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2021.01.31 PM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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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권의 실태와 자유 억압의 굴레

 

 

 

한국은 인권 향상 방법이 잘못되었다. 인권과 관련된 갈등의 본질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약자를 강자와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 약자가 약자인 상태에 머무르게 하며 약자로서 불편한 점만 배려해주었다. 약자라서 겪는 억압은 그대로 두고 억압을 받으면서 생기는 불편한 점에 대해서만 배려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누군가의 강요로 주저앉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주저앉아 있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되어 불편한 점이 매우 많았다. 가장 큰 불편함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다. 주저앉은 사람의 세계는 몹시 좁았다. 서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동경이나 증오를 하거나 절망하며 체념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다. 주저앉은 사람은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다. 그걸 보고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돕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 보통 주저앉은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행동의 자유라는 권리를 주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 있는 사람A는 그러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A가 주저앉은 사람 곁에서 주저앉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부당함, 불이익 등을 고려에 그에 상응하는 이익만을 얻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준 것이다. 그렇게 혜택만 주고 그대로 놔둔 채 볼일 보러 갔다.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여전히 서 있는 사람과 대등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 있는 사람A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한 것은 아니다. 사회규범이 만든 고정관념에 의해 주저앉은 사람은 계속 주저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가 곁에 있지 않을 때에는 차별 받고 억압 받고 괴로움을 당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괴로울수록 서 있는 사람A가 주는 배려에 기대며 배려만 바라보게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배려는 이제 인권이 되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했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았다. 그런 칭찬으로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권력을 쥐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서 있는 사람A의 의사와 상관없이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너도 나도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사람은 주저앉은 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배려를 요구했다. 주저앉아 생기는 불편함을 거론하며 그 불편함을 해소해달라고 강압했다. 서 있는 사람A는 그 강압에 동조하며 찬동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대신 배려를 통해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를 억압당하는 것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어버렸다. 결국 억압이 인권이 되어버렸다. 스스로 억압을 자청하기 시작했다. 억압에 대한 배려로 주저앉은 사람의 주장이 우선시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걸 악용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괴롭혔다며 거짓말을 한 것이다. 조사 결과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나도 주저앉은 사람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과도한 배려가 그런 힘을 주게 된 것이다. 많은 배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지쳐간다.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은 사람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럴 정도로 많은 배려를 받았음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여전히 억압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보던 서 있는 사람B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 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혼자 서는 것은 주저앉은 사람에게 있어 큰 모험이자 고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서지 않고 주저앉았다. 서서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저앉아 무력하게 배려를 받았다. 그런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의 자유가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동을 당했다. 「꾸미는 것은 서 있는 사람의 구경거리가 될 수 있으니까 꾸미지마! 서 있는 사람은 음흉하고 더럽고 속셈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도 믿지 말고 관계도 가지지마! 이건 서 있는 사람이 원했던 거니까 해서는 안 돼!」 자유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아무렇지도 않고 선동 당해버렸다. 억압이 곧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리분별도 제대로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도 침묵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서 있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다가 문제가 발생하면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며 서 있는 사람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주저앉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주저앉은 사람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황당하다. 주저앉은 사람은 자유를 억압 받았을 뿐이지 실은 매우 우수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유의 억압과 어리석다는 식의 발언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억압을 인권이라 배웠기 때문에 그런 부당한 것을 순순히 받아드리고야 만다. 정도를 넘어선 사건이 발생했다. 주저앉은 사람이 보기에도 이것은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서 있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의사를 나타내 보았다. 그리고 무시당했다. 주저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은 대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저앉은 사람이 스스로를 낮춰가며 배려를 받았던 만큼 주저앉은 사람의 의사도 존중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걸 가엽게 여긴 서 있는 사람B와 배려에 지친 서 있는 사람C는 주저앉은 사람도 이제는 서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있는 사람C는 더욱 더 크게 외쳤다. 「더 이상 배려를 해줄 수 없다. 너희도 일어서서 의무를 다해라.」 주저앉은 사람은 행동할 수 없었기에 의무를 다하지도 못했었다. 서 있는 사람C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주저앉은 사람은 일어나지 못했다.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은 설 줄 모르는 무력한 인간이니 계속 주저앉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서 있는 사람B C를 주저앉은 사람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으로 매도했다. 그걸 지켜보던 주저앉은 사람은 혼란에 빠졌다. 「누가 올바른 거지?」 혼란 속에서 서 보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 있는 사람A는 주저앉은 사람에게 주저앉아 생기는 이득을 강조하며 계속 주저앉도록 유도했다. 「네가 서게 되면 더 이상 배려가 없을지도 몰라. 네가 억압받아야 배려를 받을 수 있는 거야.」 주저앉은 사람은 배려해주던 서 있는 사람A의 말을 믿고 서려던 걸 포기하고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버린다. 주저앉아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배려를 요구한다. 그들은 계속 주저앉은 채 자유를 억압받으며 살고 있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여성, 미성년, 소수자 등 대게 다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다. 세세한 부분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들을 대등하게 바라보며 권리를 주는 게 아니라 열등하게 바라보며 배려만 늘려주었던 것이다. 