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정부와 인사2022.03.21 AM 06:26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정부와 인사

 

 

 

사회는 평가로 조직된다.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집단생활의 총칭을 뜻한다. 가족과 회사와 국가 등은 그 주요 형태라 한다. 평가는 가치나 수준을 평하는 것을 뜻한다. 평하다는 시비와 선악과 우열 등을 논하는 것이라 한다. 조직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많은 개인 및 여러 집단에 전문적이고 분화된 역할을 부여하고, 그 활동을 통합하고 조정하도록 구성한 집단을 뜻한다. 또는 그러한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라 한다. 사전적 정의를 토대로 위의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물의 가치나 수준을 다양한 관점으로 논하여 개인 및 집단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석을 통해 인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인사는 집단 내에서 인간의 지위와 직무와 능력 등에 관한 일을 뜻한다. 실제 업무는 채용, 승진, 좌천, 이동, 해고, 급여, 복지, 교육, 시험, 관리 등이 있다고 한다. 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평가해야 한다. 인간 능력의 가치나 수준을 다양한 관점에서 논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을 통해 역할을 부여하거나 해제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가족과 회사와 국가와 같이 대부분 집단에서 나타난다. 정리하면 인사가 맡은 사회의 역할은 사회를 평가로 조직하는 것이다.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 정치에서의 선거, 경제에서의 가격, 노동에서의 인사, 교육에서의 성적, 문화에서의 평점 등. 인간이 사물을 평가하는 것으로 사회가 조직되고 있다. 평가가 사회의 핵심이다. 평가가 잘 되면 모든 분야가 활성화가 된다. 반면 평가가 잘못되면 모든 분야가 잘못된다. 정치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국가가 무너지고 경제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물가가 치솟고 노동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기업이 흔들리고 교육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관념이 비틀리고 문화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신용이 죽게 된다. 올바른 평가야말로 올바른 사회를 위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올바른 사회를 위해서는 인사에 필요한 필수 능력인 평가는 비단 인사 분야만 가질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가져야 한다.

 

평가가 되면 손익이 생긴다. 선거의 등락이나 가격의 변동이나 인사의 판단이나 성적의 결과나 평점의 수치에 따라 다수의 사람들의 이익과 손해가 나타난다. 손익이 생기기에 평가에 예민해진다. 감정적이게 된다. 칭찬을 유쾌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긍정적 평가가 본인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난을 불쾌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부정적 평가가 본인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손익이 없는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욕에 대해 생각해보자. 친밀한 관계에서 욕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때론 애정의 표현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욕은 보통 부정적 평가가 아니기에 손익에 영향이 없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색한 관계에서 욕은 예민한 문제다. 때론 다툼까지 일어난다. 여기서 욕은 보통 부정적 평가이기에 손익에 영향이 있어 관심을 갖게 된다. 본인이 대상이 아닌 욕설에도 불편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건 학습 또는 세뇌에 따른 불편함이다. 그런 불편함은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외국어 욕설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학습이나 세뇌가 없었던 욕이기 때문이다. 평가는 손익을 부르고 손익이 감정을 일으킨다. 평가에 손익이 없으면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다. 손익을 부르는 평가는 감정적 충돌도 만드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하다. 이런 평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정치에서의 선거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은 민주주의 체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를 뜻한다. 보편적인 자유국가의 민주주의는 간접 민주주의로 입법과 행정의 정치가를 선출하는 선거권을 국민들에게 균등하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국민이 정치가를 선출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후보자 토론은 면접이 되고 투표는 인사권자들의 다수결로 채용하는 것이 된다.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인사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사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지듯 국민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진다. 평가도 마찬가지다. 인사권자가 올바른 평가를 하거나 받아드리지 않으면 회사가 무너지듯 국민이 올바른 평가를 하거나 받아드리지 않으면 국가가 무너진다. 국민의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국가가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올바른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선동정치. 선동을 당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 정당의 손익만 보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낡은 정치 체제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한국은 지역 대표에게 정치권력을 주는 토지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때문에 지역의 부동산과 연관된 공약이 많이 나온다. 대부분 공약이 신도시 개발과 공공기관이나 공장의 건설 등과 같이 토지 소유자의 직접적인 이익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은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를 채택하여 국민 10%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즉 지역 대표가 내놓은 대부분 공약은 토지 소유자인 국민 10%의 손익에 주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외 국민 90%는 정치가의 공약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국민 대부분이 손익이 없는 평가로 투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인간은 손익이 없는 평가에 관심이 없다는 걸 상기하자. 국민이 선동을 당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손익이 없으니까 평가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선동 당한 걸로 대충 평가한다. 대충 평가한 걸로 대충 투표한다. 이러니까 특정 지역에 몰표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걸 회사의 인사권자가 했다고 가정해보자. 회사의 인사권자가 선동을 당해서 잘못된 인사권을 행사해 회사에 해를 끼쳤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보통 회사의 인사권자는 대표나 임원으로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될 확률이 높으므로 정성적으로 평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국가의 인사권자인 국민은 직접적인 이익과 관련될 확률이 낮으므로 대충 평가하기 마련이다. 이게 바로 지금 현재 자본주의 국가에서 토지 민주주의가 부르는 국가 성장을 방해하는 끔찍한 현상이다. 이는 제정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할 때 형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기 보다는 과거의 것을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시도 끝에 나타난 것이다. 과거 제정의 영주가 현재 민주정의 지역 대표가 되고 과거 귀족 집단이 현재 민주정의 정당이 되었다. 형태는 달라진 것이 없다. 행정권은 지역의 행정이 필요하므로 그렇다 치자. 입법권마저 지역 대표에게 주었던 것은 그저 단순히 과거 통치 형태를 답습한 것일 뿐이다. 진정한 정치개혁은 과거의 형태에서 벗어나 투표권자의 실질적 손익과 연관되어야 한다. 지역의 대표는 지역의 이익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부동산 공약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반면 분야의 대표는 분야의 이익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입법 공약이 나올 수 있다. 소방관 처우 문제, 택배 파업, 간호조무사 천대, 가사도우미 홀대 등 만약 분야의 대표가 입법권을 쥐었다면 이들의 문제는 이들의 대표가 내놓은 입법을 통해 진작에 해결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산업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을 하게 된다. 시대의 발전에 발맞춰 빠른 입법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을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할 수도 있다. 하나 입법은 다수결로 결정된다. 국가의 이익에 해당하는 산업의 발전을 위한 입법만이 통과될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국가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분야의 대표에게 입법권을 주는 역할주의가 바로 진정한 정치개혁이라 주장하겠다. 회사의 인사권자가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야 회사가 성장한다는 것과 같이 국가의 인사권자가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야 국가가 성장할 수 있다. 국가의 성장을 위한 정치개혁을 부디 심사숙고 해주길 간절히 바라겠다.

