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자유적응실패와 마약대처방법2021.03.18 PM 05:43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자유적응실패와 마약대처방법

 

 

 

「자유를 잃은 자가 자유를 얻게 되면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보다 한국사회를 명료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은 없다.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대부분 그렇다. 간단히 말해 자유적응실패다. 한국은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린 시기가 지극히 짧다. 과거 한국은 왕조와 일제와 군부의 지배를 받았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서 끊임없는 간섭을 당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한국이란 국가는 과거부터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매우 적은 편이다. 국가의 기반을 유지한 사상 또한 외부에서 들어온 것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불교, 유교, 기독교를 비롯해 현대 정치이념들 전부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민족 고유의 종교나 사상의 영향력은 낮은 편이다. 교육이념으로 정한「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은 현대 자본주의와 배치되는 사상으로 그걸 기반으로 한 교육이 이타적인 인간을 길러내 이기적인 자본가의 도구로써 사용되게 만들었다. 상업이 우대받는 사회가 되었음에도 자본을 경시하고 금융교육을 멀리한 것은 농노에서 혜택만 늘어난 노동자의 지위와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타주의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같은 사상의 기본은 이기주의다. 본인의 자유와 이익과 주권을 위해 타인의 자유와 이익과 주권을 위한다. 본인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이기심을 허용한다. 개인소유가 일부만 가능하면 그게 바로 독재다. 모두가 이기적인 것이 자유국가다. 그런 상황에서 고유하다고 할 수 있는 이타적인 홍익인간조차도 이제는 낡은 사상일 뿐이다. 본인이 타인을 사랑하고 아끼고 돕는 것은 타인의 지시가 아닌 본인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타나야 한다. 타인을 일방적으로 돕는 것이 아닌 타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듣고 타협점을 맞춰나가야 한다. 본인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결코 행복하지 않은 삶이다. 지금 한국은 현대 한국인을 위해 맞춰진 어떤 고유한 사상이 없었기에 국민들은 외부의 사상에 갈기갈기 찢겨져 불필요한 다툼을 하고 있다. 외국 친한파가 아닌 한국 친한파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외부에 휘둘리고 있다. 내부가 낮은 출산율과 높은 자살률로 미래가 어두운 상황에서조차 그러고 있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런 사상적 부자유는 과거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한국인은 결혼, 출산, 학업, 국방, 취업 등 사회에 필요한 일들 대부분을 누군가의 강요로 행했다. 첫째, 결혼. 한국인은 웃어른의 명령으로 본 적도 없는 이성과 중매결혼을 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서 사랑을 해야만 했다. 둘째, 출산. 한국인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출산을 강요 받았다. 대를 잇지 못하는 딸을 배었을 경우 낙태를 당했다. 셋째, 학업. 부모와 교사의 강압으로 공부를 했다. 그 때문에 학생들의 학구열은 낮아지고 부모와 교사의 교육열은 뜨겁게 타올랐다. 넷째, 국방. 자의가 아닌 타의로 국가를 지킨다. 징병군인에 대한 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징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섯째, 취업. 가업을 잇거나 시집을 가거나 인맥을 통하거나 원치 않은 곳에 취업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밖에 없게끔 했다. 사회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강요로 이루어졌다. 대부분 한국인이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연상의 지배를 받으며 살며 그 연상이 죽어서도 제사를 통해 절을 하며 복종해야 했다. 일생 연상에게 지배를 받으며 살았다. 한국은 국가 자체가 누군가에게 지배를 받아 강요되는 것으로 운영되어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이 자유를 얻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운영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로 국가가 휘청거리게 된다. 한국은 이성애 결핍을 부를 정도로 보수적인 연애와 성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면 사랑을 배우지 못해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여 출산율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중매결혼과 출산강요로 출산율이 유지되었다. 베이비붐 세대라 불릴 정도로 높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강요로 출산율을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자유를 얻어 강요가 사라지자 이성애 결핍이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게 만들어 출산율을 폭락하게 만들었다. 1인 가구와 비혼의 증가는 이를 명확하게 증명하는 지표가 된다. 이런 것이 자유적응실패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자유를 얻으면 그 자유에 맞게끔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성에 보수적인 사상이 변하지 않아 구조를 바꾸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낮은 출산율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외에도 대부분의 문제는 강요에서 자율로 바뀌는 것에 대한 적응실패가 원인이다. 한국은 학생 행복도가 매우 낮은 국가다. 왜?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강요 말고는 공부하게끔 하는 방법을 모른다. 코로나 사태로 공부를 강요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못하자 한글을 모르는 초등학생까지 나오게 되었다. 매일 같이 게임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했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이란 기억을 근거로 한 알고리즘이다. 게임으로 만족도를 느끼는 알고리즘이 작성되면 그 외의 것으로 만족도를 느끼기 어려워 그것에 집착하게 된다. 중독에 가까운 과잉의존은 그것이 원인이다. 그래서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여 아이의 세계를 넓혀서 다른 것들로도 만족감을 느끼게 해야만 의존도가 낮아져 다른 것을 익히기 위해 한글을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현재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IQ테스트 따위로 지능 수준을 유지해두는 것이 좋을 거라 본다. 아이 시기에는 알고리즘을 바꾸기 보다 수월하기 때문에 지능 수준만 유지해두면 언제든지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럼에도 게임이 이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될 수 없다. 이는 아이를 교육할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 자체를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아이가 한글을 자율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의 학구열이 아닌 부모와 교사의 교육열이 높다는 것 자체가 강요로 학력을 유지해왔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지금 한국은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다. 하나는 모두가 자율적으로 공부하여 고학력을 유지하는 것이고 하나는 일부만 자율적으로 공부하여 일부만 고학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대로 강요가 사라진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후자의 길을 걷게 될 확률이 높음을 강조하고 싶다. 강요가 아니면 학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또한 자유적응실패라고 본다. 징병군인에 대한 천대는 하루 이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온갖 모욕과 멸시를 당하던 것이 징병군인이다. 군대사고 나도 천대받고 대민지원 가도 천대받고 위수지역에서 천대받고 사회에서도 천대받는다. 이러한 천대는 징병 자체가 강요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라 본다. 군 내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는 존재, 즉 누군가에게 지배 받는 존재라는 인식이 천대를 부른 것이다. 현재 징병군인에 대한 처우가 좋아짐에 따라 인식도 나아지고 있으니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군 기피 현상은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사실상 자유적응실패 사례라고 본다. 자율적으로 국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징병 구조 자체를 바꾸거나 모병을 하는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남녀 모두 몇 주간 군사교육을 받고 그들을 예비군 편재로 운영하며 전문인력은 전부 직업군인으로 대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본다. 탱크 같은 전문 기술을 징병군인이 운용한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다. 어차피 이제는 인력부족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중소기업 기피가 심각한 수준이다. 심지어 이제는 대기업도 기피하며 공무원이 되길 원하고 있다. 자수성가 비율도 낮은 편이다. 중소기업에서는 사원들을 착취한다. 그래서 대우가 좋은 대기업 선호가 늘었다. 대기업에서는 사원을 쉽게 해고한다. 그래서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 선호가 늘었다. 정년을 중시하며 집단 구성원으로 남길 바라자 자수성가 비율이 낮아졌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걸 알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자의 지위가 배려 받은 농노임을 알아야 한다. 농노에서 몇 가지 배려를 늘리면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에서 벗어나야 농노와 달라진다. 이는 본질적으로 농노가 지주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종속된다는 점에서 같았기 때문이다. 을의 위치에서 있는 노동자의 노동환경은 대부분 하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강요를 통해 일하게끔 했다. 노동환경이 좋지 못함에도 국가가 운영되었던 것은 강요로 취업률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어야 했다.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면 노동자의 지위를 자본가와 대등하게 만들어 일방적인 착취를 할 수 없게끔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여 농노의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과도한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배려만 받게끔 했다. 