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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2021.12.06 PM 01:03
신세계와 오프라인 유통
시대의 변화로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할 분야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다. 누구나 다 안다. 오프라인 유통업에 미래가 없다는 걸 말이다. 통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유통업체 매출이 전년 대비 오프라인은 3.6% 감소하고 온라인은 18.4%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은 매우 당연하다. 왜냐하면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하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유통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에서 유리하다. 온라인은 스마트폰으로 상품을 고르기만 해도 집까지
배송되기 때문에 편리경쟁에서 유리하다. 오프라인 유통업은 가격과 편리에서 온라인 유통업을 이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역할이 달라질 뿐이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교육은 단순한 지식주입이 아닌
자아형성 후 지식 검색 및 활용으로 바뀌어야 하고, 언론은 단순한 정보공급이 아닌 정보의 연결로 인간사이의 괴리를 줄여나가는 정보관리로 바뀌어야 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단순한
수요에 공급하는 것이 아닌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있는 수요에 생산품을 유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수요를 만들어서 유통을 해야 한다. 인간이 모여 수요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수요에 상품을 유통해야 한다. 온라인이 가격과 편리를 담당한다면 오프라인은 이제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한다. 수요에 맞춘 유통과 수요를 만든 유통은 전혀 다르다.
이번 글에서 신세계에 초점을 맞춘 것은 단지 신세계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알아보니까 신세계가 유통업에 전념하는 것 같고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단을 운영하는 것을 보았을 때 수요공급이 아닌 수요창출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서 초점을 맞춘 의미는 있다고 본다. 앞으로 이런 종류의 글은 하나씩 어떤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계가 인간관계를 담당해야 할 이유는
기술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희소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애정결핍
한국은 애정결핍국가다. 장유유서로 인해 세대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가정과 학교와 기업에서 나이차이가
나면 인간관계에 선이 그려져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그 결과 가족여행이나 회식자리를 꺼려하는 사람이 늘었다. 장유유서는 연상과 연하의 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만들었기에 다수의 연상이 연하와의 평등을
불편해하기에 연하와의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가 어렵다. 불평등을 바라는 연상과 평등을 바라는 연하가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남녀유별이나 정조관념 따위로 인해 성별간의 애정이 결핍되었다. 어린 시기부터 이성과 가까이 지내며 이성애를 키워나가야
함에도, 연상의 권위로 남녀를 갈라놓아 이성관계를 줄이고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여 성관계를 막은 탓에 정상적인 이성애로 성장치 못했다. 그 결과 남성은 여성을 성욕해소도구로 여기거나 여성은 남성을 ATM기기로 여기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 핵가족과 1인가구 증가, 저출산이나 가족애 결핍 따위는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주의가 여성인권을 빌미로 남녀의 관계와 성관계를 더욱 줄이고 막으면서 한국의 이성애는 심각할 정도로 결핍되어 출산율이 폭락하고
말았다. 이는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여성주의의
특성이 야기한 것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을 주관으로 여기는 여성의 손익으로 여성의 인권을 주장하다 보니 이런 괴상한 결과가 나와버렸다. 통상 인권이라 함은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함에도
여성주의는 성 상품화나 성매매를 하는 여성의 의지를 무시하고 여성의 권리를 빼앗고 있다. 성 상품과 매매는 그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거지, 그 자체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노동 상품과 매매가 상품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따라
인권이 결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은 한국 여성 인권이 아닌 가부장제 세계관 속의 여성 인권을 추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지 않은 여성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존재기 때문에 약한 의지에 맞춘 할당제와 강한 수치심에 맞춘 성적 억압이 나타나게
된다. 유교적 여성주의 또는 기독교적 여성주의가 보통 이렇다. 한국 여성주의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남성의 독선을 비판하던 이들이 여성의 독선을 주장하고
있다. 대다수의 신세대와 일부 기성세대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났음에도
일부 신세대와 대다수 기성세대가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여성의 주관적인 이익을 인권이라 주장하는 바람에 사회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가부장제 세계관 속 있는 사람은 가산점이나 할당제
따위의 여성특혜나 성적 억압을 주장하지만,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극단 여성주의나 온건 여성주의나 차이가 없다. 근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보면 될 것이다. 정녕 여성의 인권을 바란다면 여성을 억압하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진지하게 말하겠다. 나는 여성을 객관적으로 우수하다 생각하고 있다. 학교성적 따위의 다양한 지표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도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주장하는 여성특혜나 여성 성
억압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기 때문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여성은 열등하지 않다. 현명한 여성을 응원한다. 우자와 현자는 성별로 구분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여성인권은 인간의 인권 안에서 추구해야 한다.
