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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일랜드 사가-심해전설-서장.소년 모험가(3)2019.05.20 PM 07:29
“내 소원은 남이 이뤄줄 수 없어. 나만이 이룰 수 있어. 남에게 빌 소원 같은 건 나에겐 없어.”
소년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인한 면모를 느끼고 있었다.
‘아윈은 제 생각보다도.... 당신의 예상보다도 더 굉장한 아이로 자라고 있습니다. 카인.’
아윈의 아버지 카인이 자신에게 남긴 부탁을 떠올리며 선생은 잠시 감상에 잠겼다.
그러나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윈이 겪은 일들에 대해선 아직 하나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요정의 꽃 때문에 절벽을 내려갔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된 건지. 어쩌다 잃어버리게 된 건지 말이죠.”
“응! 처음엔 그냥 내려 가봤어.”
아윈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한 일.
몇 번이나 실패해서 위험했던 일.
실패했던 일들을 공부하고 연습해서 보완한 일.
그리고 기어코 오늘 내려가서 요정의 꽃을 꺾는데 성공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돌풍과 지진이 절벽 전체를 울려 하늘로 솟아오른 일.
그렇게 올라간 하늘에서 바다에 뚫린 구멍을 통해 심해를 봤고, 심해 너머 세상의 진짜 바다를 본 일까지 아윈은 겪은 일을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선생과 이디아에게 상세히 얘기했다.
“어때?”
이야기를 마친 아윈은 이디아를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자신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말했다. 언제나 아윈의 이야기에 특히 바다에 대한 이야기에 딴지를 거는 이디아였지만, 이번만큼은 결코 얄미운 짓을 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아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자신감엔 근거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보여준 이디아의 모습이었다.
아윈의 모험담에 제법 심취한 것이었는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부분에선 키득하고 웃거나 극적인 부분에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디아 본인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아윈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두 볼만 살짝 붉힌 채 고개를 돌리고 흥! 하는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아윈과 새침 떼는 이디아, 언제나 둘 만의 의견으로는 결론이 나질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언제나 가장 공정하고 믿을 수 있게 평가를 내려주는 심판관이자 평론가인 선생의 평가를 두 아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두 아이의 입장을 살피고 고칠 점 칭찬할 점을 친절하게 이야기 해주던 선생.
그러나 지금의 선생은 어딘가 달랐다.
평상시처럼 흐뭇한 미소로 아윈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선생은, 어느 순간 심각한 표정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윈의 말대로라면... [현상]의 진행이 예상보다 빨라...’
턱에 손을 괴고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표정으로 고민하는 선생의 심각한 분위기에 떠들썩하던 아윈도 이디아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잠자코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선생이 미동도 하지 않자 결국 나선 쪽은 아윈이었다.
“선생. 뭐해?”
헐렁하게 늘어진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아윈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심각한 생각 속에 잠겨있다 빠져나온 선생은 그제야 불만으로 볼을 약간 부풀린 아윈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난 이렇게 멋진 모험담을 얘기했어. 어서 칭찬해!’ 라고 말하는 듯 한 아윈의 표정에 선생은 겨울조차 녹여버릴 것 같은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깐 생각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가볍게 둘러대며 선생은 두 사람을 기다리게 한 대신 상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가냘프지만 넓은 손바닥을 크게 펼쳐 아윈의 반짝이는 더벅머리 금발을 덥석 움켜쥐고 시원하게 쓰다듬어 준다.
“진짜 선생... 난 이제 애가 아니라구...”
선생으로부터 아이 취급을 받는 게 싫다고 말로는 불만을 토로하는 아윈.
그러나 말과는 정반대로 표정과 몸짓은 마치 쓰다듬어지는 고양이마냥 눈을 지그시 감고 까치발을 세운 채, 선생의 손길을 기분 좋게 만끽하고 있었다.
아직 한창 부모에게 사랑받을 나이의 아이.
그러나 아윈은 사랑을 줄 부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모인 페일라가 부모 못지않게 헌신적으로 보살펴주고 있었고, 아윈도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충분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평소에 결코 내색하지 않지만, 가끔 이럴 때 보여주는 아윈의 모습에 선생은 가슴이 시렸다.
