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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인공생명, 나는 누구인가?2018.05.20 PM 06:47
인공생명, 나는 누구인가?
0. 나
태어난 지 수십 년, 이제야 나는 ‘나’를 알게 되었다. 달리 말해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는걸. 지금은 내가 이해할만한
답을 찾았기 때문에 그전에 내가 어떤 고민을 하여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나는 ‘나는 나니까’ 정도의 추상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적당히 넘겼던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본격적인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 그걸 절실히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의 욕구나 감정이 몸(뇌 포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느끼는 ‘나’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뇌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여 뇌인가 생각해보았지만 인공지능 기술이 그렇게 발달했음에도 자아가 생기지
않는 것을 보면 아닌 듯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초자연적인 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영혼이다. 정말로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여 그것이 ‘나’였던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과학적 증명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명백한 현상도 없으며 논리적으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답은 분명히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당연함을
버리고, 내게 있는 객관적 특별함을 주관적 특별함으로 바꾸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떠올렸다. 자아, 의식, 무의식, 자유의지, 유전자 등등 지금까지
학습한 지식들을 가지고 ‘나’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하여 ‘나’에 대한 의문까지 도달하였는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분명 생산성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생각하고 있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무언가 접하게 되면 그것이 촉매가 되어 이것 저것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잠결에 무언가 떠올라 컴퓨터를 켜서 그 생각을 적어 넣을 때, 생각 이상의 만족감에
‘이 굉장한 만족감’이라고 적어두기도 했다. 물론 그때 내 생각이 답이라는 확증은
없다. 그저 내가 그걸 답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런 여러 생각들이 중첩되어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다. ‘나’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미지는 잡혀있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좀 더 지식을 쌓고
싶지만, 그래서야 언제까지고 쓸 수 없단 것을 안다. 그러니 한번 글로 써보도록 하겠다. 더구나 글로 쓰면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어느 정도는 정리되곤 하니까 말이다.
1. 입력과 출력
입력이 없으면 출력도 없다. 달리 말해 입력이 있어야
출력도 있다. 어떤 인간이든 내부 입출력과 외부 입출력이 존재한다. 내부 입출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보겠다. 첫째는 신경전달물질(또는 신경조절물질)로 1000억개 가량의 뉴런에서
분비되어 100조개가량의 시냅스를 통해 전달되는 물질이다. 둘째는 호르몬으로 내분비기관에서 분비되어 혈액을 통해 전달되는 물질이다. 이외에 뉴런을 보조해주는
신경아교세포도 있다.
이런 물질들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물질을 예로 들어보겠다. ‘도파민’과 ‘세르토닌’은 둘 다 호르몬이나
신경전달세포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신경전달물질로서의 ‘도파민’은 뇌의 일부 구조에서
발견되는 뉴런에서 생성되고 의욕, 행복, 기억, 인지, 운동 조절 등 뇌의 다양한 기능과 연관이 있다. 호르몬으로서의 ‘세르토닌’은 중추신경계통과 소화계통에서
분비되어 감정, 식욕, 잠을 조절한다.
외부 입출력은 오감을 통한 정보수집이나 먹고 싸는 행위 등을 의미한다. 먹는 행위는 보통 영양소를
의미한다. 주영양소에는 대표적으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이 있다. 부영양소에는 호르몬과 비슷하지만 외부에서 섭취해야 하는 비타민이 있다. 비타민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비타민 B1(티아민)’은 신경 조절, 식욕증진, 당질대사에 관여하여 소화액 촉진, 각기 예방 등이 있다고
한다. 결핍 시엔 각기병, 식욕부진, 피로, 권태 등이 있을 수 있고, 과용 시엔 졸음이 쏟아지거나 근육이
완화된다고 한다. 그 외에 무기질과 물이 있다.
이렇게 우리들은 물질을 통해 욕구나 감정은 물론이고 몸의 움직임마저 제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과학이 자리잡은 이시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나 감정 등이 이러한 물질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물질로 인해 느끼게 되는
‘나’는 알 수 없었다. 보통 과학자들은 이런 입력을 받는 뇌를 ‘나’라고 생각하여 인공지능으로
자아를 만들려고 하고 있지만, 뇌에 있는 제한된 입력만 가지고 자아가 만들어 질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입력조차
외부의 입력(영양소)이 없으면 작동하는 것이 아니니 진정한 의미에서 입력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를 알기 위해 한참을 헤맨 끝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게 되었다. 물론 이 답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에 대한 설명에 앞서 우선 ‘자아(나)’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살펴보자.