한국은 애정결핍국가였음에도 과거에는 강요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세대간에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이성간의 애정이 없어도 강요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강요가 사라지자 관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핵가족, 1인가구, 저출산 따위는 인간관계 감소로 인한 현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 감소한 관계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온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자아를 유지하는 늘어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업이나 생계유지를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그나마 살아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으로 생계유지조차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 또한 앞으로 기존 산업은 대부분 로봇과 인공지능이 할 예정이다. 온라인 일자리가 늘고 오프라인 일자리가 줄어든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하게 된다.
다른 국가는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국만큼 애정이 결핍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애정결핍 된 상황에서 메타버스와 NFT의 등장은 대다수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소멸시킬
기폭제가 될 확률이 높다. 현재 한국은 정치, 경제, 사회, 안보,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당장 오프라인 관계 소멸의 위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와 NFT를 막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건 기술발전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교통의 발달로 인간의 체력이 저하된 것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간의 문해력이 저하된 것과 같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희소된 것일 뿐이다. 발전은 발전대로 하게 두고, 그 발전으로 인해 나타나는 부작용은 부작용대로 해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저출산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땅의 크기를 고려했을 때 인구수가 줄어들게 되는
저출산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출산이 애정결핍으로 인한 인간관계의 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애정결핍을 만든 사상은 불변가치가 아니라 만변가치기
때문이다.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므로 사상의 변화로
애정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면 출산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갈 것이다.
지금 기성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익숙하기
때문에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신세대에 맞춰야 한다. 지금 신세대는 미래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메타버스와 NFT가 성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의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희소될 확률이 높다. 저출산이 과거서부터 수많은 징조 속에서 현재 결과가
나타난 것처럼, 인간관계 희소 또한 수많은 징조 속에서 미래에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과거와 현재는 사회의 변화로 저출산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면, 현재와 미래는 기술의 변화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라는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수직사회에서 수평사회로의 변화로 자유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인터넷 이전에서 이후로의 변화로 기술적응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이
동시에 필요한 국가존립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할 수 있겠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 한국은 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다른 관점으로 가보자. 어째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 온라인 인간관계로 충분하지 않는가? 어쩌면 먼 미래에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현재는 아니다. 왜냐하면 불변가치에 해당하는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재 인류는 이성의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있어야 출산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이성이 서로 사랑을 해야 종이 존속된다. 종의 존속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유지되어야
한다. 통상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사상과 기술의 발전은
인본주의를 근거로 한 불변가치를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
인본주의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을 위한 사상이다.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란 인간이 인간인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말한다. 본래 보수와 진보가 논쟁을 벌어야 할 사안은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다. 인간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변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싸워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선동과 이권 다툼으로 점철된 정치를 보면 몹시 슬퍼
삶의 허망함을 느낄 정도다. 인권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에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무엇이 정녕 인간을 위한 길인지 고찰하길 간곡히 바란다. 내가 자유주의를 추구하고 자본주의가 옳다 말하고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는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이고 진보는 지나치게
과거의 것을 지우려 한다. 내가 가고 싶은 미래는 인간을 위한 미래다. 내가 비판하는 대상은 전부 그것이 인간을 위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서다. 이런 것은 나 개인의 손익과 관련이 없는 일도 많다. 객관적으로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그것이 옳다면 옳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인류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향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최근 가상자산이나 메타버스 등에서 논의
중인 탈중앙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탈중앙화는 불변가치인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는 국가라는 존재를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중앙화로 세금을 걷지 못하게 되면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국가가 존립할 수 없으면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곳을 잃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결코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어떤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탈중앙화는 탈국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나키즘 수준으로 저급하다. 만약 진정 탈중앙화를 원한다면 탈국가를 하고 나서 탈중앙화를 원하는 이들끼리 살아가길