안쓰러운 마음까지 더해 약간의 공을 들여 생각보다 조금 오래 아윈을 쓰다듬어준 선생은, 다음 차례를 위해 이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아윈과는 또 다른 한 마리의 고양이가 있었다.
다만, 등의 털을 잔뜩 세우며 경계하는 태도의 고양이었다.
‘전 됐어요!’
말 대신 양 팔로 X자를 해보인 이디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 저었다.
속마음이야 어쨌건, 자신은 긍지 높은 일랜드 삼검사 힐로아의 검, 아브의 무남독녀다.
따라서 아무리 선생이라 하더라도 이런 숙녀의 머리를 절대 함부로 손댈 순 없다. 라는 무언의 항의가 이디아로부터 잔뜩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후후 어쩔 수 없군요.’
이디아를 쓰다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며, 선생은 돗자리 위에 살짝 앉았다.
이야기를 하느라 아이들이 식사를 멈춘 것을 확인하곤, 선생은 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가르고는 가방에서 버터가 담긴 종이상자를 꺼내어 잘린 빵에 쓱쓱 발라 다시 아윈과 이디아에게 건내 주었다.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버터냄새가 빵을 더욱 맛있어 보이게 하는 주문을 걸어주었고, 아직 허기가 가시지 않았던 두 아이는 만면에 홍조를 띄우며 빵을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 선생은 가죽주머니를 꺼내 안에 담긴 염소젖으로 목을 축여 이야기를 해줄 준비를 마쳐두었다.
“아윈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빵을 우걱우걱 삼키던 아이들의 귀가 쫑긋 거렸다.
그리곤 곧 이어질 선생의 평가에 집중하기 위해 입에 남은 빵을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넘겼다.
서두르다 삼킨 빵이 목에 걸려 기침을 연발하는 아윈에게 염소젖 주머니를 넘긴 선생은 아윈이 다소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모두들 잘 알고 있겠지만, 진짜 바다를 본 모험가는 아직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선생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아윈이 보았다는 바다 속 심해의 푸른 물결이 진짜 바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소 단호한 선생의 어조에, 여태껏 아윈의 대척점에 서있던 이디아가 되레 안타까움이 실린 탄성을 내뱉는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윈은 달랐다.
아윈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선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선을 다한 준비를 했고, 최선을 다한 후회 없는 모험이었다. 선생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결과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비록 그 결과물이 초라하더라도, 평가엔 성의가 있었다.
그러니 선생이 여기서 끝낼 리는 없다. 라는 절대적인 믿음이 아윈의 가슴속에는 굳게 자리 잡고 있었고, 선생은 그런 아윈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그 다음은?’ 하고 독촉하는 것만 같은 아윈의 기세에 선생은 백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아윈이 본 풍경 역시,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아윈만의 발견물입니다. 그점에 대해선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다만, 그 발견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바로....”
“모험가의 할 일이지! 맞지? 선생?”
선생의 말을 가로챈, 아윈이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편다.
발견한 것이 진짜 바다인지 아닌지는 답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보장할 수 있다.
세계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아윈 혼자만의 성과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훌륭한 모험가가 되라는 격려라는 것을.
비록 발견물이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바다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선생이 내려준 평가만으로도 아윈은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원래 목적이었던 요정의 꽃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제야 사라진 꽃에 생각이 미친 아윈은 옆에 앉은 이디아를 바라보았다.
아윈이 발견한 것이 진짜 바다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아내었으니 이디아에게 있어서도 절반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람에 곱게 휘날리는 하늘빛 머릿결 너머로 정체불명의 냉기가 아윈에게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사실 아윈이 모험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부터 이디아의 안색은 이유모를 불편함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점에 있어선 영 무신경한 아윈인지라 눈치 채지 못하고 넘겨버린 것인데, 선생이 아윈의 모험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려주자 이젠 무신경한 아윈 조차도 결코 모른 척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기류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디아.”
아윈은 나름 신경을 써주겠다고 말을 걸었다.
