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현상, 사물을 보는 시작2018.11.04 PM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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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사물을 보는 시작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은 상당히 괴로운 일입니다. 나약하고, 초라하고, 무책임한, 그런 모습이 부끄러워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낯뜨거운 일이지요. 하지만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는 종종 필요하기도 합니다. 더불어 나는 괜찮아’ ‘나는 누구보다 나아같은 자기합리화는 마음의 청량제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이건 특별히 저만의 일은 아닙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그걸 깨닫게 됩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상대의 결점이 공개된 순간, 그 상대는 자신의 결점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의 결점을 먼저 지적합니다. 마치 고슴도치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럴 때엔 먼저 나는 너의 결점을 문제 삼아 공격할 의사가 없다라고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나는 너의 적이 아니다.’ 그걸 전달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웃으며 대화가 가능하더군요.

 

논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적대의사가 없다는 것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말이더라도 적대관계가 성립된 순간 부정적으로 전달됩니다. 반면 조금 엉성한 말이더라도 친근한 사이라면 긍정적으로 전달됩니다. 특히 불편한 주제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적이 아니다’, ‘이익이 되는 이야기다.’ 이걸 분명하게 전달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해지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욕을 하더라도 비꼬더라도 비웃더라도, 대화를 하고자 할 때엔 그걸 굳이 지적하진 않습니다. 그러한 결점을 지적하는 순간 적대관계가 성립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기 어렵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이것이야말로 사물을 볼 때 가장 크게 방해가 되는 요소기 때문입니다. ,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예시를 들기 조금 까다롭네요. 그래도 필요하니까 말해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불평불만을 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원인을 지적하면 놀란 듯이 거부합니다.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죠.

 

어떤 사람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가정하죠. 그렇다면 왜 비리를 저질렀을까요? 그건 돈을 위해섭니다. 돈을 위해서 양심을 팔았지요. 그리고 양심을 팔았던 이유는 우리사회가 금전만능주의로 물들여있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위해 비리를 저지른 것이지요. 간단하죠? 비리를 저지른 나쁜 새끼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욕을 합니다.

 

이렇게 비리사건을 보고 욕을 하지만, 그 원인이 되었던 금전만능주의를 나쁘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없어합니다. 반발합니다. 자본주의사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하는 건 약과입니다. 사람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하거나 심지어 돈을 위해서라면 범죄도 저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인터넷 잡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기사에 따르면 실제 설문조사에서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도 갈 수 있다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돈과 옥살이 기간을 연봉으로 계산해보니 감옥 갈만 하다.’

 

놀랄만한 일이지요. 그 생각엔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어떤 죄책감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죄의 무게보다 돈의 무게가 더 무겁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건 우리 사회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수십억 해먹은 사기꾼이 돈 숨겨놓고 옥살이 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걸 비꼬기 위해서 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어쨌든 물질거래 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필요한데, 그걸 돈이 맡고 있을 뿐이니 돈 자체가 나쁠 리가 없지요.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걸 다루는 사람들이 문제지요. 이걸 보세요. 우리 사회를 꿀꿀하게 만드는 주 원인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 아닙니까? 고위직은 돈을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고, 대기업은 돈을 위해서 하청업체를 착취하고, 사장들은 돈을 위해서 사원들을 착취합니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건비를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두루두루 살펴보세요.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돈을 사람보다 더 높게 쳤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이렇듯 금전만능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손해가 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아드려 하기 어려워합니다. 이걸 받아드리면 돈을 매우 중요시 했던 스스로를 직시하고 인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알 수 있음에도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외면하여 알기 어렵다는 것,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할게요.

 

그 전에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정리해보죠.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물을 제대로 보기 어려워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스스로의 결점을 직시하고 인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 또한 어렵기도 하고, 때론 외면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본 주제는 사물을 보는 순서이지, 자아성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결점이 눈을 가려서 사물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면 그 부분을 제외하고 사물을 보면 됩니다. , ‘를 빼고 사물을 본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자, 그 이야기입니다. 매번 하는 이야기지요.

