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현대와 자동차2021.12.31 PM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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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자동차

 

 

 

현시대를 관통하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잡았다. 명분을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이다. 다양한 인류를 위하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실리를 보자. 다양성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이며 자본주의적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기에 국민이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권력을 얻기가 수월하다. 자본주의는 상품을 소비할 소비자가 있어야 되기에 인류가 가진 다양성을 수용할수록 재력을 얻기 수월하다. 다양성은 도덕적이고 실용적이다. 다양성은 사회가 개방되고 발달될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개방되고 발달된 미국에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련된 도덕성을 얻길 바라는 일부 신세대와 권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정치가와 재력을 얻길 바라는 일부 자본가가 PC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 지지로 미국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미국을 넘어 세계의 문화에까지 침투 중이다.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PC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지만, 올바름을 근거로 타인에게 PC주의를 강요하는 일로 인해 염증과 피로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확실히 말하겠다. 다양성은 올바르나 PC주의는 올바르지 않다. 목적은 찬성하나 수단은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PC주의는 객관적 기준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다양성과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PC주의는 사회주의적이며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 종교적이며 무질서하다는 말은 굉장히 모순되는 말이지만 차근차근 알아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유주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할 정도로 사회의 규율보다는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한다. 사회주의는 사회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이런 차이에 의해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사회의 규율이 바뀌는 일이 잦지만, 사회주의는 사회의 규율에 따라 개인의 의지가 바뀌는 일이 잦다. 사회주의가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덕을 명분으로 곧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사회주의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부분 인간은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도덕성이 길러진다. 유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유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기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종교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도덕성을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탓에 대부분 종교가 교인의 의지보다 종교의 교리를 우선시했던 것처럼 사회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이 사회주의를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드릴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종교에 길들여진 민중에게 있어 그 방식 자체가 너무나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에서도 사회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한국 또한 국민의 의지보다 유교의 가르침을 우선시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도덕성이 부족하고 사회주의는 도덕성이 낡았다. 이에 따라 인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가 고유한 도덕성을 갖추는 진보를 해야 할 것이다.

 

PC주의 또한 개인의 의지보다 PC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한다. 가령 PC주의의 규율과 어긋나는 걸 보게 되면 잘못되었다고 화를 내며 PC주의를 따를 것을 강요한다. 지극히 사회주의적이고 종교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여기에 무질서가 추가되었다. PC주의가 주장하는 도덕성이 다양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을 차별이나 편견 없이 바라보자 주장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들이 주장하는 가지각색의 규율을 올바르다 해버렸다. 공통된 기준이 없이 각자의 집단의 주관에 옳고 그름을 맡겨버린 것이다. 각자 주관에 맡겨버린 탓에 질서가 사라졌고, 질서가 사라진 탓에 목소리가 큰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세력이 많거나 감성적인 이들의 주장이 주로 수용되고 세력이 적거나 이성적인 이들의 주장은 배척되게 되었다. 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의 차이를 떠올려보면 된다. 흑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크게 반응하는 반면, 아시아인이 당하는 인종차별에는 PC주의가 적게 반응하고 있다. 약자에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지, 그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난폭한 행동을 하며 강도질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PC주의는 공통된 기준이 없어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이들의 무질서를 용인하게 되었다. PC주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이상 무질서하고 비이성적인 평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 종교, 성별 등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PC주의의 이름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미국에서는 12 25일을 크리스마스라 부를 것인지 아니면 홀리데이라 부를 것인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 중에 있다고 한다. 자유주의자라면 그 날을 크리스마스라 부르던 홀리데이라 부르던 본인과 타인의 자유에 맡긴다. 하나 PC주의자는 모든 인간에게 그 날을 홀리데이라 부를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다 보니 질서가 사라져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성적 지향을 존중하기 위해 남성의 몸을 가진 사람이 여성 화장실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출입한 남성은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추행 했다고 한다. 신체적 특성이라는 객관적 기준이 아닌 정신적 성적 지향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특정 성별의 공간 출입여부를 결정해버리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자유라는 기준으로 질서 있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게 아닌 각자 주관에 맡긴 질서 없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걸 추구하는 PC주의는 용납할 수가 없다. 진정 다양성을 원한다면 객관적 기준을 가지고 추구하길 바라겠다.