<철학>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반응·체험·사고·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사전에서는 ‘의식의 통일체’ 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나’가 고정된 존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생각한 것과 사전적 정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그냥 내 생각을
풀어보겠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의식뿐만이 아니라
무의식도 포함되어있고 통일되어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는 다양한
입출력을 주고받는다. 외부에서 영양소를 공급(입력)받으면 물질대사를 통해
에너지를 생산(출력)하며 세포를 구성하고 호르몬(입력)으로도 사용되어 생리작용(출력)을 조절하기도 한다. 이외에 인체 내부에서
작용하는 입출력을 하는 모든 세포들 하나하나가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뇌는 인체 내부에서
작용하는 모든 입출력의 정보를 수집하여 영향력이 가장 강한 것들을 중심으로 의식적 사고에 떠오르게 한다. 그 기준은 처음에는
본능을 중심으로 하다가 시간이 지나 기억이 쌓이면 본능을 포함한 기억을 중심으로 우선순위가 정해져 의식에 떠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인가? 내 생각엔 뇌의 각 부위들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고영역을 만드는데 그 사고영역의 중심흐름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이 흐를 때의 물줄기를
떠올려 보자. 그 강물 중 특정한 지점에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강물의 흐름 자체가 ‘나’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겠다. 의식적으로는 감각기관의
입력이 강하므로 감각기관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그럼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보자. 꼬집은 감각은 감각기관을
통해 전기적신호로 바뀌어 뉴런을 자극한다. 자극 받은 뉴런은 그 신호를 시냅스를 통해 두정엽으로 전달한다. <스웨덴 ‘우메하대학’ 연구팀이 학술지인 ‘네이처뉴로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논문에
따르면 피부에 있는 신경세포 네트워크는 뇌에 촉각 신호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피부에 접촉한 대상에
대한 기하학적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신호가 사고영역에 입력되어 통증이
지속되는 동안 강물처럼 흐르게 된다.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위치나 ‘나’인 것이 아니라 이런
흐름들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증이 끝나면 그 흐름도 멈춰 사고영역에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자리잡게
된다. 만약 통증이 끝나도 기억을 자극하는 어떤 입력이 존재한다면 없는 통증을 기억을 통해 느끼기도 할 것이다.
하나의 예로만 들었지만 사실 수도 없이 많은 입력이 있다. 사람의 뉴런(신경세포)는 약 1000억개 가량 되고 신경아교세포는
약 1조개 가량된다고 한다. 그 외 다양한 모든 것이 데이터를 처리하여 뇌로 정보를 입력하는 것 하나하나에 모두 의지가 있다. 그 엄청나게 많은 입력들이
뇌에서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들끼리 몇 가지로 뭉쳐 사고영역에 흐르게 된다. 물론 나머지 입력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자유롭게 사고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이런 입력들이 끊임없이 뇌의 네트워크인 사고영역에 흘러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 비교를 해보겠다. 사회(뇌[사고영역])에서 사람들(뉴런,내분비기관 등)의 의지(입력[신경전달세포, 호르몬 등])가 지식(기억)과 상호작용한 것이
모여 일정한 여론들을 형성하는데 이런 여론들을 의식적 ‘나’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론이 아닌 의견이라
하여 국민이 아니라 할 수 없듯이, 의식적 사고영역에 흐르지 않는 입력이라 하여 ‘나’를 구성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의식적 사고영역을 거치지 않고 움직이는 무의식적 움직임도 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그 시간대 그
사건의 여론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지, 다른 시간대 다른 사건의 여론에 포함되어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더욱더 ‘모든’ 입력이 ‘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통일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통일체가 아니다. 사람 내부에 있는 각각의
입력들은 다 각자의 의지(감각신호, 욕구, 감정 등)를 가진 ‘나’의 근원으로 그것이 사고영역에서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여러 가지의 생각들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적 갈등도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떤 시간대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 다양한 선택지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는데, 수많은 입력들의 여론이 편안함을 바란다면 과거의 기억대로 행동할 것이고, 호기심으로 새로운 정보를
바란다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예시였지만, 중요한 점은 하나의 선택이라도 수많은
입력들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통일체라기보다는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어쩌면 이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입력(내부,외부)들의 여론으로 의지가
정해지는데,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어디 있냐고. 달리 생각해보자. 애초에 이런 입력 자체가 우리의 의지였다. 모든 행동이 의지의
표출이었다. 외부의 입력이 강하면 의지가 없어 보이고, 편안함을 바라는 여론이 강하면 습관대로 하게 되고(무의식적인 계산에 기대게
되고), 새로움을 바라는 여론이 강하면 그것이 자유의지로 비춰지는 것일 뿐이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 또한 입력 중 하나다. 스스로 생각하고 싶다는 입력들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게 되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게 되고, 그 생각은 다시 한번
입력으로 바뀌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생리작용을 하거나 사고의 흐름으로 이어져 다시금 다른 생각을 나타나게 한다. 예를 들어 무서운 생각을
하면 몸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날 것이다. 어떤 입력(내부,외부)가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고, 그 마음으로 나타난
생각은 다시 입력이 되어 생리작용을 한 것이다. 이 생리작용은 다시 한번 입력이 되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으로 나타난다. ‘앗 식은땀이 나네’ 이렇게 계속 흐르게
되어 자아는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작용은 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지 않아도 어떤 입력이 기억과 상호작용하면 생리작용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무의식적인 생리작용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외에 반사 등이 있다.
