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소년범죄 대책방안2020.11.23 PM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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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범죄 대책방안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도덕은 변하지 않았다. 자유국가가 되었음에도 어째서 도덕은 자유롭지 못하게 나둬서 사람들을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나?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는 말은 인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의미와 같다.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 상사 말을 잘 듣는 사원. 착하다고 한다. 사회에 적응하여 철이 들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복종하는 것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탓에 생긴 역겨운 현상이다. 짖지 않는 개를 가리켜 착하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잘못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인간들을 개돼지 취급하면서도 그 취급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오히려 잘못된 것은 너라며 타박해왔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다 더 끔찍한 것은 자유국가가 되었음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런 차별을 가리켜 문화의 특성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령차별이 연하에게 복종을 바라는 꼰대를 만들고 그렇게 학습된 차별로 갑질을 행하게 만듦에도 말이다. 다른 국가에도 갑질이 있지 않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다. 다른 국가도 지배국가였던 시절이 있으니 그런 잔재가 당연히 남아있다. 한국은 그게 유교였을 뿐이다. 그런 유교가 원인이 된 꼰대질과 갑질로 얼마나 많은 사회적 불행을 쌓아 올렸던가? 그들이 불행했던 것은 그들 탓이 아니다. 불행하게 만든 이들의 탓조차도 아니다.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던 사회의 도덕 탓이다. 단지 그렇게 배워서 행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꼰대질이나 갑질로 불행을 겪게 되면 이런 식으로 사고가 흘러갈 것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착하게 행동해야겠다.」 그리고는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 도덕의 가르침인 장유유서를 지키며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게 된다. 나쁜 꼰대가 싫어서 착하게 행동하려 한 결과가 바로 이거다. 그리고 꼰대질을 행함으로 이제는 자신이 불행을 전파한다. 불행이 불행을 낳는다. 올바른 일을 행함의 결과가 불행이라면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겠는가?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걸로 이성교제가 부도덕하다 배우니까 커서도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여성을 섹스파트너로만 여기거나 남성을 ATM기기로만 여기는 사람이 늘어났다. 사랑했다면 감수할만한 작은 손해도 사랑하지 않으니까 받아드릴 수 없게 되었다. 결혼과 출산 같은 희생이 필요한 걸 거부하는 까닭은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결핍되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걸 거부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성관계가 부도덕하다 배우니까 성욕이 많은 이성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성욕 자체가 부도덕하다 느껴지니 성욕을 해소하려는 행동 자체도 역겨워진 것이다. 왜 과거와 달리 많은 부분에서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남성혐오가 사라지지 않는지 알겠는가? 한국은 여성주의로 인해 남성혐오가 생겼다기 보다는 애초에 도덕으로 인해 성욕이 많은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부도덕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 그게 마약이다. 성욕이 부도덕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왜 성에 예민하고 상품화에 예민해지는지 알겠는가? 왜 여학생들이 남성끼리 동성 연애하는 작품들을 즐기게 되었을까? 단순 취향이라고 하기엔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 모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을 소재로 동성애 작품을 만들고 그걸 보여주어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이상하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성애가 부도덕하게 되니까 도덕적으로 행동하려는 착한 아이들은 동성애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진 거다.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성관계를 부도덕하다 교육받으면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법이다. 지금도 학교에서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학부모가 발작을 하며 반대한다고 하지. 한국은 지금 유교에 여성주의가 결합되어 성을 억압하는 것이 여성인권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어떤 여학생이 고민상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걸레라고 불려 화가나 부른 상대와 싸우다가 강제전학조치를 당해 많은 부분 자유를 억압받고 있어 고민이라고 하더라. 걸레라. 왜 성의 자유를 누리는 걸 모욕으로 취급하는가? 그건 도덕에 영향을 받은 것 외의 이유가 없다. 남성은 그러지 않으니까! 혹시 걸레라고 부르는 부자유스러운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리켜 유교인이라며 반격하길 권하겠다. 사랑이 줄고 혐오가 는다. 결혼이 줄고 출산도 준다. 이성을 향해야 할 애정이 문화로 가자 성장했다. 왜 한국문화는 노래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닌 우상에게 애정을 품는 아이돌문화가 유명한가? 