많은 배려로 점점 혜택은 늘어나는데 정작 자유로울 권리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권리는 지나치게 낮고 그 낮은 것에 대한 배려를 해주다 보니 배려로 인한 혜택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역차별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굉장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이나 미성년이 권리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많은 게 아니라 혜택이 많은 것이다. 본인이 당당하게 쟁취한 것은 권리고 타인이 배려해준 것은 혜택이다. 권리가 아닌 혜택을 누리는 그들은 변함없이 인권이 낮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받는 걸 권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 예전엔 알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다. 억압으로 받는 배려를 권리인 것처럼 생각해버렸다는 걸 말이다. 그들이 정당한 권리가 아닌 무력함에 대한 배려라는 걸 깨닫자 많은 사회현상이 해석되었다. 역차별 논란이 일어났던 그 모든 것들이 과도한 권리가 아닌 과도한 배려로 인한 혜택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배려를 해주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배려대상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말 잔인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선의라는 점이 더 지독하다. 대부분 선의였을 것이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고 더욱 더 좋지 못한 길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면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나 미성년인권을 주장하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실제로 여성과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선 여성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성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의 자유를 억압한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여성은 꾸밀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꾸며서 자신의 매력을 가꾸고 싶은 사람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탈코르셋을 말하며 꾸밀 자유를 억압한다. 둘째, 여성은 옷 선택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예쁜 옷을 입고 싶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짧은 치마는 잘못되었다며 옷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셋째, 여성은 자신의 성을 상품화할 자유를 누려야 한다. 레이싱 모델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성 상품화할 자유를 억압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자유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들이다. 어떤 사람은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는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기 때문에 여성이 그런 걸 했던 것이라며 여성을 위해서 그런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황당하다. 여성 인권을 말하는데 남성의 의향이 뭐가 중요한가? 여성 인권을 주장할거면 여성 중심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이 꾸미고 싶으면 꾸밀 수 있어야 하고 입고 싶은 곳이 있으면 입을 수 있어야 하며 성을 상품화하고 싶으면 상품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게 권리다.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는 것이 권리란 말이다. 여성의 자유권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가?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떤 남성이 남성을 위해 자유를 억압한다고 말하는 알겠다고 말하겠는가? 미쳤다고 말할 것이다. 어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평등해진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막는다고 가정해보자. 평등을 내세우며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형평성에 매몰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최근 어떤 커뮤니티의 게시물이 기억난다. 세상에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중에서 보다 좋은 음질을 얻기 위해 고액을 들여 집 근처에 전용 전봇대를 설치했다고 한다. 게시물의 의도는 음질에 전기가 영향을 준다는 황당한 믿음 때문에 고액을 사용한 것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댓글 반응은 게시자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댓글은 이런 반응이었다. 「그것이 설령 어리석은 행위라 할지라도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이상 존중 받아야 한다.」 고액을 황당한 것에 사용한 것을 존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자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자유로울 권리고 그런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바로 인권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인권타령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노예상이 노예의 인권을 운운하며 노예를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 여성 인권을 위한다면 자유를 억압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닌 배려다. 꾸미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꾸미지 않도록 배려한다. 예쁘거나 야한 옷을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밋밋한 옷을 입도록 배려한다. 성 상품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성 상품화를 하지 않도록 배려한다. 지금 여성 인권은 권리가 아니라 배려란 말이다. 이런 배려는 사회 곳곳에서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여성 혜택들. 여성 할당제, 여성 주택, 여성 주차장, 여성 혼수, 여성 오지파견 불가 등 여성 특혜들은 전부 그냥 배려다. 이런 것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무력하고 무능하다는 전제하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생각해보자. 여성 할당제의 의미는 여성이 할당제가 필요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장애인 할당제와 똑같다. 주택, 주차장 따위도 동일하다. 여성이 무력하다는 전제하에 특별한 혜택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혜택을 보고 여성우월주의라고 하는데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혜택의 근거가 우월이 아닌 열등인데 어떻게 우월주의가 되나. 반대다. 여성열등주의다. 과거 여성이 남성에게 억압받았기 때문에 직업의 자유가 없어 여성의 비율이 낮은 것이므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강제 할당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맞아 보이지만 그게 바로 함정이다. 이런 게 권리가 아니라 배려다. 진정 대등한 관계를 위해서는 평가만 공정하면 된다. 굳이 할당제가 필요하지 않다. 정당한 권리를 바랐다면 할당제가 아니라 공정한 평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할당제를 요구한 것은 여성이 무능하니까 그에 대한 배려를 해달라는 것과 같다. 예컨대 경찰 시험. 남성과 여성이 같은 기준으로 평가 받는 것이 대등한 관계 속에서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여성이 약하다는 전제하에 무력하게 배려만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예전 어떤 정치가가 불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성인 여성과의 관계를 가리켜 그루밍 범죄라고 칭한 적이 있다. 진짜 황당하다. 그것은 성인 여성조차 제대로 된 사리분별을 못하는 어리석은 존재라 칭한 것이다. 얼마나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가? 제정신이 아니다. 남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남성은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혼란 속에서 배려가 이익을 주니 그런 천대를 인권마냥 생각해버린다. 사실상 여성 인권을 가장 낮추고 있는 부류는 여성을 열등하다 인식하고 배려를 강요하는 이들이다. 성인지감수성이 무엇인지 아는가? 법적으로 보면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가지는 불리함을 보완해야 한다며 여성 관련 범죄에 대해 여성 측의 진술 및 증언, 증거효력의 인정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성은 무력하기 때문에 배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걸 인지하고 배려하는 것이 성인지감수성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열등함을 주장하고 그 열등함에 대한 배려를 달라고 강요하고 있다. 주저앉은 사람과 정말 똑같다. 