 

 

한국은 세력이 크고 감성적인 여성주의의 목소리가 크다. 여성주의 또한 PC주의와 같이 인간의 의지보다 여성주의의 규율을 우선시하고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에 있는 여성주의자는 다른 여성들에게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강요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은 유교와 기독교에 영향을 받아 여성에게 혼전순결과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있다. 대부분 인간의 도덕성은 당대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많은 여성주의자가 이런 걸 도덕적이라 받아드리고 있었다. 여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게 되었는데, 그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성욕 탓을 하게 되었다. 그런 탓에 정상적인 이성에 대한 성욕조차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한국사회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에 의해 그걸 수용해버렸던 것이다. 이성애의 결핍은 정조관념에서 시작되었고, 그 정조관념을 인권으로 여긴 여성주의에 의해 더욱 결핍되게 되어버렸다. 한국의 저출산은 이성애 결핍으로 인한 이성관계 붕괴로 인한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떠올려보자. 여성 성 상품화가 자유롭지 못한 까닭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 성 상품화가 자유로운 까닭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긴 것은 남성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고, 남성이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성이 성적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의 성 상품화 비판은 그야말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여성 자유권 침해이며, 정상적인 이성애의 발달을 막아 출산율을 낮춰 사회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실수다.

 

성인지감수성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며, 그런 여성상을 지금 여성인권을 명분으로 신세대 여성에게 강요 및 세뇌하고, 사회에 그런 여성상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여성주의자는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그 누구보다 가부장제의 여성상을 여성과 사회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여성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것 또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떠올려보면 된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남성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기 때문에 모든 성매매는 남성의 강요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성 상품화나 성매매가 여성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다면 자유국가는 그 자유권을 존중해야 한다. 성 상품화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형태의 성 상품화도 문제가 없게 된다. 성적 문화의 탄압이 가부장제 여성상에서 왔다는 걸 인식하길 바란다.

 

어떤 여성이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나서지 않는 것은 첫째로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은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하기 때문에 힘든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여성주의는 주관적 손익을 인권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손해에 해당하는 힘든 걸 인권침해라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가 아님에도 힘든 일에 나서는 여성이 드물고 두 번째 이유로 여성주의자들은 더욱 더 힘든 일을 외면하고 있다. 진정한 여성인권을 말한다면 평등한 관점에서 힘든 것도 같이하고 특혜를 거부했어야 했다. 학교나 직장에서 힘든 일이 발생하면 성별 관계 없이 할 수 있는 만큼은 같이 하고, 파견 또한 오지라고 해도 평등하게 받아드리고, 징병의 의무 또한 같이 했어야 했다. 평등한 관점에서 여성전용 특혜 거부나 여학교 폐지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지 않고 여성 성 상품화를 죄악시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의 자유권 침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열등하게 보고 힘든 일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성주의는 여성이 힘든 일을 하는 것 자체를 여성혐오라 말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여성에 대한 멸시다. 한국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성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능력을 무시하는 여성차별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적으로 보자. 가령 역할주의의 관점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역할수행유무로만 존중이 결정되게 된다. 역할주의의 이름으로 인종과 민족과 종교와 성별 등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주의로 접근하면 여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여성혐오라 주장하게 된다. 여성의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다 보니까 제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한 비판조차도 혐오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역할주의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이런 수준 낮은 사상을 어떻게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실 여성주의라 자칭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대놓고 나는 한쪽 입장만을 대변하는 편향적인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그게 올바르다 말하고 있다. 같은 잣대로 남성주의를 주장하는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여성주의를 주장하는 여성을 비판하겠다.

