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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롯데와 제과2022.01.23 AM 08:02
롯데와 제과
오늘날 인권운동이란 인간상 강요를 말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인간상(전통적인 도덕관념 등)을 각 대상(인종, 노동, 아동, 여성 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그 인간상에 맞춰 배려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인종은 언제까지나 제국주의 시기의 인종이어야 하고, 노동자는 언제까지나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여야 하고, 아동은 언제까지나 유교적 가치관의 아동이어야 하고, 여성은 언제까지나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이어야 한다. 그들은 이 인간상 내에서만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 인간상에서 벗어나는 건 부도덕하다 여기고 있다. 보호대상이 부도덕하지 않다 말하는 행위조차 부도덕하다
말한다. 왜냐하면 보호대상의 자유의지보다 주관적인 인간상이
더 중요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독선. 이것은 본인의 도덕성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자아성찰조차 하지 않은 인문학적 고찰이 부족한 이들이 할법한 실수다.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로서 이런 어리석은 작태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 이제 그들이 차별 받던 시기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겠다.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한 길을 안내하겠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하겠다. 인간의 행복을 위하도록 하겠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그 예술에 대해 알아보며 시작하겠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을 뜻한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보거나 느끼기에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한다. 정리하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은 인간을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술에는 괴롭거나 불쾌하거나 슬픔을 주는 상태에 있는 것도 있다. 비극을 예술이라 말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경우에는 더러운 것조차 예술이라 말한다. 이렇듯 아름답지 못한 것 또한 예술이라 부른다. 왜 그게 예술이 되는 걸까? 예술작품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관점인 인본주의적으로
바라보자. 인간의 본위로 바라보면 비극 또한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이라는 점으로 접근하자. 인간은 희극과 비극, 아름다움과 더러움, 기쁨과 슬픔 등 다양한 상태에 있는 것을 간접 체험하면서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가 넓어진다. 예술에서 접한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단어나 식상하고 지루한 일상의 풍경조차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이 된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동화를 떠올리고 저녁놀을 바라보며 어떤 영화를 떠올린다. 예술은 단색의 평면적인 세계를 살아오던 사람에게 다양한 색을 알려주어 복색의 입체적인
세계를 살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다채롭게 만든다. 다채로움 속에서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느낀다. 세계의 확장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답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 또한 예술로 분류되게 된다. 하나의 인간상을 강요 받는 시대에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예술은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하고
있다.
세계의 확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언론이고 둘이 예술이다. 둘 다 인간에게 다양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차이는 이성과 감성이다. 정보를 전달해 세계를 넓힌다는 점은 같지만 이성이냐 감성이냐에 따라 언론과 예술이 달라진다. 통상 언론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예술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인간의
세계를 넓힌다. 이런 역할의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실과 가상의 차이고 둘째는 독자의 수용태도
차이다. 언론은 현실이기에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관점이 한정되어 인간 사이에 과도한 괴리가 발생해 불필요한 다툼을 일으킬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법이 그러하다. 법에 관련된 것을 감성적으로 접근하면 그 감성에 호소된 대중에 의해 법치가 파괴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중우정치를 유발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언론이 사건을 감성적으로 바라보면 이성을 놓치고 이성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며 전체를 놓치면
질서를 놓친다. 정치는 정의를 추구해야 하고 사법은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해야
입법이 올바른 정의를 추구하고, 올바른 정의가 있어야 사법이 올바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 보통 사법이 정의를 추구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정의보단 질서다. 국민정서법과 사법의 판단이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보편적인 도덕관념을 바탕으로 법이 제정된다
하더라도, 사법 자체는 정의보다는 질서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정의 위주로 판단하면 질서가 흔들려 국가가 무너진다. 양형에는 형평성과 사회적 비용도 고려된다. 살인과 강간을 동일시 할 수 없고 교도소의 수용