 

 

이제 주제에 도달했습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현상을 보면 됩니다. 스스로의 손익, 편견, 가치관, 사상, 취향 다 접어두고 현상 자체를 봅니다. 어떤 현상도 가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때론 손해가 되는 것도 그대로 그냥 바라보면 됩니다. ‘가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걸 의미합니다.

 

예시 하나를 들어볼게요. 시간이 없으니까 빠르게 갑니다.

 

사람A가 인터넷에 불행을 호소했더니 많은 사람이 기부를 통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A의 말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럴 때 어떤 사람은 사람A를 보며 사람은 본디 나쁜 것이 틀림없다며 탄식합니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지요. 그건 사람A의 불행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기부한 수많은 사람들을 빼놓고 이야기한 겁니다. 확증편향이라고 하는데, 평소에 사람이 나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은 자신의 편견이 사물을 보는데 방해가 되어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건을 볼 때엔 현상 전부를 봐야 하지요.

 

첫째, 사람A의 불행을 보고 안타까워 기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둘째, 사람A는 거짓말을 통해 부당이익을 취했다.

 

이 외에도 이런 사건을 보고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까지 모든 현상을 바라보고 받아드리면 사물을 보기 쉬워집니다.

 

 

, 하나 더, 최근에 있던 사건 중 하나입니다.

 

손님이 피자 집에 특정 토핑을 좀 더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걸 듣고 피자 집에서는 그 특정 토핑을 피자 전체에 도배하듯이 엄청 많이뿌려서 배달해주었습니다. 그걸 보고 난 손님은 놀라 못 먹겠다며 환불을 요청합니다. 그 요청을 들은 피자 집은 웃으며 원한대로 해준 거니 환불이 안 된다며 거절했습니다.

 

이 사건은 누구의 잘못일까요?

 

그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손님이 문제다, 피자집이 문제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오갔지요.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자신의 입장에 대입해본다는 점입니다.

 

나라면 원했던 토핑이 많이 왔으니 오히려 좋다며 먹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손님이 진상 짓을 한 것이다.’

토핑을 많이 주면 피자집이 손해가 크므로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손님이 진상 짓을 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추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추측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취향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물질가치 중시를 중심으로 추측한 것입니다. 현상을 보는데 방해가 되는 가 포함되어 있지요. 그럼 를 제외하고 보겠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 사건은 특정 토핑을 좀 더달라는 고객의 요청을 듣고 엄청 많이로 대응하여 손님의 불만을 산 사건입니다. 거기에는 의 취향이나 의 가치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결국 주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객의 요청사항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고객의 불만을 만든 피자 집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사건은 크게 세가지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추가 비용 없이 추가 토핑을 좀 더 요청한 고객

그러나 이건 피자 집에서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거절하면 될 문제입니다.

 

둘째, ‘좀 더달라는 고객의 요청에 엄청 많이로 대응한 피자집

좀 더라는 말을 모르지 않는 이상 일부로 그랬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설령 악의가 아니더라도 정확하게 대응하지 않는 피자 집의 잘못이 좀 더 크지요.

 

셋째, 사물을 바라볼 때 자신의 입장을 대입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보통 그걸 감정이입이라고 하던가요? 정확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데, 이런 추측도 필요한 일입니다만, 사물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잠시 분리할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감성도 이성도 전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현상을 바라볼 때엔 전부 봐야 하니까요.

 

 

이 외에 다른 많은 사건들이 있는데 나중에 하나씩 정리해서 바라보도록 해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를 제외하고 최대한 많은 현상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작입니다. 그 뒤에서야 가 등장합니다. 사물을 제대로 보고 난 뒤에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걸 이용해 정론을 만들어낸다거나 논리적인 약점을 없앤다거나 하는 것은 사물을 제대로 본 뒤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은 사물을 보는 시작인 현상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다음에는 그걸 사용하는 법에 대해 써보도록 해보겠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아 참, 이건 결국 제 생각일 뿐입니다. 단지 저는 이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도 있음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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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미루니까 쭉쭉 밀리네요. 일주일에 하나씩은 써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오늘도 결국 일요일에서야 쓰게 됐네요. 일요일 저녁 7, 뭐라도 써야 이 간극을 넘을 수 있을 거 같아 적당히 씁니다. 개인적으로 소년법이나 유죄추정시위에 대해서 써보고 싶네요.

