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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민주적 관점, 여성주의의 피해자2019.10.20 PM 11:21
민주적 관점, 여성주의의 피해자
사법의 판결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곤 합니다. 보통 소년범, 흉악범, 사기꾼, 기득권 같은 부류들의 형량이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에서
하곤 합니다. 주로 소년범이나 흉악범은 형량이 적다는 이유로 분개하며
항의를 하고 사기꾼이나 기득권은 유전무죄라며 씁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자조하곤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 우리나라의 비겁한 단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약 사법이 법에 의거해 정당한 판결을
내렸다면, 그것이 설령 사회적 정의(법감정라 불리는)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를 위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관이 자신의 사적 정의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리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법치주의의 몰락을 가져올 겁니다.
동물보호협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은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인 사람들입니다. 최근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린 돼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돼지를 훔치거나 죽어가는 돼지를 흉내 내는 공연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피해를 입더라도,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인 겁니다. 저는 세상의 많은 정의들을 존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 정의의 근간에는 인간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위하지 않는 사상, 인간을 위하지 않는 정의로 어찌 인간들에게 존중
받으려 하는 건지, 뻔뻔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약 법관이 이들의 정의에 공감하여 이들의 범법
행위에 이로운 판결을 내린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외에 다양한 정의들, 이기주의나 혐오, 증오 따위를 올바른 것인 마냥 예쁘게 포장하여 정의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정의에 부합하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미 경험했으니까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공정한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따라서 사법은 특정 누군가의 정의를 구현하는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법에 의거한 공정한 판결이 사법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외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정의를 구현하는 걸까요? 사법은 만들어진 법에 의해 판결을 내립니다. 간단히 말해 입법에 의해 같은 사건이라도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건 입법에 속하는 국회의원의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선출하는 건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입니다. 따라서 정의를 구현하는 건 결국 국민들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그러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와 국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정치는 이용하는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해석을 낳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어떤 정치체재라도 일반 국민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재체제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그 힘은
국민들로부터 나옵니다. 설령 무소불위의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백성이 따르지 아니하고 혁명에 참여하면, 그 왕은 국민의 감정에 의해 처리될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국민들을 선동하거나 회유하거나 탄압하거나 괴롭히는 겁니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눈치채지 못하게 당근과 채찍으로 강압하는 것이지요. 때로는 없는 죄를 만들어가면서까지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권력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는 간첩몰이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개중에선 진짜가 있겠지만 없는 경우도 많았겠지요. 죄 없는 많은 이들이 고통 받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대외적으로는 진짜 간첩을 잡은 것마냥 떠들어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방관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들이 이용당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진짜 간첩에 대한 공포로 진짜든 가짜든 선동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공포, 그리고 분노. 그러한 감정들이 이용당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렇게 이런 현상을 바라볼 때, 이용하는 자의 이념이나 선동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렇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정치적 혁명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에게 권력이 있으니 국민의 입장에서 정치를 본다. 즉 민주적인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면 정치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통해 정치적인 관계가 성립되고, 이후 다른 방식으로 감정이 형성되면, 그 감정을 통해 또 다른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정권이 교체됩니다. 정치의 본질은 사람의 감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일반 국민들, 일반적으로 기득권에게 이용당해왔던 국민들의 감정을
살펴보면 어째서 이용당해왔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 좀 더 올바른 길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보다 젊은 정권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과 신하, 백성의 관계는 충성과 복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충성과 복종은 기나긴 세월 속에 주입된 혈통주의적
서열이 만들어냈습니다. 종교와 신자의 관계는 신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기나긴 세월 속에 주입된 신앙주의가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감정으로 정치적인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들의 부당한 행동으로 인해 차곡차곡
쌓인 분노를 통해 또 다른 정치세력, 즉 혁명의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본래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의해 왕정이 폐지될 운명을 맞이하나 싶었으나, 자본주의로 형성된 제국주의의 발호로 인해 나타난 일제침략으로 그 정치세력이 항일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정치이념을 정립한 국가와는 다른 정치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이러한 혈통주의적 서열이나 신앙주의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거짓된 것임이 증명되어 사상의 종말을 불러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혈통주의적 서열은 유전자와 환경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혈통만으로 결정되는 것임이 아님과 동시에, 일부 혈통만이 우수하다고 할 정도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혈통주의적 서열은 지식인들에게 비웃음을 사 사상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이 부유함에 취해 부모의 능력도 자신의
것인 것 마냥 행세하는 일종의 혈통주의적 서열을 정당화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은 그러한 기득권적인 노화가 다양한 억지논리를
통해 정당화되고 있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늙은 국가로 일직선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주의는 옛 종교가 과거와 미래를 알지 못하여