인구수와 재원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개인의 정의보단 사회의 질서가 우선시되고 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말하는 성인지감수성이 법치를 파괴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법을 객관적 질서가 아닌 주관적 정의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국민 각각은 다양한 정의를 추구하더라도 사법은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국민과 사법의 괴리가 줄어들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의 이념에 따라 언론도 주관적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는 사람만 그래야 한다고 본다. 객관과 주관을 분리할 수 있으면 객관적 서술과 주관적 의견을 둘 다 쓰면 되기 때문이다. 그게 안되면 일반적으로 그냥 객관적 서술만 해야
한다. 물론 우수한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언론이 어떤 사건에 있어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감성적으로만 접근하는 일이 있다. 그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은 언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예술은 가상이기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이어야 한다. 가상에서 발생하는 사건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감정이입이 어려워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관심을 사기가 어렵다. 현실의 정보를 전달하는 언론과 달리 가상의 정보를 전달하는 예술은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보고 그래야 의미를 갖게 된다. 논픽션도 예외는 아니다. 현실에 있던 사건이라 할지라도 결국 그건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재창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를 넓히고 다른 인간과 연결하는데 감성이 작용하게 되면 그 인간은 풍부한 감성을 얻게 된다. 빈자는 부자의 세계를 모르고 부자는 빈자의 세계를
모른다. 그걸 언론이 알리면 이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성적인
이해는 되도 감성적인 공감은 하기 어렵지만, 그걸 예술이 알리면 감성적으로 바라보기에 이해가 어려워도 공감은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감성적인 자극이 보는 이로 하여금 진심을 갖게 만든다. 진심으로 어떤 변화가 바라게 되게 된다. 변화를 바라는 마음에 감정이 실리게 된다. 같은 주제,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여기서 언론과 예술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예술이 사건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재미를 놓치고, 재미를 놓치면 관심을 놓치고, 관심을 놓치면 의미를 놓친다. 대중을 위한 예술을 위해 최소한의 독자는 필요하다. 모든 예술작품이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 수는 없다.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이 그럴 수가 없다. 대중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은 수많은 각각의 여러
사람이 각각의 예술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예술이 있어야 인간의 세계도 넓어지게 된다. 어떤 예술은 예술성을 명목으로 독자를 아예 외면하는 일이 있다. 예술은 예술의 위치와 가치를 좀 더 자각하길 바란다. 독자의 수용태도에도 차이가 발생한다. 언론이 주관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언론 역할 자체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예술이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독자가 예술
역할 자체가 주관적이고 감성적일 거라 받아드리게 된다. 언론은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예술에 맡기고 예술은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걸 언론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예술이 그러해야 하고 그러했었다. 지금 현대미술이나 클래식 같은 순수예술을 가리켜
대중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미술과 클래식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과거 예술은 종류와 대상이 한정적이었다. 종류는 그림, 소설, 음악, 연극 등과 대상은 부유한 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과거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사람 자체가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과 같은 그림과 클래식과 같은 음악이 대중예술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현대미술과 클래식과 같은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중예술이란 무엇인가? 대중이 즐기는 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
등등이다. 간단히 말해 상업예술을 말한다. 순수와 상업,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인가? 미술로 바라보자. 지금의 현대미술은 대부분 예술이 아닌 단순한 자산으로
전락했다. 코인에 그림을 입히면 그게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과 코인에 투자하는 이유가 비슷한 시점에서
둘은 차이가 없어졌다. 대부분 현재 현대미술은 금전적 가치를 보고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이 현대미술은 비싸니까 예술적일 거라
생각하고 상업미술은 예술적이니까 비쌀 거라 생각한다. 이러니 상업미술이 더 예술적이라 하게 된다. 현대미술을 예술로 즐기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들조차 그게 다수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음악으로 바라보자. 클래식은 투자자산이 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직도 예술적 가치를 보고 금전적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순수와 상업 둘 다 예술적이다. 그러나 순수는 낡았기 때문에 하향세에 있다. 클래식이 살아남고자 한다면 상업예술과의 연계를 꺼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생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현대미술이 클래식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예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클래식이 현대미술보다 나은 상황이다. 정리하면 순수예술은 과거의 대중예술이고 상업예술은
현재의 대중예술이다.
