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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정제어, 인격2019.09.23 AM 06:29
감정제어, 인격
시작하기 전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미운 상대의 불행을 보며 만족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습니까? 왜 미워하고, 왜 만족하는지. 그러한 감정에 의문을 한 번 품어볼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있어 감정은 물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고, 미세하게 구분할 수도 없지요. 우러나오는 감정을 관찰하여 깨닫는 것일 뿐입니다. ‘아, 내가 지금 기뻐하고 있구나.’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갑작스럽게 기쁠 때도 있고, 갑작스럽게 슬플 때도 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 속에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지요. 이렇게 감정은 의식적으로 표출하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행하는 감정을 가리켜 위선이나 위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일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행하더라도
효과가 나타나곤 합니다. 의식적인 행동이 세포에 영향을 끼쳐 다시금 결과로 나타나는 거지요.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학교나 군대에서 억지로 칭찬하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곤 합니다. 그걸 보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더라고요. 단지 위선 같음을 느껴 불만을 느낄 뿐입니다.
이러한 행태를 보며 현행교육에 다소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제어를 강요하거나, 감정제어를 위선으로 느끼는 걸 보면, 자기감정제어의 필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정제어는 강요할 필요도 없고, 위선으로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를 제어하는 건, 인간이 자신의 모든 세포를 통제할 수 없는 한, 꼭 필요합니다. 특히 인간관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악의라고 불리는
감정들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선의도 제어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악의는 대체로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미움 분노 증오 공포 질투 괴롭힘(사디스트) 지배욕 따위의 감정들은 제어되지 않으면 사회의 죄로
이어지곤 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분노하는 청소년 범죄들은 거의 다
이러한 악의로 일어났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청소년의 흉악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분노합니다. 그리고 그런 청소년들을 보호해주는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판사의 말을 들어보면 청소년 범죄의 1%정도만 흉악범죄라고 합니다. 대부분 빈곤범죄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판사들은 개정이나 폐지보다는 유지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청소년의 빈곤범죄는 사회체계의 허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사회의 책임이지요. 그러나 1%라도, 그러한 청소년을 보호해주는 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악용 때문에 희생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판사의 말도, 소년법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의 말도 수긍이
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둘이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감정제어라고 생각합니다.
소년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보통 일벌백계를
바란다고 봅니다. 강력한 징벌로 청소년들에게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바라는 만큼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흉악범죄 비율이 낮은 것 때문에 빈곤범죄라는 사회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지우는 결과로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작은 비율의 흉악범죄도 비슷합니다. 한가지 예시를 들어보지요. 작은 범죄도 가혹한 형벌을 행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줄어드는 걸까요? 다소 영향은 있을지 몰라도, 그리 큰 영향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혼란해진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범죄와 형벌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작은 범죄로 끝날 것이 큰 범죄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작은 범죄나 큰 범죄나, 가할 수 있는 형벌이 가혹해질수록 비슷해지므로 큰
범죄로 이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법조인들이 이러한 형태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이 있더라도 유지를 하는 거지요. 법조인은 정의를 위한 집단이 아닙니다. 질서를 유지하는 집단이지요. 감정적으로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 싶더라도,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므로, 형법에 맞게 형벌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낱 범죄자의 처벌보다 사회질서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방법으로 소년범죄를 줄일 방안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감정제어입니다. 일벌백계를 하기 전에 애초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자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단순히 선의를 강제로 권하고 악의를 강제로 막습니다. 성의 있는 교육자는 그 이유에 대해 성심껏 알려주기도 합니다만, 그 감정 자체를 제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는 드뭅니다. 애초에 그런 교육과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식을 쌓게 하고 지식을 활용하게 하는 것에 치중된
나머지 인간을 고찰하고 제어하는 것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겪고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악의로부터 비롯된다.’ 보통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악의만 제어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정의구현을 통해 악당이 불행을 맞이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정의가 구현되었기 때문에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악의입니다. 인간의 불행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악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정의가 구현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악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위해 죄를 지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일까요? 악의일까요? 얼핏 보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악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이럴 때 느끼는 만족감은 선의입니다. 소중한 이의 행복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선의라는 겁니다. 단지 사회적 측면에서 죄가 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당한 선의충족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세포가 받아드리는 감정의 만족감은
사회적 올바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통은 인간의 악의가 죄를 부르기 때문에 악의를 중심으로 해도 무관합니다만, 선의가 부르는 죄를 경계하기 위해 되도록 모든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보통 공교육에서는 감정제어를 알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잘 모르지만, 아마 별다를 바 없겠지요. 더구나 청소년 범죄가 그대로인 걸 보면 과거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그러나 감정제어는 누구나 다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려고 애를 씁니다. 선의가 부르는 오해를 막기 위해 친절을 베풀고 싶은 충동을 참거나 악의가 부르는 죄를
막기 위해 화내고 싶은 충동을 참습니다. 화를 삭인다고 하지요. 그걸로 나타나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좋은 방법으로 취미를 통해 해소하거나, 나쁜 방법으로 만만한 상대에게 해소하거나 하지요.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여기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공교육으로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제어하는 건, 성장해도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학습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지 좀 더 교묘하거나 그런 행동을 자기합리화 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게 되면 변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태로 인해 감정제어방법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은
커지지만, 이러한 상황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그 행동을
하지 말라고만 합니다. 결과가 나쁘니까 결과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원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찮아서 일까요? 아니면 그저 관성에 의해 학습된 대로만 행동하기 때문일까요? 더 큰 문제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되는 취미를 악으로 여기며 무조건 막으려고만 하기도 한다는
겁니다. 사실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건, 단순히 스트레스만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되려 스트레스를 쌓아가며 즐기는 취미도 있지요. 인내를 필요로 하는 취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즐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더 큰 보상을 얻기 위해 즐기는 걸까요? 그렇다면 웃기 위해 즐기는 취미. 울기 위해 즐기는 취미. 화내기 위해 즐기는 취미. 무서워하기 위해 즐기는 취미들은 무엇일까요?