바란다. 탈중앙화는 사상적 관점이 아니라 기술적 관점에서
나타난 것일 것으로 보인다. 탈중앙화는 부디 인문학적 고찰을 좀 더 하고 나서 하길 주장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기본적인 불변가치를
부정하였다. 분명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승패는 상품화 능력으로
결정된 것은 맞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를 생각하며 경쟁을 통해 상품가치를 높여 그걸 소비하는 국내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하여 경제를 발전하게
하였다. 공산주의는 생산자를 생각하는 바람에 경쟁을 없애
상품가치를 높일 이유가 없어 상품 품질 저하로 국내 국민을 불행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경쟁 없이 만든 상품이 경쟁 속에 만들어진
상품을 이길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공산주의는 몰락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로 돌아섰고 중국은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공산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상품가치를 올리는 방안을 사용했다.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북한은 아직까지도 고난의 행군을
할 정도로 빈곤한 처지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어떤 방법을 통해 공산주의가 상품가치를 높였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에는 미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인 욕망이란 불변가치를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공산주의 국가는 기득권층은 마음대로 욕망을 추구하고 있고 그 외는 살기 괴로울 정도로 절제시키고 있다. 이런 차별로 인해 불만이 쌓이게 되고 언젠가 그
불만으로 국가가 붕괴될 것이다. 어떤 사상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을 바른 길로 안내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사법 언론 은행 등에 대한 불만이 치솟고
있다. 이는 특별히 한국이 무능하기 보다는 한국 국민이
접하는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사회를 보다 엄격하게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이런 것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법을 옹호하고 언론을 옹호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역할이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을 비판하는 이들은 불변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따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을 비판하며 사법의 인공지능화를 주장하면서 삼권분립의 파괴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맹목적으로 원하는 판결이 아니면 화부터 내며 법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보면서 어떻게 사법을 옹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물론 일부 판사가 성인지감수성이 법치주의 기본인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않고 차별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을 행함을 보면 국민들의 비판은 지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다고 본다. 성인지감수성이 얼마나 천박하냐면 돈인지감수성 따위를
생각해보면 된다. 약자이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빈민
또한 약자기 때문에 그에 맞춰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성인지감수성은 돈이 적은 빈민은 약자기 때문에 부자와 다르게 판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성주의 자체가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법치주의를 훼손하더라도 여성이 이익을 보면 여성인권이란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여성주의가 법 앞의 평등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든 사법을 비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겠다. 사리사욕 또는 전관예우 따위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판결을 하는 일이 많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법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논리로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가 매우 낮음에도 언론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많은 정보생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언론만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역할이 아직까지
없다. 얼마나 많은 개인방송이 수익이 안 되는 일에 집중하겠는가? 이런 측면에서 언론의 쇠퇴가 아닌 언론의 새로운
길을 주장했던 것이다. 은행을 비판하며 가상자산의 탈중앙화를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 탈중앙화를 비판하는 까닭도, 탈중앙화가 국가 내에서 은행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지 못하는 이상 탈중앙화는 결코 은행이나
경제를 대체할 수 없다.
많은 사상이 불변가치에 대해 무지하다. 채식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잡식을 부정한다. 비폭력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폭력성을 부정한다. PC주의는 인간의 본성인 비웃음을 부정한다. 인간의 본성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채식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공육이 바람직할
것이고 비폭력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게임이나 격투기가 바람직할 것이며 PC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그가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 인간에게 피해를 입하지 않은 상황에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인본주의적 방법이다. PC주의를 잠시 말해보자. PC주의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를 생각했던 공산주의처럼 타인이 아닌 본인을 생각하자 주장한다. 여성주의의 주관적 이익의 인권화가 바로 이런 흐름에서
나타난 것이다. 본인을 생각하며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게 만드는, 인간의 향상심을 부숴버리는 무시무시한 사상이다. 만변가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보통 사상이 그러하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자리잡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장유유서나 정조관념 따위가 한국인을 불행하게 한다면
그걸 바꿔야 한다. 그럼에도 불변가치는 훼손하면서 만변가치는 굳게 지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인간의 애정은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면서 특정 사상에 매달리는 꼴을 보면 속이 터진다. 유교의 연령차별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상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이제 연상이 아닌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가령 어떤 노인이 피해를 입으면 노인공경할 줄 모르냐고 말할 게 아니라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건 나이 성별 관계 없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불변가치고 특정 인간에게만 공경하는 건 만변가치다. 많은 이들이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요즘 시대는 논쟁이 쉬운 측면이
