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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유국가의 사회구조2020.12.31 PM 07:42
자유국가의 사회구조
사람은 바람의 실현으로 행복을 느낀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 꿈을 이루면 행복하다. 어떤 형태든 동일하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깊은 만족감과 기쁨으로 행복을
느끼게 되어있다. 매우 단순한 구조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도 행복한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다. 바라는 것을 착각하게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보겠다. 사이비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바친다. 심지어 모태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자녀들까지 종교에 바친다. 그들은 그렇게 대를 이어가며 종교의 종이 된다. 종교의 종이 되는 것이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착각하게끔
세뇌하면 종살이조차 행복하다고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행복은 온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짜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인의 바람 위에 타인의 바람이 덧씌워졌을 뿐이다. 본인의 바람은 지워지지 않았다. 내면에 존재한다. 자유롭고자 하는 본인의 바람과 종교의 종이 되고자
하는 타인의 바람이 충돌한다. 그 충돌을 가리켜 번뇌나 마귀의 속삭임이라고 한다. 진짜 바람은 매도되고 가짜 바람은 신성시되어 올곧게 지키려고 한다. 일생 본인의 바람과 타인의 바람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사실은 불행하다. 하지만 세뇌 당했기 때문에 불행을 느낄 때마다 스스로를
책망한다. 불행을 느끼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의식하며
타인의 바람대로 하는 것이 행복한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불행하면 불행할수록 행복하기 위해 타인의 바람에 집착한다. 더욱 더 종교에 매달린다.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속으로는 불행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이비종교의 형태다. 자, 어떤 감정이 드는가? 지금 느낀 감정을 찬찬히 살펴보길 바란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럼 이제 이타주의 사회에 대해 생각해보자.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 사회는 종교의 종이 되길 바라는 사이비종교와 몹시 흡사하다. 이 둘은 결국 본인의 바람보다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빈자를 돕고 싶은 바람이 없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지만 도덕적 의무 때문에 빈자를 돕기로 했다. 자신의 바람 위에 도덕의 바람이 덧씌워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과 빈자를 도우라는 타인의 바람이 충돌한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는 이기적인 바람이 마음 속에서 튀어나오면 나쁜 마음이 나왔다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진짜 바람은 그릇되고 가짜 바람은 바르게 된다. 나쁜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의식하며 빈자를 돕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가짜 바람을 행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행복하지만 속으로는
불행하다. 얼마나 비슷한가?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면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결과적으로 사회를 이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의 강요가 괜찮은 것이 아니냐며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사이비종교를 이롭게 했기 때문에 신자를 세뇌해도 된다는 논리와 같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대부분이 이타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가짜 바람을 행하며 겉으로만 행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사회가 불행하다.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모두의 이기적인 바람이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무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빈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각해보자.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없는 사람 A가 있다. A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A가 사회에 속한만큼
사회의 치안은 A에게도 이익이 된다. 빈자가 사회 안전망 안에 있어야 사회환경이나 치안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A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없어도 세금이 빈자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 동의하고 여유가 되면 기부를 한다. A는 지극히 자신의 이익만을 위했던 이기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A가 이기적으로 행동했음에도 빈자는 도움을 받았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 의무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만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철저한 논리와 계산으로 필요한 일을 진심으로 한다. 어느 쪽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빈자 또한 불편함을 덜 수가 있다. 빈자에게 가는 도움이 빈자를 향한 동정이 아닌 사회
안녕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없는 가식은 도움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불편할 뿐이다. 이타주의 사회와 이기주의 사회는 둘 다 빈자를 도울 수 있었지만 개인의 행복도는 전혀
다르게 되었다. 얼마나 이상적인가? 이런 이상적인 이기주의 사회가 작동하려면 사회 구성원의
지성이 필요하다. 최소한 빈곤과 범죄의 상관관계 정도는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걸 이해해야 자신의 세금이 복지에 쓰이는 것에
반대하지 않고 찬성할 것이다. 빈자를 돕고 싶다는 바람이 없어도 지성이 있으면 사회복지에 찬성하게 될 거란 이야기다.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것저것 다 하고도 여유가 된다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사회의 질
향상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 사회의 질이 향상되면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의 질 또한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을 돕게
되었다. 그럼 다음을 생각해보자. 빈자를 돕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 B가 있다. B가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한다. B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빈자를 돕는다. 이타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을 돕는 것조차 간섭하기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누군가 기부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이타주의로 인해 도덕적 의무를 행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껴 기부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위선이나 가식이라며 공격을 한다.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이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어느 누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부터 어떤 ‘것’을 위해 시간과 재산을 희생하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 본인의 바람이면 이기적이고 타인의 바람이면 이타적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만족도를 위해 취미에 큰 돈을 쓰는 것이나