 

경제에서의 가격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주의란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하는 자본가가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노동자로부터 노동력을 상품으로 사들여 상품 생산을 하는 경제 체제를 뜻한다.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격과 투자와 분배 등이 시장경제에서 이루어진다. 시장경제는 분업에 의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자유 가격 체제의 수요와 공급 관계에 의해 분배하는 사회구성체라고 한다. 생필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수요는 평가로 결정된다. 다수가 가치와 수준이 높다 평한 것은 수요가 높아 점점 가격이 오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수요가 낮아 가격이 내린다. 팔리니까 오르고 안 팔리니까 내린다. 이런 평가가 잘못되면 물가가 치솟는다. 다수의 평가를 예측하여 사물의 가치와 수준을 제대로 평하지 못하면 초과생산으로 자원이 낭비되거나 미만생산으로 물가가 오를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자연재해로 미만생산 된 작물의 가치가 오르자 너도나도 생산하여 초과생산 되는 바람에 가치가 내려 소비되지 않는 작물은 그대로 버려지기도 한다. 이런 예도 있다. 한국에서 우유는 공급은 그대로인데 수요는 줄어들고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유의 가격이 내려야 하는데 원유가격연동제에 의해 우유 가격을 유지하지 위해 초과생산 된 우유를 땅에 버리고 있다. 자원낭비다. 최대한 정확히 평가하여 우유의 생산을 조절하거나 우유의 가격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정확한 평가가 있어야 효율적인 자원분배가 가능할 것이다. 사회구성원이 만족할 만큼의 분배는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강자에 의한 지배체계를 구축하는 약육강식의 체제라며 비판을 받고 있다. 시장경제는 사유재산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와 사적 이익의 추구를 보장하므로 시장경제에 속한 기업은 이윤을 위해서만 일한다고 여겨지는 일이 많다. 그에 따라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 착취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으로 반자본주의를 외치며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의 장점을 망각한 실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수요와 공급으로 가격이 결정된다. 공급이 늘면 경쟁이 생겨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오르고 가격이 내린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으므로 자유로운 공급 경쟁이 일어난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비자가 이익을 얻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은 소비자에게 구애하고 있다. 내 상품을 사랑해줘. 내 서비스를 사랑해줘. 이런 걸 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논리적으로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 된다. 이윤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파는 것으로 이윤을 얻는다. 자본주의는 목적과 수단을 바꾸는 것만으로 도덕적 이념을 얻을 수 있다. 국가 행복과 성장을 보았을 때도 이익이 크다. 기업이 경쟁하면 국내 소비자는 높은 상품과 서비스 품질로 행복하고, 국내 기업은 높은 상품과 서비스 품질로 국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국가가 행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게 된다. 자본주의가 소비자의 행복을 이념으로 삼으면 자연스럽게 노동자 문제도 해결된다. 상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에게 타당한 부의 분배가 없으면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저하된다. 공장 노동자 급여가 낮으면 상품 품질이 낮아지고 호텔 노동자 급여가 낮으면 서비스 품질이 낮아진다. 그런 기업은 도태되고 타당한 부의 분배를 하여 상품과 서비스 품질이 높은 기업이 성장한다. 당연한 이치다. 소비자의 행복이 이념이라면 올바른 부의 분배가 가능해진다. 소비자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미덕은 공정과 경쟁이며 악덕은 불공정과 담합과 독점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국가가 그러지 못했던 것은 온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시기 신분제의 관념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노동자를 농노 취급했기 때문에 노동자 착취가 나타났던 것이다. 인간은 기초적인 관념에 의해 대부분의 감각과 감정과 욕구의 방향이 결정된다. 그걸 알고 있다면 한국의 문제도 알 수 있다. 한국이 수직사회인 까닭은 조선이 수직사회였기 때문이다. 수직사회인 조선의 관념을 그대로 이어받으니까 한국도 수직사회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본가를 길러내는 교육을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자본가를 길러내는 교육을 했어야 함이 마땅했다. 우수한 평가능력으로 올바른 인사능력과 정확한 수요예측능력과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타당한 부의 분배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올려 국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경쟁에서 승리하여 정당하게 높은 이윤을 얻는 것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이가 경쟁에서 살아남아 자본가가 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은 장유유서로 인해 사회초년생은 무조건 사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자본가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용 교육을 하지 않고 노동자용 교육으로 노동자만 길러내니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가치가 낮아지는 바람에 경제참여비율이 낮아졌던 것이다. 배달 수요가 높아지자 배달료가 늘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수요와 공급을 고려했을 때 자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자는 자본가를 해야 한다. 정부가 창업자를 아무리 지원해도 국민이 창업에 필요한 능력을 배우지 못하면 시도조차도 못한다. 시도하는 사람도 능력이 없어 실패만 하기에 창업은 실패의 대명사가 되어 대다수가 창업을 꺼리고 안정적인 취업만 노렸다. 잘못된 관념으로 잘못된 교육을 하니 잘못된 결과가 나온다. 한국에서 나타난 꼰대질과 갑질이나 부의 분배 실패나 족벌기업은 자본주의 보다는 조선의 관념이 원인이다. 이처럼 관념이 중요하다. 각각의 사람은 다른 욕망을 가질 수 있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할수록 부를 얻을 수 있는 체제다라는 관념이 자리잡게 된다면 본인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고 할 것이므로 앞으로 자본주의는 인류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상이 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드리면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경제와 사회와 문화에 침투하며 미국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중화사상에 영향을 받은 지배욕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착잡한 일이다. 대부분 인류는 아직도 규율을 강요하던 종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규율을 강요하는 것이 인류의 보수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인류의 진보다. 미국이 위대한 것은 그들이 진보적인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진보적인 사상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만약 진보적인 사상이 인류를 퇴보시킨다면 그건 실제 진보가 아니라 퇴보사상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진보라고 아무리 떠든들 그 근본 구조가 종교와 마찬가지로 규율 중시인 이상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다. 그건 그냥 퇴보다. 미국이 진정 인류가 자유롭길 바란다면 세계에 단순히 시장경제 체제를 집어넣기 보다는 자유주의 관념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부를 얻은 사람은 혼란이 이익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인류가 합심하여 인류를 진화시키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는가? 아무리 부가 많아도 수명이 끝나면 무슨 의미인가? 전 우주에 인류를 퍼트리고 영원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주로 진출하려면 노화와 수명의 한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므로 자잘한 이해관계는 제쳐두고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인류 모두가 효율적인 체제 안에서 진화를 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한다. 모든 욕망은 어떤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더라도 무조건 막을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해야 한다. 진리를 알고 싶으면 진리를 알기 위해 올바른 방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노동에서의 인사에 대해 알아보자. 