왜 한국문화에는 드라마나 음악이나 영화를 가리지 않고 사랑이 빠지지 않는가? 문화로 애정결핍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의 성장은 한 국가가 이성에게 향할 대부분의 애정을 문화에 쏟은 결과물이다. 한국문화를 깎아 내리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인과관계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뿐이다. 어떤 것의 성장함에 있어 그 원인이 반드시 긍정적일 거란 보장은 없다. 게임문화 성장 또한 실외에서 놀 거리가 없는 한국 특성이 만든 결과물이 아닌가? 가족애나 이성애가 많은 곳에서는 게임보다는 실외놀이를 더 즐겁게 즐길 것이다. 놀 거리도 없고 도덕적인 이유로 애정결핍이 된 한국은 자연스럽게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에서는 게임 하는 것 자체로 너드 취급 받는다고 하지. 한국이 그러지 않은 것은 대다수가 게임을 즐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게임플레이강국의 이면엔 그런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에 뿌리내린 근본을 알면 거기서부터 다양한 현상이 해석된다. 인과관계가 단순한 만큼 책임소재도 명확하다. 카스트로 불행을 겪은 사람은 카스트의 책임인 것처럼 이런 종류의 사회적 불행은 도덕 책임이다. 한국인들은 배운 대로 성실하게 하는 착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사회가 불행한 것이다. 나는 내가 이상한지 알았다. 어린 시절 나는 세뱃돈 받는 걸 싫어하는 이상한 아이였다. 친척 어른에게 무릎 꿇고 절하는 것도 싫고 그걸로 돈을 받는 것도 싫었다. 내 의지와 감정이 헐값에 팔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받고 나면 부모에게 세뱃돈을 넘겨주고 모른 척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내가 이상한지 알았다. 그래서 자책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해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상한 건 연하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한국의 도덕이었다. 이제 내겐 어른과 조상에게 절하는 것과 태국 왕족에게 절하는 태국 국민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정신 나간 왕족은 한국에 와서 한국인에게도 절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역겹다. 친구의 어린 동생과 친구처럼 지낸 적이 있었다. 그걸 보고 어른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연하와 대등하게 지내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다. 대중가수의 춤과 노래를 듣고 즐긴 적이 있다. 그걸 보고 어른이 화를 내며 혼을 냈다. 아마 그런 문화를 즐기는 내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이후 내적 결함을 알아차릴 때까지 속 편하게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가니 식은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걸 강제로 먹었다. 꾸짖음을 당하고는 다 불어터진 걸 억지로 먹으며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남아있다. 평소 요리를 하지 않던 사람이 준비한 모처럼 배려한 음식이 식을 때까지 늦게 들어온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김치를 먹길 거부하니 강제로 먹여지다가 내뱉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한국의 자랑식품인 김치를 먹지 않는 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내가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서 자신들이 먹는 음식은 편식하면 화를 낸다. 유치원생일 때 미형이 아닌 이성과 사이 좋게 지내는 걸 보고 못마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때엔 외모 상관없이 대했던 모양이다. 이후 그건 교정된 듯하다. 답답하다. 이외에 자잘한 것 하나하나 어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강제로 교정을 당했다. 이세상 모든 것이 내가 이상하고 세상이 올바른 것이라며 꾸짖었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 같은데 모두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내가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내 주변엔 자유주의자가 없었다. 「어른에게 절하기 싫어하는 내가 나쁜 거야? 연하와 친구 먹는 내가 나쁜 거야? 대중문화를 즐기는 내가 나쁜 거야? 멋대로 준비한 배려를 받지 못한 내가 나쁜 거야? 김치를 먹지 않는 내가 나쁜 거야? 미형이 아닌 이성과 친하게 지내는 게 나쁜 거였어? 나는 나쁜 아이구나?」 결국 어린 학생이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상실해버렸다. 나쁜 자신을 할퀴고 상처 입혔다. 그건 도대체 누구 책임이라 할 수 있는가? 자신이 배운 대로 착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 도덕적으로 가르쳤던 어른인가? 가르침대로 교정되려다 망가진 아이인가? 모든 건 도덕의 책임이다. 자유롭길 바랬던 모양인지 인터넷 아이디마저 Free가 붙게 되었다. 아무래도 당시엔 Freedom Liberal의 차이를 몰랐던 것 같다. 그토록 자유를 바랬지만 당최 무엇이 원인으로 내가 부자유를 느끼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결정적인 사건으로 신체의 부자유를 느낀 순간 모든 걸 자포자기하고 운명이란 이름의 도피를 통해 무기력하게 살아남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는 안다. 모든 부자유는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의 트라우마와 나의 적은 인간을 지배하는 걸 올바르게 만든 지배국가의 도덕이다. 인간을 지배하려는 모든 것은 자유의 적이고 자유의 적는 나의 적이다. 나는 그걸 단언하겠다. 이하 몇 가지 사회 현상들. 왜 귀농을 꺼려하겠는가? 시골의 연상들에게 지배 받기 싫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래도 개인주의화가 되어 연상의 꼰대질을 당할 우려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어른들도 직접적인 원인은 몰라도 꼰대질이나 갑질이 문제라는 것은 인식하여 자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골은 그런 것이 아직 부족하다. 젊은이가 시골에 가면 모든 노인에게 꼰대질을 당할 것이다. 누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고 싶어하겠는가? 