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 굴욕과 패배감을 맛봤습니다.2020.12.09 AM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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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더니 이정도면 할만하네...'

 

짙은 어둠이 깔린지 오래인 호수공원에는 산책로를 따라 찬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약 두어달간 매일 같이 걷기를 생활화 해오다보니, 재택근무를 시작한 오늘 아침에는 몸이 날아오를 듯 가벼워 당황스럽기까지 한 상태였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몸 상태는 만전. 최상의 컨디션. 겨울의 추위가 매섭더라도 운동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청년은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빠르게 걸었다.

추위에 굳어진 몸이 슬슬 시동이 걸리는 것을 느끼며 청년은 점점 걸음에 속도를 더해갔다.

풍경이 휙휙 지나가고, 마주오는 바람이 점점 거세져오며 추위가 더해갔지만, 반대로 패딩을 입은 몸 안은 용광로처럼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슬슬 몸이 풀리네.'

 

적당히 시동도 걸렸겠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지나쳐가며 청년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누가뭐라고 해도 청년은 이 호수공원에서 빨리 걷는 것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진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나이였다.

코로나19로 한창 난리가 났을 무렵.

청년은 마스크쓴채로 운동하겠답시고 전력질주를 하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 이후로 전력질주 대신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거의 조깅하듯이 걸을 수 있는 경보를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호수 공원에서 청년을 걷기로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앞서서 걷는 그 누구라도 청년이 한번 추월하고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청년의 앞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도 청년은 평소처럼 앞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가볍게 앞질러가며 헤드셋의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게 없는 하루였다.

뒤에서 심상치 않은 그림자가 다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뭔가 빠르다?'

 

뒤에 비친 가로수 조명으로 길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청년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 호수 공원에서 자신 보다 빠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조깅을 하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탄 자라면 어쩔 수 없다쳐도 걷는 자 중에 청년보다 빠른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는 청년의 보폭보다 빠르게 청년의 그림자를 덮어가는게 아닌가?

그렇다고 달리는 속도로 보기에는 너무 느렸다.

그렇게 아차 하는 사이 일은 벌어지고야 말았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길게 늘어섰던 그 그림자가 수평을 유지하나 싶더니 어느덧 그 그림자의 주인이 청년을 추월해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럴수가!!'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추월을 당하다니!!'

 

하지만 이내 분한 마음은 사그라들고 여유와 즐거움의 미소가 청년의 마스크 너머로 피어올랐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지.'

 

앞질러간 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청년보다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다.

고구마장수 같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패딩을 입은 채 엉성하게 걸어가는 폼이 분명 나이를 먹은 중년 아저씨리라는 추측이 들자 청년은 앞선 상대를 가벼이 여기기 시작했다.

다소 무리해서 나를 추월했지만, 이후 조금 떨어진 속력을 보니 역시 한계가 온 모양이 틀림 없다. 나이도 드신 분이 무리해서 운동하면 안되지 않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마친 청년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앞질러간 자는 어느덧 100여미터는 앞서가고 있었지만 거리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경보를 쓰는 그 순간부터 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뒤로 가는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럼 처음엔 가볍게'

 

청년은 조소하며 보폭을 줄이고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른 발걸음이 느껴지면서 사물과 사람들이 청년의 뒤로 향했다.

가로수의 조명이 청년의 뒤로 향하며 청년의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뻗어나간다.

그리고 마치 추월을 예고하는 양 앞서간 자의 그림자를 덮으며 그 간격을 좁혀가기 시작했다.

청년의 그림자가 점점 빨라지며 앞서간 자의 앞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그 또한 청년의 추격을 눈치채고야 말았다.

쉬엄쉬엄 가는 듯했던 보폭이 급격히 빨라지며 다시금 청년과 걸리를 벌리기 시작한게 아닌가?

 

'용을 쓰는군.'

 

청년은 실소를 흘렸다.

저러다가 쥐가 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운동은 결코 무리해서 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신체를 알지 못하고 하는 운동은 반드시 탈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잠자코 자기의 분수를 알고 제 자리로 돌아가란 말이다!'

 

청년은 다리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경보!

가볍게 조깅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속도를 내는 빨리 걷기의 최고의 경지!

그 폭발적인 속도가 청년의 두 다리에서 뿜어져 나왔다.

때마침 청년의 헤드셋에서도 강렬한 메탈락이 뿜어지고 있었다.

속도를 내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분위기 앞에 앞서간 자는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청년이 척척척 하며 앞질러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만 다시는 추월할 수 없다는 절망을 안겨주지!'

 

추월한 순간 경보를 해제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청년은 다소 무리해서 300미터 정도 여유있게 거리를 벌리고 나서야 땀을 훔치며 거췬 숨을 내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소 빨리 걷는 상태를 유지하며 격렬한 운동의 반동으로부터 회복을 도모하며 방금 추월한 순간을 되새기며 뿌듯해하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훌륭한 상대였지만 역시 나를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공원에서 가장 빠른 자는 나이다. 라는 식의 자기 만족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청년은 순간 느껴지는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격렬한 운동을 했으니 몸은 뜨겁게 달궈져야 정상인데, 추위라니? 이 무슨 기현상이란 말인가?

청년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발 밑.

발 밑이었다.

청년의 발이 하나 정도 앞으로 더 나와있었다.

아니 길죽한 검은 것은 발이 아니었다.

 

삐져나온 그림자였다.

 

'뭐...라고?'

 

차마 자존심 때문에 뒤를 돌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그림자가 점점 청년의 그림자를 잠식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의미를.....!

 

놈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청년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미 소모해버린 다리는 마음만큼 급하게 움직여주지 않는다.

다리는 쥐가 날 것처럼 땡겨왔다.

무리를 해버린 것이다!

점점 쳐지는 몸. 턱까지 차오르는 숨.

하지만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청년의 바로 뒤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거리를.. 벌려야해....앞을 내줄 수는 없어.....'

 

청년은 간절하게 바랬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바램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그저 헛되이 허공에 팔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청년의 옆을 지나 유유히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점점 점점 벌어져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거리까지 벌어지고 말았고, 겨우 체력을 회복한 청년이 다시 의지를 불태웠을때, 그는 갈림길에서 청년과는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말았다.

 

'비겁한놈! 이기고 도망치다니!!'

 

청년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이미 정해진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청년은 패했고, 호수공원의 지존의 자리는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제가 어떤 아저씨에게 추월당한 것 까지는 사실.

최강자 운운이나 조소 실소 비웃음 이런건 그냥 창작의 요소 입니다.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 보고 '가엾은놈!' 이러는 사람 아닙니다 ㅠ.ㅠ

 

댓글 : 1 개
헐.. 크크크

결국 졌군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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