있다. 어떤 주장에서 불변가치를 훼손 또는 부정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걸 지적하는 순간부터 논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논쟁이 불변가치만 파악하고 있어도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정말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불변가치와 만변가치를 구분 짓지 못한다. 주관과 객관을 구분 짓지 못한다. 취향과 도덕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인권과 독선을 구분 짓지 못한다. 허용과 권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권장과 강요를 구분 짓지 못한다. 자유와 방임을 구분 짓지 못한다. 재력과 전능을 구분 짓지 못한다. 개인과 집단을 구분 짓지 못한다. 의지와 세뇌를 구분 짓지 못한다. 어떤 인문학자는 우수하다 생각한다. 나는 인문학자와 교수가 작성이나 번역 또는 해제한
사상서로 생각을 키워나갔다.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를 보면 인문학적 수준이 낮다 하지 않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그게 몹시 괴롭다. 어린애도 논파할 수 있는 저급한 논리를 가지고 선동하고
있는 꼴을 보면 환장하겠다. 평등하다면서 한쪽에 특혜를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거나, 성 상품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남성 성 상품화는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한다거나 말이다. 이런 것은 가부장제 세계관에 익숙한 인간들이 저지를법한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많은 이들이 인문학을 무시하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단순히
인문학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 기초인문학 수준이 낮은 편임을 인식하고 제대로 된 인문학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겠다. 보통 낮은 수준의 인문학 때문에 발생하는 폐해에
대한 책임은 개개인에게 묻고 싶지 않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상적인 사상가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에 굳이 책임을 묻자면 사상가 또는 인문학이다. 그러나 과거의 것은 물을 수 없어도 현재의 것은 물을 수 있을 거라 본다. 책임져야 할 일을 더 이상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아도 낡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애정결핍으로
인한 저출산이라는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그만 문제를 악화시키길 간곡히 바란다. 어떤 종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이 악이라면 한국인의 씨를 말리는 행위를 저지르는 이들도 악이다. 도대체가, 사회에 그렇게나 영향을 끼치는 이들에게 애국심이
없단 말인가? 작디 작은 나라가 열강 속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낭비할
힘 따위 없단 말이다. 유교의 장유유서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아동과 여성 약화교육과 정조관념을 성립시키기 위해 자행되고 있는 성적 억압과 한국 여성주의의
가부장제 세계관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인권화하고 있는 무지한 작태는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인류라는 종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다. 오프라인 인간관계에서 성립되는 이성애는 인류가 단성생식 따위 같이 이성관계 외의 방법으로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 가치가 된다. 인본주의적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는 불변가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새로운
역할이다.
유통업계
온라인 유통업계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말이 없다. 세부적으로 개선하거나 발전해야 하는 방향은 알아서
해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제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프라인은 온라인과 가격경쟁과 편리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이 우위에 설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여가다. 아이쇼핑 또는 쇼핑데이트 따위가 보통 소비와 여가가
합쳐진 형태다. 이런 여가는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이길 수가 없다. 이후 온라인 또한 어떤 형태를 통해 여가까지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하나 아직까지는 어렵다. 오프라인은 이 점을 공략해야 한다. 물론 단순히 공략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그것뿐이면 앞서 장황한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한국의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위해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를 담당해야 한다. 온라인은 실질적인 상품의 수요에 유통하는 걸 담당하고
오프라인은 수요를 만들어서 상품을 유통하는 걸 담당해야 한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보통 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나 그러다 보면 시장경제에 지나치게 간섭하게 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그 역할을 하길 바라게 되었을
뿐이다. 역할의 영역은 만변가치에 해당한다. 딱 부러지게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는 인간이 해야 한다. 지금 당장 한국에서 오프라인 인간관계 희소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제인식이 미비하기에 이 역할은 과거 빈 땅을 점령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선착순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회적 공헌을 하는 것이 명백해지면
정부에서는 그런 이들에 대한 어떤 특정한 혜택이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세금감면이라던가 말이다. 그럼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생성과 유지의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알아보자.
우선 종래의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가령 술집이나 PC방은 술과 서비스가 아닌 안주와 부식으로 수익을
얻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이 보통 수요를 만든 다음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술과 게임이라는 라는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안주와 부식이라는 수요를 만들어 수익을 얻는다. 그러나 이런 것은 특별히 인간관계 개선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수요와 수익을 고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가
나온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시로는 충분하다. 이런 형태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이상 이런 방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업계는 이런 걸 보다 더 확장된 형태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면 된다. 신세계의 야구단 운영은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길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여가와 유통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이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가령 메타버스와 NFT에 익숙해진 미래세대는 오프라인 인간관계 자체가
어색하여 야구장에 갈 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걸 위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까지 필요하다.
오프라인 플랫폼화
온라인 유통업은 현실을 가상으로 연결하여 유통과
소비과정을 생략하는 것으로 가격과 편리를 잡은 것이라면, 온라인 플랫폼은 가상과 가상을 연결하여 시공간을 생략하는 것으로 거리와 관계를 잡았다. 관계, 온라인 인간관계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 오프라인 유통업은 온라인 플랫폼을 참고할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겠다.
