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KBS 수신료와 방송매체2021.11.08 PM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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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수신료와 방송매체

 

 

 

최근 KBS에 대한 여론이 좋지 못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했다. 평소와 같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PC주의와 여성주의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문제해결방법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KBS 수신료를 보고 발상을 시작하여 KBS를 기준으로 하지만, 방송매체인 만큼 해결방법은 다른 방송국도 비슷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TV 수신료 인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시간낭비다. 왜냐하면 오래지 않아 TV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TV는 이제 인터넷으로 세대가 교체될 것이다. 그러면 TV 수신료 인상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 TV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을 때에는 수신료 인상에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등장으로 이제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수신료 인상은 TV의 소멸 시기를 앞당길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수신료 인상으로 납부부담이 늘면 국민들 사이에서 TV를 버리고 모니터를 대체하여 수신료를 내지 말자라는 흐름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KBS는 딜레마에 빠졌다. 수신료를 인상하지 않으면 물가상승에 의해 운영비 부족을 겪을 것이고, 수신료를 인상하면 납부자 수 자체가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인상 전과 비용이 같아져 운영비 부족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KBS TV 수신료 인상을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재원을 찾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일 것이다. 공영방송은 공정성과 독립성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새로운 형태의 세금은 국민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방송국이 자체적으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 이제 방송국이란 형태로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을 한 곳에 묶을 필요는 없다. 과거 방송매체의 특성상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방송국이란 형태로 묶을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언론과 수익성과 공영성이다. 언론은 분명 정상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에 사회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언론 자체로는 수익을 얻기가 어렵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잇는 언론은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일 확률이 높다. 수익을 위해 권력이나 재력의 마이크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론 외의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창작과 플랫폼이다. 간단히 말해 언론이 사회공헌을 하고 창작과 플랫폼이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하고 정보플랫폼을 통해 새로운 수익창출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잠시 언론으로 가보자. 정보플랫폼은 공영방송뿐만이 아니라 정보를 다루는 모든 언론이 공동으로 소유하여 기여도에 따라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해둬야, 언론이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오자. 창작과 플랫폼도 수익성이 없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공영방송이란 공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세금을 걷기 어려운 이상, 수익성이 높은 문화창작물의 성장과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정보플랫폼의 소유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 저널리즘을 말하며 정보 생산자 특성(성별 또는 장애)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말하는데, 그것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부터 생각하는 지극히 공산주의적인 발상이다. 생각해보자. 소비하는 정보의 생산자의 특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누가 정보를 생산했든 그 정보에 가치가 있으면 된다. 지금 기성방송매체가 외면 받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간단히 말해 정보의 품질이 인터넷의 접근성보다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성방송매체와 인터넷의 차이는 편리성과 편향성이다. 인터넷방송은 접근이 편리하고 원하는 정보만 수집할 수 있을 정도로 편향적이다. 그 때문에 중립성을 중시해야 하는 기성방송매체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편리성과 편향성을 넘어서는 고품질 정보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 품질에는 개인의 특성이 아닌 역할에 맞는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성별유무나 장애유무와 관계없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없으면 결과적 비율이 맞지 않더라도 수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생산자를 생각하다 상품경쟁력이 낮아져 국내의 소비자를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뒤쳐지게 만든 공산주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이다. 차별이란 능력이 없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는데 역할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강조하겠다. 본래 지금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이런 역할에 맞는 능력만 보는 걸 의미한다. 거기에는 성별이나 장애의 유무는 관계가 없다. 부디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줘야 한다는 궤변에 선동되어 국가 전체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길 바란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귀족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공산당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권력자들,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인맥,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은 소수자들. 어떤 사상이든 관계가 없다. 어떤 이유든 능력도 없는데 역할을 맡는 순간부터 국가가 몰락하게 된다. 우수한 한국인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화가 난다. 귀족이나 권력자 또는 인맥으로 부당한 이익을 얻던 걸 욕하던 이들이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서도 잘못된 걸 모른다. 그런 건 단순한 권력투쟁이다. 인권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그 누구든 역할에 맞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역할을 맡도록 해야 한다. 물론 사리사욕에 힘을 남용하는 것 또한 역할에 맞지 않는 것 중 하나다. 사리사욕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커다란 욕망을 지닌 이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어야 국가가 발전할 것이다. 한국에는 힘이 필요하다. 국력이 낮아 국가적 치욕을 겪은 것이 백 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강조하겠다.