이런 관점에서 상업예술인 게임과 영화와 만화를 검열하는
것은 순수예술을 검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상업예술 중 하나인 게임에서 등장하는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은 순수예술 중 하나인 동상으로 표현한 인간의 나체에 검열을 하는 것과
같다. 주관적인 도덕관념으로 야한 걸 가리는 검열은 나체상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과 같단 말이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되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천박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상업예술의 검열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도구로 여기고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의 성을 결정하는 권리는 보호자와 남편과 국가가
가지고 있었다. 여성에게 보호자가 순결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남편이 정절을 지킬 것을 강요하고 여성에게 도덕이 정조를 지킬 것을 강요했다. 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된 한국 여성주의는 똑같이 여성 성 상품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한국 여성들에게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빼앗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 없다. 아름다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낡은 도덕관념으로 폄하하며 파괴하려는 수작을 당장이라도 그만둬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이 남성의 성을 다룬 예술을 보고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듯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세계를 넓히는 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게 만드는 것. 새로운 세계에서 욕구를 해소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 인간의 성은 예술이다. 거기에 검열을 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가벼운 성형조차 비판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과도한 성형은 건강에 해가 될뿐더러 본연의 미조차
해치지만, 적절한 성형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들어 인간 스스로
자존감을 얻기가 좋다. 나는 인본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행복을 우선시한다. 나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어떤 이는 성 상품화를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런 이는 인간의 성의 아름다움을 즐길 자격이 없다. 현실 인간의 성 상품화가 잘못되는 경우는 노동 상품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했을 때에 발생하고, 가상에서는 애초에 성이나 노동 상품화가 잘못될 일이 없다. 무엇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있는지 인지해야 한다. 나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잘한 도덕관념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선시한다. 솔직히 머리가 아프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나? 어쩌자고 낡은 성 관념을 바꾸지 않고 있는 건가. 인간을 성적인 대상으로 본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안보는 게 이상하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을 성적 대상으로 안보면 어떻게
하나. 강요할 수 없는 이상 인간이 인간에게 성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해야 서로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맺고 출산을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이 자유국가라는 걸 깨닫고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 예술가를 가지고 있다. 본인이 즐기고 있는 예술이 곧 본인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게임과 영화와 만화와 소설은 나의 예술이고
그걸 만든 사람이 나의 예술가다. 내가 즐기는 예술에 검열이 들어가는 것은 고가의 예술에 페인트칠 당한 것과 같을 정도로, 아니 그보다 훨씬 화가 나는 일이다. 나의 예술과 나의 예술가를 모독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화를 내야 하는 일이다. 본인의 예술가를 모독하는 일에 참지 않길 바란다. 특히 예술가들이 더욱 분노해야 한다. 같은 예술인데 누구는 예술이라고 검열되지 않고 누구는
예술 대우도 못 받고 검열되어야 하는가? 대량생산되면서 예술의 영역은 넓어지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자동차의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예술가의 작품을 대량생산했을 뿐이지 거기에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양산품 또한 예술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상품에 예술적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과자 또한 마찬가지다. 양산과자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처방전
과자는 무엇인가? 단맛 위주로 만드는 간식을 뜻한다. 간식은 무엇인가? 끼니 외에 먹는 음식을 뜻한다. 끼니는 무엇인가? 아침, 점심, 저녁 같이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을 뜻한다. 정리하면 일정 시간 외에 단맛 위주의 간식을 과자라 부른다. 이 과자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어떤 길이 바람직할 것인가? 우선 과자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 심심풀이. 둘, 배 채우기. 셋, 맛 즐기기. 심심할 때 먹거나 끼니 전에 간단히 배 채울 때
먹거나 오로지 맛을 즐기기 위해 먹는다. 음식에 있어 과자는 어디까지나 조연이다. 하지만 조연이기 때문에 시간과 건강으로부터 제약이 적다. 시간과 건강은 주연인 끼니가 책임지고 있다. 조연인 과자는 미식에 집중할 수 있다. 건강보다 맛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주연인 끼니를 돋보이게 할 수 있다. 전채처럼 끼니 전에 과자를 먹는 것으로 끼니를 보다
맛있게 만들 수 있다. 조연인 과자는 음식의 양을 조절하기가 쉽다. 포만감이 높은 과자를 먹으면 폭식을 멈출 수 있고 소화가 빠른 과자를 먹으면 소식하지 않을 수 있다. 체중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미식과 미용이다. 둘 다 아름다움을 다룬다. 즉 예술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의학을 가져왔다. 보통 의학은 인간의 건강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 의학이 굳이 건강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의학의 목적이 미식과 미용이라 할지라도 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단이 인간의 몸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학이 인간의 건강을 위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미식과
미용을 위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떤 맛에 가장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끼니 전에 어떤 과자를 먹어야 끼니에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가? 인간이 체중을 조절하기 위해 어떤 과자를 먹어야 하는가? 이 모두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보편적 인간의 특징을 진단하고 그 진단에 맞춰 처방을
하면 된다. 어떤 과자 브랜드는 과자와 의학의 건강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면 나는 과자와 예술과 의학을 더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의학의 진단과 처방을 통해 예술의 미식과 미용을 도입한 과자로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만든다.