노동이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 및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를 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판매하거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으로 화폐를 얻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고 있다.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귀속된 힘이기에 노동력을 구매하려면 노동자를 고용해야 한다. 노동자에서 노동력을 때낼 수 없고 노동자를 구매할 수가 없기 때문에 노동력은 자연스럽게 소유자인 노동자에게 빌리는 형태로 구매하게 된다. 노동자는 본인의 노동력이란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고 자본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상품을 취급하는 상인이니 서로가 대등한 관계를 구축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부당한 노동환경은 노동착취가 아닌 불공정거래다. 인사는 노동력을 평가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 또는 임금과 복지 등을 결정하는데, 노동력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만이 아니라 성격 또한 평가를 하게 된다. 능력이 우수해도 성격이 좋지 못하면 집단 내 불화를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이런 건 능력과 별개다. 노동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고용한 측이 흔들리거나 무너진다. 성격을 생각해보자. 실제 능력과 별개로 도벽을 가진 사람에게 은행업무를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능력을 생각해보자. 실제 성격과 별개로 수전증이 있는 사람에게 서빙을 맡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처럼 노동력을 평가할 때에는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을 둘 다 평가해야 한다.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이 필요하다. 역할주의는 역할로 평가하는 걸 말한다. 인간의 경우 역할에 맞는 성격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역할을 맡을 자격이 있으며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물건의 경우 용도에 맞는 모양과 성능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쓸모가 있으며 용도에 맞게 쓸 수 있으면 무엇이라도 가치가 있다. 어린이라도 바둑으로 어른과 경쟁할 수 있고 어른이라도 어린이가 즐기는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 남성이라도 가사를 할 수 있고 여성이라도 국방을 할 수 있다. 시간을 보는데 시계가 만원이든 천 만원이든 상관이 없고 모닥불을 피우는데 폐보단 잘 타는 나뭇가지가 가치가 있다. 각각의 역할은 사회에 필요한 것으로 결정된다.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사회에서 부여하는 역할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해 존재한다. 사회는 이념에 따라 생활방식이 달라지는데 자유국가는 자유주의 이념에 맞춘 역할을 부여한다. 이렇게 역할로 평가하는 것이 역할주의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대한 기준이 없어 주관에 따라 역할과 관계없는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기도 하기에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런 역할주의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기본적인 것이지만 낡은 관념에 의해 이런 것조차 잘 지켜지지 않는 일이 잦다. 몇 가지 생각나는 걸 써보도록 하겠다. 성격으로 보자. 보통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은 성별이나 범죄가 주를 이룬다. 예전에 남성인 A 정치가가 여성인 B 정치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어깨를 두드렸다. B 정치가는 그 작은 접촉에 무척이나 화를 내었고 그게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정치가의 성향이나 능력 또는 뉴스의 의도는 제쳐두고 크게 실망했다. 어떻게 국민의 대표라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나약할 수 있는가? 고작 어깨를 두드린 것만으로 그렇게까지 화를 낼만한 사안인가? 과도한 성적 수치심 또는 지나치게 민감해서 그런 거라면 정중하고 품위 있게 대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신체적 접촉만으로도 큰 불편함을 느끼고 있으니 추후에는 가능한 접촉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말도 못하는가? 그렇게 감성적이어서 어떻게 국가대사를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A 정치가가 남성이고 B 정치가가 여성이기 때문에 신체적 접촉에 화를 내는 것은 여성의 성적 수치심에 근거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남성은 주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식의 가부장제 세계관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어째서 여성은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가져야 하고 남성은 여성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조차 잘못되었다며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런 관념이 잘못되었다. 역할주의는 성별로 평가하지 않고 역할로 평가한다. 국민이 정치가란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이 이상하다 여겨지는가? 예전에 층간소음 흉기난동이 발생했을 때 경력자인 남경은 방관하고 신입인 여경은 도주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장유유서에 따른 경력자의 나태함과 성별로 평가를 다르게 한 경찰의 잘못된 채용방식과 교육방식과 코로나 사태에 따른 교육미비 등의 문제가 있었기에 일어났다. 안전한 도시라도 범죄가 일어나듯 꼼꼼하게 대처해도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약한 의지 때문에 도주한 여경이 여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옹호하는 경찰이 있거나 경찰도 사람이라며 시민의 위험을 보고 도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익명의 경찰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뉴스에 나온 것이기에 확실하지만 후자는 블라인드에 올라온 것이기에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경찰이 경찰 역할을 하지 못했음에도 옹호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면 다른 역할을 맡으면 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왜 하지도 못하는 걸 하려고 하는가? 최소한의 역할수행도 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성격에 의해 비리나 횡령 같은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심각성은 분명 성별보다 범죄 쪽이 크다. 그러나 성별은 성별을 핑계로 역할에 맞지 않는 성격을 정당화한다는 점이 문제다. 여성이니까 성적 수치심이 강한 것이 당연하다. 여성이니까 의지가 약한 것이 당연하다. 전형적인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을 근거로 역할수행 실패를 정당화하고 있다. 남성은 그 동안 여성은 집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은 그 동안 여성은 보호받고 혜택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런 것이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이다. 남성은 여성인권이 오르자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을 받아드렸다. 여성도 여성인권이 오른 지금 그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등한 관계에서 과잉 보호나 혜택에서 벗어나 평등한 관계를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정녕 여성인권을 주장할거면 유전자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여성을 차별하던 낡은 관념을 유지한 상태에서 인권을 주장하니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다. 능력으로 보자. 보통 역할에 맞지 않는 능력은 혈연이나 인맥이 주를 이룬다. 혈연이나 인맥이라고 역할 수행도 할 수 없는 인간을 대려다 고용하는 일이 있다. 특히 한국은 가족주의에 근거한 족벌기업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친인척 대려다가 일감 맡기고 일을 못하니까 수익을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해고하는 일이 있다. 끔찍한 일이다. 노동자 착취는 단순히 자본주의 탓이 아니다. 무능한 혈연에게 높은 직위를 준 것이 노동자 착취로 이어졌다면 그건 가족주의의 탓이다. 즉 유교 탓이다. 이런 일도 있다. 무능한 혈연에게 높은 지위를 준 것이 상품과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져 기업이 무너지기도 한다. 게임의 품질과 서비스가 저하되자 소비자가 등을 돌리는 일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적 이념인 소비자의 행복에 따라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순리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이가 부를 얻는 사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역할에 맞는 능력을 보유한 이를 고용하는 것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을 올려 국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고 국외 상품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역할수행은 아주 기초적인 것처럼 느껴지나 이처럼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점에서 역할주의 관념의 학습은 꼭 필요하다 본다.