 

 

 

시청자 의견 영향 축소

 

새로운 수익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가 바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 축소다.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올바르나, 그것은 대부분 소수에 불과하다. 지금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이나 방법 또는 의지의 차이에 따라 소수의 시청자가 공영방송에 지나치게 높은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비민주적인 결과다. 민주적인 제도라 하더라도 투표율이 10%도 되지 않는다면, 그걸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다. 소수가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포장되는 현상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객평가를 중시한다. 실제 상품을 구매한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영수증을 첨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을 정도다.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방송은 지나치게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다. 시청률이 1%에 보통 약 3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터넷 시청률을 포함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보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정말 적은 수의 사람이 시청자 의견을 낸다. 보통 인터넷에서 상품을 구매한 뒤 평가를 하는 비율이 약 10%에서 많으면 30% 적으면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100명 중 1명이 평가를 한다 치자. 그렇다면 TV는 시청률 1%의 방송에 의견을 내는 사람이 과연 3000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터넷과 달리 TV는 의견을 내기가 너무나도 번거롭기 때문이다. 인터넷 개인방송은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의견을 달 수 있지만, TV는 따로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가입한 뒤 의견을 내거나 전화나 엽서나 메일 따위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기 의견을 내는 사람이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방송국이 전부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하는 시점 이전에는 이런 시청자 의견은 그리 중요시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시청자 의견은 단순한 참고자료다. 그걸로 언론이나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본래의 방향과 달라지게 되면, 본래 방향을 원했던 나머지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아예 의견을 받지 않으면 불통의 이미지를 뒤집어 쓸 우려가 있다. 따라서 시청자 의견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한 방법을 써야 한다.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그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진실된 의견이 신뢰도도 높다. 신뢰도가 높기에 영향력이 높다. 자 답은 나왔다.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는 신뢰도를 낮춰야 하고, 신뢰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진실된 의견이 아니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된 의견이 아닐 수 있는가? 그건 아무나 의견표현을 할 수 있게 되면 된다. 지금처럼 가입을 하고, 실명을 써서 의견을 내고, 그런 절차를 해서는 안 된다. 익명과 접근성을 높여 아무나 익명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된다. 분명 이러면 지저분해진다. 진실된 의견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그런 조치를 한 것이므로 이해를 구한다는 식으로 나가면 된다. 그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의견의 신뢰도가 낮아지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면 소수의 시청자 의견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재미가 없어지는 바람에 그 외의 시청자에게 외면 받은 무한도전 등의 코미디 같은 프로그램의 전철을 밟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주관적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몰상식한 일부 단체가 불편함을 토로하며 되도 않는 간섭을 할 수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단체의 수를 늘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다양한 시청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성별이나 세대가 다른 이들이 특정 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유도하면 될 것이다. 이외 인터넷 플랫폼에 달린 댓글 또한 시청자 의견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에도 맞추기 때문에 일부 시청자 의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없다는 표명을 하면 될 것이다. 유행하는 빅데이터 수집을 표방해도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낮춰야 온전한 언론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로 고품질 정보와 영상을 생산하여 국민의 호의를 얻어 높은 수익을 통해 수신료 인상이 없더라도 방송국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적은 반면, 방송 매체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은 제약이 많다.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결코 방송 매체의 정보와 영상이 인터넷 플랫폼에서 생산되는 정보와 영상과 경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창작의 자유

 

창작에 자유에 대해 잠시 다루겠다. 공영방송이기에 보다 신중하게 방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공영은 공공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이지, 보수적인 것의 이익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시각으로 성적 컨텐츠를 억압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이라 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영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가령 성적으로 자유로운 영상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국가의 이미지 상승으로 국익을 얻게 된다면, 그것이 공공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지금 유교적 가치관과 여성주의에 의해 폐쇄적인 성 관념을 근거로 한 성적 억압으로 인해 이성애가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있는 중이므로 공영방송이야말로 자유로운 성 관념을 널리 알려 국민이 온전한 이성애를 획득해 충만한 애정을 통해 출산율을 올리는 걸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선도하여 공공에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야 말로 공영방송의 의무라 주장하겠다.

 

