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5. 복수의 검은 손길 (15)2015.07.03 AM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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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인가요?”



“……”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농담으로 받아쳐 줬을 텐데, 후작은 매서운 눈만 부라렸다. 무안할 법도 하건만 리타는 겸연쩍은 기색 없이 담담히 사과하고서 말했다.



“양녀로 들어오란 말씀이신가요?”



“그렇다.”



“싫습니다.”



리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후작도 순순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스마인타그라는 양부모 때문이냐?”



“네.”



후작은 한껏 깔보는 고소를 머금었다.



“귀족이 되고 싶지 않나?”



“네.”



“왜지?”



“리타 할슈타일 보다는 리타 스마인타그가 더 마음에 드니까요.”



“똑바로 말해라.”



“이 나이에 할슈타일 가의 양녀로 들어가서 사는 것보다, 지금처럼 헬턴트 숲지기의 첫째 딸로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별로라고 해도, 그 나라는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사랑하게 됩니다. 다른 좋은 나라의 국민이 되지는 않지요.”



“틀렸다.”



“적절한 예가 아니었나 보군요.”



후작은 부정했다.



“예는 적절했다. 그 내용이 틀렸을 뿐이다.”



“무엇이 틀렸죠?”



“어째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라에 충성을 바쳐야 하지? 그건 나라를 벗어날 능력이 없는 놈들이 만들어낸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아니면 멍청한 국민을 끌어들이기 위한 왕가의 선동이지.”



만약 누군가가 듣는다면 당장 반역죄로 신고해도 이상치 않을 말을 후작은 내뱉었다. 그의 태도에 혹시나 다른 사람이 들을까 하는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리타가 그걸 어떻게 들을지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다. 정열적으로 불타는 눈으로 거침없이 그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람이 힘이 있다면 어느 나라에서건 망명시키고자 한다. 중요한 건 국가가 아닌 사람이다. 내가 힘이 있다면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 엄청난 말을 리타는 그냥 수긍해버렸다. 그녀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국왕이 닐시언에게도 당당했던 것은 그녀의 바이서스를 향한 충성심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바이서스의 국민이기에 국왕을 판단했고, 국가에 크게 종속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후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리타를 바라보았다.



“예는 틀렸다.”



다른 대답을 후작은 원하고 있었다. 리타는 별다른 머뭇거림 없이 바로 답했다.



“간단한 이유입니다. 손쉽게 넣은 것으로 살기에는 제 빈 곳을 채울 자신이 없거든요. 제 영혼은 귀족이라는 것에 얽매이지 않길 바랍니다.”



“웃기는군.”



후작은 여전히 비웃었다.



“후작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해 보았나? 아니겠지. 경험해 보지 않고 단순히 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것만으로 거부하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다. 맞춰볼까? 너는 귀족이 되는 게 싫은 게 아니다. 귀족이 되는 것이 무서운 것이지.”



리타는 물끄러미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리타를 꿰뚫어 보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잘 벼려진 칼처럼 날카롭게 말했다.



“어린 꼬맹이들이나 하는 소리다. 자기가 변하는 게 싫어서 거부한다는 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상황이 사람을 만들어 가기 마련이다. 네가 선택하는 삶은 그 어떤 것이 되어도 네 주변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나이듯 삶의 주인공은 오직 자신뿐이다.”



“지나치게 독선적이시군요.”



“그게 사람이다. 우습군. 율리아나의 딸이 고작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가문을 뛰쳐나간 어머니의 딸이니까요.”



“……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알고 있습니다.”



조금 기세가 누그러든 후작은 몸에 힘을 뺐다. 리타는 계속 태연한 상태였기에 둘의 분위기는 금방 풀렸다. 후작은 미간을 손으로 꾸욱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양녀로 들어올 생각이 정말로 없나?”



“네.”



“내가 잘못 짚었군.”



리타는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리타가 결심한 것은 단순히 후작이 말한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물론 후작님이 말하신 것도……”



“숙부.”



“네?”



“숙부라 불러라.”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작은 전혀 부끄럽거나 민망한 기색 없이 리타를 향해 진지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하길 바라며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표현하는데[ 한 점 스스럼이 없었다.



유일한 누이의 딸이다. 이상했던 누이는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가문 이상의 것이다. 가족이기 때문이F까? 그렇다면 부모도 그랬어야 할 테지만 그들은 후작에게 큰 존재가 아니었다. 오직 누이 뿐이다.



그래서 누이의 딸인 리타를 좋게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보기에 세상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눈다면, 리타는 단연 그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럼 숙부님이라고 부르지요.”