그러나...
“어디 아파?”
잘못 짚었다.
뽑기로 치면 꽝.
곧 이어질 대참사를 예감한 선생이 ‘맙소사’를 연발하며 손으로 눈을 가렸고, 아윈의 무관심함에 결국 이디아는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 바보! 멍청이! 거짓말쟁이!”
폭언을 내뱉으며 일어난 이디아의 얼굴은 머리색과 반대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동료라면서! 언제는 함께 모험하자면서! 이번에도 또 혼자서 잔뜩 위험한 일 해버리고, 혼자서 신기한 경험은 독차지하고! 아윈 정말 나빠!!”
터져버린 둑처럼 담아둔 감정을 뒤죽박죽 쏟아 내버린 이디아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친구 하나 없이 저택에서 무미건조한 나날을 보내던 아가씨를 꺼내어 온통 흑백으로 가득하던 지겨운 일상에 색을 입혀준 소년이 바로 아윈이었다.
선생과 함께 신기한 이야기를 들으며 같이 모험가가 되어 세상을 누비자고 약속했건만, 자기만 놔두고 세상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신기한 광경을 아윈 혼자 봐버렸다는 사실에 이디아는 약이 올라, 분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쟁이!”
그저 사고나 친 줄 알았던 일이 신나는 모험이었다는 사실에 심각한 배신감을 느낀 이디아는 급기야 눈물을 흩뿌리며 깊은 숲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앞으로 말걸지마! 이 바보야!”
라는 고함만을 남기고...
3.
얼마나 달려왔을까... 정신없이 숲 속을 달려온 이디아는 턱 밑까지 차오르는 가쁜 숨을 고르며,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저질러 버렸어...’
절대 숲에서 경거망동해선 안된다.
선생과 아윈으로 부터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들어온 그녀였지만, 가슴을 답답하게 조이는 쓰라린 감정에 소리 지르며 달리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 어린 이디아는 속 시원히 단정 짓지 못했다.
다만, 잠시 멈춰선 사이 정신없이 달릴 때 느끼지 못했던 좀 전의 기억과 감정이 다시금 그녀의 뇌리를 스치자,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낀 이디아는 작게 되뇌었다.
지금까지 달려오며 숲이 떠나가라 질러댄 그 한 마디를....
“아윈 이 바보...”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작은 두 주먹을 부서지도록 힘껏 움켜쥐는 이디아가 걱정되었던지, 달리는 내내 가로 맨 작은 손가방 속에 웅크리고 있던 엘피르가 귀를 쫑긋거리며 튀어나와 이디아의 손을 핥아 주었다.
손을 적시는 간질거리는 감촉에 이디아는 그제야 찡그리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괜찮아 엘피르. 이젠 괜찮아졌어.”
이디아는 자리에 주저앉아 작고 보드라운 흰털 담비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나와 준 작고 귀여운 친구에게 이디아는 말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평정을 찾게 해준데 대한 감사의 인사와 미처 털어놓지 못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아윈과 자신이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순간부터.....
이디아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결코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었건만, 이상하게도 아주 어렸을 때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뿌연 안개에 가로막힌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저 막연하게 오래전부터 당연히 이 마을에, 이 저택에서 살아왔겠거니 하고 여길 뿐이었다.
한편으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디아 본인이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기도 했다.
이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 저택의 일상은 지극히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을 추억이라곤 없을 거라고 이디아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랜드 제일의 무인이라는 아버지는 한 달의 대부분을 왕도나 영주도시 혹은 바닷가 요새에서 보내기 일쑤였기에 좀처럼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고, 그런 상황 덕에 집안과 마을의 대소사는 엄격한 할머니 카디아가 도맡아 이끌어오고 있었다.
유서 깊은 무인 가문의 영애로써 어려운 책과 예절을 익히며 재미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왔고, 간혹 저택 밖으로 외출할 일이 있어도 ‘마을을 지키는 수호기사의 딸’로서 모두가 이디아를 대할 뿐, 또래의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검소를 중시하는 가풍 상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던 이층 저택도 어린 이디아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금전적으로 부족함은 없었다.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해 애태운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항상 결여된 기분을 이디아는 가슴 한 곳에 늘 품고 있었다.