F20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KBS에서 조현병을 주제로 영화를 제작한 듯 하다. 그런데 그걸 보고 조현병 관련 단체에서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혐오를 그대로 담아 조현병 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으므로 TV 방영 중단 요청에 의해 TV 방영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는 보통 문제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직시로만 끝났다. 아마 이 영화도 조현병에 대한 현실직시를 했을 것이다.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불편하다고 현실과 다른 왜곡된 진실을 공개하게 되면 실질적인 문제해결조차 못한다. 그저 불편하다고 다루지 말라 하게 되면 사회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사회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다. 예전에 영화 기생충이 현실직시만 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고 평가한 적이 있는데, 최소한 현실직시라도 해야 한다. 만약 기생충이 저소득층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고 방영 중단의 요청을 받아 영화상영을 하지 못했다면 어땠을 것 같나? 전세계가 황당해했을 것이다. 진정 빈자를 위한다면 왜곡된 영상은 필요가 없다. 빈자가 행복하게만 표현된다면 그 누가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하겠는가? 진정 조현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다면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다수가 문제해결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적인 논의를 통해 문제해결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에 무언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악당이 등장한다고 등장 자체를 불편해하면 어떻게 악당의 악행이 잘못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떤 걸 혐오를 하는 인간이 있어야 혐오가 나쁘다고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혐오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며 그런 혐오를 하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만으로 불편해한다. 어쩌자는 건가.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특정 직업을 깔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고, 민족이나 국민, 그리고 대중을 바보로 보는 인물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런 인물이 등장해야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세상에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인물 자체가 불편한 인간은 그냥 특정 도덕에 세뇌된 것에 불과하다. EBS가 국정감사에서 포텐독이라는 컨텐츠가 폭력성으로 지적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나쁜 것이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반발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보는 컨텐츠라고 하더라도 폭력성은 있어야 한다. 폭력성이 등장해야 잘못되었다는 걸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저 폭력성이 나쁘다고 무조건 등장조차 못하게 해서는 한국 아이들이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국 아이를 미숙아로 키우는 건 바로 도덕에 세뇌되어 맹목적 비난과 반대를 하는 이들이다. 나는 그것에 분노한다. 단호하게 말하겠다. EBS는 폭력성에 대한 경계와 아이의 성숙한 시각을 길러주는 지극히 올바른 일을 했다. EBS는 일차원적인 지적을 받았다고 올바른 태도를 바꾸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며 도덕을 명분으로 타인의 위에 서려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불편하다 싶은 것은 전부 인권침해라 주장하며 창작에 간섭하는 것으로 창작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다. 보통 이런 부류들이 취미와 도덕을 구분 짓지를 못한다.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취미인데, 거기에 도덕성을 붙여서 동물보호라는 식으로 몰고가 사회를 혼란케 만든다. 개나 고양이 보호를 주장하면 취미인 게 명확히 보이므로 의도적으로 동물보호를 붙인다. 특정 종에 대한 애호에 동물보호라는 도덕성을 붙이는 것으로 취미를 도덕으로 탈바꿈해버리며 사회의 도덕적 판단저하를 일으키고 있다. 명확하게 말하겠다. 특정 종을 좋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건 취미다. 단순 취미를 맹목적으로 올바르다 주장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거 마녀사냥이나 홍위병 때도 그랬다. 시야가 좁은 인간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름이 반드시 옳다는 보장이 없다. 제정신이 아닌 걸 옳다고 말하는 인간의 의견 따위는 들어줘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에서 도덕적 명분으로 검열하는 것은 과거 공산주의 척결을 명분으로 사상서 검열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올바름을 명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자유국가에서 올바른지 부디 심사숙고하길 바라겠다. 도덕은 이제 인간의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앞에서 길을 안내해야 한다.

 

여성주의에 대해 잠시 얘길 해보겠다. 이들이 최근 가장 많은 불편함을 호소하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특혜에 반발이 심한 까닭이 무엇인가? 신세대 남성이 여성특혜를 수용할 수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성평등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다수 기성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기에 여성에게 장애인과 같은 혜택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성평등에 익숙한 다수 신세대는 여성이 열등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여성특혜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여성주의자들이 성평등을 교육하자 주장했기 때문에 여성주의자가 주장한 여성특혜를 신세대 남성이 수용할 수 없었단 것이다. 여성주의가 교육한 것으로 여성주의가 공격받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상황인가? 이 사상은 이 정도로 어설프다.

 

여성주의는 객관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기독교적 등 그냥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손해를 보면 어떤 경우에도 여성차별이나 혐오가 된다. 간단히 말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는 사상이다. 굉장히 조잡하고 천박하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를 결정해버리면 황당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세뇌된 여성의 손익으로도 인권 여부가 결정되어버린다. 유교 또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세뇌된 여성에겐 가부장적인 가치관인 여성의 약한 의지와 강한 수치심이 인권이 된다. 그러니까 그걸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여성에게 똑같이 세뇌해버렸다. 마치 사이비종교에 세뇌된 인간이 종교의 교리를 인권이라 주장하며 다른 인간에게 세뇌하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신세대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 여부가 결정되기에 감사지수가 낮아지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게 되었다. 보통 부당한 이익은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는 인정하고 감수해야 하는데,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여부를 결정하다 보니 부당한 이익을 인권이라 생각하고 정당한 손해를 차별이나 혐오로 생각하게 되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당시 유럽 여성이 실수를 저지르는 까닭이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므로 이성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은 것은 여성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한 것이다. 바로 여성주의자의 교육에 의한 것이다. 학교기관에 여성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남학생에게도 주입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이들 또한 의지가 약하고 수치심이 강하고 감사지수가 낮고 피해의식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인간을 열등하게 만드는 사상이 전파되고 있다. 정말 인간을 퇴락시키는 사상이다. 그래도 보통은 성별 관계 없이 건전한 사상을 가진 정상적인 교사가 있어 아마 괜찮을 것이다.