2. 시공간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는 자아의 형성, 발달, 유지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우선 ‘나’의 시작부터 이야기해보겠다. ‘나’의 시작은 언제일까? 그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착상하여
배아가 되었을 때부터다. 임신 8주 이후부터는 태아라고 부르게 되며 출생 이후 아기가 된다. 모체에 있을 때 이미
뇌와 감각기관들이 형성되어 감정을 느끼고 잠도 잔다고 한다. 세세한 성장과정은 생략하겠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나’가 시작된다라는 것이다.
이때의 ‘나’가 받아드리는 정보를 크게 내부와 외부로 구분해보자.
첫째, 내부는 유전자다.
식물이 유전자에 의해 세포로부터 알아서 성장하듯, 사람의 몸 또한 알아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잠도 잔다. 보통 수면을 의식의 부재로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뇌가 없는 해파리나
식물들도 잠을 잔다고 하니 의식과는 큰 연관은 없을 것이다. 수면은 뇌가 만들어내는 뇌의 휴식이라기보다
유전자가 만들어내는 세포의 휴식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뇌는 그걸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몸이 휴식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실제로 몸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유전자 내에 저장된 정보는 뇌가
자라 계산이 가능할 정도로 발달되면 사고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가리켜 본능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외부는 ‘나’의 감각기관과 모체다.
모체에 있을 때부터 청각기관이 발달해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이때를
기억하는 아이들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 설명하겠다. 감각기관 외에도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모체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기도 한다. 모체의 식사에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체의
영양공급에 차질이 빚어져 뱃속 아기에게도 큰 타격이 된다. 그래서 임신할 때엔 건강한 음식섭취와 마음의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이런 모체에게 받는
영양공급 여부에 따라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아마 최초의 감정표현이다.
그럼 잠시 모체에 있던 때를 기억한다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이때를 기억하는 5세 이하 아이들이 약 30%가량 있다고 한다. 이것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내 생각을 적어보겠다. 내가 보기엔 그들이 의식을 가진 상태에서 기억한 것이 아니라, 그때 뇌에 저장된 정보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차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겠다. 이건 ‘나’를 의식한 상태에서의
기억인가, 아닌가의 차이다. 사고영역이 넓어져 명백하게 자아를 느끼기 전에도 감각기관은 정보를 수집하고 뇌는 그 정보를 처리하여
저장한다. 이를 가리켜 무의식적 뇌활동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활동으로 저장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아이가 30%가량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30%도 5세 이상이 되면 잊게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은데 내 생각을 적어보도록 한다. 5세 이상이 되면 자아가 발달하여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뚜렷해짐에 따라 무의식적 기억을 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꿈과 같이 말이다. 누구나 다 꿈을 꾸지만 그 꿈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꿈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건 단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기억도 잊는다기보다는 그 기억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이유 모를 트라우마가
보통 이런 연결점을 잃어버린 불쾌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종종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은 기억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정확히는 몸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모체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또한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건 그 당시엔 무의식적
뇌활동에 의존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지능이 높은 동물을 가리켜 인간의 2~5세 지능을 지녔다고
한다. 이걸 달리 말하면 5세 이하의 아이들은 지능의 일부가 동물수준이라는 것이다. 본능에 의존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크기 때문에 사고영역이 넓어져 자아가 발달되면 그 이전의 무의식적 기억은 꿈과 같이 연결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성장하기만 하면 알아서 자아가 발달하고 지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문명의 학습이 없는
인간은 다른 동물수준을 벗어날 수가 없다. 야생아나 고립아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말을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늑대 동굴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늑대처럼 행동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록에서 접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문명을
접하지 못하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지적 장애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동물들이 환경에 적응하여 다른 종을 흉내 내는 것을 보면 뇌가 있는 동물은 주변 환경으로 학습하여
흉내 내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개 흉내 내는 고양이나, 고양이 흉내 내는 개 들도 있다. 자신을 고양이로 착각한
호랑이도 있다. 한 애완사자는 야생으로 돌아갔다가 1년 후 만났음에도 그 사자와 관계된 인간을 기억해 친근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환경 또한 자아를 형성하는
수많은 입력 중 하나이므로 이렇게 사자조차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학습 없는 인간이 지능이 낮은 것과 학습 해도 지능이 낮은 동물들. 이 둘의 차이는 지능의
한계치의 차이일 뿐이다. 아기일 때엔 지능의 차이가 크지 않다. 그러니 인간의 자아발달과
동물의 자아발달에 기능적인 차이가 별로 없을 거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단지 지능의 차이로 발달 정도가 다를
뿐이다.