 

최근 단어의 정의도 주관에 맡기는 일이 많은 바람에 연상의 언행에 심적 불편함을 느끼면 근거 없이 꼰대라며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꼰대의 어원과 별개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연상이란 이유로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인간을 말한다. 이런 강요는 사회적으로 보면 꼰대가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갑질이 있다. 반대로 강요하지 않는 이상 꼰대가 아니라 그냥 자기의사표현이다. 무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주관에 맡겨버리다 보니 무지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까지 생겨버렸다. 모르는 걸 알려주면 되려 화를 낸다. 정상이 아니다. 이런 비이성은 기준이 없는 사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겠다. 어떤 규율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선해야 자유가 보장되고,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질서가 있어야 이성이 생긴다. 이런 형편없는 사상에 선동되거나 세뇌되지 않기를 바라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개인의 의지를 우선시하고 질서 있는 다양성을 추구하길 간곡히 바라겠다.

 

 

 

다양성

 

현대 광고가 눈에 띄어서 상대적으로 유명한 현대자동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현대자동차가 노조나 차내 결함 따위로 논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주제와 관련이 적으므로 논점이탈을 막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다. 현대가 로봇회사를 운영하는 걸 보았을 때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 그건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자동차. 이동수단. 인간을 태우고 이동하는 수단. 인간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 자동차는 인간에 맞춰 환경, 지형, 날씨, 온도 등을 고려하며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각의 용도에 맞춰 소형, 대형, 산악용, 사막용, 운반용, 공사용 등으로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사정에 따라 가격을 다르게 만든다. 자동차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디자인이 다르게 만든다. 생각하다가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대상이다. 모든 자동차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탑승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는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다. 만약 인간이 탑승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으면 된다. 가령 출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요즘은 컴퓨터관련은 원격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출장이 필요하지 않지만, 인간이 직접 작업을 해야 할 때에는 출장이 필요할 수가 있다. 그럴 때 만약 인간형 로봇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공지능 차량에 인간형 로봇을 탑승시킨 후 출장시키면 된다. 그러면 인간의 목적은 달성된다. 간단한 얘기다. 많은 인간의 기술이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발전되었다. 걸어서 출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동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자동차나 지하철 따위의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식사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다. 욕구해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성상품을 소비한다. 필기입력 시간을 줄이기 위해 녹화나 녹음을 한다.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가전제품을 이용한다. 이런 기술발달의 흐름이라면 분명 나중에는 인간의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출장 가는 게 아닌 인간형 로봇이 출장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만이 차량에 탑승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 외의 대상을 고려하여 자동차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대상의 다양성이 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몇 가지 확정사항이 있다. 인간형 로봇이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은 확정사항이다. 부의 편중화에 따른 일부의 과잉자산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세가지를 고려하면서 새로운 길을 알아봐야 한다.

 

 

첫째, 대상의 다양성. 인간형 로봇이 등장한다면, 자동차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 탑승할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지금은 로봇이 아니더라도 좋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며 인간에게 쏟을 애정을 동물에게 쏟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동물은 인간과 동격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그런 동물에 맞춘 차량을 개발하면 충분히 관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특정 동물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애호는 도덕이 아니라 취미다. 도덕이라면 그런 애호 자체를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취미라면 타인에게 애호가 아닌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인간형 로봇은 등장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없으므로 그걸 대상으로 하여 자동차를 만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간형 로봇이 없더라도 지금 당장 로봇은 존재한다. 그런 로봇들과 결합한 자동차를 만들어 로봇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선점하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한다. 가령 드론을 자동차 어딘가에 부속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걸 이동을 멈추고 정찰하는데 이용하거나 조수석에 있는 이가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개념은 과거 매를 날려 정찰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드론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니므로 적절하게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로봇 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만들어지면 인간을 수행하는 비서와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짐을 운반하고 위협으로부터 주인을 보호하는 일을 로봇이 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기술이 부족하여 그걸 할 수는 없지만 로봇 개가 짐을 운반하는 것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 로봇 개를 장착할 수 있는 차량이 등장한다면 짐을 운반하는 로봇과 자동차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파워태권도라는 것이 있다. 게임의 철권과 같이 체력 게이지의 감소를 관객이 명확하게 볼 수 있게끔 해둬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도입한 태권도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인기가 적은 편이다. 다른 격투기에 비해 폭력성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술과의 연계는 분명 이미지를 선점하는데 충분히 효과가 있다. 미래에는 어쩌면 안전보호구의 발달과 중력을 낮추는 기술의 등장으로 종래의 격투기보다 훨씬 화려한 싸움을 하는 태권도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력을 낮추면 일시적으로 강해지고 이후 적응한다는데, 격투하는 동안에만 강해지면 되기 때문에 그건 괜찮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미지 선점이다. 태권도가 전세계 보육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훌륭하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로봇과 결합한 자동차 개발. 반려동물에 최적화한 자동차 개발. 동물은 소수에 속하므로 채산성이 맞을지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세계를 대상으로 만든다면 충분한 수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미국 반려동물 수가 고양이는 9500만 마리, 개는 9000만 마리로 추정된다고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나 개가 인간에 맞춘 좌석에 앉아 불안정하게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을 본 적이 있다. 이제 동물에 맞춘 좌석을 만들어도 그에 따른 충분한 수요가 있을 것이다.

