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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타주의는 선한가?2020.11.02 PM 02:05
이타주의는 선한가?
사무치게 슬프다. 분명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되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상황이 악화되면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며 더욱 더
노력했다. 그리고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쳇바퀴 돌듯이 잘못된 노력을 반복하며 점점 더 지치고
괴로워졌다. 대표적으로 출산율이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점점 더 낮아질 뿐이다. 이게 특정 개인의 일이라면 가엾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일부 조롱을 하거나 분노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보통은 동정으로 끝날 것이다. 결국 남의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회의 일이라면 다르다. 자신의 일처럼 분노할 법도 하다. 「왜 헛된 노력, 아니 잘못된 노력을 해서 사회의 문제를 더 악화시키느냐!」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분노하지 않고 그저 슬픈 까닭은 그들이
선한 의지로 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리석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정말로 사회의 행복을 바라며 노력하고 있다.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진정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악화되었던 걸까? 그것은 단순하다. 그들이 가진 올바름의 기준인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임산부와 여성들의 권리를 늘려주었고, 그와 동시에 일부 여성들이 주장하는 성 문화의 검열을
강화하고 아이들의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그럼에도 출산율이 줄어들자 여성의 권리가 부족한 것이라며 권리를 늘렸다. 아이들의 성 문란이 문제라며 더 성 문화를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금지시켰다. 노력하고 더 노력했다. 그럼에도 출산율은 줄어들었다. 이쯤 되면 그 노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챌 법도
한데, 노력의 근거인 도덕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된
노력이라는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출산율은 간단한 문제다. 남녀유별로 어릴 때의 이성교제를 금하고 정조관념으로 성관계를 금한 탓에 낮아졌던 것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가 낮은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노동환경이 열악한 곳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큰 곳도 출산율이 높다. 권리 핑계, 환경 핑계, 빈부격차 핑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출산율이 낮아졌으면 다른 원인을 찾았어야
했다. 자 한국의 과거를 보자.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결혼은 집안끼리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출산 또한 대를 잇는 것을 중요시하여 집안에서 임신을
하라고 압박을 가할 정도로 강요되는 측면이 있었다. 학창시절에 이성교제를 금했더라도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기 시작하면서 결혼과 출산은 의무가 아니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깨달았어야 했다. 어려서부터 사랑을 배우게 해서 자발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하게 했어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결혼과 출산은 개인의 희생이다. 집안과 자식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해야겠는가? 당연히 바람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 중 사랑이 대표적이다. 사랑하는 우상이나 창작물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자본을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야 결혼과 출산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이 그걸 막았다. 남녀유별이라면서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어려서부터 이성교제를 했어야 이성에 대해서 배우고
이성을 아끼고 이성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금하자 이성에 대한 사랑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버렸다.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해소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욕망은 대부분 우상이나 창작물 같은 유사연애산업으로
이어져 그 산업을 발전시켰다. 문화는 즐기는 사람이 많으면 성장하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은 사랑은 커서 하면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인간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먹는 방법, 싸는 방법, 걷는 방법, 말하는 방법, 쓰는 방법과 사교 능력, 수학 능력 등을 토대로 욕구나 감정이란 바람을 이루면서 성장한다. 인간은 인간이란 도화지에 지식이란 선을 그리고 바람이란 색을 칠하면서 성장하는 동물이란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이성애란 색을 칠하지 않고 성장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랑을 몰라 결혼을 하지 않거나 필요에 의한 기계적인
결혼을 하게 된다. 왜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고, 왜 이성혐오가 늘어나는지 알겠는가? 만약 어려서부터 이성을 가까이 했다면 이성을 위해 외모를 가꾸고 이성을 위해 공부를 하고 이성을 위해 희생을 했을 것이다. 그걸 안 한 결과가 지금의 한국이다.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으로 여성의 성관계를 부도덕하게
만들었다. 왜 남성은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상관이 없는데
여성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부도덕하겠는가? 단순하다. 과거 여성은 남성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도구가 쓰이기 전에 사용되면 사용자 입장에서 불쾌하겠지. 그래서 중고라는 멍청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성을 도구로 삼았던 국가들은 다들 하나같이 정조관념의
흔적이 있다. 정조관념은 지극히 여성차별적인 생각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도덕을 의심할 수 없어 성 평등을
주장하는 지금도 정조관념이 남아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리고 정조관념을 근거로 성 문란을 막기 위해 문화검열도 하고 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도 그 선상 위에 놓여있다. 포르노나 성매매로 여성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나 남성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 남성은 남성이 포르노에 나온다고 하거나 성매매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성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은 그저 정조관념이 만든 환상이다. 도구가 도구로 쓰이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여성이 신체접촉에 민감한 것도 정조관념 때문이다. 남성이 구입할 상품에 흠집이 나면 안되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은 여성차별적인 정조관념을 지금은 여성평등이란
