•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4. 가장 빨리 죽는 새 (23)2015.05.02 PM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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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시언은 붉게 부풀어 오른 볼을 매만지며 거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타의 얼굴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부터 싸늘한 얼굴에는 일가견이 있는 리타라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길시언은 땅에 엎드리기라도 할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오해라고는 하지만 여성분께 그런 무례를 범하다니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원래 미친놈이라…… 후우, 눈치가 없는 놈이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남장을 했었으니까요. 모르시더라도 무리는 아니죠. 거기다 그때는 좋아하시는 가슴도 가리고 다녔으니 알 턱이 있었겠어요?”



“그, 그게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프림이 멋대로 한 말이고, 저는 가슴이 작은걸 좋아…… 야! 제발! 여성의 특정 신체부위에 대해서 특별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작은 게 취향이셨어요?”



“아닙니다! 저얼대로 아닙니다! 차라리 큰 게 낫…… 크아악!”



기어코 길시언은 씩씩거리며 바닥에 검을 던져 버렸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사정을 모르는 칼은 움찔했다. 바닥에 던져진 검은 놀랍게도 웅웅거리며 혼자서 울리기 시작했다. 길시언은 한숨을 내쉬며 리타에게 예의바르게 말했다.



“프림 때문에 계속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거듭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몰랐다고는 하지만 실례했습니다.”



“흠……”



리타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싸늘하게 그의 숙인 머리를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뭐, 됐어요. 프림 때문에 그랬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조금 장난 쳐본 거예요. 별로 화나지 않았으니까 그만 사과하셔도 되요.”



별로 화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 틀림없다. 길시언은 아직도 얼얼한 볼을 느끼며 생각했다. 과거에 기억하는 페이의 성격에 장난으로 뺨을 칠 리가 없다. 그래도 사과를 받아준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길시언은 몸을 바로 세웠다. 리타의 싸늘한 표정은 어느 정도 풀어져 보인다.



칼과 운차이는 리타와 길시언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칼은 거듭 헛소리를 말하는 길시언과 땅에서 웅웅거리는 검을 번갈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고 길시언은 땅에 버렸던 검을 주워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진동이 멎었다.



“여러분이 어떻게 절 보시는지 압니다. 제가 아름다운 미녀…… 미친놈처럼 보이시겠죠.”



칼은 자연스럽게 끄덕거리려는 고개를 간신히 제어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그 검은?”



“직접 잡아보시겠습니까?”



길시언은 진저리 난다는 얼굴로 칼에게 검을 내밀었다. 칼은 남의 검을 선뜻 받아도 되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길시언 뒤편에 있던 샌슨과 후치가 슬며시 웃음을 감추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를 아는 모양이다. 칼은 의아해하며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앙앙! 이번엔 늙은 남자에게 날 맡기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힘이 없다고 아무 남자에게나 막 손대게 하는 거야? 정말 실망이야! 좋다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마구 다루다니! 그리고 넌 손이나 씻고 날 잡는거니? 자고로 남자란 것들은 여자를 조심스레 다루는 법을 모른단 말이야. 안 그래? 듣고 있어?]



칼은 질겁하더니 검을 떨어트렸다. 타인의 검을 함부로 떨어트린다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지만 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증거로 샌슨과 후치는 칼도 자신들과 다를 바 없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이 입을 쩌억 벌리자 다 이해한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에고 소드(Ego sword)입니까?”



“그렇습니다.”



길시언이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에고 소드의 가치를 아는 이들은 대단한 눈으로 그 검을 바라보았다. 칼이 떨어트린 검은 이루릴이 주워들었다. 그러자 길시언이 한숨을 탁 내쉬며 말했다.



“정말 이루릴 양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이 녀석의 시끄러운 수다를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저, 그런데 에고 소드가 뭔가요?”



궁금한 걸 묻는 건 지식의 습득 과정의 일부일 뿐이라 여기는 소년은 당당하게 질문했다. 칼은 아직도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마법검…… 들 중에서도 최고의 물건이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간신히 만들 수 있는 검이라네. 검이 스스로의 자아를 가지게 되지.”



마법검이라는 단어에서 후치는 네리아를 돌아보았다. 네리아가 일행에게서 훔쳤던 돈으로 샀던 마법검을 가진 남자의 정보는 아무래도 길시언인 것 같다. 역시나 네리아는 눈에서 반짝반짝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며 후치가 물었다.