그럼 자아발달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겠다. 누구나 다 알듯이 아기일
때엔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자아는 수많은 입력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사고영역에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기일 때엔
유전자의 기억이나 모체에 있을 때 감각기관으로 수집한 정보 또는 모체로부터의 영양소 공급 말고는 없기 때문에 사고영역이 매우 좁아 생각을 거치지
않고 행동하게 된다. 즉 무의식적인 뇌의 활동에 의한 본능적 행동이다.
이런 사고영역은 학습으로 기억하면서 점차 넓어지는데, 언어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처음에는 소리를 수집하여
축적한다. 가르침을 받아 그 소리의 의미를 알게 된다. 각 단어들의 의미를 알게 되면서 문장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문장을 형성할 수 있게
되면서 언어적 사고영역이 넓어져 후천적 언어로 사고할 수 있게 된다. 다음은 수학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처음에는 1+1에 대한 개념을 받아드리기
시작하여 점차 어려운 단계를 밟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수학적 사고영역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처음에는 사고영역이 좁아 생각을 거치지 않고 행동하게 되지만, 학습하여 점차 사고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생각을 하여 행동하게 된다. <어린아이가 문자를 빨리 배우게 되면 정서와 감정에 장애가 올 수 있다고 한다. 심하면 정서 불안증이나
유사 자폐증까지 겪을 수 있다니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뇌가 골고루 발달해야 하는데, 문자를 익히면 지능
뇌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감성 뇌가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언어적 사고영역이 문자로
좁혀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문자는 소리를 전부 표현할 수 없으니까. 물론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만 7세 이전의 문자 교육을 엄격히 금한다고 한다.
그럼 자아의 유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자아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로 유지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입력을 보내는 기관이 다른 입력을 내보내면서 학습된 기억과 충돌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선택을
하기 위한 생각이 나타나게 되고, 그 생각은 다시 입력이 되어 생리작용이나 생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사고영역을 유지하고 넓혀준다. 또한 공간의 변화가 있어야 다양한 정보를 학습할 수 있어 사고영역을 유지하고 넓힐 수 있게 된다. 자아는 끊임없는 입력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외부입력이 중단되면 자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 내부입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중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단은 곧 자아의 훼손이나
소멸 또는 생명체의 죽음이다. 일부의 입력은 세포의 사멸로 중단될 수도 있으나, 그 사멸된 세포가 하던
기능을 이어받은 다른 세포를 통해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뇌가 90%없음에도 보통 사람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나머지 뇌세포가 없어진 뇌의 기능들을 맡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3. 자아
지금까지 자아와 자아의 발달 및 유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걸 정리해보겠다.
자아란, 몸에 영향을 주는 모든 내부, 외부의 입력들을 근원으로
하며, 이런 입력들이 뇌의 네트워크인 사고영역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흘러간 입력들 중 비슷한 입력들끼리
뭉쳐 여러 개의 여론으로 나타나는데, 그걸 가리켜 의식적 ‘나’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상반된 여론은
내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여론에 속하지 않는 입력들은 다양한 무의식적 움직임을 나타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자아를
발달 및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공간적 변화를 통한 새로운 입력을 끊임없이 사고영역에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자아의 형성과 발달 그리고 유지는 살아있어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나’ 란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본다. 자아는 살아있기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자아의 실체다.