 

혈통이나 인맥이나 빈부나 지역이나 성별 같은 걸로 평가에 차등을 준다 가정해보자. 대상에 대한 관념이 비틀리게 된다. 역할에 맞는 능력과 별개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것이 틀릴 경우 불만을 갖게 된다. 귀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아니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귀족주의다. 아는 사람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연고주의다. 남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여성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남성주의다. 반대도 동일하다. 여성이니까 좋은 평가를 주고 남성이니까 나쁜 평가를 준다. 이것이 여성주의다. 남성주의나 여성주의가 인권운동이라 착각할 수 있는데 정녕 평등을 바란다면 거기에 성별이 붙을 이유가 없다. 귀족주의든 남성주의든 여성주의든 대상을 기준으로만 바라보면 대상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게 된다. 이런 건 잘못된 관념을 새겨주게 된다. 평등한 평가조차 부당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귀족이니까 좋은 평가를 받다가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면 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주관에 의한 부당함이다. 객관이 아닌 주관으로 인권을 결정하면 이처럼 잘못된 부당함을 올바른 것처럼 포장되게 만들게 된다. 어디 여자가 사회활동을 하려 드느냐가 차별이듯 어디 남자가 여성혜택에 불만을 가지려 드느냐도 차별이다. 여성이 특별한 혜택을 받기 때문에 종종 여성주의를 여성우월주의로 착각하고 있지만 근거가 여성이 열등하다는 가부장제 세계관의 여성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여성열등주의다. 귀족은 보통 정복자의 입장에서 피정복자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이 우월함을 근거로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우월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건 생물학적 우월함이 아닌 사회학적 우월함이기에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월주의는 잘못되었다. 여성은 보통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 여겨졌던 가부장제 세계관에서 남성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이 열등함을 근거로 특별한 혜택을 요구하는 것은 열등주의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건 생물학적 열등함이 아닌 사회학적 열등함이기에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등주의는 잘못되었다. 인간의 우열은 혈통이나 체력이 아닌 지능에 있기에 지능 지수가 비슷하다면 우열을 나눌 수가 없다. 남녀의 뇌 구조가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귀족이나 일반인이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지능은 개인마다 다르기에 일방적 우월함이나 열등함을 주장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특별한 권리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부당함이나 차별을 느낀다면 그건 관념이 비틀려서 감각과 감정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바라보면 무엇이 평등인지 알 수 있다. 왜 배려하지 않는 거야?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약하니까 배려해야 하잖아? 왜 불만을 가지는 거야?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강하니까 힘든 걸 해야 하잖아? 모든 근거가 가부장제에 있다. 가부장제가 싫다는 이들이 가부장제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걸 근거로 모든 걸 요구한다. 한심하다. 이제는 모두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여성이 의지가 약하거나 성적 수치심이 강할 이유가 없다. 그건 가부장제 세계관의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여성상이다. 의지가 강하여 정확하게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고 성적 수치심이 없어야 부당한 일에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여성상은 그저 여성을 약자로 만들 뿐이다. 바보 같은 선동에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런 여성상을 근거로 온라인에서 성 문화를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온라인에서는 인간의 체력이나 근력의 차이가 없으니 완전 동일하게 보고 특정 여성의 약한 의지나 과도한 성적 수치심을 근거로 성을 탄압하거나 자유를 억압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모두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때가 왔다. 민족의 자유, 국가의 자유, 국민의 자유를 잇는 사상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교육에서의 성적에 대해 알아보자. 교육이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고, 인간의 잠재 능력을 일깨워 훌륭한 자질, 원만한 인격을 갖도록 이끌어 주는 일을 뜻한다. 이런 교육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관념이 비틀릴 수 있다. 성적을 수정하거나 시험문제를 유출하여 혈연인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혈연이면 높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촌지를 받고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뇌물을 주면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아부를 받고 무능한 학생을 높게 평가한다. 그걸 본 다른 학생은 아부를 하면 높게 평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교사가 공정한 평가를 하지 않으면 학생의 관념이 잘못된 방향으로 비틀리게 된다.