“와, 그런데 검이 자아를 가지게 하는 이유가 뭐죠? 그럼 좋나요?”



“응? 그야 검이 스스로 주인을 알아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자아가 없는 것이 어떻게 마법을 쓰겠나?”



“검이 마법을 써요? 우와! 그럼 비싸겠네?”



“허허허. 돈으로 따질 수가 있겠나. 네드발 군. 웬만한 영지와도 바꾸기 어렵겠지.”



칼이 어이없어 하면서 말했고 후치는 정말 놀란 듯 소리쳤다.



“와악! 영지를 손에 들고 다니는 셈이네요.”



“그런 셈이지. 에고 소드라면 이만저만한 보물이 아닐 텐데, 혹시 어딘가의 기사님이십니까?”



칼의 질문에 길시언은 고개를 저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천만에요. 그저 떠돌이입니다.”



“떠돌이라고요? 허어.”



칼은 그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다. 행색과 말투는 영락없는 모험가지만 마법검을 가진데다 절도 있는 행동거지는 일개 모험가가 가질 것이 아니었다.



이루릴은 검을 손에 쥔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러다 그녀는 옆에 있는 리타에게로 검을 내밀었다.



“한 번 잡아보시겠어요, 리타?”



“사양할게요. 프림은 절 싫어하거든요.”



“프림?”



“그 검의 이름이에요. 프림 블레이드. 세침때기 검이라는 퍽 어울리는 이름이죠.”



“그렇군요. 그런데 어째서 리타를 싫어한다는 건가요?”



리타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얼핏 듣기로는 제가 무서워서 싫다고 한 것 같아요. 길시언을 통해 들은 겁니다. 제가 잡았을 때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침묵을 지키거든요.”



그러자 길시언이 신기하다는 듯 리타를 보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 녀석은 용모 단정하고 마음씨 착하면 남녀를 안 따지고 좋아하긴 합니다만, 좋든 싫든 수다는 동일합니다. 엄청나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누구든 시달리기 마련인데, 페이…… 음, 리타 양이 잡았을 때만은 녀석도 입을 닫는 모양이더군요. 상당히 겁을 먹은 것 같은데 자기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답니다.”



“아하. 그래서 리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거군요.”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검이 무섭다면서 대화를 거부하니 상처받은 모양이다. 과연 리타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쓸까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완전히 상관없는 건 아닌 것 같다. 고작 두려움을 받는다고 시무룩해하다니, 예상외의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리타는 길시언을 아는 것 같던데요?”



“지난번 여행 때 만났어.”



“그랬어요?”



후치가 길시언을 바라보자 길시언은 아직 벌건 손자국이 남아있는 볼을 쓰다듬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그게 벌써 3년 전인가?”



“3년하고도 반년 정도 더 되었습니다.”



“그, 그랬지. 커흠. 북부대로에서 만났지 않습니까?”



“네.”



리타가 짧게 대답하자 길시언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도 그럴게 남자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과거의 동료가 사실은 여자였고, 그런 여성에게 성희롱에 가까운 언사를 하고 말았으니, 그 처지가 상당히 민망했다.



후치는 불쌍해 보이는 길시언을 도와줄 겸 리타에게 물었다.



“북부대로에도 갔었어요?”



“응.”



“좀 더 자세한 대답을 원하는데요.”



리타는 눈을 살짝 치켜들어 조금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마 헤게모니아를 다 돌아본 다음에 바이서스로 돌아와 내려오는 길이었을 거야. 지난번에 에델린을 만났을 때 말했던 것처럼 어비스의 미궁으로 가는 도중이라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했어. 그랬는데 마침 미치광이 검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갔지.”



“허허. 그게 다 프림 때문이었지.”



길시언이 멋쩍게 웃으며 이루릴이 들고 있는 검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거의 광기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지긋지긋함이 묻어났다. 본인도 미치광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문을 쫓아가다 보니 만나는 건 쉬웠어. 그 다음엔 간단하게 실력을 알아본 다음에 같이 다니자고 했지.”



리타가 평소처럼 덤덤하게 이야기하자 길시언이 안색을 굳히며 즉시 반응했다.



“…… 사람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달려드는 걸 간단하다고 말하진 않습니다.”



“돌발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을 보고 싶었다고 해두죠. 어쨌든 첫 만남이 과격했기 때문인지 같이 다니자는 내 제의를 거절하더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신나게 칼부림을 한 다음에 같이 다니자고 한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거절할 것입니다.”