다음은 자아에 대한 세상에 있는 의문이나 현상에 대해 내 생각을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마음
사람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유명한 질문이다. 옛날에는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감정이 일어나자 심장박동수가 변화하는 것을 보고 심장에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반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대부분 뇌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나의 생각이 옳다면 사람의 마음은 생명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몸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입력(내부, 외부)이 마음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마음이 변화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내적 입력을 보내는 내분비기관 등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입력이 변하니 출력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사람의 경우 과거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입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기까지 한다. 이런 입력의 변화가
출력의 변화를 만드는 것은 장기 이식으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종 장기 이식을 하면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바뀐다고 한다. 이 현상을 보고 세포기억설을 주장한 사람이 있지만 진지한 과학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현상은 있다. 현상이 있다면 그에
대한 답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보았을 때 그 현상은 장기 이식으로 입력이 조금 바뀌었기 때문에 그에 영향을 받아 출력(생각이나 행동)도 바뀌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만일 세포기억설이나 내 의견 둘 다 아니더라도 현상이 존재하는 한 그에 마땅한 원인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마음이 있거나 건강한 마음에 건강한 신체가 있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건강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하여 마음에 이로운 물질을 분비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이 건강하여 몸에 이로운 물질을 분비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건강이란 힘이
좋다거나 체력이 좋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세포의 건강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예외는 있다.
둘째, 잡념
흔히 말하는 잡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시험을 볼 때의 잡념을
생각해보자. 시험은 중요하므로 시험에 관한 것만 의식적 사고영역에 떠올라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때론 예전에 있던 일이, 평소 생각하던 일이, 미래에 대한 일이, 스쳐 지나가던 소리들
등 다양한 잡념이 의식적 사고영역에 떠오른다. 시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내부 입력이 아닌 외부 입력으로 중요성을 알게 되었던 것이라면, 내부 입력은 따로 작용하게
된다. 잡념이 떠오르는 거 자체가 그 시간대 내부적으로는 그 잡념이 더 중요한 생각이란 이야기다. 아니면 예전에 중요하게
여겼었으나 지금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 그럴 것이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스스로 생각하여 입력을 주입해도 내부적 입력이 더 강하다면 잡념은 떠오르게 되어있다. 그러니 집중하기 위해서는
평소부터 의식적 입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배고픔조차 잊고 집중할 수 있는 까닭도
의식적 입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습관을 들여도 더 강한 생존이 걸린 입력일 때엔 별 수 없을 때도 많을 것이다.
셋째, 감정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식는다. 그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입력이 달라지지 때문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달라지니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했다. 왜 사랑이 식는 걸까? 그건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루던 요소들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 중 성적 요소가 많다면, 상대방의 성적 매력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사랑은 식을 수 밖에 없다. 상대방에게서 성적 매력이라는 입력을 받을 수 없으니 더 이상 사랑을 구성할 수 없게 되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갈등은 대게 기억 속의 매력적인 모습과 현재의 식은 감정이 충돌하여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지시키고 싶다면, 성애 외 존중, 친애, 우정 등의 다양한 것들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성과 연인으로, 친구로, 보호자로, 피보호자로, 가르치거나 가르침을
받는 등 다양한 관계를 맺어야만 그 사랑은 오래 갈 수 있게 된다.
넷째, 나의 과거와 대화
현실과 환상을 구분 짓지 못하는 연령대에서 주로 나타나는 ‘상상 친구’라는 것이 있다. 기준은 다 다르나 보통
만 5세 미만이라고 한다. 이 ‘상상 친구’는 마치 정말 현실 속에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나야 기억이 안나니
잘 모르지만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전문가에 의견을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아이가 외로워서, 보호받고 싶어서, 돌봐주고 싶어서 등.
한번 나의 생각을 써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현상은 미숙한
자아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희미하여 벌어진다고 본다. 마치 꿈과 같이 어떤 현상을 직접
만들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상상 친구’를 만들게 되는 것일까?
나는 종종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입력(내부, 외부)이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이상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때론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떠올라 헛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그걸 가리켜 나는 ‘나의 과거와 대화’라고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아이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친구가 말을 걸어주는 것이라고 여겨 ‘상상 친구’를 정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희미해 현실을 꿈마냥 살아갈 수 있는 아이들의 특수능력이다. ‘상상 친구’라고 여기는 그 생각에는
도덕적 교훈도 있을 것이고, 못된 꾀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상상친구’가 따끔하게 충고할
때도 있고, 못된 행동을 하자고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희미해 꿈과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어떤
존재가 말을 걸어주는 것이라 여겨 환상을 만든 것이 바로 ‘상상 친구’다. 이런 환상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현실감을 유지하지 못할 때도 등장할 수 있다.