온라인 플랫폼 몇 가지를 살펴보자. 유튜브나 로블록스 등의 특징은 어떤 생태계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고 있다. 목적이 영상이나 게임 따위로 다를 뿐이다. 이는 국가가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사회를 구축한 뒤에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세금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목적이 인간이라는 것으로 다를 뿐이다. 즉 플랫폼 경제란 국가 안의 작은 국가들이라 생각하면 된다. 플랫폼 생태계에서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플랫폼을 운영하고, 플랫폼에서 생기는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된다. 이런 구조를 오프라인 유통업 또한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온라인의 경우 법적인 규제가 아직 들어서기 전이기
때문에 큰 제약 없이 성장하고 있지만 오프라인의 경우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나 만약 온라인에서는 허용되나 오프라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면 통상 법이 낡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잠깐 정리해보자. 오프라인 유통업이 가야 할 길은 있는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게 아닌 창출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는 것이다. 어떻게 창출하느냐? 여가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요가 창출된다. 창출된 수요에 상품을 유통하여 수익을 얻는다. 이 기본 구조에서 여가를 오프라인 플랫폼으로 제공하면 된다. 그리하면 플랫폼 내에서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요에 대한 상품 유통하는 것으로 수익을 얻고, 생산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온라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수수료뿐만이 아니라 현실 상품 수요에 유통하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유튜브가 최근 상품광고를 하는 것을 볼 때 유사하게
수익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유통과 간접 유통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한국 전통인 김치 담그기를 할 필요가 있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김치 담그기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본래 생산하지 않는 소비자인 사람이 혼자 또는 집단이 가서 김치를 담근 다음, 소비해야 할 것 외의 남는 김치는 다른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김치를 담근 사람은 남는 김치로 수익을 얻었다. 오프라인 플랫폼은 그 생산과 판매 과정 속에서 김치재료
유통수익과 김치생산 수수료수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특이할 만한 점은 본래 오프라인 유통업체에서 소비를 하던 사람이 생산을 하여 수익을 얻었다.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체도 온라인 플랫폼과 비슷하게 생산과
소비에서 나타나는 수수료로 수익을 얻었다. 차이점은 추가로 재료 유통이라는 것으로도 수익을 얻었다. 이런 기본적인 구조가 바로 오프라인 플랫폼화다. 물론 이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산자의 인성, 생산된 김치의 품질이나 가격, 수요가 결정되지 않은 점 따위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건 온라인 플랫폼도 원래 처음에는 힘들어하는 문제다. 유튜브의 경우 우수한 품질의 영상이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생태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쉬운 점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겠다. 그나마 나은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은 온라인 플랫폼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이 거쳐온 시기보다는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가령 담근 김치를 플랫폼 관리자가 시식해보고 맛을 품평하여 판매 허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최저품질을 보장한다. 생산자의 판매기록이나 맛의 평점 따위를 온라인 앱에 기록하는 것으로 생산자의 인성이나 가격 따위가 결정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람은 식사를 해야 한다. 그 때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재료를 제공한다. 어차피 요리할 것이라면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요리를
잔뜩 한 뒤에 남는 요리를 저렴한 가격에 판다. 어떤 일가가 있다. 오프라인 플랫폼에서 여가를 보내기로 한다. 그 때 일가가 자신들이 먹을 요리를 만든 다음 남은 요리를 저렴하게 판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DIY를 하는 이들이 직접 취미로 만든 걸 구매하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어떤 이들과 같이 노는 것으로 소비를 한다. 이렇게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었다. 점심시간에 생산하고 이후 시간에 소비를 한다. 이 과정이 전부 즐거운 여가다. 가족과 합심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그걸 나누는
것으로 여가에 필요한 수익을 얻고 그 수익으로 다른 생산자의 상품을 소비한다. 다른 생산자도 비슷하다. 여가 시간의 일부는 생산하고 일부는 소비한다. 그 과정 전체가 여가다. 이런 것이 여가와 생산과 소비가 합쳐진 오프라인
플랫폼, 오프라인 생태계다. 이것으로 오프라인 인간관계 유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온라인은 놀아주는 것으로도 비용이 지불되고 있다. 오프라인도 그런 식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사 입장에서 온라인 게임 무료 이용자는 다른
유료 이용자를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료 이용자를 위해 들어가는 고용이나 서버 유지 비용은 실질적으로 무료 이용자에게 지불되는 것과 같다. 온라인 게임은 이미 놀아주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무료 이용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소비자를 즐겁게
하고 있다. 즉 어떤 측면에서 그건 생산활동이다. 이걸 오프라인 플랫폼도 쓸 수 있다. 아니 이미 쓰고 있다. 예컨대 어떤 대회를 열고 상금을 준다고 해보자. 그때 주최측은 광고효과 따위를 목적으로 상금을 지급한다. 여기서 관점을 바꿔보자. 상금을 얻을 정도의 우수한 인간이 대회에 참가하게끔
