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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초식화의 죄악2020.05.17 PM 11:58
초식화의 죄악
모든 본질은 간결하다. 인간의 유형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육식과 초식이다.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다. 침략을 하거나 평화를 누린다. 자유를 만끽하거나 통제를 수용한다. 경쟁에 뛰어들거나 안정을 취한다. 투쟁에 나서거나 복종을 받아드린다. 이를 이념으로 구분한다면 자유주의나 사회주의가 될
것이다. 서양에선 자유주의가 보수로 불리고 사회주의가 진보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 우파와 좌파라고도 부른다. 과거에는 극단으로 치우쳐 이념갈등이 극심했다. 그 극단이 냉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달라져 우파와 좌파의 가치가
많이 섞였다. 우파도 복지를 하고 좌파도 시장경쟁을 활성화시킨다. 그래도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구별은 가능하다. 이런 서양정치를 기준으로 한다면 현 야당인 한국당은
보수고 여당인 민주당은 진보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고 진보는 변화를 받아드린다. 이제껏 한국의 것을 지키자며 중국과 북한과 화합하려던 쪽은 민주당이고 서양의 것을 따르자며
미국과 일본과 화합하려던 쪽은 한국당이다. 사전적 정의만 따진다면 보수가 민주당이고 진보가 한국당이다. 쇄국과 개화, 동양과 서양. 한국정치는 관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가 달라진다. 그래서 헷갈린다.
한국은 최근 민주당의 선거승리로 사회주의 쪽으로
추가 기울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다. 민주당도 자유주의 정당으로 서양이념으로 따져도 중도 보수에 가깝다. 그래서 큰 틀의 변화는 없다. 단지 상대적으로 사회주의 쪽으로 기운다는 것이다. 복지정책이 보다 더 많이 추진되고 평등사상이 보다
더 많이 용인된다. 여성주의자, 채식주의자, 비폭력주의자와 같은 소수나 약자의 주장이 받아 드려져 그에 따른 정책이 추진되거나 법률이 제정된다. 평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안전을 위한 통제를
강화하고 노동자를 위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든다. 간결하게 말해 초식화가 진행된다.
한국은 자유주의 국가로 육식국가에 가깝다. 육식국가였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명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식화의 죄악을 경험했다. 동맹국의 요구에 민주주의를 위한 침략을 강행하고
노동자를 착취할 자유를 만끽하고 경쟁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고 의견이 다르면 투쟁했다. 죽이고 착취하고 찍어 누르고 투쟁한다. 지금 한국이 누리는 풍요는 강자의 뼈를 깎는 노력과 약자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린 첨탑이다. 그 첨탑에는 행복이 부족했다. 그래서 불완전하다. 자살률 최고수준, 출산율 최저수준. 이는 불행의 수치화다. 한국은 성장과 행복이 비례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완전 육식국가는 아니었다. 초식국가였던 조선의 피와 문화를 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평화를 누리며 통제를 수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은 늙은 초식국가였다. 그들의 문화를 이은 한국은 예와 효를 중시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한국만큼 치안이 좋은 국가가 어디 있던가? 그런데 초식국가의 결점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낮은 서열은 높은 서열에게 복종하게 만들었다. (육식의 복종과 초식의 복종은 다르다. 힘으로 복종하게 하느냐, 도덕으로 복종하게 하느냐) 그들과 경쟁할 수 없게, 투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무한경쟁사회임에도 관습으로 서열이 나뉘어 불평등하게
경쟁했다. 어른과 아이가 경쟁하기 어렵고 선배와 후배가 경쟁하기
어렵고 스승과 제자가 경쟁하기 어렵다. 아이가 어른 말을 거역할 수 있었는가? 경쟁이라 함은 상대방을 꺾고 넘어야 하는데 그걸 관습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었다는 거다. 능력과 관계없이 경쟁상대가 결정되어 그들끼리만 경쟁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이유로 왜곡된 유교를 숭상하던 과거
조선의 관습이 부른 폐해다. 삼강오륜에서 삼강은 원래 없던 것이라 하더라. 이런 이유로 한국은 문명은 육식인데 문화는 초식인 기묘한 사회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문명도 초식화가 시작되었다.