이름으로 바꿔서 소중히 하고 있다. 차별을 평등으로 받아드리다니 정말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참 슬프고 무서운 일이다. 이런 게 심해지면 남성에게까지 정조관념을 요구하는 문화가 된다. 왜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은 걸 남성에게까지 주입하려고 하는가. 모든 인간이 성적으로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여성이 성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문란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적이란 말이다. 팍팍 연애하고 팍팍 성관계 맺어도 상관이 없다. 지금 한국은 인구소멸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의 도덕을 운운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다. 설령 그러다가 학창시절에 임신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고 보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교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해도 무엇이 문제겠는가? 어처구니 없다, 황당하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지배국가의 도덕관념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일 뿐이다. 이는 다른 국가도 마찬가지다. 많은 국가가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선진국수록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지배와 자유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아이들끼리 연애를 하는 걸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더라도 이해하는 문화가 받아 드려져야
한다. 학교에 탁아소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국가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막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학생들끼리 공동육아를 하여 피보호자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발적인 희생을 경험할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건 경험 말고는 배울 기회가 없다. 혹시 학업에 방해가 되면 그들이 일 년 정도 휴학을
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휴학을 문제 삼는 것은 어른이 만든 인생의 선로에 종속적인 상명하복 문화의 잔재가 만든 것일 뿐이다. 학생이 임신을 했을 때 도덕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남은 문제에 대해 고찰해보라.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리 큰 장벽은 없다. 다 큰 성인들 출산 지원비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사용했음에도 출산율은 낮아져만 갔다. 이는 이유 없는 희생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을 망각한 대가다. 차라리 아이들에게 연애를 권장하고 그러다가 임신을
하면 그 아이들을 지원해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권장해서 하고 싶은 것을 위한 희생을 각오하게 해야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그거 말고는 자유국가에서는 답이 없다. 지금 한국은 지배국가의 도덕이 자유국가에서 남아
국가를 인구소멸로 이끌고 있는 셈이다.
출산율 문제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거의 모든 이가 도덕을 지적한 적이 없다. 대부분이 도덕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지금이라도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꾸는 수밖에
없다. 나는 반체제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되려 체제에 맞는 도덕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도덕이 문제라는 걸 몰랐을까?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다. 그럼에도 몰랐던 것은 자신의 도덕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심이 깊은 종교인이 종교의 교리를 의심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흔치 않는 일이다. 도덕, 도덕이라. 도덕에 대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된 게 하나하나가 그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만든 도덕으로 피지배자를 올바른 것이라 세뇌하여 지배했던 것이다. 자 세상의 선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보편적인 선은 무엇인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이다. 법을 준수하고 도덕적 의무를 행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이타주의자. 이런 사람을 일반적으로 선인이라 부른다. 이 기준으로 세상의 선을 살펴보자. 첫째,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는 선한가 악한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악하다. 인간을 차별하는 문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진다. 힌두교에 영향을 받아 낮은 신분으로 태어난 이들은
전생에 카르마(업)을 짊어졌다고 하여 그들의 불행을 당연하게 여긴다. 전생에 못된 짓을 저질렀으니까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논리다. 한국에서도 운이 좋으면 전생에 덕을 쌓았고 운이
나쁘면 전생에 죄를 지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는 농담조로 하는 걸 그들은 진심으로 여기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자신은 전생에 덕을 쌓았으니 높은 신분이 당연하고 저들은 전생에 업을 쌓았으니 낮은 신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증명되지도 않은 걸 근거로 하여 차별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카스트 제도를 폐지했음에도 문화적으로
남아있는지 알겠는가? 종교의 가르침이 만든 도덕 때문이다. 이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던 유교보다 더 심각한 차별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위인의 가르침을 부정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게 종교의 사상적 한계다. 보편적인 선은 질서에 순응하고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걸 뜻한다고 했다. 여기서 카스트에 순응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여기서 상위 카스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이 기준으로 봤을 때 선하다. 질서가 어떠하든 그 질서에 순응하면 선하고, 대상이 누구건 상대의 이익을 우선시 하면 선하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게도 카스트 제도는 그들의 입장에서 선하다. 둘째, 이슬람의 참수 문화는 선한가 악한가? 최근 자유주의자라면 누구나 다 분노할만한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에서 역사교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참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 중학교 교사는 이달 초에 언론의 자유를 수업하면서
무함마드 풍자 만화를 보여주며 토론을 했다고 한다. 그런 수업을 알게 된 이슬람 학부모가 이슬람 인들끼리 그 내용을 공유하며 비난했다고 한다. 그 다음 주 프랑스 교사는 무슬림 난민 청년에게 참수를 당했다. 범인은 사건 직후 트위터에 「알라를 받들어 무함마드를
조롱한 마크롱의 개 중 하나를 처단했다.」 라는 글과 함께 목을 자른 사진을 게시했다고 한다. 정말 정신 나간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이걸 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 그래도 한번 선의 기준으로 바라보자. 질서에 순응했는가? 이슬람 문화의 질서에 순응했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는가? 종교 위인과 그를 따르는 종교인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그러므로 이 미친 행위는 그들 입장에서 선이다. 황당하게도 이슬람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위인이 모독