모든 취미는 인간의 감정이나 욕구 등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감정이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쌓이는 스트레스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취미지요. 감정과 욕구의 충족이 만족감을 느끼게 만들어 기분이 좋아짐에 따라 취미를 즐기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인간이 취미를 즐기는
것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제어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어, 그걸로 자신을 제어하게끔 이끄는 것이 올바를 겁니다.
이러한 감정제어방법이 교육을 통한 체계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게임 중 욕설이나 비아냥 따위가 있겠습니다. 취미는 분명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면 본말전도가 되어버리게 되겠지요. 이러한 본말전도가 바로 감정제어방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하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또한 선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의를 위해 기부나 봉사를 하지만, 제어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선의는 종종 악용되기도 합니다. 사기꾼이 기부를 받아 사리사욕을 채우는가 하면, 기부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바로 감정제어를 못하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좀 더 체계적인 감정제어방법을 알려줄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왕따와 괴롭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시아권만이 아닌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볼 때, 단순히 문화적 측면에서 발생하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마 보통 악의에서 비롯될 겁니다. 타인을 괴롭히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다는 이야기에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약간 형태만 다를 뿐, 모든 인간(결핍되지 않는 한)은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낍니다. 단지 그것이 정당한 악의충족이냐, 아니냐 일뿐 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의구현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또한 악의를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 내 사건들도 체계적인 감정제어를
통해 방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하고 싶은 충동도 교육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게끔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육은 어떠했습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만 합니다. 왜? 다른 아이의 상처를 입으니까. 그렇게 그냥 막기만 하고 끝이 납니다. 그런다고 아이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인데, 그냥 막기만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감정 욕구가 해소되질 않으니까 충동에 이기지 못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이런 걸 생각할 때마다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간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걸까요? 아니면 교육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는 고지식함 때문일까요?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은 충동, 누군가를 욕하고 싶은 충동 자체가 나쁘다고 교육하면
안됩니다. 그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나쁘다고 교육을 해야지요. 인간의 악의 자체를 나쁘다고 교육하는 건, 인간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밖에 되질 않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한 충동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악으로 낙인 찍어버리면 어떻게 하나요. 그러면 모든 인간이 악인이 되어버릴 테죠. 그러면 어차피 악인이니까 선행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악의를, 자신의 감정을 제어해야 하는 걸까요?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이미 하고 있으니까 잘 모르고 있던 것뿐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취미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처럼 어떤 의식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처럼 강제로 권하지는 말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유도하게끔 해야 합니다. 웃음 박수나 칭찬 노트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감정을
제어해야 할 필요성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악의를 제어할 필요성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필요성은 인간을 고찰했다기 보다, 억지로 웃더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현상을 보고 본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악의의 경우엔 개그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생들이 개그를 통해 비웃음을 당하고 비웃음을
하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진지하게 개그 과목을 하나 개설해서 악의를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개그라는 일종의 문화를 통해 누군가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으로 정신력을 강화하고,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악의를 제어하는 수업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교육을 통해 자신의 악의를 제어할 수 있다면, 어떠한 도덕교육보다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낼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주입식으로 학습하여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도덕보다, 자신이 실제 경험하면서 악의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수행평가나 시험도 그러하지요. 사람을 웃기는 것. 그걸 해낼 수 있으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됩니다. 단지 선을 넘지 않도록 유도해야겠지요. 저는 모든 아이들이 개그의 기본소양을 익히게 되면, 악의를 제어할 수 있게 되어 학교범죄가 상당히 줄어
들을 거라 확신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입니다.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약함. 그걸 강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교육이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외우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할 거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그걸 미리 교육받아놓으면, 평생 덕을 받아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사전적 정의로 사람의 인격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고, 사람의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라 합니다. 저는 복잡할 것 없이 자기제어능력의 정도에 따라
인격을 평가합니다. 자기제어능력을 통해 감정과 욕구를 제어하여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타고난 성품이 어떠한들 우수한 인격이라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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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을 마음대로 선동했었다는 교만함은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한 오만함일 뿐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인간의 상처를 이용해왔을 뿐입니다. 가여운 사람들.
그럼 또
- 태극권지니
- 2019/09/23 AM 10:32
부처님정도 되어야 가능하죠.
감정은 사고 체계의 무의식에 가까운 습관입니다.
어릴때 뇌가 발달하면서 그때 각인된 사고 체계입니다.
그걸 콘트롤 하려면 자신의 호흡을 콘트롤 하는 것만큼 힘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려해도 무의식중에
하는 호흡을 인식하며 호흡하기도 힘들듯이 감정을 자신의 사고체계를 스스로 알기조차도 힘들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콘트롤 하도록 한다는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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