자선에 큰 돈을 쓰는 것이나 어떤 ‘것’은 동일하다. 굳이 쉽게 이해하자면 취향존중으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자선은 단지 다른 취미보다 사회적 가치가 있는 취미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만 보지 않으면 여유가 되는 한
누군가 돕는 것에 적극적일 거라 생각한다. 이들은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 구성원을 돕게 되었다. 행복은 바람의 실현으로 얻어진다. A와 B는 자신의 바람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행복해졌다. 이런 걸 보면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도덕적 의무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것이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인 사람을 기본으로 할 것이 아니라 타인을 돕는 것이 이익이지 않는
사람을 기본으로 해서 세금으로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의무로 선행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하고 싶은 걸 하게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기부단체의 기업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부단체는 자선을 하기 위해 단체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기 위해 단체를 경영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큰 건물이 필요한가? 도대체 왜 투명하지 않은가? 도대체 왜 광고비로 그렇게 큰 돈을 사용하는가? 수천 만원짜리 광고를 보고 도덕적 의무감을 느껴 기부를 하면 그 기부금은 다시 수천 만원짜리 광고비로 활용된다. 기부금을 받아서 광고비, 인건비 다 때고 남은 적은 금액만을 자선에 활용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선이 목적인지 사업이 목적인지 헷갈리게
될 정도다. 하도 불투명하고 기부금 대비 자선활용금액이 낮아
요즘에는 지역 구청에 문의해서 직접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고 한다. 확실히 수천 만원짜리 광고비로 불필요한 돈이 낭비되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 광고를 시청한 사람들은 도덕적 죄책감을 느끼거나
원치 않는 기부라는 바람과 다른 걸 했다는 불행을 겪게 된다. 기부금 효율뿐만 아니라 사회의 행복 또한 낮아지게 된 것이다.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인을 돕는 것뿐만이 아니라
돕는 사람 또한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행복의 총량을 늘려야 한다. 그걸 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기부단체는 개개인의 도덕적 의무를 강요하여 기부를 통해 운영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 자선 현황을 검토 받고 세금으로 운영하거나 개인의
취미로 운영하는 것이 건전하고 효율적이며 행복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국가에서 공익법인을 평가하고 있긴 하지만 다소 느슨하고 방만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세금으로 운영되면 보다 더 엄격하게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요점은 두 가지다. 하고 싶은 걸 하게 한다. 그렇게 해도 사회 안전망이 구축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사회구조라고 생각한다.
이타주의 사회는 대부분이 가짜 바람을 행하며 불행을
겪게 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한다.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을 받고 싶다. 그럼에도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본인의 바람보다 도덕적
의무라는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꼰대란 유교의 장유유서를 근거로 연하를 지배하려는 사람을 뜻한다. 그들은 도덕적 의무를 행하기 위해 꼰대가 되어 자녀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것이 올바른 길이고 그것이 행복한 길이라 믿는다. 자녀들과 갈등을 빚어 불행해지면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더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한다. 자녀들에게 보다 강화된 지배력을 행사하여 더욱 더 불행해진다. 이런 불행에서 벗어나기는 마치 사이비종교에서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올바르기 때문에 더욱 더 매달린다. 매달리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런
가짜 바람을 자신의 진심으로 착각하게 된다. 올바름과 무의식이 종교나 도덕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올바름이 진리가 아니다라는 것과 무의식이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이기주의 사회에서는 본인의 바람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적 의무라는 타인의 바람이 애정이라는 본인의 바람과 일치할 때에만 참고하여 바람을
이루는데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필요한 걸 무시하고 다른 것을 참고하여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이렇게 도덕의 지배를 받아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 대부분 과거의 사상들은 이런 이타주의를 기반으로 한 것들이 많아 진짜 바람을 이루며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올바른 걸 생각하고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이런 이타주의는 과거의 사상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대 사상 중 대표적인 이타주의 사상이 바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다. 약어로 PC라고 한다. PC는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 민족 성별 등의 편견을 없애 차별 받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의도는 평등이지만 방법은 지극히 이타적이다. 흑인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아시안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여성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그런 식으로 편견 당하는 이들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평등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PC주의자들은 본인의 바람대로 사는 걸까? 아니면 타인의 바람대로 사는 걸까? 생각해보자. 공정함이 본인의 바람인 사람이 있다. 세상이 공정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PC라는 타인의 바람을 우선시 했다. 그래서 공정하지 않는 걸 올바르다고 인식해버렸다. 예를 들어보겠다. 최근 미국 민주당에서 첫 흑인 여성 부통령이 지명되어
당선 유력이 되자 이런 언론기사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흑인, 아시안, 여성. 이 세가지를 강조했다. 그걸 보고 많은 PC주의자들은 환호했다. 왜냐하면 PC는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이 우선시 된 것 같으니까 환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런 걸 강조하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력이나 사상이 아닌 흑인과 아시안과 여성이라는 타고난 것을 강조하며 평가해 높은 지위를 가지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자가 백인이라는 타고난