하는 것은 다른 대회에 참가하거나 관람하는 이들을 즐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된다. 요는 간단히 말해 놀아주는 비용이다. 주최측은 상금 수여자에게 놀아주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콘서트에서 떼창이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뜻한다고 한다. 그게 만약 다른 관객을 즐겁게 하여 콘서트 티켓
구매에 영향을 끼쳤다면 충분히 생산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산활동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산활동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생산활동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다. 어떤 소비에 영향을 끼치는 광고가 생산활동이라면
이런 것 또한 생산활동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소비자의 소비 이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떼창이라면, 그런 떼창을 하는 소비자에게 어떤 혜택을 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조사한 결과 떼창으로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어 다른
소비자를 즐겁게 했다는 근거가 명확하다면, 그 근거로 티켓 할인이나 또는 적당한 금액을 환급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지 못한 생산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아
다시 한번 콘서트에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가 속에서 생산과 소비가 되어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여가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라지는 직업들이 있다. 계산하는 직업이나 서빙하는 직업이나 홍보하는 직업이
사라질 수 있다. 여기서 관점을 바꾸자. 이 직업을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라지는 걸 굳이 사라지지 않게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여가를 목적으로 하였을 때다. 어떤 사람이 여가를 즐길 때 2시간 정도 계산이나 서빙이나 인형탈을 쓰고 홍보를 하고 나머지 시간을 놀이를 즐긴다고 가정해보자. 여가 동안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진다. 생산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 시간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짧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계산이나 서빙에 지불되는 비용은 실질적으로
소비촉진 비용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에 광고비로 인식하면 된다. 계산이나 서빙에서 지불된 비용을 다른 유통상품으로 지불된 비용보다 더 크게 회수한다. 그런 개념으로 접근하면 된다. 설령 회수가 어렵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놀아주는 비용과 같이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다른 소비자의 소비를 촉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플랫폼 내에서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을 어떤 다른
소비자가 들어주는 것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게끔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소비자가 아이 돌보기를 원한다면 다른 소비자가 그걸 들어줄 수 있다. 물론 아이 돌보기는 예민한 문제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돌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외 심부름이나 상품 구매 고민상담 또는 디지털 문맹자가 구매하기 어려운 상품을 구매하는 걸 잠시 도와주는 걸로도 소비와 생산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여가를 목적으로 한 오프라인 경제 플랫폼이란 생태계를
형성하는 것. 거기서 발생하는 수요에 대한 재료 유통 수익과 생산과
소비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수수료 수익으로 생태계를 유지하고, 그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세금으로 국가를 유지한다.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의 결과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라인의 온라인화
온라인 인간관계와 오프라인 인간관계의 가장 큰 차이는
익명이다. 온라인 인간관계는 오프라인과 달리 인간관계에 있어
익명이라는 영 번째 관계가 존재한다. 오프라인은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순간부터 통성명을 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이 익명관계가 성립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지쳐 좀 더 가벼운 익명의
관계가 성립되는 온라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굳이 인간관계에 지치지 않더라도 편하고 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특성상 그렇게 되게 된다. 특히 한국은 수직적인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많아 수평적인
온라인 인간관계를 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같이 수평적인 관계성립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의 사상은 변하기가 쉽지 않다. 장유유서에 세뇌된 인간은 연령차별을 올바른 도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당분간은 온라인과 같이 익명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어떤 특정 플랫폼 내에서는 모두가 익명의 닉네임으로만
교류할 것. 이것을 지정해두면 된다. 가령 혼자서 플랫폼에 출입한 후에, 테니스를 치고 싶다면 플랫폼 내에 있는 사람 중에
테니스를 치고 싶은 사람을 찾아 같이 치며 논다. 오프라인 플랫폼 어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으면 될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혹시 따로 실명으로 만나고 싶다면 플랫폼 외의 지역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면 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
수용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술을 마시더라도 같이 술만 마시면 되고,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만 같이 하면 된다. 이런 방식을 써서라도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유지시켜놔야 앞으로 있을 메타버스나 NFT 시대를 대비할 수 있다.