다섯째, 뇌 이식
많은 사람들이 뇌에 ‘나’가 있다고 생각해 뇌를
냉동보관하기도 한다. 나중에 기술이 발달하여 인공신체를 만들 수 있게 되면 뇌를 이식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라 부르기는 어려운
게 아닐까 생각한다. 뇌 이식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뇌에 보관된 기억이
뚜렷한 처음에는 ‘나’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뇌 이외의 내부 입력이 다르므로
점차, 점차,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예컨대 여러분들에게 어떤 특정한 사람A의 기억을 그대로 주입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여러분들일까? 사람A일까? 아마 처음에는 기억 때문에 사람A라고 혼동할지도 모르지만, 점차 자기자신을 찾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내부 입력은 그대로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냉동보관을 하고 싶다면 몸 전체를 보관하길 권하겠다. 그래야 진정한 ‘나’로 남을 수 있다.
이외에도 다중인격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짧게만 정리하겠다.
다중인격이란 그 사람의 다른 선택지가 낳은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살면서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된다. 선택에 따라 성격이나 특징이 확연하게 달라지게 된다. 만약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면 어땠을까? 그걸 뇌가 저장된 지식을 통해 예상하여 어떤 특정한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
다른 인격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인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트라우마, 또는 그 이상의 충격을
받아 강력한 의지를 담은 입력이 뇌를 자극해야만 가능할 것이다. …… 사실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자투리로 써봤다.
꿈도 하나 떠올라서 추가해본다.
꿈은 어쩌면 이런 입력들이 여론으로 형성되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의식에 통제 받지 않으니
그냥 마구잡이로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아무거나 머릿속에 생각들이 나타나며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 뭐 그냥 떠올랐다. 음,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들이 꿈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희미해 의식의 통제를 덜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통제가 적어 입력이
마구잡이로 기억과 상호작용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나오게 해준다. 의식이 뚜렷하지 않으니 잡념도 많고
상상친구도 만들어낼 수 있다. 자아가 발달하여 의식이 뚜렷해지면서 다양한 입력들은 통제 받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굵직한 여론들로
바꿔나가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예전 기억에 대한 연결점도 잃게 되고, 상상친구도 사라진다. 그리고 천재적인 감성들을
만들어내던 수많은 입력들은 절제된 의식의 통제 속에서 몇 가지의 여론으로 묶이는 바람에 천재성 또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 뭐 이것도 그냥 떠올랐다. 나중에 소재로 정리할
때 이런 생각도 정리해보겠다.
4. 인공생명
드디어 본 주제인 인공생명에 도달하였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었다면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맞다. 불가능하다. 뇌의 일부 기능만 구현한
인공지능에 어찌 자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인공지능에 자아가 나타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의
발달하면서 여러 입력의 필요성을 깨닫고 생물이 갖추고 있는 기능들을 하나씩 추가할 때나 가능할 것이다. 결국 도달하게 될 곳은
인공생명이다.
그러니 인공지능에 자아를 갖게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인공생명을 기준으로 기술을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효율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인공지능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자아를 갖추게 될 인공생명은 분명 감정이나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아를 형성하므로
없을 수가 없다. 그러니 단순 반복만 해줄 인공지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건 예상이지만, 나중에 이런 기술이
발달하면 자아를 가진 인공생명이 자아가 없는 인공지능을 부려 작업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지금도 인공생명 비슷한 것은 있다. 그건 ‘예쁜꼬마선충’이다. 이 생물은 세포 숫자가
일정해 신경다발 지도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지도를 그대로 프로그래밍하여 로봇을 통해 움직이게 해본 영상도 존재한다. 궁금하면 검색하길 권하겠다. 그러나 이걸 가리켜
인공생명이라 부르기는 조금 어렵다. 완전 그대로 구현한 것도 아니지만, 애초에 없는 생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 생명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예쁜꼬마선충’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조차 어려운데 어떻게 생명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명으로 시작해야 한다. 생명이 곧 자아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 수준의 생명을 만드는 것은 현재 과학으로 몹시 어렵다. 그러니 현재 인공지능에
몸을 구현하여 생명을 부여해줘 보는 것이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어떻게 하여 데이터수집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예상이지만, 그냥 모든 정보를 그대로
저장하는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사람의 수집방법으로 바꿔보자.