당했다고 생각하면 모독했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참수하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권의 반응이다. 프랑스 대통령이 무함마드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이슬람 문화권은 프랑스에 대한 보이콧을 시작했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전 총리는 무슬림은 수백 만의 프랑스인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가 이슬람 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나, 극단적인 자는 총리가 될 정도로 우수한 인간조차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런 광기는 지식유무와 관계가 없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도덕과 관련이 있다. 셋째, 중국 공산당의 독재는 선한가 악한가? 언젠가 한국인과 중국인이 유튜브에서 댓글로 토론하는 걸 본 적이 있다. 한국인이 중국 공산당이 저지르는 홍콩과 위구르와 티베트 탄압을 비판하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면 잡아가는 것처럼 중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하니 잡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 관점 자체가 사상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반체제 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다. 왕정복고를 주장하거나 공산독재를 주장하는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겠다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그릇된 행위가 맞다. 하나 중국에서 자유를 외치는 것은 지배에 저항하는 것이므로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올바른 행위가 맞다. 반체제 운동을 해서 잡아갔다는 그 단순한 논리에서
도출되는 결과는 바로 자유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 그것은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중국인이 할법한 논리였다. 이걸 일반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선의 기준을 생각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 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 일반적으로 중국인이 선하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질서에 순응하고 공산당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독재자는 피지배자들이 선하길 바랄까 아니면 악하길
바랄까? 그 답은「선하길 바란다.」다. 순종적으로 자신의 지배를 받아드리길 원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드리는 것이 독재자가
원하는 세상이다. 중국 공산당이 자유가 아닌 평화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지배 아래 자유롭지 못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이 독재자가 꿈꾸는 세상이다. 그 세상은 한국인에게는 악하더라도 중국인에게는 선하다. 그래서 중국인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을 올바르게
여긴다. 민족주의가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홍콩과 위구르와 티벳을 탄압하는
것에 침묵하고 있다. 거기에 일대일로로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것까지 올바르게 여긴다. 오만한 중화사상이 그걸 뒷받침 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명확하게 자유와 반대되고 있다. 공산주의를 명목으로 자국을 지배하고 자본주의를 명목으로
타국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인간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상 그들은 자유의 적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중국 공산당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래서 중국의 제품을 최대한 구매하지 않고 있다. 완전하게는 불가능하더라. 조미료까지 다 불매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중국 공산당을 옹호하는 영화를 보지 않거나 아무리 재미있어 보여도 중국산 게임은 하지
않았다. 만약 스스로가 유교인이 아니고 자유국가의 국민이며
자유를 도덕으로 삼았다고 생각한다면 중국과의 거래 또는 중국산 제품이나 창작물을 소비하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길 바라겠다. 그것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부도덕한 일이다. 중국 공산당의 현재 문화와 달리 중국의 과거 문화
자체는 중국의 자유를 대변하는 대만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 하지만 중국에 이익을 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부도덕하다. 자유주의자라면 연하가 연상에게 반말하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며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려는 자와 집단을 부도덕하다며 분노해야 할 것이다. 넷째, 일본의 혐한은 선한가 악한가? 세계적으로 일본 국민은 착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한데 혐한에는 침묵하거나 동조한다. 그걸 보고 많은 한국인들은 이중적이라고 말을 하거나
실은 착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선의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질서에 순응하고 이타적인 것이다. 이 기준이면 일본 국민은 착한 것이 맞다. 질서가 옳건 그르건 자민당을 지지세력이 주도하는 혐한에 순응하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 즉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착한 국민답게 일반적으로는 규칙을 준수하고 선진국민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저 착하기 때문에 자민당이 하는 행동이나
그 지지세력이 하는 혐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혐한은 일본에서 악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민주적으로 보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은 지배국가의 도덕을 물려받아 질서에 순응적인 것을 착하다 여기고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제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순응을 올바르게 여기며 따르기만 하다 보니 주인행세를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유치원생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하나 같이 손을 들고 건너며 질서를 지키는 모습이 사진촬영 되어 인터넷에 공개된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일본이 경기를 마친 후 깨끗이 청소를 한 것이 기사에
뜬 적이 있다. 착해 보인다. 그들이 그걸 선하다고 인식하기에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선하려고 하기 때문에 옳건 그르건 자민당의 질서를 거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돌려 말한다거나 동조압력이 있다거나 자기 주장을 펼치기 어려워한다거나 하는 것도 이타주의적인