익명 오프라인인 만큼 출입자의 인성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가 달라지는데, 그에 따라 2가지 필터를 적용한다. 첫째, 성년은 신용등급으로 미성년은 보호자의 신용등급으로
출입여부를 결정한다. 둘째, 익명 오프라인 진영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반말을
사용한다. 직원조차 반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반말이 불편한
인간은 출입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평등개념이 박힌 사람만 출입할 수 있게 된다. 영역을 구분 짓기 위해 출입구 밖의 직원은 존댓말을 쓰고 출입구 안의 직원은 반말을 쓴다. 출입구 밖의 직원은 안에 들어갈 때 주의사항을 설명한다.
온라인은 지극히 편향적이다. 원하는 정보만 얻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오프라인도 그걸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다. 출처는 불분명하다는 점을 말해두겠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 즐기던 문화를 접하자, 신체 나이 또한 어려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문화를 접함으로써 뇌가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착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결과가 있기 때문에 온라인과 같이 구역을 만들어서 특정 세대에 최적화한 상품선별을 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오프라인의 역할극
오프라인 유통업의 변화의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완전자동화
시대를 대비하여 일이 없어도 오프라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직업이 없어도 역할이 있어야 인간은 오프라인 사회활동을 하게 된다. 동호회 따위의 간사나 협회의 참여자 또는 무상봉사자
따위의 역할. 연금을 타거나 주식 또는 코인 또는 부동산 또는
상속 따위로 수익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인간 또한 사회에 속하여 살아갈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 나는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자는 역할주의를
통해 그것에 대응하고자 한다. 오프라인 유통업도 그것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 유통업이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역할 판매다. 각 역할을 판매하고 인기 있는 역할은 +가격이 높고 인기 없는 역할은 –가격이 높다. 인기가 높은 역할은 돈을 지불하고 인기가 없는 역할은
돈을 지불 받는다. 어떤 역할극을 꾸미고 거기에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전문 배우를 섭외하고, 그 외의 배역들은 판매하는 것으로 소비자가 생산을 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 소비자의 생산을 다른 소비자가 보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역할을 구매한 사람이 아마추어일 때에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걸 어려워할 수 있다. 그걸 다른 전문 배우가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게끔 유도한다. 인기가 없는 배역은 비용을 지불해서라도 충원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역할 판매의 특이할 점은 오프라인 플랫폼 내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해당 역할에 맞춰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다. 만약 기사 같은 배역을 하고 있으면 역할을 구매한 동안에는 기사 대우를 해준다.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처럼, 현실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할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런 특별 대우가 특정 역할의 가격을 높여줄 것이다. 해당 구역에서만 적용되는 놀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평등을 훼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단순히 역할극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플랫폼 내의 역할을 판매 또는 역할에 대한 비용 지불이 이루어져도 좋을 것이다.
국가 안의 작은 국가. 이미 온라인은 그걸 해냈다. 오프라인도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온라인은 상품을 유통하고 오프라인은 오프라인 인간관계를
연결한다. 사회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로 이제 오프라인 유통업은
단순한 유통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중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왔다고 주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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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쓸 생각이었는데 자꾸 과거의 생각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생각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시간이 걸렸네요. 솔직히 우울하군요.
다음 글은 네이버와 포탈 또는 현대와 자동차 또는
국민과 은행 또는 병원과 간호사 등 살아있으면 아무거나 씁니다.
군 급식 개선을 하겠다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만약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국군의 최고에 있는 이가 말한 걸 허언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 사태를 쉬이 넘기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낙태를 허용한다고 해서 낙태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포르노를 허용한다고 해서 포르노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성매매를 허용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권장하는 건 아니잖아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포르노나 성매매의 경우 범죄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지 그것이 반드시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허용과 권장의 차이도 모릅니다. 취향과 도덕의 차이도 모릅니다. 답답하군요. 성적 대상화나 성 상품화가 인간을 도구로 만든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도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성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노동 상품을 당사자가 소유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산업혁명 시대 농지를 팔고 도시로 나갔던 일이 있었다고
하죠. 시골의 고령화가 되고 있는 만큼 이제 농지를 사들여
식량의 대량생산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봅니다. 미국식 대량 생산이 되어야 국민들이 식재료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은 지나치게 비싸요. 생산자를 생각하다 소비자가 불행한 것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시대가 흘러 농사를 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대량생산계획을
시도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치는 노동자용 교육을 해놓고 취업이
안 된다. 학벌사회다. 노동자 인권이 낮다. 이런 말 하면 안됩니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본가 수가 줄고 노동자 수가 늘면
당연히 자본가가 희소해짐에 따라 노동자 수요가 줄어들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게 되는 거죠. 자본가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데 담합하게끔 유도했으니
참.