가족의 사랑이 부족한 것도, 살림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지만, 무언가가 항상 부족하다는 갑갑함이 결여된 기억만큼이나 어린 이디아의 유년기를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그래도 그런 생활 속에서도 한 가지 낙은 있었다.
이층의 다락방으로 올라가 가장 높은 창문에서 턱을 괴고 금지된 숲 너머 저 멀리까지 뻗어있는 오솔길을 바라보며, 가끔씩 오가는 행렬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으며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날도 이디아는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자극 없는 하루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를 찾아 이층 다락으로 향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밖의 이야기를 듣는 이디아에게 빛나는 색깔 그 자체인 아이가 나타나 말했다.
지붕위에서 거꾸로 튀어나오면서 말이다.
“너 누구랑 얘기하냐?”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는 이디아.
아가씨의 비명소리에 하인들이 쿵쾅거리며 호들갑을 떠는 와중에도, 아이는 창문에서 다락으로 뛰어들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창문 끝에 걸린 햇빛에 비쳐 더욱 반짝이던 금발, 그리고 그보다 빛나던 천진난만한 미소.
소년이 소녀에게 손을 내밀며 이름을 말해주었을 때, 회색 빛 시간 속에 갇혀있던 소녀의 세계는 색을 더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녀의 시간 속에 특별함을 더해준 소년.
아윈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이디아는 곧잘 아윈과 만나 어울리게 되었다.
소년과 함께 찾아온 소년의 아버지, 모험가 카인이 이디아의 아버지를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아끌며 평범했던 장소를 특별한 공간으로 탈바꿈해주었다.
늘상 지겹게 보던 저택의 복도며, 헛간, 아담한 정원들이 기발한 놀이의 장소가 되고 탐험의 대상이 되며, 도전의 목표로 변신했다.
사소한 것에도 아윈은 놓치지 않고 두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고, 이디아는 그의 모험에 결코 빠져서는 안 될 든든한 동료가 되었다.
아윈과 신나게 놀고 나서 잠시 정원 그늘에 앉아 쉬고 있노라면, 어른들의 중요한 이야기를 끝낸 아버지들이 다가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뺨에 입을 맞추곤, 소박하지만 정다운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다.
아윈과의 모험, 아윈의 아버지 카인의 즐거운 모험담이 곁들어진 저녁식사.
이디아의 새롭고 즐거운 나날은 일년 동안 계속 되었다.
일년 후, 아윈의 아버지 카인이 심해를 향해 마지막 모험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도 아윈은 한결 같았어. 주위에서 뭐라고 하건 신경도 쓰지 않았어. 있지? 엘피르? 나 그날은 말야.... 진짜진짜 놀랐다?”
지난 일을 생각하는 이디아의 얼굴엔 언제 울었냐는 듯 즐거움과 설렘이 가득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이디아의 치맛자락에 꼿꼿이 선 흰털담비 엘피르는 작은 귀를 쫑긋거리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윈의 아버지가 떠나고 난 뒤에, 아윈이 만신창이가 되선 나한테 와서 두 손을 딱 모으고 빌었어. ‘도와줘! 이디아!! 너가 없으면 안될 것 같아!’ 라고 말야. 그게 뭐였는지 알아?”
이디아는 아윈의 흉내를 내보이곤 쑥스러웠는지 쿡쿡하고 손을 입에 대고 웃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여기 이 숲에 들어가고 싶은데, 자기 힘만으론 안 된다고 나한테 숲에 부탁을 해달라고 하더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마을 어른들이 모두 들어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여기를 들어가겠다고 별의 별짓을 다하고 있었다니까 정말.”
아윈과 금지된 이 숲에 첫 발을 딛었던 날을 생각하며 이디아는 미소 지었다.
