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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_습작모음] [단편] 13062113_09182023.09.18 PM 05:50
13062113_0918
(1학년 3반 6번, 2학년 1반 13번, 9월 18일)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더위가 남아있던 늦여름.
여느 때처럼 책상과 한 몸이 된 듯 늘어져있던 선배가 물었다.
"있잖아, 인류가 멸망한다면 어떤 이유로 멸망하게 될까?"
"네? 글쎄요... 핵전쟁으로 멸망하지 않을까요?"
선배의 엉뚱한 질문에 최근에 했던 게임을 생각하며 적당히 대꾸했다.
"폴아웃인가. 멸망한 듯 보이지만 멸망하지 않았잖아. 그 정도로는 부족하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핵무기가 폭발할 경우 제2의 빙하기를 만들 정도로 엄청나다는데요?"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핵무기가 사용될 경우를 가정한 시뮬레이션."
"핵 공격이 시작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여기서 펑, 저기서 펑, 요즘 뉴스에서도 매일 떠들고 있잖아요. 우리는 핵 공격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단호한..."
"푸하하하."
방송을 따라하는 과장된 억양과 몸짓에 한바탕 웃은 선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누군가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서, 모두가 방아쇠를 당기진 않을 거야. 도미노처럼 주르륵 무너질 것만 같겠지만, 아슬아슬하게 남겨진 조각들로 다시 쌓아갈 거야."
"방아쇠를 쥔 사람들이 최악의 최악인 결정만 내릴 수도 있잖아요. 선배 이야기도 가정일 뿐이니까. "
"아니, 확신이야."
선배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눈빛은 치사하다.
단호한 어조보다 내 눈을 집어삼킨 선배의 눈동자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자자,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해보도록."
장난기 어린 선배의 표정에 오기가 생긴 나는 이런저런 상황을 제시했다.
"미지의 바이러스는요."
"그건 비슷한 사례를 겪었지만, 멸종하진 않았잖아?"
"기후 변화?"
"결국은 적응하지 않을까? 지구 상에서 적응력하면 손에 꼽히는 종이니까."
"외계인 침략?"
"점점 허무맹랑해지는구나? 그것도 기각. 행성을 뛰어넘을 정도로 고도화된 문명이라면 대화를 하려 하겠지. 최악의 경우라도 표본 정도는 남겨놓을 거야. 인류가 다른 생명체들에게 하듯이 말이야."
"운석 충돌은요?"
막힘없이 내 말을 잘라내던 선배였지만, 이번에는 고민하는 듯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일어날 가능성인가..."
고민을 끝낸 듯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켓도 얼마든지 쏠 수 있는 상황에서 거대 운석이 지구와 충돌할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의견이었지만 기각."
선배는 어서 다른 의견을 내보라는 듯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몰라요. 어떤 위기가 와도 인류는 극복해 내겠죠. 어떤 상황도 척척 해결해 내시는 선배님처럼 말에요."
"저런 후배님, 기분이 상하셨나요? 상하셨나요?"
"상한거 아니에요."
"사과의 뜻으로 비밀 하나를 알려줄께."
선배는 내 쪽으로 의자를 바짝 붙인 뒤 말을 이어갔다.
"만약에 말이야, 앞 선 상황이 온다면 나는 최대한 빠르게 죽으려 할 거야. 인류의 희망이니, 마지막 생존자니 그런 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또 번식 같은 것도 말이야. 의무적인 사랑이라니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니?"
"흠흠, 그...꼭 해야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 번식이라던가..."
"응? 종의 보존은 모든 생물의 의무 아니겠니? 반드시 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물론, 나는 기꺼이 멸종을 택할 거지만."
"으음...... 그런데 그게 비밀인가요?"
"아니, 진짜 비밀은 말이야."
선배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아. 마지막 생존자."
"자, 그럼 열쇠 반납하고 정문으로 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선배는 굳어버린 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선배는 치사하다. 그런 목소리로 속삭이면. 그런 눈빛으로 속삭이면.
있는 힘껏 달려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심장이 터질 것만 같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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