- Level.1
- 2021/12/06 PM 01:49
- Etta
- 2021/12/06 PM 02:39
- 루리웹-5344056515
- 2021/12/06 PM 03:33
우선 플랫폼이라고 해서 새로운건 없습니다.
유튜브는 예전 방송사에서 하던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죠.. 무한도전 볼 때 돈 내고 봤습니까? 앞뒤 광고 끼고 봤죠.
배달 라이더는, 화물차 지입제랑 동일하고
가사도우미나 아이 돌보미는 이전에도 인력소개소가 있었죠. 대리운전도 플랫폼이죠.
지금들어 플랫폼이 각광 받은 것은 기업 입장에서 기존의 노동법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버나 라이더 같은 플랫폼 기업에서는 서비스 제공자들에게 파트너니 뭐니 하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즉, 둘의 관계가 노사관계가 아니라는거죠.
이렇게 되면 기업은 파트너가 사고가 나든 문제가 생기든 책임질 이유가 없어집니다. 주몇시간 근무, 수당, 연차, 퇴직금.. 이런 것에서 해방되는거죠.
즉, 제가 말하고 싶은 것 플랫폼 이란게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기업이 노동법을 비껴갈 꼼수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일부주에서 우버가 노동자라는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타다 직원이 노동자라는 것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튼 말이 길었는데 플랫폼 기업이라는 건 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겁니다.
예시로 김장을 들으셨는데, 제가 기업가라면 일일이 김장김치 평가하고 관리할 담당자 고용할바에 그냥 일정한 맛 보장되는 공장 김치 유통하는게 더 낫습니다.
거기다, 대량생산하는 공장보다 단가도 비쌀건데, 경쟁력이 있을려면 가격도 많이 높이지 못할겁니다..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적거나 없을 확률이 큽니다.
또한 플랫폼 업체에서 품질관리 담당자를 둔다는 거 자제가 플랫폼으로서 자신의 이점을 버리는거에요.
배민에서 입점식당들 맛 관리합니까? 오픈마켓에서 판매상품이 가품인지 확인합니까?
일일이 자기 상품 다 확인하고 품질관리 하는건 이미 플랫폼이 아닌 기존 유통업체랑 다를게 없죠.
- 트랜지션앤트랜지션
- 2021/12/06 PM 04:00
유통업은 온라인 + 오프라인도 되고 오프라인 + 오프라인으로도 되는 양방향이라고 보는 시각이 유통업계 경영자들에겐 더 크다고 보셔야 할듯합니다. 아마존의 성장이 엄청났기 때문에 빛을 잃었지만 코스트코와 월마트의 성장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죠.
온라인 쇼핑, 이커머스가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행이나 흐름이었다가 끝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인류에게 소개된 새로운 물품거래방식으로 아직 그 역사가 30년 남짓 밖에 안된것이니까요. 반면에 물건을 산지에서 가져와 수요지에 파는 것은 수백년이 된 비즈니스 모델이니 오히려 지속가능성의 비교는 오프라인 시장 유통이 역사적으로만 놓고보면 앞선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거래방식의 채택의 펀드멘탈을 그럼 들여다 봐야하는데 수요지-산지-소비자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전통의 유통업계의 영향력을 무시할수도 없으니 신세계나 롯데는 어찌보면 대박은 없지만 쪽박도 없는 시장을 원할수도 있습니다. 그게 치킨게임이고 창고와 운송에 돈을 집어넣어야 하는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이지요.
유통업계의 흥망은 사실 판매량 보다는 구독경제 방식의 회원권 판매와 배송비 절감, 그리고 물건의 매입 금액에서 남기는 차익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마케팅과 재무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수요에 맞춘 재고 관리등 업체의 내재가치에 달려있다고 생각해서 한자 적어봅니다.
- 격리해제자
- 2021/12/06 PM 04:02
오프라인 가서 인터넷 가격 비교해보고 삽니다.
직접 만지고 보고 입어보고 하니 구매율이 올라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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