 

도덕은 본래 주관적 이익이 객관화를 거쳐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다음에야 도덕성을 갖추게 되어 사회를 올바른 길로 안내할 수 있는데, 여성주의는 그냥 모든 여성의 주관적 이익을 전부 인권이라 주장하고 주관적 손해를 전부 차별과 혐오라 주장하는 천박한 사상이기에 사회를 혼란과 고통과 갈등의 길로 안내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객관화가 된 명확한 논리를 구축한 도덕을 근거로 한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유라던가 말이다. 여성도 이제는 그런 천박한 사상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에서 여성의 인권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도덕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생각한다. 건전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방송매체 또한 자유주의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창작의 자유가 있어야 고품질 창작물이 나올 수 있다는 걸 강조하겠다.

 

 

 

경쟁원리

 

방송 매체 특성상 경쟁이 어렵다. 채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황금시간대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런 탓에 생산되는 창작물의 수가 적어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 경쟁원리가 작동하기 어려우니 아무래도 고품질 창작물이 양산되기가 인터넷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다. 이것이 방송매체가 넷플릭스에 추월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 점을 보완해야 한다.

 

우선 생산(창작자)과 유통(플랫폼)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자. 일반적으로 생산보다 유통이 유리한 상황이지만, 생산자가 다양한 유통경로를 확보하고, 우수한 상품을 양산하여 수요가 높으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 전제에서 창작물은 생산과 유통이 대등한 관계가 가능한 환경이다. 왜냐하면 문화 창작물의 수요는 전세계로 퍼지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상품의 경우, 생산품이 세계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쉽게 퍼지기가 어려운 반면, 창작물은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유통될 수 있다. 문화는 다양한 유통경로와 높은 수요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품질 상품만 양산하면 생산이 유통에 비해 불리할 수가 없다. 지금 방송 매체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할 때가 있음을 기사를 통해 종종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야말로 다양한 유통경로와 다름이 없다. 굳이 적대적 관계를 성립할 필요가 없다. 이런 온라인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해진다는 점도 좋다. 지금까지 창작은 보통 가장 우수한 일부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약간 부족하더라도 가능성이 높은 창작자는 기회를 얻기 어려웠다. 가령 지금 창작물 품질이 7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80인 것과 창작물 품질이 50이지만 성장 가능성은 90인 것이 있다면, 전자가 선택되어 후자의 무궁한 가능성은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다양한 유통경로와 수요가 있으므로 무조건 많이 생산하면 되기 때문에, 약간 부족한 창작자도 기회를 주는 것이 큰 틀에서 이익이 된다. 이는 배우도 마찬가지다. 창작물을 보면 매번 보는 배우만 나오는 것 같다. 창작물이 많아져야 재야에 붙인 유능한 배우들도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보통 양산의 경우 품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지만, 개인이 대량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 다수가 각각의 창작물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품질 자체는 유지될 것이다. 넷플릭스가 그런 방식으로 지금 성장하고 있다. 방송매체는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하여 수많은 창작자로부터 다양한 창작물을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한 뒤에, 그 중 가치 있는 것을 TV 편성표에 편성하여 송출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존 셀러를 사들이는 것으로 덩치를 키워 7조원대의 기업으로 성장한 스라시오라는 기업이 있다. M&A 또는 MCN과 같은 방식이라고 한다. 방송매체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학교의 영화동아리나 아마추어 영상제작팀을 대량으로 모집하여 간단한 교육과 함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생산된 창작물을 다듬어서 온라인 플랫폼에 올려 시청자 평가를 받도록 한 뒤에 평가가 높은 것을 방송국에 내보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공영방송에 목적에도 부합한다. 한국의 창작자를 지원하는 것으로 한국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자동화 시대가 되면서 각국은 산업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한국은 문화적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으므로, 본격적으로 문화도 미래 먹거리로 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관광지를 먹거리로 삼는 국가처럼 말이다. 물론 이미 그런 계획은 있을 것이다.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다수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모전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소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평가 받는다면, 이제는 다수의 창작자가 만든 창작물이 시청자에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익은 넷플릭스가 오징어 게임에 200억원을 투자하여 1조원의 가치를 창출했던 것과 같다. 40 팀에 1억씩 투자했을 때, 40억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창작물 하나만 건져도 본전을 얻고 두 개를 건지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양산을 통해 어떤 형태의 경쟁이 발생하고, 그 경쟁을 통해 고품질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창작의 자유는 보장하되, 기술의 전수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촬영이나 연기는 창작과 무관하게 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기술전수는 대상을 까다롭게 고르는 경우가 많지만, 공영방송인만큼 공공의 이익을 위해 대상을 고르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건 바람직하다 본다. 창작에서 높은 수익을 얻게 되면 언론 또한 권력과 재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장 초반에는 이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형성되면 작은 영상제작팀조차 많은 경험을 통해 우수한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가의 문화 수준이 한층 높아지는 것으로 추후에는 이익을 얻을 확률이 높게 될 거라 생각한다.