것을 강조하며 평가해 특권을 누리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진정 평등하고 공정하길 바랐다면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검사나 의원 시절 했던 업적들을 기반으로 한 별명으로 제목을 짓고 그 안에 그 별명을 갖추게 된 업적들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아닌 역할에 초점을 맞춰 평가해야
공정해질 수 있다. 그러지 않았던 것은 공정함이란 진짜 바람이 아닌 PC라는 가짜 바람을 행하는 이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최초라는 것에 의미를 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어떤 소외되던 지역에서 최초로 대통령이 나왔다며 지역만 강조하는 언론기사가 올라온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의 이력이나 사상 같은 것이 아닌 지역이라는
타고난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 어떤 반응이 있겠는가? 지역주의를 부추겨 갈등을 빚게 만드는 언론기사라고 할 것이다. 타고난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신분제나 다름이 없다. 공화제에서 공정하려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타고난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역할에 맞는
능력이나 이력이나 사상 같은 것들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PC주의자들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이런 걸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그들도 좀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 PC가 진짜 본인의 바람이 맞는 건가? 어떤 작품이 정말 재미없어도 PC색이 섞이면 높은 평가를 받는 일이 생기고 있다. 도대체 그게 진심이 맞긴 한가? 그게 진짜 재미있어서 높은 평가를 하는 건가, 아니면 PC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미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여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건가? PC가 반드시 올바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PC를 따르는 자신의 무의식이 자신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부디 자신의 삶을 살길 바란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어떤 사상에서 얽매이는 게 아닌 참고를 하여 이기적으로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각자 조금씩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지 선동되지 않고 자주적으로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자유의 적이 아닌 이상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자유국가의 사회구조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바람의 실현으로 얻어지므로 관리가 가능한
지표다. 실체가 없는 게 아니다. 보다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수록 행복할 확률이
높다. 단지 그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여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질서를 만들고 규제를 하고 검열을 한다. 하지만 그 규제나 검열이 필요이상으로 강하게 되면 사람들은 깊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가령 범죄 우려가 있다는 추정만으로 감시하고 통제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행복하겠는가? 최근 다양한 범죄들로 인해 많은 규제와 검열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검열의 끝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와 비슷해진다. 까놓고 말해 범죄를 없애려면 그냥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면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명령에만 복종하는 개돼지로
만들면 범죄는 사라진다. 그리고 행복도 사라진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 앞에 있는 자극적인 사건 때문에 규제나 검열을 강화하자는 말에 선동되는 사람들이 많다. 이기적으로 봐야 한다. 과연 그런 규제나 검열이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올바른
것인가? 그냥 누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이타적으로 생각하여
그 주장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봤을 때 올바른지 판단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어떤 커뮤니티에서 등신대 인형의 처녀막 유무 선택지가 담긴 글을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걸 어떤 언론기사에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사실 나도 처음 봤을 때엔 놀랐다. 그런 것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해당되고
그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그런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단지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근거로 막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분명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성욕이 어떤 잘못을 낳더라도 성욕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 모든 자유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사회의 행복을 위해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도 존중하려고 한다. 나는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성의 동성애는 그래도 받아드릴 수 있는데 동성의
동성애는 솔직히 불편하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런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낙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생명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성의 행복을 위해서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할 때 낙태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근친혼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유전자의 문제가 없는
사촌간의 결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음주를 즐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음주사고라는 위험이 있더라도 음주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마약을 부정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시한부 생명에 한에 허용해서 그런 사람들을 국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 자유를 보장해야
사회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다.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어떻게 본인의 자유를 보장받으려고 하는가? 자유에 대한 책임은 단순히 한 행동에 대한 책임뿐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면서 겪을 수
있는 위험부담의 책임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 걸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무작정 자유를 억압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 유치원이나 병원에서 수많은 사건사고를 일으켜 CCTV를 설치하자는 여론들이 무성하다. 이해한다. 그런 사고를 일으키고 자정이 없기 때문에 CCTV를 설치하자는 여론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면 그 다음은