주저앉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낮은 권리와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 높은 혜택으로 역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남성들이 역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정한 여성 인권 운동을 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과 대등한 존재라고 주장해야 한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렇다. 그래야 법적으로 대등하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여성 인권이 올라가 여성이 자유로워야 남성도 자유로워진다. 여성이 꾸밈과 옷 선택과 성 상품화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이 여성의 매력을 즐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성이 성 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남성 또한 여성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어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 여성 성의 가치가 올라간 것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이다. 자유로운 성 생활을 즐기는 여성 수가 적어 희소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여성 성의 가치가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것이다. 많은 여성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과 많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은 여성을 동일한 잣대로 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남성은 매력이 있다고 여겨지고 여성은 천박하다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 또한 매력이 있다고 여겨져야 여성이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그런 여성과 자유로운 성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억압을 받으면 결과적으로 남성도 억압을 받는다. 지금 그렇지 않은가? 이런 것이 억압의 굴레다. 지배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아도 남성은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여성을 마음대로 성욕의 도구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국가인 한국에서는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으면 남성도 성적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남성과 여성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여성 순결의 중요성을 말하며 처녀에 집착하고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걸레라고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여성을 성적으로 억압해 결과적으로 남성도 성적으로 억압했던 것이다. 성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최소한 많은 경험이 있는 여성을 모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제발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억압의 굴레는 자유국가에서는 비슷하게 일어난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면 억압한 사람도 억압을 당한다. 노동자와 기업의 관계도 그렇다. 기업이 노동자를 억압하면 노동자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기업을 억압한다. 노동자가 기업을 억압하면 다시 한번 기업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지 않는 걸로 대응한다. 억압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자유국가에서는 이것이 일상이다. 위의 악순환으로 기업 규제가 강화되고 일자리 감소와 직접 고용 기피가 늘어난 것이다. 이것과 별개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일자리가 더 줄어들었다. 앞으로는 더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기업은 로봇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국가는 기업이 내는 로봇세로 국민들에게 기초생활을 보장하는 완전자동화 사회구조 정립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앞으로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다. 이 부분은 추후 다른 글로 정리해보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여성 징병에 대해 논해보자. 여성이 징병되지 않는 것은 여성이 힘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여성에게 징병의 의무가 없는 것도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 여성이 직접 나서서 징병을 요구했어야 했다. 여성 인권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것이 징병 요구 시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을 억압하는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과 그 억압으로 받는 배려에 익숙했던 사람의 합작으로 그러지 않았다. 권리 대신 배려를 받아 권리결핍이 과잉혜택을 불러 역차별이 일어나 성별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러던 중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한 사람들이 있었다. 2014년 서울대 여학생 두 명이 여성 징병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그걸 많은 여성들이 부정적으로 봤다. 징병하지 않는 근거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것이었음에도 징병 받지 않는다는 배려를 받기 위해 열등함을 받아드린 것이다. 답답하다. 임신을 핑계로 징병 불가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일도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두겠다. 임산부와 여성은 다른 존재다. 임산부나 경산부는 징병되지 않아도 된다. 징병대상은 남성과 여성일 뿐이다.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여성은 정당한 징병회피수단을 남성보다 하나 더 가진 것이다. 임신은 징병에 있어 유리한 권리로 작용할 뿐이다. 생리를 말하는 여성도 있다. 생리 때문에 군에서는 효율적인 인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성 군 간부의 존재로 그런 주장은 의미를 상실한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신체검사를 받고 힘이 강한 여성은 군 복무를 하고 그러지 않은 여성은 공익기관에서 근무를 하면 된다. 과거 내가 아직 이타주의에 머물러 있을 무렵에는 여성 징병에 부정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이야말로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인식했다면 여성 또한 군 복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여성이 열등하단 인식에서 벗어나 징병이란 의무를 행해야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고 남성 또한 권리 대신 받는 배려로 인한 역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황당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어째서 자유를 억압하는 걸 권리라고 말하는 거지?」 미성년의 자유 억압에 대해서는 정말 많이 생각했다. 그런 억압으로 자포자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나의 환경은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좋다고 말은 못해도 평범의 선은 유지했다. 그럼에도 자포자기했던 것은 자아가 강하고 두뇌회전이 빨라 자신이 받고 있는 억압이 부당하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왜 모든 어른을 공경해야 하지? 왜 내가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지? 왜 내가 싫은 음식을 강제로 먹어야 하지? 왜 내 인간관계나 취미에 간섭하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억압했다. 그것이 대부분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억압을 하고 당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왜 같은 인간인 어른에게 절을 해야 하나요? 라고 묻는 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괜히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 혼나게 되었을 것이다. 쓰다 보니 기억난다. 초등학생 때 전단지 알바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합법인가 불법인가도 몰랐다. 초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같이 전단지 알바를 모집하는 곳을 찾아갔다. 피자집이었다. 배달을 주로 하는 곳이어서 가게 안은 몹시 좁았다. 옹기종기 모여 가게 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일하겠단 의사를 전달했다. 몇 가지 당부를 듣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급여는 장당으로 계산했다. 가게 안의 작은 탁자 위에 전단지 뭉치들이 수북이 쌓였다. 각자 전단지 한 뭉치씩 가지고 와서 전단지 위쪽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그러면서 전단지를 붙일 구역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준비가 끝나고 전단지 뭉치를 들고서 거리를 떠돌았다. 보통은 각자 다른 구역을 갔을 테지만 우리들에게는 놀이와도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냥 다 같이 돌아다녔다. 한 장씩 붙이고 다니다가 어떤 어른을 마주치게 되었다. 그 어른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험악하게 혼을 냈다. 