리타는 그다지 부담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곧장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선을 고려해서라도 한 번 거절했을 것이다.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후작과 인연을 쌓기 위한 속물적인 행동으로 보여 질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리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고, 그러했기에 그녀는 진실로 후작이 숙부라는 이유만으로 그 호칭을 부르기로 했다.



“숙부님이 말하신 대로 제가 귀족이 되길 두려워하는 면도 있습니다. 귀족이 되어 그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지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요. 새장 안에만 있던 새는 자유가 주는 폭력의 맛을 모르기에 두려워 하지만, 새장 밖의 새들은 새장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아스화리탈의 말이군.”



“예?”



리타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후작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스화리탈이 해준 말이 아닌가? 그자가 저택에 머물던 시절에 그런 말을 했었는데.”



“…… 아버지가 그랬었군요.”



그냥 적절한 비유를 찾다가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글귀를 책에서 본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어디서 들었을 텐데, 기억나는 것이 없는걸 보면 아마도 어린 그녀에게 나이젤이 해주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후작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 의지는 알겠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리타에게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이어 말했다.



“내 휘하에는 사내놈들이 몇 놈 있다. 드래곤 라자라는 자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못미더운 것들이지.”



돌멘 할슈타일과 디트리히 할슈타일을 일컫는 것이리라. 그 두 소년이 지금 바이서스에 있는 유일한 드래곤 라자다. 라자의 재능을 가진 이가 아닌, 드래곤을 가지고 있는 라자.



후작이 그들을 말할 때 영 고깝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시선 보다는 사육자의 시선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제대로 사육하지 못해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 놈들이 후작가를 지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진 않는다.”



돌멘은 소심하고 디트리히는 유악하다. 돌멘의 그런 성격을 고치기 위해 검과 파괴의 레티의 신전에 재가사제로 보내기도 하고 자이펀과의 최전선에 투입했지만, 그는 여전히 후작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 네가 그놈들과 혼인해서 할슈타일을 이어받아라.”



엄청난 말이 나왔다.



“……”



“양녀로 들어오기 싫다면 혼인해서 이름을 받아라. 너라면 가문을 맡길 수 있다.”



뜬금없이 하는 소리치고는 너무 무거운 내용이었다. 거기다 후작의 시선이나 태도는 농담기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리타는 그런 분위기에서도 농담을 할 수 있는 여성이긴 했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그녀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거절합니다.”



후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너는 본디 할슈타일의 핏줄이다. 이어 받기에 부족함은 없을 거다.”



리타가 권력이나 금품으로 매수되지 않는다는 것을 후작은 알아 차렸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재물이나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 모든 이가 야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모든 이가 공통적인 욕심을 가지진 않는다.



그러하기에 후작은 재물에 관한 것으로 리타를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핏줄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말하지. 너에게서는 미약하게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느껴진다. 아주 미약해서 짝이 맞는 드래곤은 찾기가 힘들 거다. 하지만 라자의 자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다른 라자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연이어서 엄청난 내용들이 터져 나왔다. 할슈타일 후작은 그 엄청난 말들을 감추거나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리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깜박거렸다.



“제가 드래곤 라자의 자질이 있다고요?”



“몰랐나?”



“예.”



“디트리히를 못 봤나?”



“봤습니다만……”



“디트리히에게서 기묘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나? 친밀감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이다.”



“……”



환하게 두 달이 떠오른 밤에 야트막한 숲 속에서 만났던 소년은 리타에게서 엄마를 찾았다.



리타는 어린아이를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껄끄럽다.



아이들은 논리적이지 않고 이성적이지 못하다. 귀엽다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을 이해하기 힘든 리타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어려운 존재였다. 더군다나 그녀의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후치 같은 개구쟁이야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도망간다든가 치마를 뒤집는 것 같은 장난을 쳐댔지만, 대개의 꼬맹이들은 그녀를 어려워했었다.



그런데 디트리히는 달랐다. 어린아이가 껄끄러웠음에도 그녀는 일찍 친부모를 잃은 아이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다. 그리고 호의로서 그 아이를 안아주었다.



그 감정이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드래곤 라자이기 때문에 같은 라자에게 감정을 느끼는 것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캇셀프라임은…… 그녀에게 느꼈던 감정의 원천은……



후작은 굳어있는 리타에게 계속 말했다.



“동질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어쨌든 라자는 같은 라자를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드래곤과 적어도 대화의 물꼬를 틀 여지를 만들 수 있지. 그 자질은 엄청난 것이다.”