시골에 젊은 사람이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바뀌거나 시간이 흘러 지배할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연하를 아기 취급할 때가 있을까? 다 큰 성인도 나에 비하면 어리니까 아기라고 한다. 성인을 아기라고 하다니 황당하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겠는가? 나이로 차별하는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어리게 여겨야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어린 놈이 건방지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까져가지고. 이런 류의 발언도 연령차별에서 비롯된다. 굳이 나이를 붙이는 건 차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에서 종종 자신을 형이라 강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위니까 알아서 기어라.」라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는 양반이 천민을 천하다고 여기며 업신여기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유교인이 아니라면 연하를 아기 취급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이와 관계없이 대등한 인간 대접을 해야 할 것이다. 왜 한국에서 천재는 범재가 되어버리는가? 범재인 어른의 입맛에 맞게끔 교정 당하기 때문이다. 왜 한국에서는 창의력이 없는 게임들이 많은 것인가? 창의력이 없는 윗사람 입맛에 맞게끔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왜 명절에 친척과 마주하기 싫은가? 꼰대질 당하고 싶지 않아서다. 흔히 한국의 핵가족화를 개인주의화라고 하는데 나는 다르다고 본다. 연상들의 지배가 싫은 자유로운 이들의 자유주의화다. 연상의 잔소리 듣기 싫은 사람들이 가정을 꾸려 나갔다는 얘기다. 이외에도 악영향을 끼치는 사례들이 무수하다. 이들이 수많은 불행을 불러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지배하고 복종 당하는 걸 올바르다고 가르치는 국가에서 자유국가의 국민이 정상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다양한 문제들이 성장해서 스스로 바뀔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쉬웠다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없었을 것이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성장기에 배운 교육은 자아성찰이 없다면 대부분 평생 간다. 도덕적으로, 연하가 복종하길 바라고 이성과 교제하는 걸 금하고 야한걸 검열할수록 사회는 불행해져만 갔다. 이런 불행을 부르는 도덕을 한국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란다면 카스트를 인도 문화의 특성이라며 존속하길 바라는 것과 같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인도의 카스트는 신분으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고 한국의 장유유서는 나이로 인간을 나눠 차별하는 것이다. 하위카스트가 상위카스트에게 불평등함을 호소하는 걸 보고 철이 들지 않았다며 비난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황당하거나 화가 난다면 장유유서에도 동일하게 해달라. 복종을 올바른 도리로 만든 이 둘도 다른 부분이 있다. 장유유서는 아이일 때 차별 받고 어른일 때 차별하는 구조를 가진다는 점이다. 과거 수공업 도제시절에는 장인에게 부림을 당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장인이 되면 도제를 부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노동자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용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 시절의 불평등함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의료체계와 비슷하다. 수련의나 전공의 시절 부림을 당하더라도 이후 다시 부릴 수 있기 때문에 악습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지배당하더라도 어른이 되고 나서 지배할 수 있으니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젊은 정치가가 늙은 정치가에게 나이로 차별 받았다며 억울하다고 호소한 기사가 공개된 적이 있다. 과연 그 젊은 정치가는 단지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차별하는 한국 도덕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연하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을까 궁금하다. 자유. 자유. 자유! 지배국가의 도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왜 한국엔 자유주의자가 보이지 않는 건가? 자유와 평등을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며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던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자유주의자는 어디에 있느냔 말이다! 자신들이 도덕을 명분으로 지배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지배라고 인식하지 못하여 왜 자유를 갈구하는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차라리 알기 쉽게 독재자라도 있으면 싸울 수 있으련만. 나는 도대체 무엇과 싸웠어야 했는가?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과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나? 선한 의지로 행동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하냔 말이다! 알기 쉽게 나쁜 인간이라도 되면 속 편하게 싸울 수라도 있지 이게 뭔가! 아아. 자유를 희망했던 민주화 운동가와 자유민주주의자가 진정 자유를 갈구하고 그것에 맞춰 사회의 도덕을 변혁했다면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율을 부를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이 원인이 된 사회의 불행. 그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 지배국가의 도덕이란 잘못된 것을 바꾸는 걸 부정하는 이에게 도덕으로 발생한 불행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다. 자유롭지 못한 도덕을 가지고 있는 자유국가. 