태도 때문이다. 이제는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그들이 한국과 갈등을 생기는 것은 질서에 순응하는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견 착해 보이지만 나쁘게 보이는 모순이 없어진다. 일본이 자유국가라면 일본 또한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을 버리고 자유국가의 도덕을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배국가의 도덕이 말하는 착하다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도덕으로 삼아 자유롭게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외칠 수 있어야 일본은 변화할 것이다. 다섯째, 한국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세상의 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의 질서가 진리로 느껴지던가? 어떤 질서가 가르치는 도덕이 반드시 올바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한국이 가지고 있는 도덕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지금 한국의 수많은 사회 문제는 과거 지배국가의 도덕에서 비롯된 것이다. 낮은 출산율, 높은 자살률, 사회적 갈등, 집단 이기주의 등 다양한 문제는 도덕을 근거로 한다. 스스로의 도덕을 의심하는 것은 그 도덕으로 행동을
결정해온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어려운 법. 그러니 도덕을 의심하는 것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먼저 다른 국가들의 도덕을 알아본 것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어려워도 다른 걸 보고 반면교사로 삼는 것은 그나마 쉬우니까 말이다. 한국의 도덕이 진리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우리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냥 착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마냥 이타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게 올바른 것이었을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검열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연하와 연상을 차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을까? 과거의 관행과 관습을 수용하는 게 올바른 일이었을까? 다문화,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공주의, 자본주의, 심지어 자유주의까지도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한국이 체제에 맞는 도덕과 가치관과 희생의 이유가
갖춰지면 비로소 기초가 튼튼한 자유국가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넘어가기 전에 잠시 다문화에 대한 의견을 내보겠다. 다문화는 실패한 정책이 아니라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다. 각자의 문화는 각기 다른 도덕을 내포하고 있는데, 서로 충돌하는 도덕을 가진 이들끼리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은 자와 지배를 도덕으로 삼은
자가 어찌 공존할 수 있겠나? 이는 천적과 공존하겠다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이다. 다문화를 위해 카스트를 도입할 수 있겠는가? 명예살인을 도입할 수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너를 노예로 삼겠다며 나서는 인간과 자유로운 인간이 어찌 같이 살 수 있겠냔 말이다. 한국은 지금 과거의 도덕에 근거하여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다고 본다. 하면 미국이 없다면 중국의 지배를 가만히 받아드릴 생각인가? 미국이 있든 없든 그들이 다른 국가를 지배하겠다고 나선다면 싸울 수 밖에 없다. 일국양제가 무너진 홍콩을 보라. 대만을 위협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보라. 탄압당하는 소수 민족들을 보라. 주변 국가인 한국도 예외는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 협상한다고 해도 그들의 도덕이
지배를 올바르게 여기는 이상, 한국은 그들에게 정복할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중립이 가능한가? 애초에 한국이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을 갖추고 있었다면 중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적이 아니다. 중국은 자유의 적이다. 한국이 자유국가이므로 결과적으로 한국의 적이 되는 것이다. 중국 외에도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는 전부 가상적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문화는 도덕 때문에 원래부터 잘못된 정책이었다. 그렇다고 순혈주의나 민족주의를 주장하거나 이민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최소한 자유를 부정하는 인간이 자유국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를 기반으로 한 단일문화와 다인종이 앞으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이민정책이라 생각한다. 설령 피부색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더라도 자유의 가치를 받아드린 사람은 자유국가의 국민이다. 반대로 같은 민족이라도 자유를 부정하면 자유국가의
국민이 될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지닌 문제의 본질은 지배국가의 도덕이었다. 다른 국가들을 살펴보면 도덕이라는 것은 애초에 진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이타주의는 과연 정말 올바른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가볍게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대해 정리해보자.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선한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질서에 순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선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자유롭길 바라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질서가 객관적 선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런 순응하는 태도를 선이라 부른다. 그것이 바로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그럼 본 주제로 넘어가겠다. 그렇다면 이타주의는 선한가? 그것도 객관적으로 선하지 않다. 어떤 대상의 이익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집단이 집단 이기주의가 되려면 모든 집단 구성원이
이기적이어야 할까? 답은「아니다.」다. 대부분 이타주의적이어야 그 집단이 어떤 이기주의자가
주장하는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세상의 수많은 집단 이기주의를 떠올려보라. 과연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는가? 스스로부터 생각해보자. 내가 속한 집단에서 부당한 행위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을 목격했다. 그걸 목격하고 나서 나는 그 행위를 저지하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을 잘못된 일이었다. 그걸 주위에서 말린다. 네 이익을 떠올려보라면서 말이다. 그걸 듣고도 나는 부당한 행위를 막으려고 한다. 그러자 그들은 집단 구성원의 가족을 꺼내며 막는다. 「네가 그걸 막는다면 그 부당한 이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내게 내제된 이타주의가 속삭인다. 「네가 막고 싶다는 욕심을 접고 다른 이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지 않겠느냐?」 신념과 인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무엇이 올바른 일이란 말인가? 만약 내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타인이 피해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부당한 행위를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이타적인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얻는 피해가 가슴 아파 자기합리화를 하며 침묵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비리와 집단 이기주의를 형성하는
토양이 된다. 부동산 담합을 떠올려보자. 어떤 아파트 주민이 자신의 부동산을 싸게 처분하려는