지금의 노동자는 정치권의 도움이 없으면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철저하게 을의 위치에서 정치가의 도움이나 자본가의 배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많은 노동자인권운동가들이 노동자가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아닌 자본가에 종속되어 자본가의 배려를 받는 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한 기업에서 꾸준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다. 종속되어 배려 받는 것이 바른 것이기에 해고를 하지 못하게 하여 취업도 하기 어렵게 되었다. 쉬운 해고가 되어야 자리가 나고, 자리가 나야 쉬운 취업도 가능한 것이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중소기업의 불평등한 착취에도 을의 위치에서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나가서 다른 직장 구하기 어려우니까 부당한 대우에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소기업의 착취로 기피현상이 일어나 우수한 인재들이 대기업에 몰림에 따라 대기업은 인재풀이 넘치면서 쉽게 해고를 하면서도 인재고용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기업의 부품으로 성장한 노동자는 그 기업의 부품으로서의 역할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 보다 더 기업에 매달렸다. 철저하게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으로 정년을 보장받는 것이 올바르다는 인식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공무원에 매달리면서 사업을 기반으로 한 자수성가를 통해 성공하겠다는 사람 수가 줄어들게 되어 자수성가 부자 비율이 낮게 되었다. 2016년 조사한 결과 세계 부자 400명 중 자수성가로 성공한 한국 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자유적응실패의 사례다. 뭔가 좀 자유롭게 되었으면 그에 맞게끔 구조변화를 추진했어야 했는데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배려만 늘려왔다. 상처가 나면 치료를 해야 하는데 진통제만 먹인 꼴이다. 개인이 개인으로 있을 수 있는 구조. 개인이 기업의 부품으로서 기업의 성장동력이 되는 것이 아닌 기업이 개인의 성장동력이 되는 구조. 노동의 중심이 집단이 아닌 개인이 되는 구조. 노동의 개인화. 그것이 노동의 자유화, 노동의 민주화라고 본다. 그렇게 하여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다고 본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일부 자본가의 자유만 보장하고 있는 불완전한 자유주의다. 모두가 자유로워야 진정한 자유주의다. 사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산업혁명부터 이어져 내려온 체계를 바꾸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바꾸지 않는 한 어떤 혜택을 주더라도 노동자는 농노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자유적응실패는 사회갈등도 마찬가지다. 정치적 진영논리는 지배 받던 사람들이 이타적으로 본인의 의견보다 타인의 의견을 우선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자유로워진 지금도 진영의 주장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모두가 스스로 생각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정당이란 집단정치가 아닌 정치가라는 개인정치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게 안되니까 양당정치가 발달하는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를 운영하는 미국이 양당정치가 발달한 것을 떠올려보라. 안타깝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고학력자들이 많은 한국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수준이 낮다면 그것은 국민의 정치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준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수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과 정당만이 아닌 분야별 국회의원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시대가 변해 한 지역에 평생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타향살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의석 수는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고 싶다. 의사협회가 굉장히 정치적인데, 그걸 보고 이기적인 의사협회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들이 정상이고 나머지가 비정상이다. 모두가 이기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의사협회가 이기적인 주장을 하면 다른 분야도 이기적인 주장을 하며 맞서면 된다. 어떤 의견이 올바른지 토론을 하며 서로의 논리가 타당한지 검증한다. 그게 정상이다. 이것은 차후 다른 글에서 세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이처럼 민주적이지 못한 정치환경은 자유적응실패 사례라 볼 수 있다. 성별 갈등도 마찬가지다. 과거 남성에게 지배 받던 여성들은 이제 많은 부분 자유로워졌다. 그러면 그 자유에 맞게끔 생각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지배 받았기 때문에 배려 받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지배 받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던 의무를 행했어야 했다. 그렇게 하여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정당하게 누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여성은 힘이 약하니까 배려해달라.」 거의 모든 여성에 대한 혜택이 이걸 근거로 한다. 과거 남성에게 지배 받던 시대에 머물러서 배려만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남성이 하는 의무도 같이 하여 여성도 할 수 있음을 증명했어야 했다. 노르웨이에서는 여성들도 징병된다고 한다. 오히려 징병되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군에 필요한 인원의 수가 적어 군 입대 경쟁률이 6대 1로 치열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가 군 경력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만든 현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의무를 행해야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인데 한국은 과거 지배 받던 시대에 머물러 배려만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진정 여성을 위한다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본가와 대등해야 하는 것처럼 여성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남성과 대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은 과잉 혜택을 내려놓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여성을 위하는 길이 될 거라 확신한다. 현재 노동자나 여성은 정치권의 배려가 끝나면 지금 혜택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길 바란다. 노동자나 여성이 정치권의 도움으로 얻어낸 배려가 없어도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스스로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자본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잘못되었다. 비단 여성에 대한 배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보수적인 성 관념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성적으로 박해 받던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성 문화를 박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자유로워졌는데,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출산율이 낮은 것이다. 성별 갈등 또한 자유적응실패에서 왔다고 본다. 미성년 문제도 다를 바 없다. 촉법소년 문제, 학력저하 문제 따위는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그들의 자유의지로 올바른 일을 하는 법을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명령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모든 걸 차근차근 다 설명했어야 했다. 사회구조가 어떻게 운영되고 자유와 질서가 무엇인지 가르쳤어야 했다. 인문학을 철저하게 가르쳐 사고의 폭과 깊이를 늘려 자발적으로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끔 했어야 했다. 이제 아이들은 시장경제의 도구로 성장하게끔 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정보의 양에 근거해 미성년의 연령대도 바꿔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본다. 과거 지배 받던 시대의 미성년과 자유로운 시대의 미성년이 받아드리는 정보의 양과 그에 따른 정신연령의 성장차이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미성년으로 일어나는 사회문제 또한 자유적응실패 사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사상이다. 대부분의 사상이 과거 지배국가였을 때 만들어지고 적용되었었기 때문에 그 사상으로 인한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한다. 본능이란 재료에 사상이란 도구로 행동이란 결과물이 나온다. 모든 악덕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상에서 나온다. 본능 자체로 죄가 지어지지 않는다. 본능을 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게 죄가 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정적이게 되어버린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본능을 받아드리고 이해하고 현실에 맞춰가야 한다. 죄를 야기하는 대표적인 욕구인 살해욕구도 실제 행하지 않고 스포츠나 게임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본능의 해결 방식에 따라 죄가 결정되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이 되겠다. 가령 이런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배욕구가 있다. 그 지배욕구에 따라 지배구조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그런 욕구에 맞춰서 사상이 생겨나고 그 사상에 맞게끔 법과 제도가 정비되었다. 신분과 연령에 의한 질서를 정당화한 유교가 바로 그렇다. 그 유교에 맞춰 법이 만들어졌다. 현재까지도 사촌 간 결혼이 금지되거나 부모살해와 자녀살해에 대한 차별이 일어나는 까닭은 유교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그런 지배구조 정당화에 따른 차별과 억압은 사실상 지배욕구에서 온 것이므로 지배욕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지배욕구를 다른 방식으로 충족할 수 있다면 그 욕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게임에서 역할을 나눠 지배와 피지배를 나눠 노는 걸로 해소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능적인 욕구 충족과 이성적인 바람 실현을 분리하면 된다. 인간의 자아는 세포의 여론을 담은 기억의 의식적 알고리즘이다. 본능이나 무의식적 행동이 반드시 자신의 의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감성과 이성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어떤 식으로 느끼게 되는지 관찰하면 자신의 본능에 대해 파악할 수 있고, 그 본능을 파악하면 본능적인 욕구 충족을 어떤 식으로 해내야 사회질서와 발맞출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건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인 욕구로 나타난 과거 지배국가의 잔재들을 자유국가에 맞게끔 하는 것이 정상적인 자유적응이 되겠다.