세계에 이름 높은 모험가이자 아윈의 아버지 카인이 아내 레일라와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난 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기억을 잘 하지 못하는 이디아는 한 달이었는지, 두 달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 기간 동안 이디아와 아윈에겐 새로운 즐거움의 시간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아윈의 부모님은 며칠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아브와 아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가 손에 쥐어진 날이면, 아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머금고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이디아 방의 창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이디아를 불러댔다.
화들짝 놀란 이디아가 달려 나오면, 아윈은 이디아의 가슴팍에 편지를 쑥 내밀며 말하는 것이었다.
“읽어줘! 빨리!”
아윈도 부모대신 돌봄이 역할을 맡은 페일라 이모도 글을 읽지 못했다.
그렇기에 편지가 오면 아윈은 가장 먼저 이디아에게 달려왔다.
편지안의 이야기는 평소 카인이 저녁식사 때마다 들려주던 놀라운 모험 이야기에 비하면 소박한 내용이었다.
그저 오늘은 어느 마을에 들러서 무엇을 보았고, 어떤 음식을 먹었으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누가 멀미를 했고 무엇을 보았다는 식의 대단한 것 없는 시시콜콜한 일상에 가까운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을 밖에 나가본 적 없는 두 아이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무한한 상상의 날개가 가득 펼쳐져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여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나 함께 편지를 읽는 즐거운 나날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편지가 온지 두어달 정도 지나고, 카인이 광산도시 탈탄에서 새 모험을 위한 놀랍고 멋진 배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부부의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모험을 떠난 모험가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카인과 레일라가 아윈을 낳기 위해 샤농으로 돌아왔던 것도 5년만의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왔던 편지에 이별을 암시하는 문구가 있었지만, 워낙 대단한 모험가인 두 사람이다 보니 별일은 없을 거라고 이디아는 생각했다.
마을의 모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이 탄 배가 바다 한 가운데로 가라앉았다는 한 어부의 목격담이 전해지자, 모두는 생각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종언을 고했다고....
세계는 가장 위대한 모험가 두 사람을 잃고 말았다고....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아윈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열어준 장례식장에서 열한 살 난 꼬마아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디아가 위로의 말을 건넸을 때도 울먹이는 이디아를 오히려 위로하며
“난 괜찮아. 이디아.”
라고 말해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윈은 부모의 죽음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아윈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구절뿐이었다.
[보지 못한 것을 보기 위해 듣지 못한 것을 듣기 위해 나는 낯선 길을 찾아 떠난다.
처음 마을을 떠날 때의 두근거림 그대로... 아윈, 언젠가 너만의 모험을 찾아라]
장례식 이후, 아윈은 찾아오지 않았다.
매일같이 소녀를 만나러 달려오던 소년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연락조차 들을 수 없었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디아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지루한 시간을 때울 겸 펼쳐놓았던 두껍고 무거운 세계 문학 전집을 쿵 소리 나도록 덮으며 이디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물론 이디아가 일주일동안 아윈의 소식을 넋 놓고 기다리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허락 없이는 전택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디아였기에, 하인을 시켜 아윈의 집에 보내보기도 하고, 바람에 부탁해 아윈의 동향을 묻기도 했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하인들은 갈 때마다, ‘별 일없이 잘 있다.’는 아윈 이모의 답변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고, 바람과 새들은 흘러가며 본 광경을 전해줄 뿐인지라, 이디아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아윈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한 이디아는 일주일째가 되는 날인 오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굳센 결심을 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어!’
결심을 굳힌 이디아는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일단 가장 먼저 진행한 것은 바로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 어울리는 외출복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아윈이야 이디아의 저택에 수시로 놀러 왔지만, 반대로 이디아가 찾아간 적은 없었던 만큼 마을을 수호하는 이름 높은 수호기사의 무남독녀로써, 스스로 나가는 첫 외출에 친구의 집에 처음 방문하는 모습에 결코 빈틈이란 있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런 모습은 부모님은 물론이고 엄하신 할머니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디아 본인 스스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리와 선택을 도와줄 유모를 옆에 세워두고, 자신의 하늘 빛 머리와 어울릴 후보군을 몇 벌 골라놓고 거울을 마주본 채, 옷을 몸에 맞춰봤다 내려놨다 하길 여러 번 한 끝에 결국 머리색과 어울리는 하늘 빛 원피스와 예쁜 리본이 달린 모자를 골라 유모로부터도, 스스로도 거울을 보고 오케이!를 하고 나서야 이디아는 만족스럽게 첫 번째 단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단 하나.