걸 다른 아파트 주민들이 막았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전해진 적이 있다. 그들은 집값이 떨어진다고 파는 자유를 막은 것이다. 거기서 논리는 간단할 것이다. 「네가 싸게 팔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하지 마라.」 자신의 이익 때문에 이타주의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상을 몰아주는 예술계의 관행을 떠올려보자. 거기에 속한 인간이 전부 이기주의적이었을까? 분명 실력으로 승부를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행이 유지되는 것은 이타주의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 관행으로 이익을 본 다른 선배들의 이익을 침해할
것인가? 너에게도 언젠가 이익이 돌아올 거니 부당한 관행을
막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을 하지 마라.」 이타주의가 그 부당한 관행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여성주의에 휩싸인 여성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전부 이기적이었을까? 여성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사례를 떠올려보자. 어떤 여성이 간호사 코스프레를 했다거나 야한 옷을
입었다거나 하는 등의 행위를 했을 때 어떤 비난을 했던가? 「너는 여성주의의 이익을 침해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여성주의라는 어떤 사상 자체에 대한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말이다. 그게 바로 이타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다. 여성주의로 이익을 보는 일부의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타적이기 때문에 여성주의 광풍이
불었던 것이다. 나는 여성들을 우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들도 알 것이다. 어떤 희생도 책임도 지지 않고 이익만 챙기겠다는
말이 사회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말을 못하는 것은 여성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라는 이타주의가 간섭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집단 내부에서 집단의 이익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부 이기적인 행위로 몰기 때문에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이 된 세상에서는 집단의 부당한 행위를 막을 수가 없게 된다. 왜 내부고발자가 그 집단에게 소외되고 퇴출되는지
알겠는가? 이타주의가 선인 곳에서 정의구현이라는 이기적인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집단 이기주의나 비리 사건은 이타주의를 근거로 한다. 이럼에도 이타주의가 올바른 것으로 보이나? 이타주의는 지배국가의 도덕이 남긴 잔재다. 생각해보자. 지배자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피지배자들은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모든 이익이 지배자에게 몰리지 않겠나. 국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모든 국민들에게 희생을
요구했던 전체주의는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걸 강요했기 때문에 전체주의가 된 것이다. 이타주의는 대상을 분명히 할 수가 없다. 대상이 정해지면 목적성을 띠게 되고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결정했다는 자유의지가 간섭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기주의가 되게 된다. 순수한 이타주의는 결국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다. 인도의 카스트도 이슬람의 참수도 중국 공산당의 독재도
일본의 혐한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한국의 비리도 집단 이기주의도 전부 어떤 기준에서 선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이 착하기 때문에 엉망인 것이다. 착하기 때문에 엉망이라면 착하다는 보편적인 기준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는 알았을 것이다. 지배국가의 도덕을 기준으로 정한 선으로는 세상이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더 이상 무력한 이타주의는 선이 아니다. 자유국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이기주의의 가치는 자유의지를 근거로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는 것은 전부
이기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모든 인간의 의지가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다. 어떤 인간이 세뇌를 당해서 하는 행위를 가리켜 자유의지라고
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듯이 단순히 인간이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자유의지라고는 할 수 없다. 고찰이 없는 의지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내 의지가 어떤 것이 영향을 받았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비로소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걸 아무런 고찰 없이 그대로 하는 게 자유의지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건 노예다! 개돼지다! 고찰 없는 의지는 결국 남의 의지를 그대로 수행하는 이타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현명한 이기주의야말로 자유주의자가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이며 이기주의 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바꾸려면 누가 필요하겠는가? 이기주의자다. 카스트 제도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을 무시하고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뀌는 거란 말이다. 이슬람의 참수는 얘기하기가 어렵다. 어떤 이슬람 인이 참수를 비판하면 그 사람도 참수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이 바뀌려면 이슬람의 이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자가 있어야 바뀔 것이다. 중국의 공산독재도 그러하고 일본의 한국 혐오도 그러하다. 그들 대부분이 선량하지만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기주의. 어떤 사람이 땅에 떨어진 쓰레기를 주어 도시를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가정하자. 그걸 보고 다른 도시의 구성원이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걸 위선이라며 공격했다. 이타주의자는 거기서 그들의 이익을 침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참고 쓰레기를
줍지 아니한다. 이기주의자는 거기서 다른 이의 이익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의 욕망대로 쓰레기를 주워 도시를 깨끗하게 만든다. 누가 도시에 더 필요한 인간이겠는가? 거기에 이기주의자들은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기 때문에 행동한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그 파장으로
다른 이가 이익을 얻는다고 해서 달리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친절을 베푼 이기주의자는 그 친절로 상대방이 이익을 얻건 말건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친절에 대한 보답에도 관심이 없다. 베푼 순간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순수한 선의인가? 보답을 바라는 이기주의자는 보답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관행, 관습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이기주의자들이다. 과거 관행을 만든 그리고 현재 관행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의 이익 따위에 관심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야말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도 마찬가지다. 과거 판례를 중용하는 것은 판례를 만든 과거 판사들의 권위라는 이익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판례거나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더라도