 

자동차는 혁명을 상징하는 산업이다. 산업혁명의 변화를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지금 기술혁명 또한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 때가 많다. 언젠가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인간형 로봇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바뀌는 걸로 설명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 본다.

 

 

둘째, 차내의 다양성. 완전운전자동화 자동차가 등장한다면, 자동차 내에서 운전 외의 것을 할 수 있다. 이동하는 동안 식사를 할 수 있고 수면을 취할 수도 있다. 가령 미래에는 캡슐호텔에 동력기구를 달아 출발할 때 누어서 자다 도착하고 나서 깰 수 있는 캡슐차량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본다. 완전운전자동화가 대중화가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차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이동하는 수단인 만큼 이동하는 동안 다른 걸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캠핑카 등이 있지만 그건 일상적인 자동차의 목적과 거리가 있다고 본다. 일상 속에서 차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상의 다양성이 인간 외의 존재에 맞춘 차량이라면 차내의 다양성은 인간에 맞춘 다양한 차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건 아무래도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자동차가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새로운 개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완전운전자동화에 최적화한 차량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야 완전운전자동화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운전자동화에 따른 차내의 다양성은 새로운 개념에 가까우므로 거기에 최적화한 차량을 계획하고 비슷한 걸 개발하여 이미지를 선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인공지능 자율주행은 인공지능 기술발달이 더뎌 언제 개발될지 확정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지금과 같이 단순 계산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 자체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정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여 학습하는 것으로 알고리즘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최초 만들어진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학습하는 것으로 아예 또 다른 알고리즘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 유전자, 행동, 학습, 생각,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요컨대 알고리즘 겹치기다. 알고리즘을 하나 만들고 거기에 또 다른 알고리즘을 겹친다. 겹치고 겹치고 겹치면서 인공지능이 어떤 알고리즘을 이용해 계산할 것인지 판단하게 하면 된다. 하나의 알고리즘 내에서 수많은 계산의 결과를 인공지능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계산하는 알고리즘들을 선택하게 하면 된다. 그 선택과정 속에서 알고리즘을 조합하여 또 다른 알고리즘을 만든 것으로 행동한다. 그런 식으로 반복하며 자아가 형성된다. 인공자아다. 인간은 매일 세포를 바꾼다. 세포의 신호를 통해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걸 고려하면, 매일 매시간 매초 다른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인간임에도 하나의 자아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알고리즘이 담긴 기억 자체가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같이 알고리즘과 알고리즘에 전달되는 신호가 계속 바뀌며 알고리즘 자체도 계속 바뀌는 기능을 도입하면 인간과 비슷한 자아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차내의 다양성은 인공지능의 성장이 필수적일 것이다. 일단 개념적으로 정리해두겠다.