 

일부 한국 교육은 사회주의나 PC주의에 영향을 받아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려 하고 있다. 결과의 평등이 어떤 것인지 잠시 알아보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까닭은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다. 기회의 평등으로는 차별이 발생하니 결과의 평등으로 모든 차별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의 평등이란 평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평가를 하면 차별이 나온다. 평가는 가치와 수준을 평하는 것으로 가치와 수준에 따라 차별이 나오게 된다. 그것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에도 차별이 나온다. 그런데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며 정당한 차별조차 부정하게 되면 평가를 하지 않게 된다. 매우 일차원적인 논리다. 평가를 하면 차별이 나온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평가를 하지 말자. 가산점이나 할당제에 찬성하거나 모든 줄 세우기에 반대하는 것은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하지 않고자 하는 논리에서 나타났다. 가산점이나 할당제는 학교나 기업의 평가를 국가가 간섭하여 바꾸는 걸 의미한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조작했다. 이는 결과의 평등을 위해 선거 결과를 조작하는 것과 같을 정도의 어리석은 행위다. 어떤 결핍으로 어떤 혜택을 주고자 한다면 평가에 간섭하기 보다는 환경에 간섭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다. 모든 줄 세우기에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모든 평가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 결과의 평등을 위해 평가를 없애자고 한다. 이는 결과의 평등을 위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주장이다. 나는 교육의 줄 세우기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기준으로 줄 세우는 걸 반대하는 것이지 역할 같은 다양한 기준으로 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본다. 애초에 평가를 하면 어떤 경우에도 줄 세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할주의는 그 줄을 여러 개로 늘리는 것을 통해 다양하게 한다. 이와 같이 결과의 평등은 평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 평가를 하지 않으면 사회가 조직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PC주의는 누가 평가를 하게 되는가? 바로 사회주의 정치가나 공산당원이나 PC주의자가 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의 규율을 강요하고 그 규율에 맞춰 평가를 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의 규율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사회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규율이 만들어지므로 규율을 우선시하는 것 또한 민주적이라 착각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선대가 만든 규율은 후대의 의사반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규율은 당대의 민주적 절차에 불과하다. 후대는 아무런 의사표현도 하지 못하고 선대가 만든 규율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건 민주적이지 못하다. 이러니까 사회민주주의는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후대의 의지에 따라 규율이 쉽게 바뀔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사회의 규율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다. 선대가 사회를 중심으로 한 규율을 만든다 하더라도 후대가 자유를 중심으로 한 규율을 만들어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그걸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그걸 자유롭게 바꿀 수 없다면 어떻게 그걸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가? 사회민주주의는 모순덩어리다.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의 규율을 강요하는 사상이다. 규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공산당원의 손에 쥐어져 있다. 규율로 평가를 하기에 실질적으로 평가할 권리는 공산당에 있는 셈이다. PC주의는 PC주의의 규율을 옳다고 선동하는 사상이다. PC주의자가 다른 사람에게 강요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 공산주의와 다르게 강요를 따를 의무까지는 없다. 단지 도덕적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강요에 가까운 선동이 된다. PC주의자가 평가한 것을 선동하며 강요하기에 실질적으로 평가할 권리가 PC주의자에게 있는 셈이다. 정리하면 결과의 평등은 평가할 권리를 일부가 독점하자는 주장이다. 평가의 권리를 일부가 독점한다는 것은 평가가 사회를 조직한다는 것을 미루어보았을 때 일부가 사회를 조직하자는 것과 같다. 즉 독재다. 이런 것은 종교부터 시작해 규율을 강요하는 모든 사상이 같다. 종교인이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종교국가다. 사회주의 정치가가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국가다. 공산당원이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공산당 국가다. PC주의자가 평가하여 사회를 조직한다. PC주의 국가다. 모든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규율을 우선시하는 사상들이 보수나 퇴보가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평가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와 역할주의야말로 다수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되는 민주적인 사상이다. 이렇게 자유를 우선시하는 사상들이 진보가 된다. 무엇이 인류의 보수와 진보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문화에서의 평점에 대해 알아보자. 문화란 인간의 공동 사회가 이룩하여 그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가치 있는 삶의 양식 및 표현 체계를 뜻한다. 자연 상태와 대립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극복한 것이라 한다. 평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 상거래의 평점과 문화예술의 평점이 있다. 전자 상거래의 평점은 온라인 쇼핑몰이 주를 이루고 문화예술의 평점은 게임이나 영화나 소설 등을 공급하거나 평가하는 사이트가 주를 이룬다. 상품을 소비하거나 문화예술을 즐기고 그 가치와 수준을 평하여 점수화한 것이 평점이다. 이런 문화에서 평가가 잘못되면 신용과 예술이 죽게 된다. 전자 상거래나 문화예술의 평점을 보고 구매한 상품의 품질이 생각보다 낮으면 평점의 신용도가 낮아져 타인의 평가를 믿지 않게 된다. 사회의 신용이 죽는다. 문화예술의 평점을 보고 관람한 작품의 품질이 낮으면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혼란스러워져 온전히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게 되므로 예술이 죽게 된다. 그럼에도 대다수는 제대로 된 평점을 매기고 있지 않고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평가가 손익을 만들고 손익이 감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전자 상거래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평점에 민감한 까닭은 그 평가가 바로 손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사하는 이들이 이유 없이 낮은 평점을 받으면 평가를 한 사람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는 웬만해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다. 평균만 되도 5점 만점 중 5점을 주고 정 마음에 안 들면 1점을 준다. 평점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둘은 평가에 대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평가의 가치를 모르니까 대충 평가한다. 지금까지 평가는 위에서만 했다. 보편적으로 모두가 평가한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의 평가로 사회가 조직된다. 정치, 경제, 노동, 교육, 문화 등등 모든 분야가 모든 사람의 평가로 조직되고 있다. 그 점을 알고 모두가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관념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평가가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 다양한 평가사가 있지만 상품 평가사는 없는 것 같다. 좀 유명한 상품이 되어야 그에 대한 평가가 실린다. 대중의 평가는 구매 평점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지만 전문가의 평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평점 양극화 현상으로 5점 만점 중 5점을 매긴 평점은 대충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므로 낮은 점수를 참고할 때도 많다. 얼리어답터나 유튜버나 블로거가 평가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그들조차 익명이거나 광고용으로 상품 지원을 받는 일이 많아 신용도가 엄청 높지는 않다. 즉 신용할 수 있는 평가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배달음식을 주문할 때 평점을 신용할 수 없어 불편할 때가 많았다. 분명 평점은 높은데 맛이 없거나 취향이 아닐 때가 많았다. 전문가의 평점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배달앱은 미식가를 고용하여 익명으로 배달주문을 한 뒤 평점을 하고 그 평점이 상단에 올라올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미식가에게만 좋은 음식이 나갈 수 있으므로 미식가의 아이디는 공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 후 바로 평점을 매기기 보다는 평가기간 후에 평점을 매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문화예술에서는 전문가의 평가조차도 신용할 수 없을 때가 있다. PC주의의 영향으로 품질이 낮은 작품도 높게 평가 받을 때가 있다. 이유는 오직 하나다. PC주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평가할 권리가 PC주의에 있기 때문에 전문가조차 PC주의에 영향을 받은 평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PC주의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꺼려하는 것은 PC주의 자체를 꺼려하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그게 정당한 평가를 받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신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용할 수 없는 평가가 늘어날수록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혼란스럽게 된다. 진심으로 아름답게 느낀 것의 평점이 낮은 걸 보고 혼란을 느끼고 진심으로 아름답지 않다 느낀 것의 평점이 높은 것을 보고 혼란을 느낀다. 미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뒤틀리면서 예술을 경시하게 된다. PC주의뿐만이 아니다. 현대미술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낙서처럼 그려진 걸 아름답다 말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 하는 거야?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는 잘못된 평가는 예술을 죽이게 한다. 정리하면 평가가 대중적이고 전문적이어야 전자 상거래를 이용하고 문화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이가 부를 얻어야 할 것이다.