 

그리고

 

한번 비틀린 인생도 바로잡기 어렵군요. 저는 지금 바로 잡고 있는 중이라 누군가의 일생이 비틀리기 전에 도와주고 싶네요. 여러분들은 올곧기를 바랍니다. 좀 추상적입니다만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럼 또.

댓글 : 5 개
현상을 봐야 하는데 토핑이 왜 엄청 많다는 주관이 끼어들어 있는 것이죠?
좀 더 라는 기준이 객관화된 기준인가요?
그 좀 더 라는 기준을 누가 정했을까요?

현상만 보자면 좀더 달라는 주문을 받고 좀 더 줬을 뿐입니다.

즉 그 수량에 대한 개념에 '나'를 빼놓지 못하고 있는거죠.
왜 일부러 그랬다고 밖에 볼 수 없나요??

그 추가주문을 받아든 입장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선심일 가능성이 1%도 없나요?
'나'는 언제 지우시게요??

좀 더라는 것에 정확한 대응은 무엇일까요?
좀 더를 객관화된 수치로 g단위로 물어 봤어야 할까요?
아니면 주문자가 좀 더라는 비객관적 수치가 아니라 기본에서 몇배라는 객관적 단서를 달았어야 했을까요?

정확한 주문을 하지 않은것이 잘 못일까요?
아님 정확히 주문을 받지 못한것이 잘못일까요?

보통 '나'를 지운다면 이런식의 의문이 떠올라야죠.


그리고 그것은 그 어떠한 해결책도 아닐뿐더러 본질을 보는 수단 또한 아니구요.
아뇨... 토핑이 많다는 건 그 글에 담긴 사진을 봤을 때 알 수 있는 부분이었어요.
엄청 많았거든요. 그건 사진을 첨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라, 그 점을 쓰지 않은 점 죄송해요.
그것도 어쩌면 주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보편적인 개념으로 볼 때 '좀 더'라는 건 본래 주는 양의 배를 넘어선 건 아니겠지요.
수배는 넘어 보였거든요.
글 읽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의도에 대한 해석은 주관이 들어갈 수 밖에 없어요.
결국 '좀 더'로 모든 판단을 해야 하는데, 그건 사진..의 문제로 어쩔 수 없었네요.
정확한 대응이라... 말씀하신 대로 객관적인 수치를 묻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보통
'좀 더' 라는 건 100을 주면 110 정도, 주는 걸 가리켜 좀 더 라고 하지, 100주던 걸 200, 300주는 걸 '좀 더' 라고 하지 않아요.
'좀 더'에 사전적 정의가 있는 만큼 객관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네요.
그러므로 그건 정확한 주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돼요.
'나'를 지우고 객관적으로 본다는 건 수치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건만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념이나 개념들도 포함되는 거죠
예를 들어 시험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중간 정도 성적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떤 걸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요?
가장 객관적인 것은 분명 수치일지도 모릅니다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을 본다는 것은
그러한 수치 이외에 것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뭐 결국 이것은 제 생각에 불과합니다. 댓글을 달아주셔서 제 글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질이 무엇일까요? 저는 객관적으로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해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선 '나'를 지워야 한다고 말했던 거구요.

예를 들어 '사람A이 복수를 위해 사람을 죽였다.' 라는 사건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사람A와 관계되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감정 이입이 되어 '복수'에 초점을 맞추겠죠.
어떤 사람은 냉철하게 '사람이 죽었다' 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요.

이 외에도 다양한 시각들이 있겠지요. 여기서 사물을 제대로 본다는 건 '나'의 주관적인 해석을 빼고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다 봐야 한다는 걸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복수'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살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봐야만 사물을 제대로 본다, 본질을 본다고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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