후작의 말에 리타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오래된 습관 덕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속은 엄청난 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네 자질이 필요한 장소는 여기다. 너의 핏줄은 이곳으로 향하고, 너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도 이곳이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 방증이다. 어설픈 신념과 어린 생각으로 운명을 거부하지 마라.”



후작의 말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말이 리타를 붙잡고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리타는 손을 꼭 쥐었다. 힘을 주지 않으면 덜덜 떨릴 것만 같았다. 숙부라지만 후작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본능이 그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후작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할슈타일의 이름을 받지 않겠나?”



차갑고도 단호한 말이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후작의 얼음장 같으면서도 불타오르는 것 같은 시선이 리타에게 못 박혔다.



리타는 양 손을 꼭 붙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많은 생각이 그녀의 안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후작이 노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말한 내용들은 이제까지 리타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것에 답을 제시한 것과 다름없었다. 정확한 답은 아닐 지라도 방향은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리타는 흔들렸다. 이라무스 시에서 스스로가 조금 더 인간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저 자기기만일 뿐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후작의 말대로라면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드래곤 라자이기 때문이다. 태생이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리타 스마인타그가 아니라 페이 아스화리탈이기 때문이다.



리타의 떨림이 멎었다. 그녀는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먹으로 그린 것 같은 검은 눈동자가 후작을 향했다. 그 순간 후작은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 눈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공허했다.



그녀가 대답했다.



“싫습니다.”



“…… 그런가.”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변명부터 하기 마련이다. 능력이 안 된다. 혹은, 어째서 아무 것도 모르고 오늘 처음 만난 자신에게 가문을 맡길 수 있겠느냐. 아니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등의 대답이 아닌 변명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리타는 가타부타의 말이 없이 바로 대답했다. 싫다고.



그녀는 틀림없는 진짜였다. 널리고 널린 쓰레기가 아니다. 후작의 눈은 정확했다. 가문을 이을만한 인재가 여기 있었다.



그러나 후작은 받아들였다.



그렇게 흔들어도 변함없는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더 흔들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지가 없으면 애초부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녀는 당연히 거절할 거다.



그랬기에 그는 아쉬워도 대답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단 한 명의 조카이기에, 누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알겠다.”



“감사합니다.”



그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줘서 감사하단 의미일까? 후작은 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뒷골이 바짝 서서 꽤나 아프다.



“언제 떠날 거냐?”



“내일 떠날까 합니다.”



“…… 빠르군.”



“찾던 것을 찾았으니까요.”



리타는 살풋 웃었다. 후작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까지 짓던 차가운 웃음이 아니었다. 차가움은 얼굴에도 남아있었지만 미소까지 차갑진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선선하게 웃었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들러 주겠나?”



“왜 그러시죠?”



이대로 보내기 아쉬워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후작은 그런 평범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검을 준비해 주지.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말해라. 얼마든지 원조해 주마.”



“검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른 필요한 건 없을 것 같네요.”



리타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레브네인 호수에서 잃어버린 검 정도다. 나머지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호의로 베푸는 것은 정말로 호의로만 받아들인다. 후작은 조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어 했고, 리타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필요한 것만 받았다.



후작은 목에서 손을 땠다. 그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북쪽에 파견 나가 있는 사병이 있단 이야기를 했었지?



“네.”



“일단은 그들에게 연락을 해두겠다. 여자 홀로 여행하는 것은 힘들 테니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라.”



“어린 시절에 홀로 자이펀까지 갔었습니다.”



“칼을 맞고 살아났다고 해서 다시 칼을 맞고도 살란 법은 없다.”



“……”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그건 내일 확실히 이야기하지. 어쨌든 오늘은 이야기가 길었으니.”



그는 길었던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후작과 리타의 이야기로 인해 시간은 상당히 흘러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색은 붉은 빛이 감돌았다.



후작은 가타부타 감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의 감상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었다. 그는 누이의 딸을 만나서 기뻤고, 그녀가 가치 있는 인간이기에 만족했다. 그의 제의를 거절해서 아쉽지만, 조카의 의지를 존중하고자 놓아주었다.



리타는 리타 나름대로 대화의 여운을 즐겼다. 목적한 바를 이렇게 바로 이루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뿌리에 관한 것. 이럴 거면 도둑 길드를 어째서 이용했을까 싶을 정도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후작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숨길 수 없는 피로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깊숙한 곳에는 피곤함도 이길 수 없는 다른 감정이 존재했다.



그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리타에게 말했다.



“저녁을 먹고 가라.”



역시나 거침없는 명령이었다. 저녁 약속이 있다거나 혹시 거절할 것을 고려해 질문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리타는 그런 것들이 필요 없게 직설적으로 답했다.