 

 

셋째, 차량의 다양성. 일부의 과잉자산이 현재진행형이므로, 그들을 위한 차량개발이 가능할 수 있다. 차량 또한 컬렉터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자본주의의 특성상 돈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일부는 상상이상의 돈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코인이나 NFT에 돈이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이들의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컬렉션화를 할 수 있는 컨셉카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본다. 스마트폰 같은 기기와 다르게 자동차는 외형을 바꾸기가 매우 수월한 편이다. 이동만 가능하면 되기 때문이다. 자동설비에 적합하지는 않지만 애초에 고가의 컨셉카를 지향하는 만큼 수작업을 늘리면 되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다고 본다. 자동화 설비의 증가로 노동자 고용이 줄어들어 정계와 노동계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에, 수작업의 컨셉카로 노동자의 일거리를 만드는 것은 시대변화의 흐름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컨셉카의 노동자와 자동화 설비의 노동자가 같은 일은 하는 건 아니지만 보통 사회는 인원 수와 급여의 수와 같이 숫자에 주로 초점을 맞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기 때문에 괜찮다. 이렇게 수작업이 필요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완전자동화를 대비한 연착륙이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다.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외형적인 디자인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 고양이처럼 안과 겉에 부들부들한 털과 지하철 의자처럼 내부에 열이 흐르도록 만든다면 만질 때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산업과 연계하여 컨셉카를 만든다면 다른 산업을 좋아하던 이들을 끌어들일 수가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콜라보다. 같은 산업과 연계하면 산업에 관심이 있는 인간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다른 산업과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크게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본다.

 

수집을 목적으로 한 컨셉카는 매년 또는 매월 한정적으로 제작하고 상대적으로 고가에 팔면 될 것 같다. 에르메스라는 명품은 단순히 비싼 걸 넘어서 구매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떤 매장의 제품을 많이 사야 구매할 자격이 부여된다고 한다. 과잉자산이 명품에 대한 욕구를 크게 늘려 공급자가 우선되는 상황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수집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명품 컨셉카의 등장은 분명 채산성을 물론이고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길거리에 비슷한 차량만 보이는 건 다소 심심하기 때문이다. 게임이나 영화 또는 만화나 소설에서 보던 것과 같은 차량이 현실에 등장하는 걸 본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자극적이고 재미있을 것이다. 대중에 친숙한 브랜드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자동차의 새로운 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다. 다양성은 분명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다. 그것의 수단이 잘못되었기는 했지만 그 방향은 옳다. 지금 당장 자동차만 다루기는 했지만 다양성은 다른 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치일 것이다. 개념적으로만 접근했기 때문에 이 다양성이 어떤 식으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른다. 규제나 저작권 등이 어떤 식으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새로운 개념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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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국민과 은행입니다. 원스토어와 앱 플랫폼, LG전자, 롯데제과 등 아무거나 씁니다. 사실 은행은 답이 없을 것 같았는데 나오긴 하네요. 인문학은 사실 취업은 물론이고 창업을 목적으로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 당장 사회에 필요한 수많은 산업들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인가에 대한 고찰로 나타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거기에 필요한 게 바로 인간을 배우는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이 인문학을 발달시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면 한국의 상품이 전세계에 사랑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문주의 인본주의 인간주의 다양하더군요. 굳이 인본주의라 한 것은 그것이 본래 뜻에 가장 적절하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위(판단이나 행동에서 중심이 되는 기준)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 모두의 자유를 위해. 한국은 물론이고 동맹국이나 자유진영이 보다 인간의 보편적인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인류가 자유롭기를 바라지만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요. 한국이 자유국가라면 인류의 자유를 위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경제나 안보로 자유를 위하지 않는 국가와 협력하는 일이 있더라도 한국 자체는 자유를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부디 자유를 위하는 국가와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인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해 자유적응과 기술적응을 해야 합니다. 자유 없는 생존은 무가치하고, 생존 없는 자유는 무의미합니다. 둘 다 갖출 수 있는 수준 높은 자유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선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한국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합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정계가 성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위해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개혁은 분야의 대표에 입법권을 주는 일이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양당정치가 고착되다 보니 경쟁이 줄어들어 아무래도 한국 정치의 발전이 더디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정당에 갇혀 정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당에서 벗어나 분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 또한 필요하다 주장하겠습니다. 정당의 대표와 분야의 대표가 둘 다 입법권을 쥐고 정당은 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분야는 분야의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분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역할주의를 작성할 겁니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는 산업의 새로운 길을 떠올리는 것이 역할주의를 작성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본질과 가치를 통해 개념을 만들고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생각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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