과거 한국이 경험한 육식화의 죄악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와 대비되는 초식화는 완전무결한 정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화, 평등, 안정. 무엇이 나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미 역사로 우리는 초식화의 죄악을 알고 있다. 조선은 타국을 침략하지 않은 선한 국가였다. 평화로운 국가였다. 하지만 약했다. 초식화의 죄악 중 하나는 사람을 약자로 만드는 것에
있다. A는 도덕을 지키고 B는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B가 A를 공격하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 그게 과거 조선이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한 일이다. 살생을 하는 야만적인 사람들의 지위는 낮아지고 입으로만
도덕적인 선비들의 지위가 높아졌다. 도축업자를 백정이라 부르며 천대했던 것은 우리 선조의 부끄러운 과오다. (참고로 서양은 도축업자의 지위가 낮지 않다고 하더라. 어떤 나라는 되려 천민이 도축업자를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평화롭게 안정적으로
살며 국가의 야성을 지워버렸다. 힘과 기술을 녹슬게 만들었다. 국가 자체가 초식화가 되어버렸다. 그런 조선은 국가 자체가 육식이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맛 좋은 먹이로 전락해버렸다. 초식화된 기득권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나라를 팔아버렸다. 국가몰락의 죄. 이것의 얼마나 큰 죄악인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초식화의 죄악을 알고 있었다.
이런 초식화의 죄악은 문화가 초식이었던 현대의 한국
아이들도 경험하고 있는 일이다. 괴롭힘이 왜 생기겠는가? 학교 내에 강자와 약자가 왜 생기겠는가? 왜 누구는 괴롭히고 누구는 괴롭힘 당하는가? 단순히 힘과 체력의 차이인가? 아니다.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오로지 힘과 체력만으로
그런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다. 도덕으로 인해 저항하고 투쟁하는 마음가짐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싸울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도덕을 지키고 누구는 도덕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 지키는 아이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다. 청소년의 흉포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소년을 착하게
만들기 위한 행동이 만든 것이다. 강요된 도덕이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어 다른 아이들에게 잡아 먹히게 만들었다. 별다른 고찰 없이 죄를 짓지 말라고 강요하는 도덕교육은 머리회전이 빨리 그 교육에 강하게
구애 받는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어 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 얼마나 가여운 일인가. 정녕 아이들을 선하고 바르게 자라게 하고 싶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했어야 했다. 바르지 않는 일을 바로잡고 나설 수 있는 강인한
아이들로 자라게 했어야 했다. 과거 한국인들이 불의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 미래 아이들도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했다. 그렇다고 도덕교육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편하기 위해 아이들을 도덕의 노예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가축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인간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편하더라도 어려울 길로 걸어달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인간으로 교육하길 바란다. 스스로 생각해서 선을 행할 줄 아는 인간으로 교육하길
바란다.
가끔 인터넷 고민상담 글을 읽는다. 그 중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사소한 도덕적 실수가 큰 잘못을 한 것마냥 초조하고
불안하고 괴롭다고 하소연 하더라. 가여웠다. 이미 이건 세뇌의 영역이다. 이런 도덕적 강박증이 한국 사회를 불편한 사회로
만들었다. 별 것도 아닌 일로 불편해하며 힘들어한다. 알고 있지 않나. 이건 누가 상처 입을 지 몰라요! 저건 도덕적이지 못해요! 이 따위 불편하단 의견으로 한국의 개그는 죽었지
않았나. 무엇으로 사람이 웃을 수 있고, 개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일말의 고찰도 하지 않는
이들이 세뇌된 도덕으로 불편하다 호소하여 사람들의 작은 낙마저 없애버리지 않았나. 모든 것이 불편한 그들이 가엾다. 세상이 얼마나 힘들게 느껴질까?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도 고통 받은 이들은 누가 구원해줄 것인가?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 선을 행하게 만든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들어 선을
행하게 만든다. 그것은 결코 바르지 않는 일이다. 한국은 치안이 우수하다. 그 우수한 치안은 약자의 눈치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강자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인가? 할 수 없으니까 못하는 건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건가? 사람을 약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초식화의 죄악이다.
죄는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군가 공격해오면 반격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반격하다 보면 살해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도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줄 생각인가? 도덕을 이유로 아무 방비 없이 희생당하라 요구할
수 있는가? 자기자신뿐만이 아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공동체가 침략을 당하면 공동체를 위해 침략자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다 살해도 할 수 있다. 그것이 부당한 일인가? 그것이 잘못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은 징병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다. 단순하게 훈련을 받고, 경계를 서고, 휴가를 기다리는, 그런 단순한 일상을 생각한다. 심지어 숨막히던 경쟁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가지는
시기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징병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군인이 된다는 것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살해할 각오를 다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이고 무거운 각오인지 알겠는가? 징병된 군인 본인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공동체를 위해 적을 쏴 죽일 훈련을 하고
있다. 미사일이나 총알이 날라오면 긴장을 한다. 민간인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초식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지 묻고 싶다. 폭력과 살인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그들의 신념아래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한다. 말이 양심적 병역 거부지, 공동체를 위해 살해의 죄를 짊어질 각오도 되어있지 않는 자들일 뿐이다. 다른 이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어가며 싸울 때 자신만의 신념을 위해 안전한
곳에서 평화를 노래한다.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들의 정의는 추악하다.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초식화의 죄악이다.