다른 집단의 자유도 억압되는 것이다. 가능한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상태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유치원도 의료계도 좀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왜 사건사고가 나는 유치원이나 의사들을 옹호하는가? 왜 그렇게 집단적이고 이타적인가? 좀 자유롭게 이기적으로 행동했으면 내부적으로 비판을
하여 자정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사람들은 무엇이 진짜 바람이었을까? 저출산을 걱정하면서 이성을 멀리하게 만드는 남녀유별과
정조관념을 중시하고 그걸 심화시키는 여성주의를 중용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저출산은 이성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이성애결핍에서 왔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저출산들을 금전적인 원인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저출산 대책을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사용했는가? 수백 조를 썼음에도 계속 떨어졌다. 한국보다 가난한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높은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한국보다 집값이 비싼 국가도 출산율이 높다. 저출산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단 말이다. 어떤 사람은 여유가 없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말의 근거로 부유한 사람들은 결혼을 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 말에 답이 있다. 여유가 있으면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이
단순한 옵션일 뿐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물에게 있어 종을 퍼트리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지 않는 종은 멸종했기 때문이다. 생물에게 있어 종을 퍼트리는 것이 최고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물인 한국인들은 수백 년간
이성을 멀리하게끔 가르침 받은 결과, 종을 퍼트리는 수단인 결혼이 그저 옵션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환경이 좋지 못해도 결혼을 한다. 전쟁 통에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결혼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결혼이나 출산이나 육아 같은 희생을
거부한다. 저출산의 원인은 너무나도 간단한 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산율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이 아직도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을 중시하고 그걸 심화시키는 여성주의를 중용하는 것은 진짜 바람이 아닌 가짜 바람을 행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타적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이기적이었으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같은 구시대적 사상을 내쫓고 이성애를 주장하긴커녕 이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부추기는 이들을 멀리했을 것이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여성의 억압을 걱정하면서 여성들이 자유롭게 꾸미거나
옷을 입는 것을 비난한다. 치마를 입는 것을 강요하는 것에 화를 내면서 치마를 입으면 잘못되었다며 바지를 입게 하거나 긴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자유롭고 누구나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바지 입고 싶은 사람은 바지 입으면 되고 치마 입고
싶은 사람은 치마 입으면 된다. 어떤 사람은 치마는 성적으로 남성이 바라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한다. 아니 남성이 바라면 안 되나? 남성은 취향도 가지면 안 되나? 그런 취향에 맞춰서 치마를 입는 여성이 잘못된 것인가? 남성도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외모를 가꾸고 근육을
키운다. 그냥 이성에 관심을 끌기 위해 이성의 입맛에 맞게끔
하는 것은 이성을 사랑하는 생물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잘못되었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그런 행동이 이성애를 결핍시키는 것이다. 부탁이니까 서로 사랑하기 위해 하는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왜 자꾸 그래서 국가를 인구소멸로 이끌려고 하는가? 미래에 어떤 평가를 받으려고 그러는가?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본인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타인이 어떻게 입든 대부분은 본인의 자유에 침해가
되지 않으니까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받아드려야 한다. 무엇이 진짜 바람인가? 부동산 투기와 주식과열을 걱정하면서 자신을 위한 사치를 비난하고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있던 건가?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정당화하길래 그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익률을 말하며 굉장히 생산적인 일이라고 반론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국가적으로 봤을 때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했는데 개인인 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생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IMF가 국민의 사치가 원인이었다고 말하며 책임회피를
할 정도로 사치에 대해 부정적이다. 반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여 급속도로 성장한 만큼 생산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런 환경에서 국민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소비를 하지 않고 부동산에 투자나 투기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지 않았을까? 소주성의 미흡한 점은 두 가지였다고 본다. 대기업의 지출은 그대로인데 노동자의 임금만 올라 중간에 있는 이들의 수익이 악화되었다. 국민들은 소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데 소비를 통한 경제성장을 도모했다. 따라서 먼저 대기업의 지출을 권장하고 국민들의 소비를
권장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했어야 했다고 본다. 국민들이 이기적으로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해결방법은 일반적으로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었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바르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바른 것도 아니다. 진짜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단정지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꼼꼼히 생각하여 무엇이 진짜 바람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인지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진짜 바람을 위해 살아야 타인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 부디 한국 사회가 행복하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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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에 대해 작성하기 전에 필요한 글들을 작성 중입니다.