그것이 한국이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올바른 일을 행하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도덕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소년범죄의 대책 또한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촉법소년 문제다. 면제부에 가까운 걸 가지고 있는 촉법소년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죄를 저질러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 촉법소년이 무면허 운전차량으로 대학생을 쳐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는 SNS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은 메시지를 올려 사회적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촉법소년 범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거나 불만을 가지거나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소년범죄는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소년범죄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환경에 놓은 아이들도 저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보검열이 어려운 자유국가의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정보과잉공급이 만드는 결과물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주고 간단한 사용법만 일러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어린이는 쏘고 싶다는 충동만으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쏘아버리는 일도 있을 것이다. 총기에 정보를 대입하면 그게 바로 지금의 촉법소년 범죄다. 자유국가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다 성인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미성년자 차단을 한 사이트도 VPN을 통해 어렵지 않게 접속이 가능하다. 굳이 VPN도 필요 없다. 유튜브를 이용하는 어린이들은 뉴스를 통해 어른들이 접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촉법소년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그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과거엔 주변 연상들에게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양질의 정보를 유튜브만 봐도 얻을 수 있다. 과거와 뉴스와 달리 매우 쉽고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물어보면 된다.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정보수집이다. 아이들에게 공급되는 정보의 양은 과거와 달리 어른과 비등해지고 있다. 그렇게 얻은 정보를 마치 총기를 주운 어린이처럼 충동적으로 사용하여 범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 지배국가처럼 정보검열만으로 아이들을 올곧게 성장할 수 있게 도울 수가 없다. 일부 아이들은 정보 검열 같은 통제만으로도 망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착하게 키우기 위해 억지로 정보검열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스마트폰을 빼앗고 TV를 못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외의 아이들은 정보를 얻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간단히 말해 따돌림을 당한다. 정보라는 힘을 쥐지 못한 아이들은 아이들의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아는 게 힘이라고 하지. 알지 못하게 하니까 힘이 없어서 그런 거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는 것으로 힘이 강해진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정보를 검열하는 것은 그들에게 힘을 빼앗아 약자가 되게 하여 다루기 쉬운 가축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검열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할 것이다. 어린이에게 총기를 쥐어 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총기 사용법뿐만이 아니라 언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쏴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유국가에서는 정보과잉공급으로 나타나는 소년범죄에 대한 대책을 그에 맞게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법소년이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못하고 있는 건지 안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니까 말이다. 외부에서 공표되는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련자의 의견에 따르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촉법소년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첫째, 촉법소년은 강력범죄 비율이 낮고 생계형 범죄 비율이 높다고 한다. 둘째, 지나치게 어릴 때 처벌을 하는 것은 낙인을 찍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대강 이런 의견이었을 것이다. 생계형과 낙인효과. 어떤 이는 강력범죄만 처벌을 하자고 하던데 그런 의견이 받아 드려지지 않는 걸 보면 강력범죄와 생계형 범죄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하나를 더하겠다. 셋째, 촉법소년의 범죄는 사회의 책임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은 대부분 환경에 의할 확률이 높다. 환경에 관계없이 독특한 특성을 지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쌍둥이를 예로 들며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원리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묻겠다. 쌍둥이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자유주의를 접하며 성장하고 한 명은 중국에서 중화사상을 접하고 성장했다면 그 둘은 같은 사상을 공유할 수 있겠는가? 