 

 

 

해외

 

국내에서 인정 받는 것보다 해외에서 인정 받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이들이 많다. 흔히 말해 국뽕이다. 이런 걸 고려해서 처음부터 세계에 초점을 맞춘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평범해도 세계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도 관심을 갖고 성공하게 된다. 그 성공이 여론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여론악화로 인해 TV수신료 인상이 어려웠던 점을 생각해보면 그런 점은 고무적이다. 또한 그 성공이 방송국 자체의 성장으로 이어져 수신료가 없어도 될 정도의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TV가 사라질 시대를 대비할 필요가 있다.

 

5천만명이 70억명을 만족시킬 컨텐츠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창작자가 필요하다. 이러니까 무조건 많이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끌어올려서 고품질 창작물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량생산에 자원이 소모되는 다른 산업과 달리 한번 만들면 자원소모가 거의 없이 복제가 가능한 문화 산업은 고품질 창작물을 많이 만들수록 대체로 이익이다.

 

본래 외국의 상품은 내국의 견제를 받기 쉽다. 그러나 문화는 다르다.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검열이나 규제를 해도 어떻게든 보게 되어 있다. 중국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 창작물 수준만 높으면 별다른 제약이 없이 수익을 얻을 확률이 높으므로 해외공략이 수월해지게 된다. 또한 문화의 영향이 커지면 그 나라에서 생산한 상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져 다른 산업의 진출도 돕게 된다. 어찌되었건 무조건 많이 만든다. 고품질의 창작물을 많이 만들면 70억명 중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논쟁

 

스마트폰 세대의 결점 중 하나가 바로 문해력이라고 한다. 스마트폰에 길들여져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한다. 보통 그걸 개선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지 않다. 사람은 점점 쉽고 편하고 간단하고 재미있는 걸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는 이런 인간의 본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문화만 봐도 그렇다. 소설, 만화, 게임 같이 점점 편하고 재미있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본성이 인류의 발전의 원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쉽고 빠른 이동, 쉽고 빠른 식사, 쉽고 빠른 기억, 쉽고 빠른 기록, 쉽고 빠른 교류 등 이런 경향은 사회의 발전을 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런 경향에 따른 발전은 그대로 두고,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잠깐 생각해보았다. 바로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본래 배움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고, 무지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근 배움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이고, 무지는 지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괴상하게 변했다. 이는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시험 평가를 높게 받는 것이 주관적으로 이익이기 때문에 시험 평가로만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인권이라 인지하고, 모르는 것을 지적 당하는 것은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손해기 때문에 차별이나 혐오로 인지하고 있다. 이 천박한 사상이 한국 사회에 독소처럼 퍼져 온갖 것을 갉아먹으며 인간을 퇴락시키고 있다. 슬픈 일이다. 애초에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다. 단순히 스마트폰으로 문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체력이 낮아졌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을 정도다. 편리한 도구와 별개로 인간의 능력은 인간 개개인이 알아서 키워야 한다. 그걸 권장하는 풍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인지를 정상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론과 논쟁의 발달이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인지를 바꿔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어떤 주제로 사람과 말싸움을 하면서 배움의 폭을 넓히는 필요를 느끼게 해야 한다. 현재 인터넷의 발달로 어디서든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을 하는 일이 많지가 않다. 하도 인신공격이나 일반화가 궤변이나 왜곡이나 논점이탈 따위로 지친 나머지 아예 토론과 논쟁 자체를 거부하며 네 말이 옳으니까 그냥 반론하지 말라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는 정말 좋지 못한 현상이다. 일상에서 토론과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정도로 발달해야 시험 외의 배움의 필요성을 깨닫고, 무지에 자존심을 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논쟁의 예능화다. 토론이 아닌 논쟁을 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토론보다 논쟁이 보다 깊게 대화를 하게 된다. 둘째, 논쟁이 예능에 보다 적합하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주제를 겉 핥기 식으로만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 논쟁을 해야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얌전히 토론만 하는 건 재미가 없어 흥미를 끌기 어렵다. 예능이 되려면 논쟁으로 발전하여 승패가 갈려야 한다. 예능화를 한 이유는 논쟁의 단계별 학습을 위해서이다. 본래 지적 수준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다르다. 동화부터 시작해 어려운 인문학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논쟁 같은 걸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처음부터 어려운 단계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대체로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기초부터 알아가야 한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의 힘을 갖추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힘든 운동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처럼 처음부터 어려운 논쟁을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예능을 통해 논쟁의 접근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논쟁의 예능화를 주장하겠다.