바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외출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옷을 봐주러온 유모로부터 두 사람이 함께 일 층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찾아나서는 수고는 덜었으나, 이디아는 섣불리 허락을 구하러 나서지 못했다.
‘뭐라고 말씀드리지....?’
지금까지 혼자서는 해본 적 없는 저택 밖의 외출.
처음으로 시도하는 미지의 도전에 이디아는 손가방을 꼬옥 움켜쥐며 마른침을 넘겼다.
아직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은 마주하지도 않았건만,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허락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이 소녀의 가슴속에서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혼나면 어떡하지..?’
무심코 생각해버린 그 한마디.
혼이 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킨 것만으로도 이디아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무서운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주체할 수 없이 역류해 오기 시작했다.
식사예절을 지키지 않아 혼난 적이 있었다.
화단을 망쳐 야단맞은 적도 있었다.
책을 읽지 않아서, 고집을 부려서, 언성을 높여서, 음식 투정을 부려서, 거짓말을 해서....
엄한 할머니의 훈육 속에서 지내왔던 그동안의 안 좋은 기억이, 할머니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이디아의 마음속에서 가득 차올라 방금 전까지 작게 피어올랐던 외출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은 생명을 잃고 초라하게 얼어 시들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허락... 안 하실거야....”
문고리를 당기려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리며, 이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 샘솟기 시작한 공포와 낙담을 넘어설 용기가 아직 어린 소녀에겐 충분하지 못해서였을까, 끝내 한 발작을 내딛지 못한 이디아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이디아의 눈앞에 그녀를 마주보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우거지상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이디아 자신의 모습.
바로 거울에 비친 이디아였다.
현관을 마주보고 걸려있는 낡은 거울은 이디아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물건이었다.
‘형편없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디아는 솔직한 감상평을 내뱉었다.
거울 속의 이디아는 분명히 잘 어울리는 하늘색 외출복과 귀여운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화사한 옷과는 달리 얼굴은 포기와 실망감으로 가득해 흉하고 못난 모습이었다.
조금 전까지 옷을 고르면서 보았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귀엽고 예쁘기만 했는데, 그런 숙녀는 어디가고 이런 못난이가 있단 말인가?
이디아는 거울을 보며 언젠가 아버지 수호기사 아브가 해주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현관 앞의 거울을 보며 장난을 치던 어느 날, 이디아의 뒤에서 귀가한 아버지가 다가와 다정하게 알려주던 이야기를....
“이 거울은 ‘돌아보는 거울’이란다. 이디아.”
“돌아보는 거울이요?”
“그래. 집에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이 거울이 보이지? 하루를 마치고 거울을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보고 오늘 하루를 돌아본단다.”
아브는 이디아의 어깨에 턱을 걸치고 볼을 마주 댄 채, 거울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찌푸리기도 하고, 흉하게 우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화내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는데, 이런 이디아는 아버지의 얼굴 장난이 마냥 우스워 킥킥거리며 그 표정을 흉내 내는데 애썼다.
그렇게 대여섯 가지 표정을 짓던 아브는 다시금 자상한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와 말을 계속했다.
“하루를 보내는데 실망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거울을 볼 때마다 생각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되풀이 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지. 하루를 보내는데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 하루에 부끄러움이 없었다면.”
이디아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었던 아브는 몸을 일으켜 가슴을 펴고 거울을 마주한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이디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익살스런 표정을 짓던 장난기 많던 아버지 대신, 손을 높이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산처럼 크고 높은 사나이가 이디아의 높은 곳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이 눈부셔 올려다본 아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명을 받고 빛나는 그의 벌어진 어깨와 그 위에서 반짝이는 은빛 망토와 넓은 가슴은 어린 이디아의 눈에 너무나 든든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빛나는 동경의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에게 거인은 손을 뻗어 거울을 가리켰다.