선배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타적인 생각 때문에 바꾸지를 못하는 있는 것이다. 현재 판사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판례변경이 가능하다. 지금 정보의 확산으로 촉법소년들이 사회의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여 성인과 비등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이를 막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하게 과거의 법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어야 이런 걸 바꿀
수 있단 말이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우리 사회가 행복하게
될 수 있단 말이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사법개혁, 검찰개혁, 의료개혁, 관료개혁, 교육개혁, 기업개혁, 예술개혁 등 다양한 개혁들도 결국 그 집단에 속한
이가 집단 이익을 무시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개혁할 수 있다. 지금 개혁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까닭은 이타주의가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각자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니까
바뀌질 않는 거란 말이다. 이제는 근시안적이고 멍청한 이기주의자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선량한 이타주의자들을 선동하는 것을 배제하고 하고 싶은 대로 올바른 일을
하는 이기주의자를 착하다고 해야 된다. 기자가 언론사와 연계된 곳의 비리를 파헤쳐서 터트리는 것. 「내 맘대로 할거야!」 라면서 특종을 터뜨린다고 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예술계가 그 동안의 관행을 무시하고 진정 예술적인 것에 상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계가 자신들의 특권을 무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기주의자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져 간다. 어차피 제 배만 불리려는 그릇된 이기주의자들은 이타주의가 선인 세상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기주의자들이 무력한 이타주의자들을 이용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거면 모두가 이기적인 편이 낫다. 올바른 이기주의가 선이 되어야 그릇된 이기주의를
견제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얘기다. 모두가 이기적이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거란 우려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특성을 고려하면 그리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이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나 외의 이기적인 인간이 주장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하게 된다. 자신의 이기심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기적인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자 펼쳐봐라.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동자든 기업이든 어디든 간에 자신의 이기적인 주장을 펼쳐봐라. 자신이 그러하듯 그 외의 사람들이 그 주장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지 엄격하게 판단을 할 것이다. 자신의 이기심이 대중에게 평가 받는 것이다. 지난번 어떤 인간이 지방에 땅을 사서 톤 단위의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여 큰 돈을 벌었다는 소식이 언론기사로 공개된 적이 있었다. 그런 인간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받아드리겠는가? 반면 정당하게 돈을 벌어 공동체에 이익을 주는 기업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 기업이 이기적인 주장을 펼친다고 가정해보자.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이 거절하겠는가? 그 주장을 각자 판단을 해서 결론을 내리겠지만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이기적인 주장은 반대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여성들이 여성의 권익을 보장해달라는 대신에 남성들이 짊어지던 병역의 의무를 같이 하겠다는 주장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걸 어떤 남성이 반대하겠는가?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진정 올바른 일을 이기적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타주의는 그런 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꺾었을 뿐이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행하려고 하면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할 텐데 그럴 거면 안 하는 게 낫지.」 이처럼 이타주의는 뭔가 하기도 전이 자유의지를
꺾어버린다. 자유국가의 국민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할수록
행복하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되려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게 되면 불행해진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있으면 무조건 막을 거나 의무를 만들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무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지나치게 부자유스러운
일이다. 도덕이 시켜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도덕에
지배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로운 참된 도덕이라 생각한다. 이슬람 인의 참수는 그것이 자신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다. 그것이 자유롭게 보이는가? 혈통을 사랑하는 일, 국가 구성원을 사랑하는 일, 인류를 사랑하는 일. 등등 의무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스스로 바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태도다. 나의 핏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혈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만약 이혼을 하게 되면 가족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사랑도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가족이란 형태에 구애 받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라는
도덕의 명령 때문이다. 가족이라서가 아닌 인간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편협한 혈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유롭지 못한 혈통주의 때문에 양자를 들이는 사람이 적은 것이다. 이런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유국가의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한다. 분명 검열과 규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들이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를
자유롭게 발산했더라면 지금 한국이 출산율로 걱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걸 확신한다.