 

 

 

정치와 경제와 노동과 교육과 문화에서 평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인사가 주제임에도 다양한 영역에서의 평가를 알아본 까닭은 그래야 인사의 평가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인사의 평가 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인사는 노동력을 평가한다.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하게 된다. 역할에 맞는 인간의 성격과 능력을 평가하여 채용과 승진과 좌천이나 임금이나 복지 등을 인사권자에게 제안하거나 인사권자가 직접 결정하는 것이 인사 업무다. 성격과 능력. 인사는 두 가지를 역할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으면 된다. 성격에 대해 알아보자.

 

성격이란 각 개인에게 특유한 감정과 의지와 행동 등의 경향을 뜻한다. 또는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정신생활을 모든 방면에서 나타내는 전체로서의 소질을 뜻한다. 인사가 성격을 파악하는데 쓰인 방법은 관상, 혈액형, MBTI 등이 있다. 관상부터 살펴보자. 관상은 한의학과 비슷하다. 한의학은 사람을 축적된 경험을 비과학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진단하고 치료한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경험의학과 유사한 부분이 있으나 그걸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경험의학이라 부르기 어렵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치료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치료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A증상에 B약초를 먹이니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런 것은 경험에 해당한다. 그러나 A증상에 B약초를 먹이니 증상이 호전된 것을 보았을 때 A증상을 가진 사람은 C유형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것은 단순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A증상에 B약초가 효과적이다라는 것까지는 경험에 해당하므로 실험자료로 쓸 수 있지만 그 외의 것은 쓸 수가 없다. 한의학이 현대의학과 조화를 이루고 싶다면 쓸 수 있는 경험적인 것만 가져와 실험을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관상도 마찬가지다. 관상은 사람을 축적된 경험을 비과학적인 기준으로 해석하여 판단한다. 경험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맞기도 하지만 해석하는 기준이 경험과 무관한 잣대기 때문에 맞지 않기도 한다. 예컨대 A관상을 지닌 사람이 B의 결과가 나왔다. 그게 맞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외견은 환경이나 감정에 의해 바뀌는 일도 있기 때문에 외견을 통해 환경이나 성향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예를 들어보자. 스트레스를 받으면 흰 머리가 날 수 있다고 한다. 그걸 통해 젊은 나이에 흰 머리가 많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향도 있으므로 확신은 할 수 없다. 실내에 자주 있으면 피부가 흰 색일 수 있고 실외에 자주 있으면 피부가 구리 색일 수 있다. 그걸로 내향적이거나 외향적인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향도 있으므로 확신은 할 수 없다. 이처럼 관상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한의학은 A증상에 B약초를 먹이자 증상이 호전되었다라는 걸 쓸 수는 있으나 A관상인 사람이 B의 결과가 나왔다라는 것은 아예 쓸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오랜 경험으로 관상만 봐도 안다며 자신하며 근거 없는 평가를 하기도 하는데 정말 당황스럽다. 예컨대 미형인 범죄자를 보여주면 범죄자라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연찮게 맞출 수도 있지만 그건 전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관상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이제 지나치게 낡은 방식이다. 혈액형은 애초에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관상보다 못한 방식이 혈액형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2017년 조사결과 10명 중 6명은 혈액형별 성격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심각한 수준이다. 바넘(일반적 성격과 특성을 본인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것)이나 자기실현적 예언(어떤 예측이나 기대를 믿는 것으로 직접 실현하는 것)에 의해 혈액형 성격 차이를 믿는다고 한다. 바넘은 자기객관화를 못한다는 증거고 자기실현적 예언은 플라시보 효과에 대해 모른다는 증거다. 인문학 수준이 낮거나 과학 지식이 적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령 수준이 높다 하더라도 관념의 문제가 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 차이가 있다는 관념이 주입되자 논리적인 근거로 믿을 수 없음을 증명되었음에도 고정된 관념에 의해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관념의 무서움이 다시 한번 증명된다. 인류는 과학이란 영원진리에 가까운 진리로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올바른 관념은 진리가 바탕이어야 한다.