“길시언은 미치광이라고 해서 정상적인 접근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프림 블레이드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긴 했습니다만, 그땐 죄송했습니다.”



리타가 대뜸 고개를 숙이자 길시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반응은 사과를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아, 예. 예. 사실 무례라면 제가 더 했지요.”



“그건 그렇죠.”



“……”



입이 닫힌 길시언을 놔두고 후치가 리타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 둘이 같이 다닌 것 같은데.”



길시언이 힘없이 후치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기가 차다는 어조로 그의 궁금증에 답했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 무작정 쫓아 다녔어. 뒷간까지 따라오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승낙했지. 그때는……”



말을 하다 말고 길시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일행의 표정도 비슷했다. 그들의 시선은 리타에게로 모아졌고 리타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남장을 하고 있었으니 별로 문제될 건 없었습니다. 진짜로 보지도 않았고.”



후치는 생각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원래 저랬다. 성에 관해서 이론적으로는 해박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남자의 알몸을 본다거나 자신의 몸을 보인다는 것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성격이다. 상당히 민망해하는 길시언에게 동정이 갔다.



그러다 후치는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에델린을 만났을 때 그녀는 분명 혼자였다고 했었다. 그래서 에델린을 포섭한 뒤에 둘이서 어비스의 미궁으로 향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상한데요. 그래서 같이 다녔어요?”



“그렇긴 했는데 금방 헤어졌지. 길시언이 바이서스 임펠 쪽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어. 처음부터 어비스를 간다고 했을 때 거절당하기도 했었지. 단호해 보여서 더 설득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포기했어”



“그럴 거면 왜 굳이 그렇게 쫓아다닌 거예요?”



“프림 블레이드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사람들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치와 샌슨은 그녀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발러까지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쉽게 납득하였다. 모험가의 무덤이라는 어비스의 미궁도 단지 대화 때문에 찾아가는 여자인데, 고작 인간 모험가 하나 쫓는 게 대수겠는가.



후치는 측은한 시선으로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왠지 여행하는 동안 겪었을 그의 고생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프림 블레이드와 리타 사이에 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길시언은 아직도 남장한 리타와 다닐 때 그가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떠올리며 좌절하고 있는 것 같았다. 후치는 고개를 저으며 리타에게 물었다.



“그러면 헤게모니아에서부터 출발해서 어비스의 미궁까지 간 거예요? 자이펀도 갔다면서요. 도대체 어떻게 여행한 거죠?”



“걸어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내가 묻는 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얼마나, 어디를 여행했는지에 관한 것이에요.”



리타는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조금 뜸을 들인 다음 입을 열었다.



“음…… 먼저 영주님과 수도까지 갔다가, 그 후로 미드 그레이드 쪽을 혼자 천천히 돌아다니다 일스로 갔지. 일스는 작았기 때문에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었어. 그 다음에 배를 타고 자이펀으로 갔지. 자이펀은 아무래도 적국이다 보니 정체를 숨겨도 여행하는 데 많은 무리가 따랐지. 일단 피부색이 우리와 다르니까. 어쨌든 그래도 무사히 돌아다니고 나서 자이펀의 배로 헤게모니아로 향했어. 그 때 스승님을 만났고. 헤게모니아를 여행하고 나서 대미궁을 탐험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하고 북부대로를 타고 다시 바이서스로 돌아왔지. 그 다음은 아는 대로야.”



“우와! 엄청나게 많이 다녔네.”



네리아가 감탄을 터트렸다. 그녀는 존경스럽다는 듯이 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당사자는 다시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외면했다. 얼굴에는 살짝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 시절에는 무서운 걸 몰랐거든요.”



정말이다. 과거에 가장 무서웠던 건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그것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리타는 일행의 시선에 부담스러워 하며 이 상황에 놀라워하는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험이라면 나보다 길시언이 훨씬 더 많이 했지. 길시언이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등장할 것 같은 모험가의 표본과 같은 사람이야.”



은근슬쩍 화살을 돌려버리는 리타를 향해 길시언의 시선이 꽂혔다. 리타는 그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고, 대신 일행의 시선이 이번에는 길시언에게로 향했다. 마법검을 가지고 다니는 모험가라면 시시한 이야기는 안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길시언은 손을 올려 부정했다.



“그렇게 거창한 사람은 아닙니다.”