 

논쟁이란 무엇인가? 사리를 따져 말이나 글로 다투는 것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 말싸움이다. 본래 이런 말싸움은 인간관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하지만 결투에도 일종의 예절이 있었던 것처럼, 논쟁에도 예절이 있으면 괜찮을 것이다. 결투와 달리 신체적 상해를 입을 확률이 낮으므로 예절만 잘 지키면 관계를 해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것 하나로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 좋지 못하다. 논쟁의 예능화는 바람직한 논쟁의 방법론을 알려 건전한 논쟁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의 논쟁은 논쟁에 필요한 예의가 바로잡히지 못해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능화를 할 수 있는가? 결투의 예능화가 바로 격투 프로그램이다. 몸싸움을 예능화한 것이 이미 존재하므로 말싸움을 예능화하는 것은 그걸 참고하면 된다. 우선 선수와 팀을 만든다. 방송국이나 대학 또는 기업으로 나눠 선수를 모집하고 팀을 만들면 좋을 것이다. 이런 것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홍보효과가 있을 것이다. 몸싸움에 필요한 것이 경기장이라면 말싸움에 필요한 것은 주제일 것이다. 논쟁의 주제는 예능인만큼 쉬워야 한다. 일상에서 갈등을 빚는 것을 주제로 하면 된다. 재활용 문제나 학교폭력이나 성별갈등 등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걸 주제로 해야 논쟁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몸싸움은 승패가 갈리는 것처럼 말싸움도 승패가 갈리게 해야 한다. 일목요연하게 승패가 갈려야 쉽게 접하고 즐길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심판의 결정으로 승패를 갈리게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에 방영하면 실시간 투표가 가능하므로 시청자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TV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낮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적지만, 인터넷의 시청자 의견은 비율이 높아 귀담아들을 필요가 높은 편이다. 물론 이래도 참고자료에 머물러야 한다. 논쟁에 승패가 있으면 위험한 결론이 승리할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지금 범죄의 양형이나 촉법소년 등의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승패가 나오면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예능의 좋은 점이 나온다. 첫째, 예능이기 때문에 무겁게 접근할 확률이 낮은 편이다. 둘째, 예능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로 다시 도전하면 된다. 한번 승패가 나온 주제라 하더라도 괜찮다. 승리한 결론에 도전할 다른 도전자가 나오면 된다. 본래 논쟁의 주제는 많은 편이나 쉬운 주제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계속 도전할 수 있으면 분량의 걱정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이외 세세한 부분은 몸싸움을 예능화한 격투 프로그램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선수선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해보자. 격투의 경우 선수의 능력과 승패를 알기가 쉽다. 그러나 논쟁은 선수의 능력을 알기 어렵고 승패도 알기가 어렵다. 단순히 지식이 많다고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논쟁은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유리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적더라도 관점이나 태도나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유리할 수 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 않다. 과거 하루는 정의를 말하고 하루는 불의를 말했던 인간도 있었다. 논쟁의 기술에 따라 옳고 그름을 뒤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식의 대결이 아닌 한정된 시간 내에서 논리로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단순 지식으로 선수를 선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얼마나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가? 얼마나 영리하게 주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가? 얼마나 알기 쉽게 주장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는가? 또한 예능이기 때문에 시청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제삼자가 있는 논쟁은 대체로 대화상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제삼자에게 끼치는 영향까지 고려해야 한다. 시청자가 있는 이상 시청자를 고려하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통상의 논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유명하다는 이유로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를 기용할 것이 아니라 실제 논쟁기술이 높은 인간을 기용해야 할 것이다. 격투기가 그러하듯, 능력이 뛰어나면 알아서 유명해진다.

 

논쟁의 예능화는 퇴락하고 있는 한국 인문학을 되살릴 불씨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단순 수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므로 공영방송에 적합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지역 영상 플랫폼

 

예전에 인터넷 영상 플랫폼은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 틱톡과 숏이 유행, 지역 영상 플랫폼이 지역으로 말이다. 본래 지역 영상은 방송매체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직 인터넷 영상 플랫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만들면 좋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유튜브는 취향이나 분야로 묶어 분류하지만 지역 영상 플랫폼은 부동산으로 묶어 분류한다. 영상을 주소로 묶을 수 있으면 지역의 정보를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방송매체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래 방송매체가 지역의 영상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지역 정보의 전문가가 지역 영상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생각했다. 또한 방송매체는 언론과 창작과 플랫폼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플랫폼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생각했다. 넷플릭스도 생산과 플랫폼을 둘 다 하고 있지 않나. 둘째, 이제 방송매체는 국가의 세금이나 기업의 광고나 후원 없이도 정보와 창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탄산업 사양화로 인해 지역경제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강원랜드를 설립한 것처럼, TV의 사양화로 인해 수신료 수입에 차질이 빚어지게 될 것을 우려하여 어떤 산업의 주도권을 주게 하는 것은 타당하다 생각한다. 지금 나는 이것이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공영방송의 공정성이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다. 셋째, 지역 영상 플랫폼이 나와 지역 영상이 생산되어 지역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은 지극히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한다. 공영방송에 적합한 일이다.