맛의 호불호나 취향 정도는 유전적 특성에 의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사상적인 부분은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좋은 것은 한국 환경 덕분이고 한국 내에서 발생하는 나쁜 것은 한국 환경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외면하는 편향적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미숙한 어린이들의 범죄는 잘못 가르친 사회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쉽게 처벌하기가 어렵다. 이런 저런 이유로 소년범죄 전문가와 관계자가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대책마련이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실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는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그런 점은 어느 전문가나 신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다. 자유국가에서는 지배국가의 도덕을 자유국가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 정보확산사회에서는 정보통제사회의 범죄대책을 정보확산사회에 맞게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의견을 내보도록 하겠다. 자유국가의 정보는 어린이에게 총기자유국가의 총기와도 같다. 주자니 위험하고 뺏자니 도태된다. 잘못 주면 범죄가 발생하고 아예 뺐으면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대부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제공받은 촉법소년들이 충동적으로 범죄를 일으켰다. 그 때 그 아이들이 앞으로 범죄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가? 촉법소년이 아닌 소년범죄는 소년원에 가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정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촉법소년은 어떻게 해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똑같이 소년원에 들어가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앞서 말한 생계형과 낙인효과와 사회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교육계가 나서야 한다. 교육계가 나서서 정규교육과정으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준다면 위의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나이와 관계없이 무인도에 들어가 생존교육을 받는다. 이 생존교육과정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으나 범죄학생은 의무고 나머지 학생은 권리다. 이렇게 된다면 생계형 문제가 해결된다.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 생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낙인효과 문제도 해결된다. 모든 학생이 자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정규교육과정이기 때문에 그걸 이수했다고 하여 낙인이 찍혀 차별 받는 일은 개인정보가 유출되지 않는 한 드물 것이다. 사회책임 문제도 해결된다. 촉법소년의 범죄가 환경의 책임이 크다면 부모와 교육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교육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 그렇다면 왜 생존교육인가? 무인도에 갇혀 받는 생존교육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물론 된다. 죄를 지은 자가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통제와 억압을 줘서 질서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죄를 지은 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줘서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위의 방식이 교도소고 아래의 방식이 추방이다. 옛 영국에서는 죄를 지은 자를 식민지에 추방하여 거기서 형기를 살도록 했다. 그리고 형기를 마친 이들이 식민지에 남아 정치에 참여하고 사법역할도 맡아 현대국가의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영국 관리들이 식민지에 파견 나오길 거부하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서 죄수 중에서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범죄자들이 자유로운 땅에서 자기들끼리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고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갔다는 것이다. 그게 지금의 미국과 호주다. 영국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사회의 질서가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질서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면 그게 가능해질 것이다. 무인도에서 자유를 주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이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정보확산사회에서 정보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앞으로 설명할 예정이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정규교육과정 내에서 죄를 지은 촉법소년들이 질서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계가 이런 일을 떠맡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사회적 영향력이 강할수록 그 집단의 목소리도 커지는 법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가정폭력피해를 받는 아이들이 편의점에 도움을 청하는 사례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하여 편의점이 파출소의 역할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편의점 관계자들은 사회에 목소리를 좀 더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위대한 독재자를 통해 단순한 예능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역할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역할만 해도 존중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단위다. 