자기 집 앞에 붙여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벼락 같은 호통에 부들부들 떨었다. 어디서 어린 놈이 벌써부터 이런 일을 해! 울면서 붙였던 전단지를 때서 회수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스카치테이프가 붙은 전단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렸다. 그 뒤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대로 도망쳤거나 피자집에 가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 뒤로 학창시절 동안 제대로 된 알바를 해보지 못했다. 그 사람에게 있어 이 사건은 그냥 단순한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훈육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겐 어른에 대한 불신을 늘리는 사건이 되었다. 좀 차분하게 설득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았다. 윗사람의 시선에서 잘못을 일방적으로 꾸짖고 매로 훈육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른이 잘못하면 괜찮아도 아이가 잘못하면 혼이 났다. 아이와 어른은 대등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른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어른에 반항하며 일탈을 일삼는 애들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런 애들은 생각이 짧은 멍청이들이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재미난 놀이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봤다. 아마 밤이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은 동네에 널리고 널린 불법주정차량에 가까이 가서 자세를 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뭘 하려고? 자세를 잡고 다리를 하늘 위로 쭉 올리더니 불법주정차량의 사이드 미러를 내려찍어서 차와 분리시켰다.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아이들은 폭소하며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기겁한 나는 그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졌던 걸로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에게 그 행동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어른들을 혼내줄 수 있기에 재미있는 놀이였던 것 같다. 아마 지금 민식이법 놀이와 의도는 비슷할 것이다. 그 뒤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일정부분 이상 도덕에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 파손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생각하면 복잡한 심경이다. 도덕에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런 놀이를 즐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덕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도덕의 지배를 받지 않았어도 충분한 철학적 지식과 사유를 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 올바른 일을 결정할 수 있었을 거라 본다. 올바른 일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행해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을 반드시 지키는 것으로 행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개돼지로 취급하여 착하도록 세뇌한 뒤 사육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은 아이라고 할지라도 교육과 사유를 통해 스스로 올바른 일을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다 가능할거라 본다. 아이들을 어리석어 보이는 것은 어리석게끔 가르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현명하고 우수하다. 민식이법 놀이를 생각해보라. 법을 악용해 어른들을 골려 주고 있다. 바둑은 초등학생도 프로가 될 수 있다. 두뇌회전은 아이가 어른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가 과잉 공급되자 법을 악용할 정도로까지 똑똑해진 것이다. 똑똑한데 방향이 좀 잘못되었을 뿐이다. 좋든 나쁘든 지적 수준이 보장되면 교육 방법에 따라 충분히 올바른 판단이 가능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일들을 겪고 나니 어른과 아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혼자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때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모든 걸 자포자기 했다. 마냥 사회에 순종하게 되었다. 도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타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자신의 말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했다.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는 말을 하려고 정말 노력했다. 머릿속에서 어떤 언행이 떠오르면 그 언행이 만들 가능성을 하나하나 다 떠오르고, 그 떠오른 가능성을 도덕으로 전부 검열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의 대화가 어려웠다. 검열하는 동안 대화의 흐름이 끊기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리버리 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하면 깊은 후회와 슬픔을 느꼈다. 정확히 도덕이 내게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경쟁을 할 때도 경쟁에서 떨어진 사람이 상처를 입을 것까지 머릿속에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경쟁에서 이겨도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쁜 척을 할 때가 많았다. 경쟁에서 지면 슬프지만 안도했다. 그래서 슬픈 척을 할 때가 많았다. 자아존중감이 최하로 떨어졌다. 언제나 타인이 우선이고 타인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도덕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과 PC방에 간 적이 있다. 내 옆자리에는 지적장애인이 앉아있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혐오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 사람은 컴퓨터 앞에 앉아 열린 한글 문서를 보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 문서에는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치 원숭이가 키보드를 두들기는 듯 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 몸에서 땀이 줄줄 새어 나왔다. 도덕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나를 찔렀다. 왜 너는 정상이야? 쟤는 저러고 있는데 왜 너는 정상이야? 왜 너는 살고 있어? 내가 멀쩡하다는 사실조차 지독한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이런 건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이었다. 미칠뻔했다. 죽을 것 같은 심적 고통을 느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친구에게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아마 그 친구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머릿속에서 검열되어 말문이 막힌 것이다. 그냥 자리를 옮기고 같이 놀다가 헤어졌다. 그때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장애인에 대한 격한 반응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당시에는 그것조차 굉장한 후회로 돌아왔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고민을 말할 상대가 없었다. 일차적으로는 믿고 기댈 사람이 없었고 이차적으로는 그때까지도 도덕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삼차적으로는 내면에 남은 작은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내면을 문제로 상담 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가족이건 친구건 교사건 상담사건 의사건 말이다. 최근에 조금씩 글이나 말로 풀어보고 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계속 생각만 했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것인가? 이유가 뭔가? 도대체 왜! 지금은 안다. 내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었구나. 신체자유의 억압을 느껴 더 이상 억압에 대한 반항을 포기하고 도덕에 순종하는 순간 나는 자유를 잃어버린 거였구나. 인간을 어떤 사상의 노예로 만들면 이렇게 되어버린다. 그 사상 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사상에 어긋나는 걸 보면 몹시 불편하고 괴로워진다. 한국 사회에 예민하고 진지하고 불편한 사람이 많은 것은 그 만큼 도덕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말하면 건방진 것 같아 불편해진다. 여성이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지면 문란한 것 같아 불편해진다. 보통 도덕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대게 그렇다. 최근 여성주의자들이 온갖 것이 불편하다며 호소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여성주의에 지배 받는 사람들은 여성주의에 어긋나는 것과 같은 걸 보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해진다. 