미식. 음식의 맛이 좋은 걸 뜻한다. 아름다움으로 접근하면 즐겁거나 상쾌하거나 기쁨을 주는 상태에 있는 음식을 뜻한다. 미식 자체가 예술이다. 예술이 세계의 확장으로 인간의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다양한 맛을 통해 세계를 확장시키는 것으로 인간 세계 자체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 특정 맛만이 미식이 아니라 다양한 맛이 고유한 색채를 띠게 되면 그게 미식이 된다. 과자가 다양한 맛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미식이며
예술이다. 그 맛을 의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최근 노벨상을 수상한 연구가 바로 매운 맛의 감각이
무엇인가라고 한다. 매운 맛은 통각이 아니라 온도 감각이었다고 한다. 매운 맛이 아픈 게 아니라 뜨거운 것이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인간이 느끼는 맛의 감각을 의학으로 연구하고 그 맛을 과자에 적용할 수 있다. 어떤 맛이 가장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보편적인 인간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과자를
미식으로 만든다. 이 처방을 맹신할 수는 없어도 보편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다수의 사람이 과자의 맛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전채. 식사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나오는 요리다. 그런데 이런 전채요리는 번거롭고 비싸다. 대중적이지 못하다. 예술은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식도 대중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끼니가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양산되는 과자가 전채의 역할을 맡으면 된다. 어떤 과자를 먹으면 식사가 더 맛있다. 그런 개념이 도입되면 된다. 이러면 대중이 전채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대중을 위한 미식이 가능해진다. 이게 바로 대중을 위한 예술이다. 가령 식욕을 돋우는 식욕증진 성분을 과자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자를 먹으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다. 보통 아이들이 과자 먹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다. 그걸 방지할 수 있다. 밥 먹기 전에 먹기 좋은 과자가 나올 수 있다. 단순히 전채만이 아니라 식사 후에 먹어야 더 맛있는
과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식전과 식후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끼니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끼니가 달거나 맵거나 쓰거나 짜거나 한다면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과자가 나올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운 것을 먹고 속이 뜨거울 때에 퍽퍽한 과자를 먹으면 다소 속이 편해졌다. 그런 것에 전문적인 과자가 나오길 바란다. 매운 거 먹고 먹게 좀 사두려고 한다. 그런 것과 같이 식사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하는
것으로 식사를 보다 더 맛있게 할 수 있다.
미용. 용모를 아름답게 매만지는 일을 뜻한다. 최근에는 몸도 포함되었다. 이 몸을 관리하는데 과자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는 사상이 유행하자 자기평가를
주관에 맡겨버려 노력할 이유를 잃고 자기관리에 실패하여 과체중이 되거나 저체중이 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객관적 기준이 없으니까 뚱뚱하거나 말라도 그냥 그대로
발전 없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건 외모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말 인간의 발전을 막는 최악의 사상이다. 그대로 만족하고 살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 자체가 낮아지는 것뿐이다. 멍청해도 멍청한 대로 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다. 인간은 본인과 타인을 위해 똑똑해져야 하는 것과
같이 아름답고 건강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며 변하지 말자고? 그러면 무엇 하러 교육을 받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며 자연으로 돌아가 동물처럼 살면 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발전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정상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과자가 그걸 도울 수 있다. 인간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높은 포만감을 줄 수 있다면 식사량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과자가 소화가 빠르고 식욕을 높인다면 식사량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걸로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는 체중조절도 가능할
것이다. 의학으로 체중에 맞춰 진단을 하고 처방을 하는 것으로
보다 전문적으로 다수의 사람을 정상체중으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건강용품과의 차이는 맛이다. 과자는 맛이 있기 때문에 먹고 평소에 자주 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이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냥 홍보 자체를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식전이나 식후에 먹기 좋은 과자, 매운 음식이나 짠 음식에 어울리는 과자, 과체중이나 저체중에 효과적인 과자 등등이 같이 말이다. 의학적 처방을 통해 단순한 심심풀이였던 과자를 예술로 끌어올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다양성을 명목으로 특정한 인간상을 강요하는 것으로