초식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리고 초식화를 추진하는 이들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너는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있는가? 육식화의 죄악은 분명 끔찍했다. 하지만 한국은 그걸로 성장했다. 침략해서 이익을 얻고 세계와 경쟁하여 이겨나갔다. 그들의 죄값으로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초식화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미제에 반대하며 쇄국을 결정해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북한은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다. 반미를 외치며 그들을 무작정 비난하는 자들이여, 북한이 행한 고난의 행군도 즐겨 할 수 있겠는가? 미국을 따르는 것이 죄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부당한 요구를 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반대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이 공동체의 이익이 된다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죄를 만들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한다. 그러지도 않을 사람들이 그들을 가벼운 말로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평화, 평등, 안정을 추구하는 정당의 정치적 승리로 전방위적인 초식화가 진행되고 있다. 조선의 문화를 물려받아 일부 초식화 된 상황 속에서
다른 영역까지 초식화가 된다는 것이다. 정치, 법치, 교육, 노동, 언론 등 여러 방면에서 초식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나는 그것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찬성하는 영역도 있다. 그 동안 평화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고 안정적이지 못하지 않았나. 단지 그게 완전무결한 정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초식화에도 죄악은 있다. 싸울 줄 모르는 약자로 만든다. 죄를 짊어질 각오도 못하게 한다.
초식화는 아이들을 약자로 성장하게 했다. 어른의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 아이들의 권리가 인정되기
시작했다. 학생인권조례로 학생의 권리를 보장해준다. 그런데 학생의 책임은 그대로인 상황이다. 아이들을 안전한 새장 속에서 보호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하면 아이들을 문제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없애버린다. 최근 이슈 되는 아동 관련 법률이 바로 그렇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운전자가 주의할 상황이 맞지만 운전자만 주의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성범죄가 일어난다고 해서 성에 대한 제약을 강화하고 있다. 이젠 아주 조선시대의 성관념으로 회귀하는 듯 했다. (이런 부분에서 조선은 초식국가란 것이 느껴진다.) 이런 것들이 아이들을 초식동물로 만들고 있다. 아이들을 약자로 만들고 있다. 초식화된 아이들이 초식화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잡아
먹히게 하고 있다. 조선의 죄를 되풀이하고 있다.
초식화는 여성들을 약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초식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져나갔다. 부당했던 과거의 일로 다방면에서 권리가 올라가고
특혜가 늘어났다. 그런데 그 만큼의 의무와 책임은 외면하고 있다. 어떤 여성이 남성을 깎아 내리기 위해 군인을 단순히
집 지키는 개로 비하했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공동체를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도 없는 이들이 군인을 비하한 것이다. 평범한 많은 여성들은 그 무게를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지 않은 여성들도 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은 여성들이 여론을 흔들고 있다. 제 앞의 이익만 생각하지 공동체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다. 여성이 죄를 지으면 옹호하고 남성이 죄를 지으면
필요이상 비난한다. 성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 나타나는 감성적인 주장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는지는 관심도 없다. 감성적인 주장을 펼치고 감성적인 법 제정을 요구하고 감성적인 법 판결을 기대한다. 판사가 여론이 무서워서 사건을 바꾼 것은 참 놀라운
일이었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대중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무책임할 뿐이다. 이성이 없는 사회는 책임지지 않는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남성 수준의
책임을 짊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죄를 짊어질 각오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가벼운 말로 감성적인 주장을 펼치며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죄의 무게를 달아줄 필요가 있다.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다. 그 누가 올해의 현상을 예상했을까? 전쟁이 없더라도 지금처럼 평화로운 사회가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에 싸우게 될지 모른다. 언제 어느 때에 죄를 짓게 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별 다른 고찰 없이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초식화 무분별하게 추진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조선의 실수를 되풀이할 셈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이 중 피해자에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를 약하게 한 자는 잘못이 있다. 한국 호랑이의 이빨과 손톱을 뽑아버린 뒤 야생에
풀어놓았다. 그 호랑이는 다른 동물에게 공격 당해 죽었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지금 한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랑이를 우리에
가두거나 야생의 터전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게 올바른 방식인가? 좋다. 그렇게 해서 호랑이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그건 한국 호랑이만 약해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 식의 해결방법은 다른 지역의 동물에게 잡아
먹히게 만든다. 인간은 동물이다. 포식동물이다. 싸울 줄 아는 동물이다. 한국인을 그런 인간끼리의 생존경쟁에서 도태시키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한국인을 약하게 만들지 말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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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까지 다시 정리해야 할 듯
- 스타드림
- 2020/05/18 AM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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