그래서 그걸 여성주의에 맞춰 바로잡으려고 한다. 발작하듯 잘못되었다고 호소하고 항의하고 억지로 바뀐다. 보통 사상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 그들이 불편한 것은 그들이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해지면 이슬람인이 마호메트 풍자만 봐도 발작하며 풍자한 사람을 참수하는 것과 같게 된다. 어떤 사상이든 지배를 받으면 그렇게 된다. 사상의 노예다. 따라서 인간은 특성 사상에 지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도덕보다 자유가 우선되는 이유다. 다양한 사상들을 접한 뒤 옳고 그름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을 사람들과 토론하여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미성년을 예로 들어보겠다. 미성년은 자유를 억압받는다. 인권 중 자유권이 굉장히 낮다. 미성년과 성년은 대등하지 못했다. 세 가지를 지적해보겠다. 첫째,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 시간 관계없이 검열이 없는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셧다운제를 도입해 야간에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하도록 막았다. 늦은 시각까지 학원에 다녀와 잠들기 전 잠깐 게임을 즐기는 것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검열을 통해 온전한 문화를 즐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과거 만화 검열 시대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검열의 칼날은 존재했다. 그 칼날은 실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자신의 불편유무에 따라 잘라내는 걸 결정했다. 요즘은 여성주의에 영향을 받아 야한 걸 많이 검열한다. 그런데 알고는 있겠지? 아이들이 검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야한 것을 보고 즐기고 있음을 말이다. 그럼에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도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아이들 성욕을 야한 게 아니면 해소할 방법이 없는데 누가 야한 걸 안보겠냔 말이다. 지독한 억압을 받거나 욕구가 없는 일부를 제외하면 다 본다. 사춘기가 온 이들에게 야한 걸 검열하는 건 그냥 자기만족에 불과한 허울뿐인 검열이다. 특히 여성이 야한 옷을 입으면 여성이 많이 불편해한다. 그런 것은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받아왔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남성이 야한 옷을 입는다고 남성이 불편해하는 일이 있었던가? 여성은 지금까지 조신하고 정숙하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강압을 받아왔다. 그 억압에 의해 야한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이다. 일부 여성들의 발작적인 야한 것의 검열은 과거 남성들이 주입한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나타낸다. 그런 자기검열이야말로 남성에 종속적인 것이다. 부디 여성이 자유롭게 되길 바란다. 폭력적이거나 범죄를 다룬 것에 대한 검열도 의미가 없다. 뉴스만 봐도 그거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도 많다. 범죄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민식이법 놀이를 어디서 배울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사리분별이 어려운 정말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검열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하는 힘을 저해하는 기능을 할 뿐이다. 웬만한 것들은 편견 없이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런 걸 학습하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냥 주입식으로 올바른 것만 가르치는 것은 그 인간의 성장을 막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가르침의 노예가 된다. 지금의 검열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수동적이고 무력하게 만들 뿐이다. 검열은 우민을 위한 정책이다. 한국인이 현명하다면 검열을 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개인사생활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아이들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위해서라며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하도록 강제한다. 이동통신사는 청소년에게 유해정보 차단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법이 시행되고 다양한 회사에서 스마트폰 감시 앱이 나왔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보호라는 미명아래 스마트폰 감시 앱을 설치했다. 스마트폰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을 감시했다.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어떤 문자를 보내는지, 무슨 앱을 사용했는지 확인한다. GPS기능을 이용해 어디에 이동조차 감시한다. 미성년은 독재국가의 국민들처럼 통제와 억압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받는다. 그럼에도 어떤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인권이 없기 때문에 발언의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나았다. 부모나 교사가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다소 위험할지라도 그만큼의 자유를 누렸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자유가 보장되는 곳이 없다. 언제나 스마트폰이 지켜보고 있다. 성년은 미성년을 대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리 감시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호를 위해서라는 말로 합리화할 뿐이다. 보호라. 보호라는 이름으로 손바닥 안에서만 키우면 아이들은 손바닥 정도의 성장밖에 못한다. 대부분 자유로울수록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부디 아이들의 개인사생활을 존중하길 바란다. 셋째,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 지금까지 미성년과 성년의 연애는 남녀간의 시각 차가 존재했다. 가령 남성 중고등학생과 여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과 남성 대학생과 연애를 하면 문제제기가 나왔다. 여성 대학생은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는 반면 남성 대학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백안시를 당했다. 같은 상황이라도 성년 여성보다는 성년 남성이 처벌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이걸 보고 많은 남성들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비판하곤 한다. 남성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다. 그것은 성년 중심적인 사고다. 미성년을 중심으로 사고하면 남성 중고등학생이 자유롭고 여성 중고등학생이 억압을 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성관계에 대한 인식도 동일하다. 남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도 문제가 없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알 것이다. 미성년 남성은 성년 여성과 성관계 맺는 걸 꺼려하지 않는다.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이 중요하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만약 끌리는 것이 있으면 연령과 관계없이 성관계 맺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여성 중고등학생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는 인식이 있어 성년 남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문제가 된다. 미성년 여성은 많은 부분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사를 존중 받는 일이 적다.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상서 중학교 성추행 의혹 교사 자살 사건이라는 것이 있다. 여학생 7명이 수학교사가 자신들을 성추행 했다며 호소한 것이다. 진술서가 작성되고 그 진술서를 근거로 경찰에 성추행으로 신고했다. 경찰에서 조사한 결과 여학생 모두가 성추행이 없었다고 말을 해서 혐의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사소한 사건에 대한 불만으로 거짓 진술서를 썼는데 그게 고발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부안교육지원청에서는 2차 가해의 우려를 명분으로 무고한 교사의 징계를 밀어붙여 출근 정지와 강제 퇴출 후 직위해제 되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자 가해여학생과 그 부모들은 사죄의 메시지와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그 의견을 무시하고 전라북도교육청 학생인권센터는 가혹행위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한 것이 맞는다고 하며 계속 조사했다. 교사는 최초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학생들이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협박을 받고 오해였다며 혐의를 인정해버렸다. 가해여학생들을 위해서 누명을 받아드린 것이다. 이후 직위해제가 다시 해제되었지만 학교에 돌아가지 못하고 강제로 40일 휴가서를 작성하고 타학교 전보조치에 서명했다. 그 교사는 12일 동안 단식하다 자살했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다양하다. 세세한 부분은 넘기겠다. 