다양성을 해치고 인간을 위한다는 말로 인간의 발전을 막아 인간을 불행케 하는 이 시대. 과자는 다양한 맛을 통해 다양한 세계로 안내하여 다양성을 만들고 인간을 위해 자연스럽게
미식과 미용을 할 수 있게 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과자가 세상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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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에요. 한국 인간관계 붕괴는 유교와 여성주의가 만든 결과물입니다. 유교의 장유유서가 가족관계와 사회관계를 수직적으로
만들었죠. 가부장제와 중앙집권체제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높은 자살률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유교의 남녀유별이나 남녀칠세부동석이 이성관계를 멀리하게 만들었죠. 그럼에도 연상의 강요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성관계가 멀었음에도 출산율이 높았던 것은 연상의 강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유롭게 되자 관계에 강요가 사라지면서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낮은 출산율은 인간관계 붕괴가 만든 현상입니다. 그러던 중 관계를 붕괴시킨 가부장제 세계관에서의
의지가 약하고 성적 수치심이 강한 여성상을 여성의 본성이라 착각한 기성 여성주의자가 그 여성상을 신세대 여성에게 세뇌하고 사회에 강요하는 바람에
이성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하여 출산율을 0.6까지 떨어트리게 만들었죠. 이는 PC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주의 사상이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이 결정되는 사상이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입니다. 주관에 의해 인권이 결정되니까 가부장제 세계관에 살고 있던 여성은 그 세계관에서 인권이
결정되었던 겁니다. 이러니 지금 한국 여성주의가 가부장제의 마지막 발악이라 말하고 있는 거죠. 대놓고 말하죠. 유교와 여성주의는 지금 자유롭고 평등한 한국에 있어 인간관계를 붕괴시켜 국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최악의 사상입니다. 지금 당장은 연구가 부족하니까 실감이 안 날 수 있는데 미래에는 반드시 한 국가를 위기로 내몬 또는 국가를 소멸시킨 사상으로 기록될 겁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과거 국가를 망친 이들이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상기하십시오. 사리사욕이나 정치적 손익계산으로 국가를 멸망시키지 말길 바랍니다.
여성이 가진 성적 수치심이나 정조관념은 가부장제
세계관의 남성이 여성에게 주입한 악의적인 감각과 관념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걸 소중히 하는 것 자체가 남성의 노예를 자청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쓰면 가스라이팅이죠. 네 몸을 노출하는 건 수치스러운 거야. 야한 건 나쁜 거야.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게
만들어 죄책감을 유도해 정조를 지키게 만들었습니다. 그 감각과 관념에 세뇌된 여성주의자는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남성의 자연스러운 성욕 탓으로 해버린 것일 뿐입니다. 여성주의의 성 문화 탄압이 서양에서 왔다고 하는데, 기독교도 똑같이 여성의 정조를 중시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 사회에서 성장한 여성주의자는 당연히 같은
감각과 관념에 세뇌되어 있었겠지요. 그러니까 서양과 한국이 같은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여성이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건 그야말로 여성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으로 바라보니까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여성 성 상품화를 탄압하고 있는 겁니다. 여성은 여성의 자유를 위해 이제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여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성 억압을 하고 성의 결정권을 부모와 남편과
또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성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야 합니다.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에 세뇌 당한 이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여성이 자유주의적 관점으로 자유권을 쟁취하길 바랍니다. 성을 상품화하더라도 그것이 여성의 의지라면 괜찮습니다. 성 상품화가 괜찮다면 다른 형태도 괜찮습니다. 성 문화 탄압이 여성이 가진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에서
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너무 수준이 낮은 사상이니까 지성인이라면 부디 다시
생각해주세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과 별개로 주관적 손익으로
인권을 결정하게 되는 것 자체로도 정말 엉망진창입니다. 기분 나쁘다고 신고하거나,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들거나, 죄를 지어도 옹호하거나, 이성적인 의견을 혐오로 받아드리거나 등등 제멋대로에요. 이런 사상에 세뇌 당하면 누구든 바보가 됩니다. 본인의 주관이 뭐든 옳다고 말하자 폭군이 되어버린 이들이 많죠. 본인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게 되자 이성을 잃은
군중이 되어 마녀사냥이나 홍위병이 되어버린 적이 있죠. 기본 능력과 별개로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로 달라집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바보 같은 사상에 영향을 받으면 바보가 돼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인류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진 자유주의자로서 이런 사상은 한 톨만큼도 옹호할 수 없습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수준이 낮아요.