본 주제로 들어가겠다. 최근 마약사건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시점인데, 어떻게 해야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해보자. 마약은 인간을 의존하게끔 만드는 물질이다. 마약을 복용한 사람은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파는 사람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간단히 말해 지배를 당한다. 마약에 지배당해서 마약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 가족과 재산을 바쳐서라도 마약을 갈구하게 된다. 마약의 노예가 된다. 이는 사이비종교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마약에 빠져 마약에 맹목적인 의존을 하는 것이나 종교에 빠져 종교에 맹목적인 의존을 하는 것은 둘 다 동일하다. 차이점은 물질과 비물질이다. 한국에는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지배국가에서 지배당하던 사람들이 가진 이타적인 마음을 공략하는 것은 사이비종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을 의존적으로 만들어 종교에 모든 걸 바치게 만든다. 한국인의 이타적인 선한 특성이 만든 의존성이 사이비종교에 약하게 만들었다. 이런 특성은 비슷한 구조를 지닌 마약에도 적용되게 된다. 의존성을 가진 한국인이 사이비종교에 약했던 것처럼, 마약에도 약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마약사건에 대한 대처 또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이라 주장하겠다. 자유에 적응하여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설 수 있어야 마약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자유국가를 지향하는 바, 마약에 대한 대처를 강제적으로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국인 개개인이 마약을 스스로 불필요하다고 인지하고 그 마약에 종속되지 않아야만 국가가 마약에 종속되지 않을 수가 있다.