그곳엔 바위처럼 단단하면서도 새벽별처럼 빛나는 명예와 긍지로 가득한 왕국 제일의 용사가 있었다.
그 용사가 이디아에게 말했다.
“당당해져라.”
이디아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방금까지 자신의 행동에 잘못된 것이 있었는가 하고...
그 질문의 답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이 넘게 연락이 없는 하나 뿐인 친구를 걱정해서 시작한 일이다.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허락 없이 몰래 나갈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도망치려는 것도 아니야!”
시작부터 과정까지 부끄러운 일이라곤 없었다.
거울속의 이디아도 흉한 모습은 사라지고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 이디아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 납득할만한 설득력을 갖추고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었기에, 이디아는 망설임 없이 정원으로 나가 티타임과 함께 담소를 나누던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서 외출의 이유를 말하고 허락을 구할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이디아의 말에 그녀의 모친과 할머니는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남은 차를 홀짝였다.
차를 마시는 잠깐의 시간.
참기 힘든 적막이 흐르고, 페르젠 가의 절대적 권위를 지닌 가장 큰 어른.
카디아 폰 페르젠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열릴 때마다 천둥과 벼락을 쏟아내던 무서운 입술이, 오늘은 부드럽게 치켜 올라가더니, 이윽고 산들 바람을 불어내었다.
“친구가 생길 나이구나. 이디아.”
자신의 손녀를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살폈다.
그러고 보면 며느리와 정오의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화창하고 맑은 하늘이었다.
손녀의 첫 외출에 어울리는 좋은 날씨라 생각하며 카디아 할머니는 주름진 손가락을 뻗어 마구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걷기에는 다리가 아플 테니 노새를 타고 다녀오려무나.”
할머니의 완전한 허락에 이디아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이디아는 할머니의 품에 와락 달려들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할머니도 이디아의 양 볼에 입 맞추어 주었다.
그리고 이디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당부를 더했다.
“앞으로 이유가 있다면, 특별히 허락 받지 않아도 된단다. 이디아. 하지만.”
할머니는 바로 머리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두워지기 전엔 꼭 돌아오너라.”
“그렇게 애써서 허락을 받아냈는데 아윈은 집에 없었어. 너무한 거 아니니?”
지난날을 얘기하던 이디아는 지금 생각해도 부아가 치미는 지 엘피르를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엘피르도 이디아의 말에 동조하듯 털을 곤두세우며 꺅꺅 거렸고, 이디아는 헤헤 웃으며 엘피를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그치? 너무했지? 그렇게 노새를 타고 아윈 집에 가서 이모님을 만났는데 하는 얘기가. ‘어쩌지? 아윈은 놀러나갔는데?’ 였 던 거 있지? 누군 일주일동안 잠도 못자고 걱정했는데 말이야!”
이디아의 말에 엘피르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이디아의 말에 동의하는 건 엘피르 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건 아윈이 잘못했군요.”
어느새 들려온 선생의 목소리에 이디아는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표정을 보며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디아양처럼 말하지 않아도 대화하는 재주는 없지만, 이번만큼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겠군요. 답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들었다고 하도록 하지요.”
선생의 대답에 이디아는 방금 전 아윈에게 화를 내었을 때보다 더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부끄러움에 악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꾹 참고 대신 두 손을 움켜쥐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시늉을 했다.
정신없이 혼자 달려왔고, 넋 놓고 앉아 과거푸념을 하긴 했지만, 이곳이 수많은 생명을 삼켰던 위험 가득한 숲이라는 자각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다 큰 어른이 엿듣기나 하고, 너무한 거 아닌가요?”
창피함에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으며 이디아가 쏘아붙였지만, 선생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너무한 건 이 숲에서 혼자 아무렇게나 달려가 버린 이디아양입니다.”
이 숲이 어떤 곳이던가, 숙련된 성인 모험가조차도 나무껍질에 한 서린 유언과 저주의 말을 남기는 무서운 숲이 아니던가.