세배에 대해서는 참. 한국 전통의 풍습이지만 그게 돈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주입하고 있다는 건 말해두겠습니다. 연상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은 뒤에 돈을 받는 풍습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릎 꿇고 머리 박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관념을 주입한다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게 보입니까? 돈을 위해서라면 감옥도 갈 수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맞는 것도 할 수 있다. 라는 의견이 나오는 게 학습효과에 의한 결과물이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만약 이게 한국 풍습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객관적으로 보길 권합니다. 차라리 그냥 선물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각자 경제사정에 맞게 선물을 준비해서 주고 받는
것이 보다 긍정적이겠지요. 한국이나 서양이 자본주의를 받아드렸던 때의 사회문제는 당대 종교가 만든 겁니다. 한국은 유교겠지요. 유교로 인한 수직사회가 노동자와 아동과 여성 등등을 괴롭게 만든 겁니다. 이제는 우리를 위해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반드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블리자드를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블리자드라. 중국의 잘못된 행위를 옹호 또는 방관하는 것 보고
정떨어져서 그 회사 게임 안 한지 오래되었지요. 인수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내게 있어 꽤 의미 있는 게임이죠. 역할주의가 와우나 롤 같은 역할수행게임에서 떠올린 거니까요. 메타버스. 근본적으로 스타나 와우의 유즈맵이 메타버스와 다를
바가 없죠. 거기에 금전거래가 도입되면 메타버스입니다. 메타버스가 새로운 것 같지만 그냥 유즈맵의 연장이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뭐 그런 의미에서 마소는 메타버스 전문기업을 인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수십 년간 유즈맵을 운영해왔을 테니까요. 히오스 부활 가능?
롯데인 이유는 별 이유 없습니다. 광고가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써볼까 생각해봤습니다. 다음은 LG와 전자입니다. 그 다음은 눈에 띄는 걸 골라 씁니다. 수백 년간 기술은 꾸준히 발달했는데 사상들은 제자리
걸음을 걸었죠. 새로운 사상이라곤 불변가치를 훼손하거나 객관적 기준도
없는 천박한 사상들밖에 없었습니다. 해체주의는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하고 PC주의와 여성주의는 객관적 기준도 없고 채식주의나 비폭력주의는 인본주의적 불변가치마저 훼손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본래 사상이란 기존 질서와 다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자유주의는 사회의 규율 강요를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고, 사회주의는 인간의 방종을 반대하기 위해 나타났죠. 정상적인 사상은 새로운 질서를 안내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인 사상은 과거의 질서에서 반대만
합니다. 해체주의나 PC주의나 여성주의 등등이 같은 세계관에서 반대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다르죠. 인간에게 규율을 강요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새로운 질서로 나아갔습니다. 무언가 반대를 위한 반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다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역할주의는 존중 척도가 수직인 것을 수평으로 만들고자 주장했던 것이지만
지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질서로 안내하려고 하고 있어요. 정치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에게 정치권력을 주는 제도를 구상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역할중심으로 체계를 유기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죠.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구도가 아닌 각 역할끼리 뭉쳐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역할로 가치를 판단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게 되죠. 네가 누구든 역할만 수행하면 존중하겠다가 가능하거든요. 이외 다양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도구의 가치판단도 용도에 따라 달라지게 만듭니다. 물질적 가치가 높더라도 필요한 용도가 아니면 그
순간에는 가치가 낮게 되죠. 모닥불을 피울 때엔 지폐보단 잘 타는 나뭇가지가 더 가치 있을 겁니다. 역할주의를 떠올린 게 약 6년전이었죠. 6살 정도 먹은 사상입니다. 아마 가장 어린 사상이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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