여기서 초점은 여학생의 의사가 존중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학생인권교육센터는 가해여학생들의 탄원서를 보고 누가 시켜서 쓴 것이 아니냐며 무시했다. 학생인권을 다루는 사람들이 학생의사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여학생을 어리석게 봤으면 탄원서의 진위여부도 검토하지 않고 무시를 하나.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결국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인권이 낮은 사람을 대등한 존재로 인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고 보면 된다. 특히 여성과 미성년은 권리가 낮고 혜택이 높다. 그 둘이 합쳐진 여학생은 매우 낮은 권리과 매우 높은 혜택을 받고 있다. 그래서 여학생의 의사는 제대로 존중되지 못하지만 처벌이 강한 것이다. 가령 미성년 여학생이 잘생긴 성년 대학생과 자기의사로 성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해보자. 마음에 들어서 자기의지로 호감을 나타내고 성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회에 알려지면 비난을 받는 것은 성년 대학생이다. 미성년 여학생의 의사는 존중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인권타령 하면서 관점이 인권 대상이 아닌 건가. 미성년 여학생의 자유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정말 어처구니 없다. 하긴 한국에선 성인여성도 그루밍 언급하며 머저리로 보는데 미성년은 말할 것도 없겠지. 한국에서는 혜택이 높은 순서대로 권리가 낮다. 열등한 존재에 대한 과잉혜택.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미성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늘어나면서 미성년은 더욱 더 억압받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성년 남성에게까지 억압을 하려는 시도가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 미성년 남성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 받아 원하는 상대와 관계를 맺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미성년 여성에 대한 억압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평성 문제로 미성년 남성까지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미성년 남성이 자유를 누리고 미성년 여성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미성년 여성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향이 바른 길이 아닌가? 왜 미성년 남성까지 억압하려고 드는가? 성관계를 맺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존중 받는 게 권리인 거지 억압받는 게 권리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도 결국 억압의 굴레다. 여성이 억압받자 남성도 억압받는다. 토할 것 같다. 이런 걸 여성을 억압하던 남성들과 억압받던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걸 안다. 정 미성년 여성들이 억압받기를 바란다면 최소한 미성년 남성들은 억압하지 말아라. 왜 더 미성년 인권을 악화시키는가? , 그러면 또 형평성 문제로 왜 여성은 처벌받지 않냐며 말이 나오겠지. 정말 한숨만 나온다. 억압의 순환이 끝나질 않아. 결국 미성년 남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란 자유를 누리려면 미성년 여성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제발 좀 미성년 인권 위한다면서 억압하지 말고 부디 자유의 시각으로 미성년의 자유를 보장하길 바란다. 간단하게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자기결정권 박탈을 다뤄보았다. 이런 것들이 바로 미성년이 권리가 아닌 배려를 받고 있다는 근거다.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위험할 소지가 있는 걸 막아주는 배려를 받고 있다. 미성년은 성년보다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배려다. 그리고 그런 배려는 국민이 어리석다는 전제하에 독재자가 우민정책을 펴는 것과 같은 논리다. 국민들은 어리석음으로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아이들은 어리석음으로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 똑같은 짓을 하면서 미성년 인권을 운운하는 걸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미성년자들은 이미 성년 수준으로 우수하고 똑똑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다면 미성년 범죄를 떠올려보라. 미성년자들도 성년 수준의 지식을 보유하여 교활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촉법소년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걸 말하며 과감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정보가 과잉공급 되면서 미성년자들도 굉장히 똑똑해졌다. 그럼에도 미성년을 보호할 때는 미성년의 어리석음을 말하며 자유를 억압하고 미성년 범죄가 발생할 때는 미성년의 똑똑함을 말하며 성년 수준의 처벌을 요구한다. 기준이 없다. 기준이. 이런 것은 결국 미성년은 어른 손바닥 위에서 지배를 받아야 하지만 처벌은 성인 수준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은 미성년 인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년을 그저 편하게 다루고 싶어하는 것뿐이다. 한국은 외국보다 자녀살해가 많다고 한다. 전체 살인 대비 자녀살해 비율이 한국은 5%인 반면 미국은 2% 영국은 1%라고 한다. 5배까지 높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겠는가? 부모들이 자녀들을 대등한 인격체가 아닌 단순한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자녀들은 자신의 분신으로 보며 강제로 학습시키는 일들도 상당히 많다. 그 중 충격적인 것은 전교 1등 모범생의 모친 살해다. 전교 1등이었던 그 학생은 24시간 감시당하며 강제로 공부했다. 책상 앞에 앉아 잠깐 졸았다는 이유로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9시간 동안 골프채로 200대를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를 살해할 때도 사흘이나 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했었다고 한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그 학생은 잠든 어머니를 보고 화를 참지 못하고는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눈을 찔렀다고 한다. 찔려서 죽어가는 학생 어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 이렇게 하면 넌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거야, 왜 이러는 거야? 이에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대로 가면 엄마가 나를 죽일 것 같아서 그래. 지금 엄마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엄마 미안해. 실제로 그 학생은 1등이 아니었다고 한다. 지나친 억압에 성적표를 조작해서 보여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억압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은 큰 파장을 주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여전히 미성년 인권은 변한 게 없이 여전이 억압하고 있다. 그 근간인 도덕이 바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녀와 부모는 대등하지 못하다. 유교의 가르침인 장유유서 자체가 미성년과 성년을 차별한다. 자녀살해를 보고 분노하는 성년들이 미성년이 성년에게 반말을 하면 화를 내거나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자는 건가? 자녀살해 비율이 높다는 현상에 대한 분석으로 도덕을 원인으로 삼지 않는 것은 마치 종교인이 종교 교리를 의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녀와 부모를 차별하는 걸 올바른 도리로 만든 도덕이 바뀌지 않으니까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도구처럼 살해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미성년이 지금처럼 배려를 받지 못하던 시대의 법은 법부터가 자녀와 부모를 차별했다.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면 존속살해가 되지만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면 비속살해가 된다. 미성년자의 인권도 낮고 배려도 낮던 시절의 법이다. 그걸 보고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살해할 때의 처벌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 최근에도 자녀살해 뉴스가 많이 나오고 있다는 걸 안다. 특히 최근 놀란 것은 양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살해한 사건과 사실혼 남편 충격 받으라고 8세 친딸을 살해한 사건이다. 둘 다 자녀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미성년 인권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배려만 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녀살해의 처벌과 자녀보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미성년 인권은 더 낮아진다. 보호받을수록 열등한 존재로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손안에 들어온 인간을 얕보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교도관이나 납치범이 죄수나 인질을 가볍게 여기는 것과 같다. 대등하지 않으면 결국 인권은 낮아지게 되어있다. 사건이 많아질수록 보호와 감시는 늘어나고 보호와 감시가 늘어날수록 미성년 인권은 더더욱 낮아진다. 낮아진 인권으로 인간 대접받지 못하는 미성년은 더더욱 쉽게 살해된다. 