전지(모든 것을 앎)를 증명하지 못하였으므로 믿고 받들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사상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만 해도 20대의 70%가 종교를 믿지 아니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지금 종교에 빠진 국가들을 살펴보십시오. 지나치게 늙어서 옛 위인이 한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써 갈등이 빚어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후 정치의 흐름도 비슷합니다. 자본주의의 침략(일본)과 자본주의의 도움(미국)을 받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던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침략(북한과 중국)을 받게 됩니다. 이 침략은 민중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하여, 군사독재정부의 독립운동가 탄압을 방관하고 횡포에
순응하게 됩니다. 지난 군사독재정부의 슬픈 역사는 그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이용당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설령 선동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걸 몰랐던 민주주의자들은 민족을 위해 북한과 화합을 시도하다 정치적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걸 이번에도 해보다가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는 민족에 흔들려 독재자의 본질을 잊은 대가입니다. 이러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지금 일어나는 정치적
현상과 함께, 미래에 있을 정치적 현상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정치가 기득권에 반발하며 변화할 수 있는
까닭은 그걸 지탱하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군사독재정부의 피해자들입니다. 이들이 아니라면 그 어떤 정치인이더라도 지금의 지지율을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 북한과의 관계도 엉망인 상황에서 지지율이 유지되는 건, 그간 군사독재정부와 그를 이었던 정당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피해자들에게 자리잡아 정치세력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기득권이 무슨 짓을 해도 일정 이상의 지지율이 유지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감정을 우습게 본 대가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치세력의 연령에 의해 대세가 결정되었습니다. 기존 정치세력인 공산주의 침략의 피해자들로 형성된
정치세력은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었지요. 자본과 종교가 아니면 세력을 유지하기도 벅찬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흐름을 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정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도 언제까지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피해자는 군사독재의 피해자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더욱 더 심각한 문제기
때문입니다. 설령 독재하고 부패하더라도 전쟁의 원인이 된 자들에게
강경대응 하는 쪽을 택합니다.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의 피해자도 전쟁의 피해자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이 피부에 좀 더 와 닿는 것은 군사독재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원인이 된 자들과 화합을 하더라도 반독재, 반부패를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서로의 몰이해는 막 형성되기 시작한 정치세력인
성별 역차별의 피해자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성주의의 이기주의로 인한 피해자들이 분노하는 것을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워할지도 모릅니다. 군사독재와 성별 역차별 문제의 피해 정도를 놓고 봤을 때엔 어느 쪽이 더 심각한지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를 비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피해의식은, 사람의 감정은 철저하게 주관적입니다.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이 바라봤을 때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라고 하더라도, 지금 그 피해를 직접 겪는 이들에겐 크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그걸 똑같이 전쟁의 피해자들이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가 공정을 바라고, 평등을 바라는 것은 이러한 사상적 불평등과 함께, 그걸 용인하는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불만을 가볍다 여기며 사소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들의 불만을 이용할 부당한 정치세력의 발호를 방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단 말입니다! 간첩몰이를 통해 단맛을 봤던 부당한 권력층이 다시 한번 성별 불평등을 통해 단맛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좀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성별불평등보다 군사독재정부의 피해자의 세력이
더 크므로, 맹목적인 지지가 적게 나타납니다만, 시간이 흐르면 달라질 겁니다. 공산주의의 피해자에서 군사독재의 피해자로 이어졌듯이, 성별역차별의 피해자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겁니다.
과거를 보면 현재를 알 수 있고, 현재를 알면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정치흐름을 외면한다면, 한국은 다시 한번 어둠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미국의 자국주의, 중국의 지배주의, 일본의 노화, 북한의 투정으로 국제사회가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갈등은 국민에게 주권이 부여된 이상
필연이지만, 최대한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나은 방안을 마련하여 가능한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려야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제발 좀 부당한 권력층을 좀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간첩몰이 지겹지 않았습니까? 또 반복할 겁니까? 보기 싫다면, 부디 북한과 성별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하길 바랍니다.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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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를 쓰는 것, 쓴 이야기를 또 쓰는 것, 의욕이 저하되네요. 뭐 반복해야 발전하는 건가,
사람은 없는 걸 바란다고 하지요. 사랑, 정의, 존중, 평등, 아,
알면서도 견딜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아니까 밖에서는 표출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외롭네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용소군도라는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또 그럼
- I루시에드I
- 2019/10/20 PM 11:58
- 롸데꾸
- 2019/10/21 AM 05:32
즉 누군가를 지지하면 그 반대에 대한 의견을 표출할 수 있었죠.
하지만 성별에 따른 역차별은 그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평등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없습니다.
역차별은 곧 정치세력이고 머릿숫자이기 때문에 역차별을 지지하는 세력만이 있습니다.
즉 성별에 관한 문제는 앞선 예들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여야의 지지를 받고 있는 마당에 신중한 접근이 무엇이고 그 어떤 세력이 부당하지 않다는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스스로 신중한의 탈을 쓴 각자의 정의와 좌우논란만이 있을 뿐이죠.
그 누구하나 옳은 놈이 없는데 좌우가 무슨 소용이며 그 어떤 선택이 신중하단 말입니까.
대놓고 아무나 맹목적으로 지지해도 그 어떠한 신중한 선택보다 저열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신중한 선택도 그 누구보다 눈꼽 만치도 더 의미가 없습니다.
즉 신중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치 있는 선택지는 지금으로선 없는거죠.그저 자신들을 지지해야 신중한 선택지라는 사기꾼 정도가 있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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