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2016.12.30 AM 05:05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역할존중, 나는 너를 모른다


리그오브레전드 인벤 매니아칼럼 게시판에 쓴 글입니다. 다른 글들도 그 게시판에 종종 썼었습니다.

---






계급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역할'에 부여된 것이다. 






0. 존중


이것에 관해 꽤 오랫동안 써왔다. 존중이 무엇이고, (우리사회의)존중의 척도는 무엇이며, 누구를 존중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써왔다. 처음은 하나의 괴리감으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나름대로 당당하게 주장할만한 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는 리그오브레전드 매니아칼럼 게시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이것이 리그오브레전드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맞다.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 자체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다. 게임 내 챔피언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밸런스를 논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리그오브레전드를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들을 비롯해 모든 관계자에 관련된 이야기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수차례 작성한 것과 같이 우리사회에서는 게임이 존중받지 못한다. 긍정적으로 봐도 천덕꾸러기, 나쁘게 보면 악이라 부를 정도까지 우리는 존중받지 못한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이 즐기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가(그외 다양한 인터넷 활동들이) 우리 사회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이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분명 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게임을 즐기는 우리들은 분명 존중받을 수있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해보겠다.






1. 존중의 척도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정리하겠다. 우리사회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도입했으나, 그것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신분제시절 가지고 있던 존중의 척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높으면 귀하게 대접했고 낮으면 천대했다. 


그러다보니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모두가 공평한(공평해야되는) 민주주의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귀하게 대접받는 '높은 사람'과 온갖 노력을 다해도 천대받는 '낮은 사람'이 있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높다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이가 많다. 계급이 높다. 권력이 높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 돈이 많다. 등이며 반대는 낮음이다. 이에 관해 예를 들자면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지도자와 시민, 고학력과 저학력, 상점과 손님 등이 있다.)


과도한 경쟁사회, 상대를 깍아내려서라도 높아져야하는 사회, 두렵게 해서 상대를 낮게 만드는 사회, 높은 사람이 무서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는 사회, 등 그런 사회들이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갑질과 꼰대를 만들어냈다.



갑질과 꼰대질의 공통점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행하는 불합리한 행위를 뜻한다. 높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 존중받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위치를 유지해야 존중받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갑질을 행하고 꼰대질을 행했던 것이다. 


그들을 비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과 우리들은 존중 받는 다른방법을 몰랐다. 그러니 갑질을 비판하고 꼰대질을 비판해도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가 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식으로 존중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앞으로 다르게 존중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그런다면 나쁜 사람으로 취급해도 된다고 본다.



사회시스템은 민주주의다보니 극단적으로 치우치진 않았지만, 신분제 시절의 때를 벗지 못한 것 마냥 그 시절 가지고 있던 존중의 척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신분제 시절에는 높고 낮음이 정해져있다보니 낮은 사람이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시대엔 당연했다. 정말로 끔찍한 사회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


니지 않나. 이제는 민주주의사회다. 모두가 공평한 민주주의에서 낮은 사람이 불합리한 상황에 처하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몹시 슬픈 것은 반발할 때도 상대와 똑같이 행동한다는 점이다. 상대가 무섭게 해서 존중을 빼앗으면 당한 쪽도 마찬가지로 무섭게 만들어 존중을 받아내겠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러면 상대는 다시 더 무섭게 해서 존중을 빼앗아갔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벗어날 수 없는 슬픈 굴레였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게 당연한 사회. 우리사회에서 상하관계를 통한 존중의 척도는 진리였다.






2. 역할


우리사회는 높은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낮은 사람을 천대했다. 그게 당연한 사회였다. 대표적으로 교육부터가 그렇다. '어른을 공경하세요.' 어렸을 때엔 몰랐다. 그게 얼마나 의미없는 말인지 몰랐다. 어른이라고 다 올바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슬픈일인가.


'어른을 공경하세요' 가 아닌 '올바른 사람을 존중하세요' 라고 교육했어야 했다. 


그렇다. 상대가 누구든 아무래도 좋다. 올바른 사람이면 존중받아야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성별이 어떻든, 계급이 어떻든, 지역이 어떻든, 지위가 어떻든, 돈이 많든 적든, 아무래도 좋다. 그 사람들이 올바르면 귀하게 대접하고 올바르지 않다면 천대했어야 했다.