이 악순환을 멈추려면 미성년을 대등한 인간으로 대접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빠르게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수동적으로 보호만 받게 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줘야 한다. 정녕 미성년 인권을 위해서라면 문화생활의 억압과 개인사생활의 억압과 성적 자기결정권 박탈을 할 것이 아니라 빠른 사회진출과 함께 미성년 선거권을 줘야 한다. 최소한 교육관련 선거는 그에 대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한다. 애들은 뭘 모르니까 선거권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 자체가 미성년자들을 어리석은 인간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미성년 인권을 주장하면서 선거권을 주지말자는 주장을 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음주, 흡연, 운전. 이것들도 미성년이 억압받은 것들 중 하나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과연 이 억압은 정당한가? 최근 미성년자들의 무면허 음주운전이 많은 것은 억압에 대한 반발이다. 미성년자 사이에서 흡연하는 애들이 발언권이 쌘 것은 성년의 권리를 누리는 미성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성년 사이에서 힘을 가지게 된다. 흔히 말하는 일진이나 인싸다. 이것만 봐도 안다. 억압받을수록 천대받는다.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사실 과거 미성년 흡연에 대해서 고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미성년 흡연금지에 대한 근거로 건강을 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성년이라고 해서 건강에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 더 해롭다고는 하더라도 성년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므로 건강을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다고 봤다. 가령 성년이라고 해도 지병이 있을 경우 미성년보다 흡연이 더 해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흡연권을 존중하고 있지 않은가. 건강이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피보호자와 보호자 관계를 떠올렸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건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피보호자가 보호자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그런 흡연 금지를 받아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자기합리화였던 것 같다. 이미 미성년은 흡연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 맞춰 논리를 짜냈던 것이다. 솔직히 부끄럽다. 흡연 금지가 보호자의 책임 문제라면 피보호자와 보호자의 협의 하에 흡연을 허용 받을 수 있었어야 했다. 미성년 학대는 미성년이 바라지 않는 걸 강제로 시킬 때 적용된다. 그것이 설령 공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흡연 문제도 동일하다고 본다. 강제로 피우는 것이 미성년 학대다. 본인이 바라서 피우는 것은 보호자의 허락 안에서 그 미성년의 자유권이라고 생각한다. 음주나 흡연이 단순 책임 문제면 법적으로 금지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운전은 사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음주나 흡연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다. 본인이 바란다면 보호자 허락 하에 가능해야 하는 것이 미성년의 권리라고 본다.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 흡연을 해본 적도 없다. 술 마시고 운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안이나 길에서 흡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그걸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자유를 보장한다. 미성년도 동일한 잣대로 본다. 사고 가능성 때문에 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지 않는 것처럼 건강 침해 가능성 때문에 미성년의 음주나 흡연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억압 받는 것보다 자유로운 것이 권리다. 미성년을 위해서라면 건강 침해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허용하자고 하지는 않겠다. 음주를 즐기지 않고 흡연을 하지 않는 내가 굳이 그걸 하자고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억압하는 것이 아닌 허용하는 것이 권리라고 지적할 뿐이다. 음주나 흡연을 즐기는 미성년을 보면 나는 그 자유를 존중할 것 같다. 음주나 흡연 따위도 미성년 인권의 본질적인 부분과 동일하다. 음주나 흡연을 할 권리는 없는데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 혜택은 있다. 주점에서 미성년이 술을 마시면 미성년이 처벌받는 게 아니라 성년인 주인이 처벌받는다. 이걸 보고 미성년의 권리가 높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권리가 높다면 음주와 흡연이 가능했을 것이다. 권리는 없는데 혜택은 많으니까 처벌을 성년이 받은 것이다. 적어도 앞으로 운전은 가능할 것 같다.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이 되면 미성년 혼자서 차량에 탑승할 수 있겠지. 미성년이 보다 더 자유롭길 바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도구가 아니다. 높은 지능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다.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서 미성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 미성년 인권을 위한다면 미성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여 미성년과 성년을 대등한 존재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함부로 자유 억압을 인권이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과 미성년에 대한 자유 억압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들은 지금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혜택만 받고 있다. 여전히 자유를 억압받는다. 이것이 한국 인권의 실태다. 그들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이들도 자유를 억압받는다. 자유국가에서는 그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자유 억압의 굴레다. 대표적으로 여성과 미성년의 예만 들었지만 다른 것도 적용될 수 있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기 위해서는 타인의 자유도 보장해야 한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 어떤 것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 다른 것도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다. 한국에서는 누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많이 억압되었다. 개그의 본질이 무엇인가? 조소다. 누군가를 비웃는 것으로 사람은 시원하게 웃을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본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타인이 어떤 것에 웃는지 파악해보라. 하하하, 멍청이. 바보 같은 짓을 보았을 때 사람은 웃게 된다. 정말 모르겠으면 바보 같은 인간이 뉴스에 나왔을 때 웃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된다. 코로나 사태를 막기 위해 마스크 대신 코걸이를 걸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걸 판매한 인간이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사람들은 웃었다. 말도 안 되는 걸 판매하는 사람이나 그걸 사는 사람이나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바보 같은 걸 비웃음으로써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졌다. 인간은 비웃는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생물이다. 그러니까 개그맨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정당하게 비웃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개그맨이고 그런 장소를 제공하는 게 개그프로그램이다. 본인을 희화화하거나 타인을 희화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조소하게 만든다. 사회의 어둠을 조소하는 것을 블랙 코미디다. 개그의 본질은 조소다. 그런데 그런 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조소가 불편하다고 개그에서 조소를 빼버렸다. 어떤 인간은 논문까지 썼다. 여성의 외모를 웃음의 소재로 쓰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정신이 나갔다. 사람이 무엇으로 웃는지도 모르는 인간이 조소를 막아버리는 바람에 사람들은 속 시원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더 웃긴 것은 개그를 직업으로 삼은 여성이 그것에 선동 당해 여성을 희화화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개그를 직업으로 삼을 사람이 개그의 본질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말 눈물 나게 웃기고 슬프다. 여성에 대한 조소가 사라지자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누군가 불편하다고 말을 하면 개그 소재로 쓸 수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자 다른 것에 대한 표현의 자유도 억압되었다. 