 

지금 국가에서 공공 플랫폼을 통해 빅데이터에 의한 통계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비자의 수요에 맞춘 정보가 아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상은 철저하게 소비자에게 맞춰질 것이기 때문에 공공 플랫폼과 역할이 다르다.

 

 

 

언론

 

언론 자체로 수익이 보장되기는 어렵다. 언론은 가루받이를 통해 자연의 생태계를 지키는 것과 같이 정보를 잇는 것을 통해 사회의 생태계를 지키는 사회공헌을 하는 역할이다. 이제 언론의 독립성을 위해 모든 언론은 자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창작물이나 플랫폼으로 자체 수익을 얻게 되면 정보를 악용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이 더 위험하다. 언론이 수익을 얻기 위해 정언유착이나 경언유착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생각한다.

 

대체로 한국 언론은 우수한 편이라 생각한다. 단지 특정 사상에 휘둘리거나 수익을 위해 정치와 경제 등과 유착하는 것과 같이 정보를 악용하는 것이 문제다. 언론의 폭거로 언론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언론이 자성을 해야 하지만 언론 자체적으로 공정성과 독립성을 얻을 수 있는 환경 또한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을 위해 배를 곯는 것을 언제까지 요구해야 하는가? 이제 거대 언론만이 아닌 모든 언론이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면 경쟁원리가 작동하지 못해 정보의 질이 낮아질 우려가 있다. 따라서 고품질 정보를 생산하거나 잇는 언론에 대한 대중의 특별한 관심과 대우가 필요할 것이다.

 

인터넷 영상 플랫폼에서도 정보를 생산하여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제 언론은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보다 전문화될 필요가 있다. 방송국으로 분류될 것이 아니라, 언론계 자체적으로 특정 분야의 정보전문가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인터넷의 정보보다 언론의 정보를 신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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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글은 잡담 글로 올릴게요. 잡담 글은 종종 올릴 것 같네요. 다음 잡담 글은 아마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입니다.

 

역할주의 사상 정리가 끝나면 아마 그건 제대로 관리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오타나 오류 있어도 사상의 양식이니 그냥 방치했는데, 그거부터는 관리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사는 게 힘드네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외세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논란이 일어나면 외세의 개입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말해두겠습니다.

 