 

이런 걸 믿는 사람은 한국과 일본 말고는 없다고 한다. 인사는 성격과 능력 평가의 전문가다. 그런 전문가라면 최소한 혈액형은 운운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나도 끔찍하다. MBTI는 Myers-Briggs Type Indicator 의 약어로 성격 검사의 일종이다. MBTI는 심리학자들에게 아무런 근거가 없다며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융의 이론으로 만들어진 검사라고 하는데 융의 이론은 실험과학 이전의 것이라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케팅이 잘 되어 전세계적으로 연간 약 200만명이 취업을 목적으로 약 15달러에서 40달러를 내고 검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것은 알겠다. 그런데 애초에 문제풀이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신용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점이 많다. 흔히 말하는 성격유형 검사에는 특정한 결과를 낳기 위한 알고리즘이 있고 그 알고리즘을 추측할 수 있으면 원하는 답을 만들 수 있다. 문제풀이인 시험과 같이 객관식으로 성격 유형을 검사하니 거기에는 답이 존재하는 것이다. MBTI가 과학적 근거가 있건 없건 문제풀이 방식을 사용하는 이상 개인의 주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A유형인 사람이 B유형인 것처럼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객관적 결과라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를 낳을 수 있다. 문제풀이방식은 이제 낡았다. 다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바로 바라는 것 적기다.

 

바라는 것 적기. 지나치게 단순해서 당황할 수 있다.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아 경시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데이터 수집은 단순해야 가치가 있다. 단순한 데이터를 대량으로 모아 논리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만든다. 그것이 빅데이터다. 오히려 MBTI 같은 답이 있는 문제풀이가 인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짓고 그 안에서만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동물이 위기에 빠졌다. 도울 것인가? 매우 긍정. 긍정. 중립. 부정. 매우 부정. 이렇게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을 결정짓고 거기서 판단한 결과를 토대로 인간을 평가하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직접 돕는다나 사람을 모아서 돕는다 같이 좀 더 복잡해도 큰 차이는 없다. 아는 동물이면 돕고 모르는 동물이면 돕지 않는다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좋아하는 동물이면 돕고 관심 없는 동물이면 돕지 않고 싫어하면 동물이면 공격한다라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인간의 판단을 고작 몇 가지로 나눈 걸로 선택하게 하고 그걸로 인간을 평가하려고 하니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가 없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답이 있는 문제풀이는 지식을 평가하기에는 효율적일지 몰라도 인간을 평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둘, 이미 만들어진 공개된 유형에 인간을 집어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인간의 데이터에서 유형을 새로 만들거나 비슷한 유형과 엮어야 한다. 유형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을 집어넣느냐와 인간을 평가한 걸로 유형을 만드느냐에 차이다. 셋, 문제풀이는 답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하는 성격에 맞춰 선택지를 골라 실제 성격과 다른 성격을 만들 수 있다. 조작의 위험이 있는 검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과 달리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어 있지 않고, 인간을 평가한 걸로 유형을 만들고,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운 방식이 바로 바라는 것 적기다.

 