한번에 그걸 정리하기는 어렵네요. 올해 말까지 써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준비할게 많군요. 생각도 더해야 하고 공부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쓰더라도 계속 갱신해야 할 것 같네요. 언제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예전부터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이 지지 받고 비난 받는 사람은
대통령과 검찰총장일 겁니다. 그 둘이 다양한 것들로 많은 갈등을 빚었죠. 그럼에도 어쩐지 그 둘이 어쩐지 적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 그 많은 이슈가 있음에도 그런 감각이 느껴져서 생각해봤어요. 적대적 공생관계가 떠올랐습니다. 여당과 야당은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여당이 못하면 야당이 지지 받고 야당이 못하면 여당이
지지 받지요. 대립관계에 놓였기 때문에 서로가 지지 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대립이 점차 바뀌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대립이 아니라 대통령과 검찰총장의
대립으로 바뀐 겁니다. 본래라면 여당이 못할 때 야당이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야당이 아니라 검찰총장이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대립구조가 바뀌자 적대적 공생관계도 바뀐 겁니다. 검찰총장은 대통령의 부패한 측근들을 쳐내고 대통령은
그런 검찰총장을 키워주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검찰총장이 야당 측에서 가장 큰 지지율을 받고 있는 게 야당이 아닌 검찰총장이라는 것부터가.. 야당은 검찰총장의 들러리가 되어버렸다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우연이라면 놀랍고 기획이라면 굉장합니다.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검찰총장도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측근들만 쳐내고 있습니다. 공수처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음. 재미있지요.
의료계에 대해 말하자면 좀 적재적소로 인재들이 배치되는
것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동네 개원의가 놀라운 능력을 보여줘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좋아할만한 일인가는 모르겠습니다. 유능한 인재가 동네에 박혀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인재들이
적재적소로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능한 사람들이 어려운 병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병을 고치게끔 해야 하는데 모든 의사들을 장인정신과도 같이 너무나도 꼼꼼하게
가르쳐서 필요이상의 능력을 보유하고 그 능력에 맞게끔 대우를 받으려고 하다 보니 전체적으로 대우 불균형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학교수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대학교수급 대우를
받으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의료계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 수를 늘려서 실력이 낮은 이들은 쉬운 일을 하고 낮은 급여를 받고 실력이 높은 이들은 어려운 일을 하고 높은 급여를 받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의사의 질 하락을 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원래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전부 유기농과 수제품을
사용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면 사회 전체에 물량을 보급할 수 없습니다. 설령 대량생산으로 사고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냥
그걸 감수하고 풍요를 누리는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의사 질이 하락해도 됩니다. 하락한 의사는 쉬운 일을 하게 하면 됩니다. 잘하는 의사는 어려운 일을 하면 됩니다. 다른 직업들은 대게 다 그렇습니다. 법조계조차 이제는 그렇습니다. 장인정신은 수공업 시대에서나 통하는 구시대적 사상입니다. 의사 수를 늘리는 방식이 굳이 공공의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적재적소로 인재들이 배치되는 방법을
고민하길 바랍니다.
- 루리웹-2142787606
- 2020/12/31 PM 08:13
- dlwed
- 2020/12/31 PM 08:15
글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읽기 힘들어요.
개행 수정 완료되면 다시 읽으러 올 수 있게 답글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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