인공지능에 어떤 특정한 감각기관을 만들어 제한된 데이터를 수집에 가상 신경망에 입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눈을 만들어 제한된
이미지를 수집하게 하고, 귀를 만들어 제한된 소리를 수집하게 하고, 코를 만들어 가상의
향을 맡을 수 있게 하고, 입을 만들어 가상의 맛을 맡을 수 있게 하며, 피부를 만들어 가상의
촉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보자. 사람의 외부 입력을 구현해보는 것이다. (… 가능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 다음은 내부 입력이다. 그냥 몸 자체를 만들면 된다. 물론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어려우니 주요 기능만 구현해보자. 뉴런과 시냅스를 만들고, 내분비기관을 만들어보자. 그리고 신경전달세포나
신경조절세포를 만들고, 호르몬을 만들어 가상 신경망에 입력할 수 있게 해보자.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입력들을 변화시켜보자. 사람의 내부 입력을 구현해보는 것이다.
외부 입력으로 공간을 구현하고, 내부 입력으로 시간을
구현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시공간의 구현이 자아를 형성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사람의 자아가 수많은
입력으로 형성된 것이 분명하다면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5. 미래
오! 미래!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예상이 있을 수 있지만 세 가지만
다뤄보겠다.
첫째, 영혼
아, 내겐 글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맙고 기쁘다. 이 글을 읽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써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우러나오는 선심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누구나 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동설에 대한 주장이 나왔을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나도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여기까지만 말했어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리라 생각한다. 천동설을 믿고 있던
사람들은 지동성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쉽게 적응했을지도 모르지만, 끝끝내 인정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어떤 일종의
조롱을 받았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며, 그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니 명확한 진실조차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런 현상은 우리 시대에 한번 더 나올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영혼을 굳게 믿고 있던
사람들은 인공적인 무언가가 자아를 가지게 될 때 어떤 감정과 생각,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아아! 그때부터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으니 아마도 비슷한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이봐! 여기 컴퓨터에도 영혼이 들어있어!”라며 영혼을 믿었던
사람들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 조롱은 아마 내가 쓴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정도로 잔인하고 난폭한 어조로 구성될 것이다. 그걸 웃으며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영혼이 필수불가결인 사람들에게마저 영혼을 부정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아니할 때엔 누군가 영혼의 존재여부에 대해 물어본다면 겸손한 목소리로 잘 모르겠다, 또는 생각해보겠다 등으로
말할 것을 제안해본다. 그래야 언젠가 인공적인 무언가가 자아를 가지게 될 때 그 패러다임을 유연하게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동물
어쩌면 나는 동물이 먼저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요컨대 인공생명을 만드는
쪽보다 이쪽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동물들도 수많은 입력(내부, 외부)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뇌의 지능 수준이
낮기 때문에 사고영역이 좁아 대부분의 입력들이 사고영역을 거치지 않고 몸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본능적인 움직임이
주로 나타난다. 그런데 만약 그들의 지능을 높여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입력은 비슷하다. 그 입력을 제어할 지능만 높인다면 아마도 그들은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윤리적인 관점에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애완동물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를 통해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고양이나 개가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구강구조가 달라 사람처럼 똑같이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지능이 높아진다면 후천적 언어를 습득하여 그들의
울음소리를 언어화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언어를 번역하는 도구만 있으면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그 시대가 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에 여러분들은 그런 시대가 오면 어떻게 적응할지 상상이나 되는가? 고양이나 개가 사람의 일하여 월급을 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물론 그 일은 매우 단순할 테지만, 뭐 어떠한가? 하하하 ‘이 고양이는 지성을 가진 고양이입니다.’라며 고양이 신분증을 발급해주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들은 정말로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 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고양이 학교가 생길지도 모르고, 고양이 회사가 생길지도 모른다. 너무 과장한다고? 뭐 어떤가 상상인데.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가져 지성을
얻게 된다면 사람을 흉내 낼 것이 분명하므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갑자기 떠오른 건데, 정말 이종간의 연애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봤다. 왜 이렇게 웃기지 아하하 적어도 지금 이상의 관계를
구축할 것은 분명하다. 애완이 아닌 친구로 격상하여 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나타날 것이다. 말이 통하니 자연스럽게 대등한 관계로 대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종간 결혼 합법화 주장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고양이 신부! 뭐 이러냐! 하하하
물론 그냥 우스개 소리다. 그러나 만약에 동물들의 지능이 높아져 자아를 갖게
된다면,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셋째, 인격
나는 예전 글에서 자아를 갖추게 될 인공생명의 식사를 ‘사람을 위해 봉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야 동물과 식물의 관계처럼 서로가 win win이 되어 싸우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건 분명 잔혹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간 수준의 자아를 갖춘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사람과 인공생명을 저울질 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래서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자아를 가진 인공적인 무언가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파멸시킬 거란 두려움은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감정과 욕구가 자아를 구성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사랑이나 동정심이 없을 리가 없다. 흔히 판타지에서 후천적
언어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몬스터들이 생각 없이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후천적 언어의 사용은 사고영역을 넓혀주고, 넓어진 사고영역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주게 되어있다. 자아를 가지게 될 그들이
생각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물론 판타지니까 설정으로 집어넣으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현실 속에 있는
존재라면… 그들은 반드시 욕구나 감정들을 고차원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중에 ‘자아’라는 소재로 다시 한번 정리해보겠다.