“와인 있나요?”



“좋은 게 있다.”



리타의 눈이 반짝였다.








*








유니콘 인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리타는 살짝 달아올라서 훨씬 매력적으로 변한 얼굴로 방긋거리며 그들을 지나쳐서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손에는 선물 받은 와인이 몇 병 들려 있었다.



전날 잡아뒀던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남자들 방이 북적거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남자들 방의 문을 겁 없이 덜컥 열었다.



“어, 리타 왔어요?”



“지난번 보단 훨씬 빨리 왔네.”



“어서 오십시오, 스마인타그 양.”



“오, 리타양! 언제 봐도 색기 넘치…… 후우…… 반갑습니다.”



헬턴트 남성 삼 인방, 그리고 길시언과 프림블레이드의 인사에 리타는 생긋 웃었다. 길시언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쭈뼛 일어섰다.



“길시언이 웬일이에요?”



“레디의 가게에 들렀다가 칼씨들을 만났습니다. 수도에서는 제 순결을 노리……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없을 테니 같이 머물기로 했습니다.”



“간만에 왔으면 집이나 들려요. 동생이 섭섭해 할걸요?”



“하하핫! 제가 집에 들른다면 노친네들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그 날로 방탕 폐태자 전설에 또 한 줄의 문구를 추가하게 되겠죠.”



길시언은 유쾌하게 리타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든 것이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다.



물론 그것은 리타도 마찬가지였기에 히죽거리며 그녀는 아무렇게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웜링을 모습을 하고 있는 카피가 축 늘어져 있는 침대였다. 상황을 보니 카피도 술을 한 모금 한 것 같다.



후치가 자꾸 들러붙는 네리아를 떼어내며 물었다.



“갔던 일은 잘 됐어요?”



리타가 헤실헤실 웃으며 카피를 들어 올려 무릎위에 올리고 답했다.



“잘 됐어.”



“얼굴 보니까 리타도 술 한잔 하고 온 모양이군요.”



“어, 야. 너 손에 든 거 뭐야?”



샌슨이 리타의 손을 보며 궁금해했다.



“선물받은 와인.”



“먹자.”



“어휴, 이 오거. 으헛!”



후치가 핀잔을 줬고 샌슨은 그를 살짝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는 사이 네리아는 들러붙는 대상을 바꿔서 리타에게로 달라붙었다.



“비싸 보이는 와인이네?”



“음…… 저녁 먹으면서 조금 마셨는데 맛은 있었어요.”



리타는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주사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차마 후작 앞에서 마음대로 음주를 할 순 없었다. 거기다 후작은 자식들을 모두 불러놓고 같이 식사했다. 그런 곳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리타는 스스로를 많이 자제해야만 했다.



그 덕에 그녀는 지금 상당히 술이 고픈 상태였다. 맛있는 식사에 맛있는 술이 있는데 그 술을 맛만 보아야 했으니, 애주가에게 있어 그보다 더 슬픈 일이 있겠는가.



네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와인에 눈독을 들였다. 리타가 빙긋 웃으며 와인의 코르크를 제거해서 바로 네리아에게 내밀었다.



“아앗. 같이 마셔요, 네리아!”



와인 병을 받아서 대뜸 입에 가져가려는 네리아를 후치가 다급하게 말렸다. 네리아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후치를 놀렸다.



“어머, 후치 씨는 내 입술이 닿은 술을 마시고 싶은 걸까? 그렇게도 간접 키스를 하고 싶다면 직접 해줄 수도 있……”



네리아의 말은 다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졌다. 그녀의 뒷덜미를 리타가 붙잡았기 때문이다. 리타는 뒤에서 말하는 걸 싫어하는 네리아를 고려해서인지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바로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나도 네리아의 키스는 탐나는데요?”



“히익!”



귓가에 바람이 불어넣어지며 속삭이자 네리아가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더 이상 후치를 놀리지 못하고 얌전하게 와인을 후치에게 전해주었다. 후치는 와인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 따라주었다. 칼이 다소 불안한 기색으로 와인을 받아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반기는 분위기였다.



후치와 샌슨은 바로 전날 리타에게 시달리긴 했지만, 그런 사실을 잊을 정도로 와인의 향이 좋았다. 그리고 술 마시면 대체적으로 안 좋았던 일은 잊기 마련이다.



네리아는 자신의 잔을 들어올려 와인을 음미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신 다음 더없이 행복하단 표정을 지으면서 감탄했다.



“우하아아…… 좋당.”



“마음에 드나 보네요?”