마약의 구조가 사이비종교의 그것과 비슷하다면 마약의 문제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그걸 믿음으로써 발생하는 가정붕괴 따위가 아니다. 그런 것은 좋지 못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초점에 맞춰야 하는 것은 전염성이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다른 사람을 전염시켜서 신도 수를 늘려나가는 것이 문제다. 혼자서 맹목적으로 믿고 있으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마약 또한 마찬가지다. 전염성이 문제다. 만약 무인도에서 마약을 복용하여 사회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혼자 먹고 혼자 죽으면 된다. 하지만 이 마약이라는 걸 복용한 사람은 마치 좋은 걸 전해드리려 왔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이비종교인들처럼 전염시키려고 한다. 한번 전염시키면 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약에 지배당한 사람들은 마약의 위치가 마치 사이비종교처럼 법을 넘어서게 된다. 법을 무시해서라도 마약을 복용하고자 한다. 마약이 그들에게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법치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이다. 마약이 세를 불리면 마약을 중심으로 한 초법적 집단이 탄생한다. 대표적으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이 있겠다. 이런 것들 때문에 정상국가에서는 마약을 허용하기 몹시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다. 일부 서양에서 마약을 허용한 국가들은 담배처럼 즐기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어찌할 수 없이 허용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마약의 문제는 전염성이다. 마약을 강제로 대처할 수는 없다. 마약 유통으로 주로 사용되는 텔레그램 같은 앱을 완전 규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자유국가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마약을 멀리하여 마음 속 백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지적 수준이 높아야 한다. 마약의 해악 따위를 인지하고 이해해야 그걸 자발적으로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개개인에게만 마약확산을 막는 걸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차원에서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 또한 고려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단순히 막는 것만으로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 할 수는 없다. 홍보하고 막는다고 해도 할 사람은 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해외에서는 허용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마약 자체가 문제라면 어째서 해외에서는 허용하였는가? 라며 반문할 수 있다. 특히 대마초의 경우에는 중독성이 담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고 말하기에 허용여론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의견을 말하자면, 자유국가에서 누군가에게 지배 받길 바라며 그걸 정당화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말하겠다. 노예상에게 노예가 자발적으로 끌려가는 걸 방치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런 관점에서 타인을 지배하는 자를 칭송하는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예컨대 북한 독재자 찬양 따위는 자유의 관점에서 부도덕한 행위다. 그러니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홍보나 처벌로 끝나서는 안 된다. 좀 더 본질적으로 보자. 어떤 인간이 천대받는 것은 그 인간의 지위가 낮기 때문이다. 노동자나 여성이나 미성년들이 천대 받는 것은 실질적인 지위가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걸 인지하고 마약의 지위를 낮춰 천대하게 만들면 보다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우선 마약의 지위가 어떤지 떠올려보자. 마약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난 물질로 쾌락을 즐기는 일탈이다. 마약 자체가 무조건 금지된 쾌락이다 보니 마약 자체의 지위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것과 같게 되어버렸다. 실제로는 마약의 노예와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가진 게 많은 기득권이나 힙합이란 사회에 저항하는 음악을 하는 이들이 종종 마약사건에 연루되는 것이다. 이는 미성년에게 있어 술과 담배의 지위와 같다. 이 지위를 낮춰야 한다. 미성년의 술과 담배를 막는 것은 미성년 입장에서 술 담배의 지위를 낮춰야 하는 것처럼 한국인의 마약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인 입장에서 마약의 지위를 낮춰야 한다.