열세 살을 갓 넘긴 어린아이들이 동네놀이터 삼아 노닐 듯 들어오는 게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나마 그 아이들이 하나는 놀라운 재능과 함께 본인 스스로가 정해놓은 최소한의 룰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갖지 못한 신비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두 아이 모두 이 숲에 발을 디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에 갇혀있는 마수 중 하나의 먹잇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은 이디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저질렀던 무모한 행동을 따끔하게 질책하리라 마음먹었다.
“여기에서 함부로 행동해선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철없이 행동하고 말았어요. 아까 소원으로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죠? 어른은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디아는 그저 단지 몸만 커지고 싶었던 거였습니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선생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낮게 깔린 선생의 어조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싸늘해 이디아가 무심결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죄송해요 선생님. 잘못했어요.”
이디아가 고개를 떨구고 사과하자 선생은 그제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럼 됐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되풀이 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생은 한쪽 무릎을 끓고 앉아 이디아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곤 크고 따듯한 두 손으로 여리고 보드라운 이디아의 뺨을 어루만지며 선생은 말했다.
“이디아양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이디아양이 마구 달려 나갔을 땐, 아윈도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당장이라도 울먹일 것 같던 소녀는 선생의 따스한 위로에 다소 진정하는 듯싶었지만, 아윈의 이름이 들리자 태도가 달라졌다.
양손으로 선생의 두 팔을 잡고 뺨에서 힘차게 떼어낸 다음, 흥! 하고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등을 돌리고 볼을 부풀린 이디아.
돌아선 채로 이디아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당초 아윈이 사고를 치지 않았음 이런 일도 없었어요! 걱정? 걔는 남을 걱정할 애가 아니에요. 자기가 사고 쳐서 남을 걱정시키면 시켰죠! 걱정했다면서 아윈은 여기 있지도 않잖아요!”
‘이래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리는 군요......’
선생은 씁쓸하게 웃으며 바지춤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그의 엄지손톱만한 따스한 온기를 지닌 동그란 조약돌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디아양. 아윈을 원망하고 있지요?”
이디아는 돌아선 채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은 주머니에서 돌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돌아선 이디아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함께 하던 아윈이 왜 오늘은 이디아양을 따돌렸을까요?”
선생은 다시금 이디아와 눈높이를 맞춘다. 하지만......
“몰라요! 그런 바보!”
이디아는 여전히 뾰루퉁한 채 고개를 돌린다.
선생은 다시 이디아가 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죠.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아윈은 그럼 왜 하필 오늘 모험을 했을까요?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절벽에서 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따려고 했을까요?”
질문이 바뀌면서 이디아의 생각도 선생이 말한 ‘오늘’에 닿았다.
숲 입구로 들어서며 이디아가 뭐라고 불평했던가?
[왜 하필 오늘 사고를 치는데!! 이 말썽꾸러기는!!]
자신의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 남의 사고 뒷수습하러 간다고 불평하지 않았던가!
아윈이 ‘오늘’을 위해 몰래 연습을 해가며 시행착오를 겪고, 급기야 죽을 위기에까지 처하면서 구하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윈이 왜 그게 없어졌다며 어색하게 이디아에게 사과했는지, 그제야 모든 정황을 파악한 이디아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력질주를 한지는 이미 한참전이건만, 왜 심장은 요란스럽게 두방망이질 치는 것일까, 귓불까지 새빨갛게 붉힌 채, 가슴을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디아에게 선생은 분홍빛이 감도는 조약돌을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분홍색 광채가 맴도는 걸 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작은 조약돌.
하지만, 그 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선생님. 이 돌은.......”
돌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이디아가 물었다.
“아윈이 전해준 돌입니다.”
“아윈이......”
“오늘 꼭 이디아에게 주고 싶은 게 있다고, 반드시 찾아내서 생일파티에 가겠다고 장담하더군요. 그 돌은 멋진 선물을 가져올 때까지 대신으로 갖고 있으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선생은 미소 지으며 마을을 향해 앞장섰다.
“아윈이 가져올 멋진 선물을 기대하면서 돌아가서 기다리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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