수행하는 역할이 늘어날수록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그런 사회가 잘못되었다. 촉법소년 문제는 환경의 책임이기도 하니 정규교육과정이 하나 늘어난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 구체적인 방식을 설명하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촉법소년들은 자유롭길 바라기에 자유롭게 무면허 운전을 하고 상점을 약탈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더 큰 자유를 주자. 사회의 질서가 없는 자유가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하게 만들자. 왜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질서를 만들어 준수했는지를 알게 만들자. 그래야 질서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려고 하게 될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질서를 준수하는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교육이다. 자 생존교육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보자. 장소는 한국 내에 있는 무인도다. 한국은 섬이 많으므로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한 섬을 찾기가 쉬울 것이다. 대상은 초면인 촉법소년이다. 새로운 질서를 배우는 것이므로 서로 초면인 것이 적합할 것이다. 범죄자는 의무고 나머지는 권리다.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은 교육의 의무로 무조건 생존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걸 거부하는 방법은 징병을 거부하는 방법과 같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의무냐 해외냐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해외로 가는 건 관대한 처사라며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평생 교도소에 갇혀 지내는 것과 평생 고국으로 귀국하지 못하는 것은 둘 다 한국에 사는 한국인은 만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같다. 어차피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이라면 적절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교육받고 싶으면 자원해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생존교육은 따돌림을 당한다거나 자유롭지 못해 답답하거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에게는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에는 우선적으로 강력범죄를 저지른 학생들부터 시범적으로 행하면 좋을 것이다. 기간은 1년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교육이행에 따라 기간이 조정되어도 괜찮다.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성되기 때문에 학년이수가 가능하다. 촉법소년의 나이가 다 다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생존교육이 끝나기 전 해당학년의 지식을 담은 시험을 쳐서 유급 여부를 결정한다. 생존교육은 그냥 말 그대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남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공부한 학생만이 진급할 권리를 취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원은 열 명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인원인 상황에 따라 수를 달리할 수 있다고 본다. 나이에 관계없이 반말을 하여 차별이 없도록 한다. 교관은 생존전문가가 좋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관이 군대처럼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철저하게 방치한다. 생존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알아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한다. 정말 위급할 때를 제외하면 그들의 자유에 개입하지 않는다. 방치하던 도중 만약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의 자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할 때는 그에게 더 큰 자유를 주면 된다. 예컨대 어떤 학생이 다른 학생을 폭력으로 의식주를 마련하라고 명령을 하면 그 작은 집단의 질서도 적응 못할 정도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혼자서 살아남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다 만약 혼자 고립된 학생이 무단으로 집단에 돌아오려고 한다면 집단은 질서를 어지럽혔던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게 만들면 된다. 실제 인류가 살아온 생존경쟁을 몸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왜 자유라면서 무인도에 갇히게 하는지 알겠는가? 진정 자유라면 사회 밖에 속한 외부인은 공격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일주일에서 한달 가량 혼자서 살아남게 만들자. 밥도 혼자서 만들어 먹고 잠자리도 혼자서 마련하고 노는 것도 혼자서 한다. 그리고 그것이 힘들다는 걸 깨닫고 집단의 질서에 합류하길 원할 무렵 다시 돌아와서 사과하고 화해하게 하면 된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야 한다. 환경은 인위적인 생존교육에 적합하게 먹기 좋은 풀과 낚시하기 좋은 장소와 사냥하기 좋은 동물들을 풀어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따른 교육은 말 그대로 생존교육이다. 마실 물을 만드는 방법. 채집하는 방법. 낚시하는 방법. 사냥하는 방법. 도축을 하는 방법. 요리하는 방법. 집을 만드는 방법. 옷을 만드는 방법. 놀이를 즐기는 방법. 농사를 짓는 방법. 등 이런 기본적인 생존교육부터 시작해서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도 배운다. 규칙을 만드는 방법. 역할을 정하는 방법. 토론을 하는 방법. 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배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제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직업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생존에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배우고 연령차별을 하지 않게 된다. 