누가 정치권력을 쥐든 나는 나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이제는 낡은 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한국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세습은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하는 가족주의입니다. 이제는 혈통이 아닌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라는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이 같은 이상을 위해 힘내야 합니다. 보통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하는데, 각국의 낡은 관습과 자본주의가 결합하자, 그릇된 자본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는 사상이죠. 그런데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생산자가 힘들게 됩니다. 생산자가 노력을 해서 품질이 높은 상품을 생산해야 그걸 소비하는 소비자가 행복하게 되는 구조죠. 공무원이 힘들어야 국민이 행복한 구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과거 왕조시대 칭송 받는 왕들이 신하를 힘들게 할수록 백성이 행복하다 말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산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하면 됩니다. 과학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상이 그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분별한 검열을 자행하는 무리들과 거기에 찬성하는 부류들은 중국과도 같은 자유의 적입니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남성이 즐기는 컨텐츠가 검열되는 일이 많아 착각할 수 있는데, 여성이 즐기는 컨텐츠를 검열해도 반대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에 관한 일이지, 성별과 관계가 없습니다. 성별 국적 취미 세대 전부 관계없이. 예전에는 적성국의 사상이라고 공산주의 저서가 금지되었지요. 그것에 반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사상잊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검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과거 검열하던 시대에 자유와 민주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검열에 찬성하는 것은 그 외침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요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규정짓습니까? 사상서를 검열했다는 것으로 분노하던 이들은 도대체 무엇에 분노했던 겁니까? 자유의 개념과 가치를 이제는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이성애 결핍으로 야기되는 모든 현상의 근원은 여성의 정조관념에 따른 성 터부시에 오는 겁니다. 미성년 때 자아가 형성되므로 그때 인생에 필요한 것을 전부 교육해야 합니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 따위를 말이죠. 학생이 야한 걸 봤다고 화내고 혼내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이성애 결핍을 만드는 것입니다. 음란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원인 중 하나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성애에 성욕이 빠지면 어떻게 이성애가 성립될 수 있습니까? 성욕이 없는 애정은 그냥 친애입니다! 신체적 본능으로 시작된 애정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서 나타난 아이에 대한 애정은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입니다. 이후 성욕이 떨어져도 시작은 성욕으로 시작해야 대를 이어나가는 거란 말입니다! 그걸 부정해서 어떻게 합니까! 야한 걸 보면 잘못되었다, 이성의 매력을 칭찬하면 혐오다, 이러면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이성애가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성애가 결핍된 겁니다. 성을 터부시하여 음란물을 악으로 몰고 있는 이들이 이 국가의 소멸을 주도하고 있는 겁니다. 성 억압이 이성애 결핍을 부르고, 이성애 결핍이 남성이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게 하고, 여성이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게 만든 겁니다.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것과 성 상품화나 수익 공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애정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에 단순 도구로 격하된 것입니다. 서로를 온전하게 사랑하게 하려면 성을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이럼에도 음란물을 악으로 모는 이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 성을 억압하며 국가를 소멸로 이끌고 가겠지요. 몹시 슬픕니다. 연령에 맞는 등급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등급 따위가 인간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나는 미성년 때 등급에 맞지 않는 컨텐츠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악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한국 치안이 세계적 순위입니까? 그러면 성적 억압을 자행하여 검열이 일상인 이슬람은 치안이 높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음란물 검열은 단순한 성적 억압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억압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상서를 검열하는 것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무엇 때문에 잘못된 건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풍습에 의거해 아무 생각 없이 음란물을 막는 걸 올바른 일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국가를 소멸로 이끈 거라고. 조소할 가치도 없습니다. 무표정으로 그게 잘못된 거라고 묵묵히 주장할 겁니다. 사회현상 이해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는 방식으로 출산율 폭락되고도 똑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건 학습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단순한 일이면 학습능력이 부족한 걸로 끝나는데, 출산율 같은 문제는 국가소멸로 이끄는 죄가 됩니다. 공산주의 척결을 운운하며 사상서 검열하는 거나 성 감수성 운운하며 성 컨텐츠 검열하는 건 똑같은 겁니다. 성 감수성 운운하면서 성 억압하는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를 인지하십시오. 그 손에 놓여진 출산율 지표를 직시하십시오. 국가와 민족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걸 깨달으십시오. 성 검열을 운운할 때마다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관계의 종말이 부를 종의 마지막을 떠올리길 바랍니다.

 

꾸밈노동에서 벗어나 남성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겁니다. 시선을 받지 않는 것은 남성이 사랑할 정도의 매력이 전혀 없어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냥 그건 이성에게 사랑 받기를 포기한 것일 뿐입니다. 거기에 멋대로 도덕성을 부여한들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학력사회의 끝은 학업의 목적이 취업이 아닌 창업이 되면 바뀔 것입니다. 창업의 성공에 학력은 그리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자 마자 사업해서 성공하는 유능한 자본가 수의 증가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걸 위해 이제는 교육이 학생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야 하겠지요.

 

정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객관적인 이기심입니다. 어떤 주관적인 이기심을 사회적 공감대를 사는 객관화를 통해 다수의 이익이 되면 정의가 되는 것이죠. 어떤 단순한 주관적인 이기심도 객관화가 되면 정의가 됩니다. 그런데 일부 천박한 사상들은 객관화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이익 그 자체를 인권이라 주장하여 사회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정의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어떤 암묵적인 약속을 전제하고 교류합니다. 특정 풍습이나 관념 따위는 이미 사회에 속한 사람 내면에 새겨져 그 외의 영역에서 개성이 두드러지죠. 인간의 자아로 비유하면 무의식의 영역이죠. 그런 관점에서 풍습이나 관념은 사회의 무의식이라 해도 다를 것은 없을 것입니다. 연하는 연상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라는 규칙은 한국사회에서 당연한 약속이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런 존댓말 같은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암묵적인 약속, 사회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상을 하는데 있어 기초 중 하나가 바로 이 고정된 무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적응실패로 인해 애정결핍현상을 해결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현상 하나에 이 정도로 파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인문학 수준이 낮군요. 인문학에 있는 사람이 설거지 운운하는 건 우울하네요. 본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파악도 못해서 남성이 주입한 여성열등주의를 여성의 본성으로 착각하고 그거에 맞춘 걸 여성인권이라 주장했던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참. 솔직히 머리가 아파요. 한국이 자유적응에 실패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답답하네요. 조선이 에 중점을 두었던 유교국가라고 해서 인문학 수준이 높다 할 수 없습니다. 유교의 가르침 내에서만 사고할 수 있었으므로 실상 인문학 수준이 종교국가 수준이었죠. 이제 한국 인문학은 조선의 유교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사상가가 수준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겠습니다.

댓글 : 2 개
읽다가 눈 아파서 포기….
논문급이네요 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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