“프림 블레이드를 가진 사람이 거창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거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하……”



길시언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번졌다. 일행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의 기대어린 시선은 부담스러운 법인지라 길시언은 시선에 당황해 하였다.



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계속 말을 꺼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칼이 점잖게 입을 열었다.



“프림 블레이드라고 했습니까? 성격이 좋은 에고 소드로군요. 사악한 마법사가 만든 에고 소드의 경우에는 선한 이의 손에 쥐어지면 그 사람을 상처 입히거나 지배하려고 들기도 한다던데요.”



“예. 지배하려 들거나 피에 미치게 만들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칼날도 훌륭하고 마법도 잘 쓰는 녀석입니다만…… 성격은 좋다만……”



길시언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드디어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가? 기대감이 듬뿍 담긴 일행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그는 하늘을 보며 절규하기 시작했다.



“다만 저 수다! 저 끝없는 수다 때문에 주인을 반쯤 미치게 만듭니다! 게다가 내숭을 떤단 말입니다!”



갑작스런 절규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리타는 오랜만에 본다는 듯 반가운 태도를 취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울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쌓인 게 많았는지 그는 사정을 아는 일행에게 성토하듯 외쳐대었다.



“자기도 검이라서 결국 좋아하면서도 적의 몸속에 들어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척, 도도한 척합니다! 어떻게 자기를 오크나 고블린 같은 짐승에게 꽂아 넣느냐고 징징거리면서도 전투만 벌어지면 미쳐 날뛴단 말입니다! 저게 정말 우습지도 않은 게, 하루 종일 입을 다무는 일이 없는데 단 한 순간, 상대의 몸속에 꽂아 넣을 때만 조용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혹시 비통해서 그런 게……”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천사게요? 저게, 저게 그때 조용한 까닭은,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듣고 있죠! 어떤 때는 심장 박동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헤죽헤죽 웃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정말 쥐고 있는 제가 소름이 돋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어도 아니라고 막 잡아떼고는 왜 자신 같은 고귀한 몸을 저렇게 추악한 것의 몸속에 쑤셔 박느냐고 오히려 엉엉 울며 앙탈을 부립니다! 피에 젖었다면서 향수 목욕을 시켜달라고 고함지를 때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어느 골빈 놈이 검을 향수로 씻습니까!”



“허, 허허…… 그런가요?”



칼은 난처하게 웃었지만 샌슨과 후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운차이도 어이없게 웃기기는 했는지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리타가 그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바로 정색하긴 했지만 말이다.



길시언은 고작 그 정도로는 쌓인 울분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 소리쳤다.



“그래서 저 녀석은 슬라임을 싫어합니다. 아마 베는 맛이 나지 않아서 그렇겠지요. 구울이나 좀비 같은 언데드를 찌르면 마구 토하는 소리를 내어서 쥐고 있기가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닙니다. 스켈레톤을 두드리면 또 얼마나 시끄러운 줄 아십니까? 비명을 질러댑니다. 자기가 멍들었다고 외치죠. 웃기지도 않습니다. 저 녀석으로 스톤 골렘을 잘라봤는데 이도 안 빠지더군요. 그렇게 칼날이 좋은 주제에 말입니다. 나도 저놈 때문에 검법이 바뀔 지경입니다.”



“검법이 바뀌셨다고요?”



“예. 페이 씨, 아니, 리타 양이라고 해야겠군요. 리타 양은 아시겠지만 전 찌르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어요. 저 녀석을 상대방의 몸속에 꽂아 넣을 때 저 녀석이 헤죽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머리끝이 쭈뼛 선단 말입니다. 아니, 그것까지는 견디더라도, 그 뒷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루 왼종일 질질 짜면서 어떻게 자기에게 그런 짓을 시켰냐고 칭얼거립니다. 사람이 돌아버릴 것 같다는 게 어떤지 느껴집니다.”



“익힌 검술에 찌르기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이유가 있었군요.”



“정말 그때 리타 양이랑 같이 다니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리타 양에게 쥐어준다고 말하면 금방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까요.”



리타는 그게 할 소리냐는 시선을 보냈지만 길시언의 표정이 너무도 애절했기에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



칼은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힘겹게 미소 지었고 다른 일행은 길시언을 외면하며 웃었다. 이루릴은 프림 블레이드를 손에 든 채 빙긋 웃었다. 처음 프림 블레이드를 들었을 때, 프림 블레이드가 마음에 들어 하자 제발 들고 있어 달라고 길시언이 간곡히 부탁했었다.