---
정말이지, 쓰면 쓸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네요. 좀 더, 좀 더 책을 읽거나
세상의 지식을 접하고 생각하고 싶어져요. 물론… 당장의 생산성은 없는 일입니다만 뭐 어쩌겠어요. 내부의 여론이 이걸
하고 싶어하는걸요. 하하… ///
예전에 이용하는 eBook에서 세계명작들을 할인할 때, 저렴한 가격에 구해놓은
적이 있어요. 그 덕에 최근 죄와 벌을 읽어볼 수 있었지요. 읽던 도중 인상 깊은 문구가 있네요. 배경은 다음과 같아요. 사람L이 철저한 무개성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지식인들과의 논쟁에 격분합니다. 취한 상태에서 그들과 헤어진 이후 옆에 있던 사람B와 사람D에게 토로합니다.
[…… 거짓말을 하다 보면
진리에 도달하게 되리라! 나는 거짓말을 하므로 사람이노라. 인간은 단 한가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열네 번, 어쩌면 114번의 거짓 이론들을 생산해 내야 할 겁니다. 그러므로 그런 거짓말은
그 나름대로 명예로운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거짓말마저도 자기 머리로는 지어낼 줄 모른단 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되, 자기 생각을 가지고서
거짓말을 하란 말입니다. 그럼, 뽀뽀라도 해주겠어요.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한 가지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
아, 이건 거짓이 좋다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생각하길 바라는
거죠.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거짓말조차 좋다고 할까요? 이 말을 들은 사람D가 일부 동의한다고
하자, 사람L은 환희에 휩싸여서 무릎을 꿇고는 사람D와 사람 B의 손에 입을 맞추게 됩니다. 그 감정이 생생히 전달돼
느껴져요.
도스토예프스키, 대단하네요. 정말 재미있어요. 읽다 보면 느끼는 게, 그때랑 지금이랑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형태는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바뀌지 않았어요. 뭐 사람이 변하지 않았으니 당연할까요?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유전자발현 때문에 조금씩 변하기는 한다지만, 염기서열은 바뀌지 않아 본질은 같으니까요.
그럼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 소재는 다음주에 쓰도록
할게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 인터넷 (사전 포함)
검색어 [유전자][자아][뇌][세포][뉴런][시냅스][신경전달세포][신경아교세포][호르몬][피부 신경세포][반사][문자 교육] [뇌 90%] [상상 친구] 등.
- 죄수번호-G890347
- 2018/05/20 PM 06:56
- 테케니스트
- 2018/05/20 PM 07:21
인간이 가진 의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유가 여러모로 의미가 달라져서 내 의식은 디지털 상으로 구현되어서 손톱만한 칩에 들어간 데이터가 나를 구성하는 근본인 자아이자 인격, 기억인 시대가 올걸로 보고 있습니다.
(뇌 리버스 엔지니어링 기술이 점점 가속화 되고 있고 계산상 인간 뇌 연산력 1페타 플롭스(ps4 500배)를 온전히 에뮬레이팅 하기 위해
넉넉하게 1000배 정도(1페타 플롭스)의 성능이 필요할 걸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최고 슈퍼 컴퓨터 중국 텐허2 성능이 30페타플롭스이고 2029년에 뇌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기본적으로 완료되고 1000페타 플롭스 정도의 슈퍼컴퓨터가 제작 될 것으로 예상)
인간을 진화적 관점에서 볼때 특별히 영혼이 있거나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고 단순한 병렬구조의 뉴런이 점점 모이고 복잡해지고 어느 레벨 이상 되면 저절로 자아의식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요.
특이점 이후에 분자 3d프린터로 사실상 제한없이 원하는 거의 모든 제품이 출력 가능해 지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맞춤으로 현재의 유기체 방식의 육체로 출력하거나 보다 튼튼한 로봇으로 출력해서 우주에서도 작업복 없이 살수 있을거로 보고 있습니다.
지극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는 부분이지만 앞으로 특이점 이후 인격이다 자아의 경계등이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도래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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