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론과 돼지-다시 읽기] [필론과 돼지] 다시 읽기-part01-사회적 배경.2023.01.23 AM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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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과 돼지>는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 발표되었고, <우일영>은 1987년의 '6월항쟁' 직후에 발표되었습니다. 즉,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출발하던 즈음에, 다른 하나는 끝날 즈음에 발표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작가의 인식의 변화입니다.

<필론과 돼지>의 '검은 각반'과 <우일영>의 '엄석대'는 모두 전두환 씨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습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필론과 돼지>에서 검은 각반은 속된 말로 '양아치'입니다. 하지만 <우일영>에서 엄석대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입니다. 비록 그가 후반부에 갑작스레 몰락하기는 하지만, 한병태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가 지배하던 질서를 간절히 그리워합니다. 이처럼 이 7년 동안 전두환 군사독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또한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왜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줍니다. 이문열 씨의 작품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가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1996년작인 <선택>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래와 같은 언급이 나옵니다.

개인이 비대해져 개인의 평안, 개인의 행복 위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가 되면 제도는 비웃음 속에 소멸될 수밖에 없다. (p.71)

라마인(로마인)들은 가장 먼저 민주주의의 맛을 본 사람들이지만 치욕스런 제정(帝政)으로 끝장을 보고 말았다. (p.78)

두 문장을 종합해 보면, 이문열 씨는 민주주의란 결국 왕정이나 독재에 의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열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문열 씨의 인식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필론과 돼지>의 초반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독재에 맞서지 않고 침묵했다는 이문열 씨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려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부끄러움은 민주주의가 선이고 군사독재가 악이라는 전제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만약 민주주의가 악이고 군사독재가 선이라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즉, 이문열 씨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그'는 초반부에는 군사독재를 혐오하지만, 후반부에서 제대병들의 광기를 보고 나서는 민주주의를 더 혐오하게 됩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집중적으로 설명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작품의 '시점'과 '홍동덕'이라는 조연의 존재입니다.

이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흔히 사용되는 시점이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소설 속에서는 검은 각반들과 제대병들이 충돌합니다. 이것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찰자이자 주인공인 '그'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를 관찰하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도 '화자'도 결국 이문열 씨의 대리인입니다. 즉, 이 작품에는 이문열 씨가 두 명 등장합니다. 이건 매우 이상합니다. 왜 '그'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하거나, '그'를 생략하고 전지적 시점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작품을 훨씬 간결하게 만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홍동덕 역시 주인공인 그와 마찬가지로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인공의 옆에서 끊임없이 그의 부끄러움을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모두 작가인 이문열 씨가 당시에 느꼈던 '부끄러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음 회부터 이 이야기를 본격적인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열차칸은 대한민국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을 상징하는 100명의 제대병들이 타고 있습니다. 제대병들은 이 열차가 자신들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란 기대에 들떠 있습니다. 즉, 갑작스레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군사독재가 끝나면서 전국이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던, ‘서울의 봄’ 당시의 대한민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인 ‘그’는 등장하자마자 ‘지난 삼 년의 병역생활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라고 언급합니다. 이 문장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18년간의 박정희 군사독재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지금 이문열 씨의 정치적 스탠스를 생각해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이때에는 그 역시 군사독재를 지독히 싫어했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그는 검은 각반(전두환 군사독재)이 등장하자 처음에는 그들에게 반감을 가집니다.

‘대구에서 고향까지 이백 리 길’이란 언급과 주인공이 ‘이 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봐서 그는 ‘안동 이 씨’인 것 같습니다. 즉, 주인공은 이문열 씨와 매우 닮은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시점은 조금 이상합니다. 사건을 관찰하는 주인공이 있고, 그런 주인공을 관찰하는 화자가 있습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해도 별 차이가 없는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설정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 속의 '그'를 '나'로 고쳐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런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이문열 씨가 느꼈던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인칭 시점을 사용하면, 독자들은 당연히 주인공과 작가를 연결시키려 할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3인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낼 때, 괜히 ‘이건 내 친구 이야긴데…’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인물의 첫 사건은 그 인물의 성격을 보여줘야 합니다. 주인공인 '그'는 열차 가운데와 출입구는 귀찮은 사건에 말려들기 쉽기 때문에 1/4 정도에 앉는 것이 안심이 된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렇게 남의 일에 말려들기 싫어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앉자마자 ‘홍동덕’이 나타납니다. 참고로 이 열차칸에서 주인공은 최고의 학력(대졸)을 가진, 그리고 홍동덕은 최저의 학력(초등 중퇴)을 가진 인물입니다. 작가는 홍동덕을 통해 주인공이 더 큰 좌절감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설정하고 있습니다.

9페이지에서 중요한 언급이 나옵니다.

‘형태나 방식이 다를 뿐, 삼 년간에 바쳐야 할 봉사의 양은 동일하다는 것을’

주인공이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동일한 양의 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 즉,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양의 고생을 해야 한다는, 이 평등이 싫은 겁니다. 그는 최고의 학력을 가진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것이 그가 매번 홍동덕에게 분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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