리타는 거의 절규하는 것처럼 무너져있는 길시언에게 물었다.



“그런데 길시언이 여긴 어쩐 일인가요? 그리고 오크들 상대하러 갔던 일행이랑은 어떻게 만나셨고요?”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프림이 오크들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여행객을 습격하려는 것 같아서 그놈들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분들이 도와주러 오더군요.”



“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시언이 혼잣말을 하며 나타나더니 오크들과 다짜고짜 싸우기 시작했어요. 일단 전투가 벌어진 마당이라 우리들도 가세한 거고요. 그렇게 된 거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죠. 아직 거리가 좀 되긴 하지만 그래도 여긴 수도에서 가까운 곳인데.”



“수도에 볼일이 있습니다.”



리타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길시언이 수도에?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 않겠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요.”



“그, 그건…… 솔직히 말해서 몇 번 들리긴 했습니다. 되도록 안 들리려고 했습니다만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어서……”



“그 사정이 뭔가요?”



리타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느낌에 길시언은 더듬거리며 이루릴이 들고 있는 프림 블레이드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넣을 검 집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검 집?”



“사일런스 마법이 영구히 걸린 것으로요. 도저히 저놈의 수다를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 6년 동안 어떻게 참긴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그때 이루릴이 기겁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는 황급히 자신의 큰 귀를 막았지만 곧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휘저었다. 놀란 일행이 그녀를 바라보자 이루릴은 놀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놀랐어요. 갑자기 프림 블레이드가 비명을 질러서.”



“뭐라고 그러던가요?”



“아…… 그냥 마구 비명을 지르더니, ‘추악한 짐승, 내가 적을 쓰러트릴 땐 내가 싫어하는데도 내 몸 구석구석에 그 꺼실꺼실한 볼을 비비며 좋아하더니 이젠 내가 말도 못하도록 그런 고약한 칼집을……’”



길시언이 질색한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됐습니다. 직접 듣겠습니다.”



이루릴은 얌전히 프림 블레이드를 길시언에게 넘겨주었다. 칼자루를 받아든 길시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그것을 우악스럽게 검 집에 꽂아 넣었고, 그러자 곧 프림 블레이드가 검 집 안에서 웅웅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칼이 운다는 게 어떤 것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 후치와 샌슨은 눈이 튀어나올 듯이 검 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네리아가 들러붙었다. 길시언은 자신의 검이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가만히 그 광경을 보던 칼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일행이 끌고 나타난 말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것이 보였다. 칼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끼어있는 것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길시언 씨는 왜 황소를 타고 다니시오?”



칼의 의문은 당연했다. 길시언을 처음 만났던 사람들도 모두 그것을 궁금해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길시언은 프림 블레이드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황소가 아니라 말입니다.”



“…… 예?”



“저건 한때 북부대로의 황제로 불렸던 선더라이더였습니다. 북부 대로에서 가장 빠른 야생마, 속도의 신, 찰나의 강탈자…… 그런 근사한 이름이 많이 있던 놈이죠.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되었는지……”



“…… 예?”



“저주에 걸렸습니다. 스네어트레일의 다크 메이지 리치몬드와 싸울 때 그놈이 선더라이더에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저 북부대로의 황제가 황소로 바뀌어버렸습니다.”



“…… 예?”



일행은 모두 입을 쩍 벌린 채 길시언을 바라보았다. 길시언이 한탄하듯 말한 내용은 상당히 흥미 무쌍하였다. 왜 리타가 진짜 모험가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저주가 걸린 황소를 타며 마법검을 휘두르는 모험가라니.



후치는 어질어질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저…… 당신 애인은 어느 나라 공주고, 지금 어느 드래곤에게 잡혀 있죠?”



“무슨 말이야? 나 애인 없어.”



“그래요? 꼭 그럴 거 같은데.”



“여동생이 드래곤에게 잡혀 있긴 하지만.”



“음, 그렇군요. 샌슨, 안녕. 이만 자야겠어. 이럴 땐 자야해……”



“농담이었어. 걱정하지 마.”



후치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고 속으로 말했다. 거기다 샌슨은 그렇지 않아서 실망한 기색이다. 길시언이라면 정말로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리타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들 사이에 낀 선더라이더를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저주를 받은 것이었군요. 참 잘생긴 아이였는데.”