“맛있어요. 진짜 오늘 피곤했던 게 다 풀리는 기분이에요.”



리타가 눈을 깜박거리며 붉은 머리를 넘실거리는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었나요?”



“아휴. 말도 마요. 웬 남정네들이 나 예쁜 건 알아가지고 어찌나 끈질기게 달라붙던지…… 떼어낸다고 엄청 고생했어요.”



“눈이 삔 놈들이겠지.”



샌슨이 중얼거리다 네리아가 술병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 조용히 딴청을 피웠다. 네리아는 송곳니가 제법 잘 보이는 미소를 샌슨에게 지어주고선 다시 리타를 바라봤다.



“오늘 카피 데리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녔는데, 갑자기 험악하게 생긴 놈들이 막 우리 붙잡고서 신상 조사를 하는 거예요. 혹시라도 카피가 위험할까 싶어서 친자매라고 하면서 거짓말을 몇 마디 하니까 그냥 납득하고 가버리더라고.”



리타는 쓴 웃음을 지었다. 오늘 후작이 피곤해 하던 원흉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라무스 시에서 의뢰했던 내용 중에서 후작이 누군가를 찾는다는 정보가 있었다. 본인도 그렇게 말했고. 그리고 네리아와 카피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제미니도 알고 있었다.



카피는 제미니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으니 제미니와 동일시 친다고 하면, 네리아와 제미니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음…… 몰라. 내일 생각하지, 뭐.”



술이 들어간 리타는 상당히 풀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술잔에 담긴 와인을 홀짝거리며 네리아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그녀는 심문을 하는 것처럼 무례했던 남자들을 욕하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고, 리타 뿐만 아니라 방안의 다른 사람들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아, 그리고 도둑 길드에서는 이라무스 시에서 있던 일을 하나도 모르던데?”



네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샌슨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네가 잘못 안 거 아냐? 아니면 너를 속이기 위해서 일부러 거짓 정보를 알려 줬다거나?”



“그런 것도 눈치 채지 못할 멍청이였으면 트라이던트의 네리아란 이름을 못 달았지.”



“뭐, 하긴.”



샌슨은 납득하며 금방 고개를 조악거렸다. 후치와 칼은 의아해하며 왜 그런 것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리아도 그 대화에 참여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마땅히 내려지는 답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라무스 시의 도둑길드에 일어난 사건을 모른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네리아의 말에 의하자면 수도의 도둑 길드 사람들은 이라무스 시의 변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는 것이다.



“으, 머리 아파.”



“도무지 알 수가 없구먼.”



“됐어요. 어차피 생각해도 결론도 안 나는 걸요. 어쨌든 우리에겐 좋은 일이니까 그냥 좋게 생각하죠.”



“그게 좋겠습니다, 네리아 양.”



“그러면 지금은 우선 이 맛있는 걸 처리하는 게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군요.”



칼은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었다.



일행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었고, 리타는 그 와중에 내일 떠나려고 한다는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리타가 먼저 떠나겠다고 말을 해뒀었기에 충격을 받진 않았다. 대신 송별식이라며 리타가 가져온 술을 모두 마시자고 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아스라이 세상을 비추는 세상에서 그들은 밤과 별을 벗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낮부터 술을 마신 네 남자는 일찌감치 쓰러졌고, 네리아와 리타는 눈 낮은 세상 남자들을 욕하며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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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슈타일이 이렇게 친절할리 없어!

절찬리 연재중.

개드립과 함께 8장이라는 분량을 들고 왔습니다.

할슈타일의 이야기로만 끊기에는 너무 그 부분을 오래 끌어서 뒷 이야기까지 써버렸어요.

그래봐야 또 다음 편은 할슈타일 이야기를 써야겠군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댓글 : 6 개
항상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하나하나에 열심히 쓸 힘을 얻어갑니다.
오옷~~~!!!
연재속도 빨라졌네요???? 감사합니다!!!
DR, FW를 볼 때도 할슈타일 후작의 독선에 치를 떨었지만 한편으로 저렇게 곧은 자세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건 어떤 것일까 궁굼하기도 부럽기도 했었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화이팅입니다!!!
사실 별 일이 없으면 주3회 연재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다른 글이 중요하다 보니, 그쪽을 다 쓰고난 다음에야 쓰게 되서 주2회가 되기 십상이죠.
엉엉. 마음편하게 이것만 쓸 날이 오길 바랍니다.
착한 할슈타일이라
리타가 아니였다면 볼일이 없었겠죠ㅋㅋ
술을 먹지 못하는 제가 안타깝군요.
마음 맞는 사람과 한잔 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게 슬프네요..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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