제대로 된 토론이 없으면 불만이 생겨 생존에 어떤 피해가 가는지를 배운다. 이런 것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해서 어떻게 해야 잘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밤 중에 별을 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직접 질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인지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어떤 질서가 옳고 그른지 판단한다. 어떻게 해야 질서 아래서 더 행복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고찰이 아이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성숙함이 자유주의 질서 아래서 자유를 감당하는 것과 총기와도 같은 정보를 다루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이상적일 뿐이다. 의도대로 되지 않을 확률도 높다. 그래도 좋다. 살아남는 방법과 질서의 필요함만 깨우쳐도 충분하다. 살아남는 방법을 충분히 터득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배운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학년에서 배우는 지식을 쌓는 도구를 줘서 스스로 배우게 한다. 시기는 생존교육을 받은 지 약 6개월부터가 적절하다고 본다. 학업적인 부분은 완전 방치해야 한다. 문제집과 필기구만 주고 알아서 공부하나 지켜보자. 스스로 공부하지 않아 유급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유급하는 동안 스스로 공부하지 않았던 그 당시의 자신을 자책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어린 학생들에게 다소 가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면 안전이 보장된 곳에서 생존교육을 받는 것이 죄에 대한 큰 대가는 아닐 것이다. 부모도 그건 납득해야 한다. 이런 생존교육이 정규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 위해서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없다면 촉법소년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아이들을 교정시켜 강제로 질서를 준수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당하는 인간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자유국가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고 그 질서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운 의견개진으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의견이 적절한지 사회에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의견이 이기적이라고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보단 그 어떤 의견이라도 표현하게 하고 그걸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자유국가에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현명한 인간이 이기적이어야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현명한 자유주의자가 되는 것.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진정 철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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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한번씩 고찰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고찰하지 않은 한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건 가르친 인간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디 진정한 자유를 찾아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최근 근친혼과 낙태죄에 관한 언론기사를 유튜브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사촌 결혼이나 낙태죄폐지에 찬성합니다. 도덕적인 걸 제외하면 그리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사촌 결혼부터는 유전적 문제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 많다고 들었는데 자유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린 한국전쟁이나 민주화 운동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이겠지요. 나는 법조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현명한 이기심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낙태죄는 태아가 세포에 불과하다는 책임회피만 아니라면 폐지하는 게 맞는다고 봅니다. 여성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가능성을 끊어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태아가 단지 세포에 불과하다는 궤변은 들어주고 싶지 않습니다. 낙태를 하면 남성과 여성 모두 도덕적 비난을 각오하십시오.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나는 여성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허용된다 하더라도 낙태가 극적으로 늘지 않을 거라 봅니다. 그 외엔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산율이 걱정일 수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환경조성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사랑해야 희생을 받아드립니다. 낙태를 억지로 막을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출산이란 희생을 받아드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기 위해 글을 쓰지 않습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걸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괴롭군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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