“그렇지요. 리치몬드, 그 놈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황소가 되어 고생입니다.”



이대로라면 자기가 화병으로 죽어버릴 것 같다며 길시언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에겐 대단한 모험가로 보일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상당히 골치 아픈 일투성이다.



그때 조용히 있던 운차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댁의 몸에서 피 냄새가 나오.”



“나 말입니까?”



“그렇소.”



일행이 그를 쳐다보자 길시언은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거야 조금 전까지 오크들과 싸웠으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인간의 피요. 꽤 많군. 얼마나 죽이셨어? 코가 떨어져 나갈 것 같군.”



순간 길시언의 얼굴에서 이상한 미소가 떠올랐다. 절대로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위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모험가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운차이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길시언을 훑으면서 말했다.



“흠. 죽을 고비를 엄청나게 넘기셨군. 댁은 거의 빌린 목숨으로 대지를 걷는데.”



말은 차갑고 눈빛은 서늘하다. 운차이는 이를 섬뜩하게 드러내며 웃었다. 길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그와 마찬가지로 이를 드러냈다.



“당신, 살기를 감지하는군? 그것도 꽤 능란한데, 자이펀인입니까?”



“그래서 이렇게 포로로 잡혀 있지.”



“그럼 입을 조심하십시오.”



운차이는 입을 다물었지만 절대로 길시언의 말에 따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초리는 여전히 예리하게 길시언을 살피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져버려서 칼이 입을 열었다.



“어, 그럼 길시언께서는 갈색 산맥을 넘어 바이서스 임펠까지 가실 계획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랑 동행하시지 않겠소? 이런 험한 곳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마침 스마인타그 양이란 인연도 있는 듯 하니.”



“스마인타그 양? 아아, 리타 양 말이군요.”



길시언이 리타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일행에서 그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 밖에 없었다. 다소 민망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옛 동료와 함께 한다는 건 그로서도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는 고민했다.



“동행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내가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저 마법검은 마음씨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면서요?”



칼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으나 길시언은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설령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어떤 불행이 따라다닐지도 모릅니다. 인간관계라는 게 단순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이루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타는 무표정하게 길시언을 보았고 그들의 대화에 일절 끼어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칼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희들이야말로 미안하지요.”



“예?”



“아까의 그 오크들은 저희를 추적하던 놈들이었으니까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길시언의 시선이 리타에게로 향했다. 리타는 무표정한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때도 남자치고는 아름다운 얼굴이라 생각했었지만, 지금 완전한 여자의 모습으로 짓는 미소는 마치 집의 정원에 핀 꽃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길시언은 멍하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녹록한 실력을 가지신 분들은 아닌 것 같으니 저로서도 감사한 노릇이지요. 감사히 제의를 받겠습니다.”



리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속옷 한 장만 입고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 안합니다.”



“술 먹고 끌어안는 건 봐줄게요. 저도 그러니까요.”



“…… 그것도 안합니다.”



길시언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오랜만에 만났던 과거의 친구는 몹시 바뀐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 변화는 꽤나 당황스러웠고, 또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길시언에게 샌슨이 말했다.



“저, 그런데 우리는 말을 타고 있습니다. 황소로 따라오시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길시언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그러면서 드러난 그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저래 봐도 북부대로의 황제로 불리던 놈입니다. 아마 도저히 황소로 믿어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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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다음에 9장으로 나타난 타자입니다. 이번주는 충실하게 썼어!

공모전 탈락의 충격이 집필로 이어졌나 봅니다. 흑흑...

아무르타트를 쓰면서 남는 시간은 다른 글을 쓰기 전에 좀 더 많은 책을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야겠어요.

솔직히 자기 글의 문제점은 자기가 찾기 힘든 법이니, 계속 스스로 고민하면서 더 나은걸 써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겠죠.

제대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도 없으니...

아, 그리고 오늘은 저녁에 바쁜 관계로 일찍 올립니다.

다행히 분량도 만족스럽게 뽑았고 내용도 퇴고까지 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놀 수 있어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4 개
리타가 길시언의 정체를 모르는군요
다행히도 운차이의 그 장면이 나오겠네요
자이펀어로 궁시렁궁시렁. 훗 여기엔 자이펀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뭣이? 속았군.
정주행 다 했군요.
DR을 인상깊게 읽은 저로서는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종종 들러서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종종 남겨주세요. 보시다시피 댓글에서 힘 받는 속물이라서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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