그런데 올바르다는 기준은 뭘까? 그것은 역할을 다하냐느 못하느냐로 정해진다고 본다. 역할은 단순히 직업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국민의 역할. 우리는 국민의 의무를 지키고 법과 질서를 지킴으로서 존중을 받는다. 그 외 부모의 역할, 자식의 역할, 교사의 역할, 학생의 역할, 지도자의 역할, 시민의 역할, 사장의 역할, 직원의 역할, 정말 다양한 직업들의 역할,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역할들의 수행여부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한다. 그 옳고 그름으로 귀하고 천함을 정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간 아무래도 좋다. 설령 외국인이라도 스스로가 한국 국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면 그 사람은 한국인인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반대로 외국인이라고 오냐오냐 해줄 필요 없다. 모든 외국인을 존중할 것이 아니라, 그 외국인이 한국인으로서의 역할인 국민의 의무와 법과 질서를 지킬 때 존중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정의를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다. 까놓고 말해 자신들의 교리를 더 우선시 하여 다른 사람들을 괴롭혀 해외에서 논란 중인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은 존중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 나라에 보호받고 싶다면 그 나라의 정의를 따르는게 맞다. 그 나라의 의무를 지고 그 나라의 법과 질서에 맞춰 자신들의 행동을 선이라 주장하는 것. 그걸 이행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의만 주장하는 것은 침략이나 다름없다. 문화 침략이다.

 


지금까지는 높고 낮음으로 귀하게 대접하거나 천하게 취급했다. 하지만 높고 낮음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역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였다. 


이것이 바로 역할존중이다.






3. 계급


민주주의는 평등한 사회다. 하지만 평등하다고 해서 계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종종 계급이 문제라고 생각해왔지만, 실제로는 계급만으로 존중을 줬기 때문에 문제였다. 계급은 귀하고 천함을 가르는 척도가 아니다. 


계급이라고 해서 거부감이 든다면 랭크(RANK)라고 해도 좋다. 리그오브레전드에서 랭크는 실력의 척도지, 높다고해서 귀한 유저 낮다고 해서 천한 유저 그렇지 않지 않나. 물론 현실에서 익힌 존중의 척도로 판단하여 낮은 랭크 유저들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대체로는 그렇지 않다. 높은 랭크 유저는 높은 실력을 보유했을 뿐이다. 대리나 헬퍼를 사용하면 게임 내 규정을 지켜야하는 유저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존중받을 수 없다. 반대로 낮은 랭크의 유저라도 게임 내 규정을 지켜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존중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이 계급은 존중의 척도가 아니다. 현실에서의 계급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은 능력에 걸맞는 역할의 척도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정당한 역할을 받는 것. 그것이 올바른 사회일 것이다. 


제 역할도 다하지 못하는 높은 계급(지도자 등)은 존중해서는 안된다. 못하면 내려오는게 순리 아니겠는가.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나 능력을 발휘하여 제역할을 다할 생각도 없는 작자들이 높은 계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제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이전에 못한 사람이라면), 그들에게 존중을 주지마라! 반대로 제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상대가 누구든간 충분한 칭찬과 존중을 줘야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예를 들어보자. 이를테면 보호자와 아이가 동등한가? 아니지 않나. 보호자는 아이들을 보호하고 올바르게 성장시킬 의무가 있다. 종종 보호자와 아이가 동등하다고 생각해 아이가 때를 쓰면 같이 때를 쓰고, 아이가 화를 내면 똑같이 화를 내는 보호자들이 있다. 아니면 알아서 커야 된다는 생각으로 아예 방치하기도 한다.


이미 그것은 보호자가 아니다. 보호자와 아이는 동등한게 아니란 말이다. 보호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보호자인 것이다. 그런식으로 동등하게 본다면 보호자의 역할을 다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보호자 역할을 다하지 않았으므로 보호자 역할에서 박탈되어 아이들이 보호자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부모는 평등하게 대해준다며 자신의 역할을 잊고 보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망가졌다.


물론 이것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다. 가정폭력이나 학대라던가 자식을 자신의 2회차(아바타)로 생각해 자기 멋대로 성장시키는 자들도 있으니 말이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계급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역할'에 부여된 것이다. 이를테면 사장과 직원은 동등하지 않다. 


계급은 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벗어나면 동등하다. 똑같은 사람이다. 공적인 일이서는 역할을 통해 효율적인 업무가 필요하므로 사장의 권위나 계급은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적인 일에서까지 사장의 계급이나 권위를 이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역할에 계급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계급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사회엔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사회는 재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계급을 역할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부여했다. 대대로 물려받는 재벌들. 그들은 이미 신분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계급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에게 부여해서는 안된다. 계급은 어디까지나 역할에 부여해야한다. 그 역할을 못하면 책임지고 물러나라. 그리고 역할을 마칠 때, 제역할도 못할 자들을 가족이라고 불러 주지 말고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에게 줘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역할에서 벗어나거나 포기한다면 그 역할에 부여된 계급도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할에 계급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역할존중이다.