마약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은 미성년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떠올려 보면 된다. 미성년을 보호하겠다는 미명아래 미성년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한다. 그럼으로써 미성년의 지위는 낮아져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인식을 주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자녀살해 비율이 높다거나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로 아이들이 망가지는 것은 낮은 지위가 만든 미성년의 도구화가 만들었다고 본다. 아이들이 도구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그들을 도구처럼 다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애정결핍도 한몫 한다고 본다. 마약의 지위를 낮추기 위해서는 마약을 국가에서 통제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약을 국가에서 다뤄야만 마약의 지위가 낮아지는 것이다. 마약을 국가에서 허용한 곳에서는 통제하는데 지위가 낮아지지 않았다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통제는 낮은 수준의 통제다.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을 24시간 감시하면서 이동의 자유와 문화의 자유와 만남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가정해보자. 마약복용자가 마치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실질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고 정신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만큼의 지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억압과 통제와 감시가 마약 자체의 지위를 낮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질적인 방법은 국가 내에서 마약 통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름은 중독병원 같은 걸로 명분을 내세우면 된다. 마약을 복용하고 싶다면 모든 걸 버리고 국가 통제 안에서 감금당하여 감시 당하면 된다. 라는 식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통제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초기에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감금되어 마약을 복용하게 될 것이다. 마약이 국가에서 통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좀 더 마약의 지위를 낮추고 싶으면 마약 복용자의 신상을 공개하면 된다. 자발적으로 신상공개에 동의하는 사람만 마약을 복용할 수 있게끔 한다. 모든 걸 버리고 사회에 속하길 포기한 인간만이 가능하게끔 한다. 정신병자와 동일한 지위를 갖게끔 한다. 모든 걸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한다.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한다. 마약을 노예의 아이콘으로 만든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마약 복용자를 속된말로 찐따로 만들면 된다. 마약이 어떤 부유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게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데, 그걸 하는 건 노예나 다름 없는 처지에 놓인 인간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마약 근절은 이처럼 그냥 막거나 부작용을 홍보하기 보다는 마약 자체의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국에서 최근 마약사건이 늘어나는 까닭은 외국인의 영향이 클 것이다. 과거에는 기득권만 마약을 복용했다. 그러다 노동시장이 외국에 개방됨에 따라 외국인이 즐기는 마약이 한국인에게도 흘러가 누구나 쉽게 마약을 접하게 된 것이다. * 2020.08.25 노컷뉴스 기사에 따르면 마약공급책이 말하길 태국 노동자 절반은 마약 투약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마약 판매가 한국인에게도 흘러간 것이 크다고 본다. 이는 중국의 경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편으로 동남아 시장을 개척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부분 감수해야 할 사안이다. 많은 선진국들이 외국 노동자들의 마약으로 몸살을 겪는 걸 이제야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은 마약 또한 자유적응이 필요한 사안이 되었다. 그 적응 결과가 한국 내 마약 중독자의 수를 결정할 것이다.