도덕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던 어떤 자부심마저도 무너질 우려가 있다. 자랑스럽게 여겨왔던 것이 실은 자랑스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면 큰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사회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야한 것을 검열하고
이성교제를 막아왔던 이들이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낮은 출산율을 불러왔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던 평등주의자가 자신이
유교의 연령차별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했다고 생각했던 이가 그저 잘못된 관행이었음을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말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직업 자체가 사라져 직업적 자부심을
잃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국가에서 일자리 창출이 어려운 까닭은 단순하다. 그냥 앞으로 인간의 노동력의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간이 필요한 일이 줄어드니까 강의실 불 끄기 같은 불필요한 일자리나 공무원을 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직업 자체가 사라지면 평생 그 직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자부심을 잃어버릴 수가 있다. 자유국가에 맞는 도덕이 새롭게 정립되면 자유를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의지할만한 어떤 자부심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인에게 자부심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들은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으로 여기기엔 다소 부족한 점이 있었다. 첫째,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일부 한국인들이 한 것이다. 그것마저도 여러 가지 복잡한 배경이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둘째, 천재. 나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그건 어떤 천재가 만든 작품일 뿐이다. 이외 천재들의 업적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상을 타거나 인정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셋째, 교육. 교육열도 높고 수준도 높지만 학생들이 행복하지 못하단 말이 있다. 그리고 효율이 낮다는 평가도 있다. 최근 한국 교육의 발전상이 바람직하다.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자부심을 갖기는 조금 어렵다. 넷째, 역사. 상대적으로 타국을 침략하지 않았던 나라였던 것은 맞으나 조선 말기를 보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갖기는
어렵다. 다섯째, 행복. 자살률이 매우 높은 국가다. 행복을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섯째, 미래. 출산율이 매우 낮은 국가다. 자부심 이전에 인구소멸을 걱정해야 해야 할 것이다. 일곱째, 시민의식. 한국 내에서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는 관광지를 떠올려보자. 해외에 나가면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 꼰대, 갑질, 혐오 등. 시민의식으로 자부심을 느끼기엔 발전해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 경제발전이나 민주주의나 천재 같은 한국인과 관련되어있는 것은 자부심을 가져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환경이 그걸 만든 것이니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이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한 모든 한국인이 온전하게 자부심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인정할만한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특성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쯤에서 나는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인의 특성, 그것이 옳건 그르건 전부를 포용할 수 있는 어떤 자부심을 가질만한 요소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그 모습들이 눈 앞에
그려진다. 사랑스러운 모습, 혐오스러운 모습, 똑똑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자랑스러운 모습, 한심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등. 쭉 떠올려보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하나 같이 생명력이 흘러 넘쳤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모든 국가가 놀랄만한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 정말 장단점이 극단적이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한국인은 무언가를 하면 끝장을 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무얼 해도 극단으로 가버렸던 것이다. 보통 생물의 생명력은 생물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다. 하지만 지성이 있는 인간의 생명력은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 아니라 각자 살고 싶은 방향을 끝까지 하는 힘이다. 지성이 단순한 생명력에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것은 사전적 정의 중 사상적인 측면인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적 기능을 유지하여 나가는
힘」에 가까울 것이다. 인간이 어떤 것을 하고자 하는 힘은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다. 생명력이 뛰어나다 보니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와 출산율과 자살률이 가능했다. 경제성장은 성장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상명하복의
유교문화가 만든 무한경쟁 속에서도 살아남아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원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끝없는 투쟁을 하며 이뤄냈던 것이다. 출산율은 이성교제를 부도덕하다 배운 이들이 가진
이성을 혐오하는 힘이 강하니까 이성혐오가 늘어서 그랬던 것이다. 이성혐오가 사회현상이 되어 정치적 영향력까지 끼치게 된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이성을 사랑해야 할 힘이 문화를 향하자 세계에 손꼽히는