4. 능력


능력중심의 사회. 능력존중과 역할존중에 대한 차이점을 집고 넘어가겠다. 우리들은 종종 능력중심의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능력집착을 부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영어는 전혀 쓰지도 않을 직업에 영어점수를 본다. 그것이 능력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웃기는 이야기다.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데, 그 이상의 것을 본다. 그것이 능력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농부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가? 어부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가? 능력존중의 사회는 능력의 척도를 제멋대로 규정하여 사람들을 평가한다. 그것은 바르지 못한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고학력자나 쓸만한 자격증을 취득했다면 능력이 높다는 근거가 되므로 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동등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근거가 마련된다면 동등한 대우를 줘야하는 것을 줘야하지 않겠는가? 능력이 어떻던간에 제역할을 다 하고 있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줘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능력존중과 역할존중의 차이다.



역할존중은 나이나, 성별이나, 자본이나,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이나는 아무래도 좋다. 어린아이가 제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도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이를테면 바둑기사는 10대초반에도 프로가 된다. 이미 떳떳한 직업인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어떻던간 바둑기사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에 맞는 존중을 받아야 한다.


반대로 나이가 많다고 하여 정년퇴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음에도 오직 나이가 많다는 이유하나로 정년퇴직을 한다. 제역할을 못하는 사람이 퇴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제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로 퇴직하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다. 그들은 삶의 여유를 위해 퇴직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제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계속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역할을 뺏으면 안될 것이다.


물론 이 이전에 왜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봐야한다. 정년퇴직의 이유는 연령에 따라 체력이 떨어져 전성기에 비해 업무능률이 떨어진다거나, 연차에 따른 높은 급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새로운 세대 교체가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감안하여 기존에 하던 역할을 다른 사람과 나눠서(시간선택이나 요일선택) 맡거나 현재능력에 맞는 역할을 받는 것에 거부감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대우 또한 그 역할에 따라 받아야 할 것이다. 역할존중사회란 역할을 다할 수 있으냐 없느냐로 정해지는 것. 그것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평생직장은 꿈에 불과하다. 



이런 역할존중은 성차별도 해결할 수 있다. 성별은 아무래도 좋다. 남성이라도 여성들이 하는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존중받을 수 있다. 간호사나 가정주부 등 여성들이 맡고 있던 역할들을 남성이 하더라도 제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성이라도 남성들이 하는 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존중받을 수 있다. 군인이나 경찰 등 남성들이 맡고 있던 역할들을 여성이 하더라도 제역할을 다할 수 있다면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니 특정 성별을 무조건 뽑아야 될 것 아니라,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으면 누구라도 역할을 부여하고 존중을 줘야할 것이다. 물론 다양성이 다양한 생각을 통해 올바른 사고를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그것을 감안하여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뽑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정 성별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분노해야 하는 부분은 제역할을 다했음에도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때 분노하고 반발해야하는 것이지, 무조건 역할을 달라해야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역차별이다.



그 외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그 외 뭐든간에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제역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역할존중이다.






5. 인터넷


지금까지 우리사회의 존중의척도인 신분제적 사고방식과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할 존중의 척도인 역할존중,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서 역할에 계급을 부여해 역할수행여부로 존중의 척도를 정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사실 이런 존중의 척도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생각해보자.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여러분들은 보석과 돌. 어느것을 귀하게 여기는가. 뭐 가끔 돌이 더 귀하다고 대답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는 보석이 더 귀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존중의 척도란 바로 이런 것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진리인 것. 그것이 존중의 척도다.



그래서 나는 절망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까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존중의 척도를 배우고 


경험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바로 인터넷이다.



온라인 게임을 생각해보자. 리그오브레전드에서는 상대를 모른다. 상대가 누구든간 아무래도 좋다. 단지 게임 내 역할을 다하면 칭찬하고 존중했다. 못하면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역할존중에 대해 배우고 행동했던 것이다!


하하하. 정말 유쾌한 일이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심하면 악으로 취급했던 게임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존중의 척도로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역할수행여부로 존중하는 온라인 게임이야말로 민주주의적인 세상이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커뮤니티 규칙을 지키는 사람은 존중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배우고 있었고, 그런 세상속에서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여 20대 총선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는 결과를 맞이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를 바꾼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역할존중주의를 배우고 경험하고 행동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도 알고 있다. 인터넷은 낮다고 해서 천대받지도 않고 높다고 해서 귀하게 대접하지 않는다. 오로지 제 역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세상.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우리가 할일은 단지 인터넷에서 배운 존중의 척도를 현실에 대입하는 것 뿐이었다.


인터넷에선 나는 너를 모른다. 그저 제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겠다. 그것처럼 현실에서도 상대가 누구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느누구라도 제역할을 다하면 존중을 주도록 하겠다.


그것이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인 역할존중이라 생각한다.






---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 : 2 개
  • Tokin
  • 2016/12/30 AM 05:14
좋은 글 잘봤슴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