 

 

 

---

사실 마약과 외국인에 대해 쓰려고 할 때엔 간단히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고찰할 것이 많았어요. 단순 마약 문제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더군요. 근본적인 자유에 대한 물음이 필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 고찰이 자유주의 정리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지금까지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이들의 자유만 보장해준 불완전한 자유라 봅니다. 진짜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싶어요.

 

물리학 이론 중 통일장이론이라는 게 있었죠. 확실히 어떤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설명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 같아요.

 

알 수 없는 현상들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 전부 좋아합니다. 그걸 생각하는 게 즐겁지 않나요?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흐릿하게 유추할 뿐, 정확히는 모릅니다만.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 거지. 뭔가 확인해보고 싶잖아.

 

사상가 하고 싶다고 말할 자신이 없네요. 자신 있는 건 생각하는 것인데… 그걸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뭔가 열정적으로 몰두할 수 없는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으면 전력을 다해볼 텐데.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다음은 노동의 개인화입니다. 그건 확실히 중요하다고 봐요.

 

미치지 않으면 여기까지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평생 이타주의가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인간이 그걸 부정한다는 건 자기과거를 완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덕에 굴복하고 나서 이타적으로 살려고 하다 보니 괴상한 짓거리도 했었죠. 타인이 뭔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할 수가 없으니까 부탁할 수 없게끔 유도했습니다. 부탁에 대한 대가를 과장되게 요구하거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기피하게끔 했죠. 하고 싶지 않은 걸 할 수 밖에 없을 때엔 파토 내는 것도 종종 했습니다. 자유의지욕구와 이타주의명령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했던 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건 분명 비겁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한 일그러짐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그걸 고찰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그렇지.

 

어째서 과거의 것만 한국의 것으로 인지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한국인이 만든 것도 한국문화 아닐까 싶습니다.

 

자유적응에 실패하여 혼란스러운 한국에서 기준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는 엘리트에 의한 법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황스러운 판결을 보면 배심원제가 바람직하다 생각하지만 이성적 사고가 다소 부족한 한국에서는 위험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질서에 관심 없이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의견들을 보면 배심원제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감을 느낍니다. 달리 생각해서 제도를 도입하고 나면 성장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같은 애정결핍구조를 지닌 한국과 일본이 문화발달과정의 차이가 발생한 것은 한국의 만화박해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만화를 박해했기 때문에 다른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겠지요. 드라마라던가 영화라던가 아이돌이라던가. 그게 현대에는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최근 투기꾼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고 있지요. 그들이 욕망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던 걸까요? 아닙니다. 욕망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욕망이 많은 인간은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욕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본인 일부만이 아닌 본인이 속한 집단의 타인까지 성장하길 바라는 것이 거대한 욕망을 가진 자입니다. 세계평화, 인류의 자유로운 행복 이런 걸 바라는 인간은 욕망에 미친 인간이지요. 그러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바라는 그들은 그저 소인배일 뿐입니다. 그릇이 작아요.

 

댓글 : 1 개
와우 상당히 흥미로운 글을 쓰시네요. 시간내서 쓰신 글들 한번 정독해보겠습니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