문화강국이 될 정도가 되는 국가가 또 어디 있을까? 자살률은 죽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죽은 것이다. 생명력이 약한 인간은 가는 삶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 때까지 살다가 죽는다. 그런 사람은 생명력보다는 생존력이 강하다고 해야
한다고 본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강렬하게 빛을 발하고 꺼지는
빛처럼 그 힘이 지나치게 강하니까 죽음도 쉽게 결정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대표적인 문화 중 하나가 빨리빨리 문화다. 뭐든지 빨리 하려고 하다 보니 경솔하다거나 성급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만큼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는 근거기도 하다. 사회갈등이 이 정도까지 치달은 국가가 얼마나 있을까? 그만한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갈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등을 빚는 상대방을 생각해보라. 그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인한지 알 것이다. 사상의 차이로 서로를 받아드릴 수 없더라도 생명력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한국은 교육열이 강하다. 얼마나 강하면 좀 자제하라는 소리가 나오겠는가? 한국만큼 발전한 국가도 많지 않다. 발전하고자 하는 힘이 강하니까 그런 거다. 한국은 사이비 종교에 취약하다는 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걸 믿는다고 결정하면 그 믿는 힘이 너무 강하니까 그랬던 것이다. 조선만큼 유교에 심취한 국가가 어디 있었는가? 유교를 믿자고 결정하자 정말 미친 듯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믿고 따랐으며 그것이 한국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북한 같이 아직까지도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국가가 어디 있는가? 소련이 붕괴됨에 따라 다른 공산국가들은 시장을 개방했음에도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집을 피우고 있다. 하나 결정하면 끝까지 보는 성질이 나타난 것 같지 않나. 이외에도 곰곰이 생각해보라.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평균 이상이 되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생명력 자체는 모든 생명이 가진 것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자부심으로 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정 이상 뛰어나면 그 자체로도 자부심으로 삼을만하다고 본다. 특정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전원이 빨리빨리 라는 문화가 생길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면
충분히 그 공동체의 특성이라 볼 수 있고 그 특성을 자부심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생명력은 한국에 긍정적인 사람도 부정적인 사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성 중 하나다. 그 특성이 장점과 단점에서 고르게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한국인조차 건조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한국인이 생명력이 강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지성이 제대로 된 방향만 결정하면 뭐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가 될 수 있는 소질은 충분히 모든 한국인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고 본다. 한국인은 굳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것을 찾지 않아도 이미 생물로서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력이 강하니까 화력을 쓸 곳만 제대로 정해두면
팍팍 성장할 수 있다. 모든 한국인이 자유를 찾아 이기적이게 되면 이타주의의 그늘 속에서 펼치지 못했던 올바름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펼쳐 사회를 이롭게 만들거라
생각한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들이므로 자유라는 체제에 맞게
도덕이 자리잡으면 그만큼 성장하고 행복해질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는 주장은 생각보다 쉽게 받아드려 질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교를 버리자고 하는 주장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미 새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가 유교의 대척점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꾸준히 설득할 수 밖에 없다. 자유와 연상이 연하를 지배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가르쳤던 유교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자유와 지배가 어떻게 함께 갈 수 있느냔 말이다! 그건 한국의 자유와 중국 공산당의 지배가 함께 갈
수 있다는 망상과 다르지 않다. 모든 국민이 자유를 도덕으로 삼으면 꼰대질과 갑질은 사라질 것이다. 그 외 다양한 사회 악습들도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부도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유교는 과거 지배국가의 문화유산으로만 남아야
할 구시대의 유물이다. 부디 그 한국인의 강한 생명력이 자유를 향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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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이 좀 더 분발했으면 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바꿔야겠지요. 이제는 체제에 맞는 도덕이 필요합니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불행해지는 사회. 도덕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도덕 때문에 꼰대나 갑질 같은 것으로 불행했던 사람은
사회의 도덕 때문에 불행했던 것이지요. 자연스러운 연애욕구로 허용하여 어려서부터 제 짝을 찾아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했다면 이성혐오가 판을 칠 수 있었겠습니까? 전부 도덕으로 인한 문제입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좀 더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올립니다. 지금 새로운 도덕에 대해 정리 중에 있습니다. 주장하는 자가 누구든 그것이 정녕 옳다면 받아드려
질 거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아.
- 어컬텔러
- 2020/11/02 PM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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