블랙 코미디를 본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시시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한숨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여성을 조소하면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대머리를 조소하면 대머리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되는가? 많은 여성들이 대머리는 조소하면서 여성이 조소 당하는 건 참을 수 없어한다. 흑인이 흑인 조소를 감내하지 못하면서 동양인 조소는 즐기는 것과 같다. 왜 그렇게 비겁한가? 물론 이유는 안다. 사상에 지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마호메트 풍자를 불편해하는 것과 같다. 이런 지배를 받아 불편해진 사람들이 무한도전 같은 예능프로그램에 참견하고 간섭하여 조소를 빼버렸다. 그러자 정말 재미없는 예능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불편한 걸 배려해주는 것이 당연해지다 보니 점점 공영방송에서 개그프로그램들이 줄어들었다. 개그의 몰락은 조소가 불편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위와 같이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 뉴스에 등장하면 댓글에서 이런 반응이 나온다. 이래서 개콘이 죽었지. 개그 프로그램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으니까 개그 프로그램이 죽었다고 말을 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뉴스가 재미있어서 개그 프로그램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당하게 공적으로 비웃을 수 있는 장소가 뉴스 말곤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작은 조소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상의 노예들 때문에 자유로운 인간들이 정당하게 웃을 수 있는 공간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 얼마나 개 같은 일인가? 여성들도 조소로 웃을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여성이 조소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동에 휘말려 다른 것에 대한 조소도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자 자신의 자유도 억압된 것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동조하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이여, 이런 결과에 만족하는가? 이런 억압의 굴레는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일부 여성들은 사상의 지배를 받아 여성 성 상품화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남성이 즐길 수 있는 성 상품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옷도 검열하고 야한 것도 검열하고 창작물도 검열한다. 지독할 정도로 검열하며 남성이 즐길 자유를 억압했다. 그런 것이 길어지자 남성 또한 여성을 억압하기로 했다. 알페스 공론화다. 알페스라는 것은 Real Person Slash로 실제 인물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는 걸 뜻한다고 한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출연진을 가지고 동성애와 성적 관계를 묘사한 것이 바로 알페스일 것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런 것에 무관심했다. 그것은 여성들의 자유였다. 그것이 설령 부도덕하더라도 자유를 보장해줬다. 그럼에도 자꾸 일부 여성들이 지배 받기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 때문에 남성들의 자유를 억압하자 남성들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여성들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작물에 간섭하고 AI 성희롱에 발작하며 억압하려고 드니 참을 수가 없어진 것이다. 도대체 피해자가 없는 창작물은 잘못되었고 피해자가 있는 알페스는 괜찮다는 논리는 뭔가? 정말 이번 알페스 공론화는 잘했다. 역지사지를 느껴봐야 이제 억압의 굴레를 조금이나마 인지하겠지. 그렇게 해서 이 악순환을 좀 끊어야 한다. 본인의 자유가 보장받고 싶으면 타인의 자유를 보장해줘야 한다. 그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이다. 어떻게 자유국가에서 그런 상식조차 모르고 남의 자유를 아무렇지도 않게 억압하려 드는가? 한국에 자유주의자가 정말 부족하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한국은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지감수성이 부족하다. 자유가 뭔지는 알고 그렇게 억압하는가?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전쟁을 한 지 백 년이 지나지 않았다.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한 지 오십 년도 지나지 않았다. 자유가 소중한지 모르는 인간들이 자신이 억압받아 생기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걸 보면 정말이지 분통이 터진다. 몇 번이고 말하겠다. 본인이 자유롭고 싶으면 타인도 자유롭게 해야 한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은 대부분 그냥 자유롭게 놔둬야 본인의 자유도 침해 받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음에도 불편함을 느낄 때에는 본인이 어떤 사상에 지배 받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해보길 권해보겠다. 십중팔구 너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있다. 지배 받지 말고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롭자고 하는 말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슬프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가? 한국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어떨 때에는 그 똑똑함이 지식만 높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확히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데 사상의 지배를 받다 보니 그 지혜로움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상의 지배를 받지 말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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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 언급하면서 윤리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AI 성희롱이 뭐가 문제입니까? 자꾸 윤리 들먹이며 자유 억압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억압 받을 거면 혼자 받으십시오. 최소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런 개소리에 호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억압이 싫다면 스스로 자유주의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상의 노예들이 자유로운 인간을 억압하는 걸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도덕에 지배 받는 인간이 저지르는 횡포를 저지해야 합니다. 누군가 도덕이나 여성주의 같은 걸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하면 자유주의를 내세우며 그것에 대항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럴 것입니다.

 

자유주의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역할주의가 인간의 평등을 최대한 보장한다. 아마 새로운 올바름에 대해서는 이걸 중심으로 쓸 것 같습니다.

 

어떤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어서 사회가 혼란스러운 걸 보면 어느 때보다 사상가가 필요한 시대 같습니다.

댓글 : 4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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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1/31 PM 06:23
가독성이 너무 나쁘네요...
문단 좀 보기 편하게 나눠주셔요...
사회가 혼란스러운게 과연 기준이나 잣대가 난잡하고 엉망이 되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원래 기준이나 잣대는 난잡했는데 그것들이 잘 들어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저는 사상가의 문제가 아니라 설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기 주장들만 외치고만 있고 설득할 생각이 없으니 난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사상에 빠져있느라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헤아려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설득하거나 전달하는 힘도 부족하더군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혹은 글을 어떻게 볼지, 그들이 잘 이해하고 잘 볼 수 있게를 생각 안하는 것 같습니다.
한줄 요약좀;;
지나가던 국문과가 한 자 적어요. 글의 시각과 논조를 떠나 글을 이만큼 분량으로 적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열정이고 노력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님의 글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느낄 수 있도록 글의 외형적인 부분도 다듬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문단 나누기나 글의 근거 정도 추가해 다듬어도 훨씬 좋은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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