첫째, 바라는 것만 적으면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지 않는다. 빈 여백에 그냥 바라는 걸 줄줄 쓰기만 하면 된다. 지나치게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아무거나 써도 되기 때문에 쓰는데 어려움은 없다. 자유와 생존을 적어도 되고 취미를 적어도 되고 꿈을 적어도 되고 이성과의 사랑을 적어도 되고 가족의 행복을 적어도 되고 갖고 싶은 제품명을 적어도 된다. 그야말로 아무거나 적으면 된다. 이렇게 바라는 것만 적으면 생각과 행동의 틀과 방향이 결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둘째,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고 유형을 만들 수 있다. 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자유를 바라면 자유주의자일 수 있다. 통일을 바라면 민족주의자일 수 있다. 남성인권만 바라면 남성주의자 일 수 있고 여성인권만 바라면 여성주의자일 수도 있다. 취미에 대해 살펴보자. 먹고 싶은 음식 종류가 다양할수록 미식가일 수 있고 식탐이 많을 수 있다. 가고 싶은 여행지가 많을수록 여행가일 수 있고 외향적일 수 있다. 꿈에 대해 알아보자. 부와 명예와 관련된 바람이 많을수록 사회적 성공을 바랄 수 있고 학문과 관련된 바람이 많을수록 지적 호기심이나 진리를 바랄 수 있다. 바람을 조합하여 추측할 수도 있다. 자유와 통일을 바라면 자유주의 국가로 통일을 하길 바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남성인권과 여성인권 모두 바라면 인본주의자일 수 있다. 음식과 여행을 조합하면 미식여행이 될 수 있고 역사와 여행을 조합하면 역사여행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조합한 걸 연결하여 어떤 고유한 해석체계를 거치면 바라는 걸 통해 유형 만들기를 할 수 있다. 셋째, 바라는 걸 많이 적게 하면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바라는 것을 열 개 적으라고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조작도 가능하다. 바라는 것을 백 개 적으라고 하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 조작하기 까다로워진다. 바라는 것을 천 개 적으라고 하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천 개 정도를 한정된 시간 내에 적으라고 하면 조작할 여유가 없다. 초반에는 역할에 맞는 바람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중반부터는 쓸 것이 부족해져서 평소 생각했던 것을 반사적으로 적게 된다. 후반에는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모아서 적게 된다. 이런 방식을 계속 쓰면 나중에는 미리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여 준비해올 수 있다. 그걸로 조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람직한 상황으로 유도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바라는 것 적기는 단순히 성격을 검사할 뿐만이 아니라 인문학 수준을 높여줄 수 있다. 진지하게 말해서 본인이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가 않다. 대부분 외부의 영향으로 바람이 결정된다. 그것은 초중고 장래희망에서부터 알 수 있다. 장래희망이 유명하고 안정적인 것이 주를 이루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외부의 영향에 지나치게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바라는 걸 열 개나 백 개 정도 쓰게 하면 외부의 영향에 따라 바라는 걸 적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천 개쯤 되면 본인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사유가 바로 철학적 사유다. 고찰 없는 자유의지는 없다. 왜냐하면 외부의 정보를 그대로 수용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외부의 의지로 움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은 이런 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키울 수 있다. 자기실현적 예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사회적 바람과 반사회적 바람이 있을 수 있는데 사회의 역할을 맡기 위해 본인의 바람에 대해 생각하면 사회의 역할에 맞는 사회적 바람을 위주로 생각하게 되고, 자기실현적 예언에 따라 그 생각에 맞춰 실행하며 성장할 확률이 높게 된다. 자연스럽게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역할을 맡기 위해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다. 역할을 선택한 것은 본인의 의향이기 때문에 그 역할에 맞는 바람에 맞춰 실행하고 성장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본인의 바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바람이 구체화되면서 보다 더 자유의지가 강해진다. 개인정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바라는 걸 적게 하는 것일 뿐이므로 개인정보에 대한 문제가 있기 어렵다. 문제가 되는 건 본인이 알아서 안 적으면 된다. 인사가 알아서 해석해서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단지 바라는 걸 많이 적는 것일 뿐이지만 이토록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채용을 위해 본인이 본인의 바람을 적게 되면 인사에 좋게 보이기 위해 나쁜 것을 적지 않아 위험한 것을 파악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은 사상마다 기준이 다르고 바람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바람 실현 방법에 있다. 바람에 따라 사상이 달라질 수 있고 바람을 조합하여 바람 실현 방법을 파악해 선과 악을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으면 그것이 악이 된다. 생각해보자. 인종과 민족의 과한 이익을 추구하여 다른 인종과 민족을 공격하거나 배척한 것이 나치즘이다. 여기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나는 크게는 인류의 보통은 사회의 작게는 집단의 인간을 위한 역할수행 여부나 역할 기여도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을 주장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역할과 기여도에 따라 얻는 이익이 달라진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만큼 부를 얻는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걸 과하게 이익을 얻길 바라거나 바람을 조합하면 상황에 따라 위험하다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바람만 살펴보자. 가령 민족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국수주의 또는 배타주의자일 수 있고 이민족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사대주의 또는 PC주의자일 수 있다. 자유를 과하게 바라면 자유방임주의자일 수 있고 평등을 과하게 바라면 전체주의자일 수 있다. 본인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사리사욕에 빠질 수 있고 타인의 이익을 과하게 바라면 자유의지가 없는 인형일 수 있다. 조합을 해보자. 자식에 대한 애정과 높은 교육열이 더해지면 자식에게 교육을 강요하는 태도가 나올 수 있다. 타인의 이익을 바라는 것과 맹신이 더해지면 타인에게 신앙을 세뇌하는 태도가 나올 수 있다. 연인에 대한 애정과 높은 자존심이 더해지면 연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타인에게 공격적인 태도가 나올 수 있다. 이것 자체로는 확정할 수는 없다. 단지 추측일 뿐이다. 실제 채용 이후 상황을 살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데이터가 쌓여 빅데이터화가 되어 바라는 비율과 조합에 따른 결과가 통계화가 되면 의미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비율이 일정이상 높게 되면 극단주의가 된다라는 통계가 나올 수 있고, 바라는 것의 비율과 조합이 특정 수치에 다다르면 위험할 수 있다라는 통계가 나올 수 있다. 빅데이터와 오랜 시간은 비율과 조합에 의한 통계로 만들어진 고유한 해석체계를 갖추게 할 것이다. 그 해석체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므로 검사 받는 사람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작 없이 검사하게 될 것이다.

 

고정되는 관념에 따라 적성이 달라질 수 있다. 관념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에 대해 비교적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모르게 이뤄진 생각이나 의식을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나 의식 내용을 뜻한다. 정리하면 보는 것에 대한 생각이나 인식이나 의식이다. 관념에 고정될수록 의사결정이 빨라진다. 고정된 관념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흔들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한다. 관념이 고정될수록 반복작업을 하게 되는 역할에 어울리게 된다. 그러나 지성인이라면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받아드려야 하므로 반복되는 작업에 관련된 관념은 주로 고정하고 그 외의 것은 고정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관념이 고정되지 않을수록 새로운 것을 떠올리기가 쉽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자유롭게 새로울 것을 떠올린다. 관념이 고정되지 않을수록 새로운 것을 떠올리는 역할에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일상이 괴롭거나 힘들거나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으므로 꼭 필요한 부분은 고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가족애나 친애에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일일이 생각하면 일상이 괴롭거나 힘들거나 피곤하고 오감에 관련된 관념이 고정되지 않으면 보편적 감각이 다른 이들과 다를 수 있기에 인간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 완전 기초적인 관념은 사상가에게 맡기면 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관념이 고정되는 수가 달라진다. 관념이 거의 없이 유전자로 움직이면 자아형성을 시작한 아기(0세)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기초가 마무리되면 자아형성이 마무리된 사춘기(13세~15세)가 끝이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구체적이게 되면 자아가 성숙한 어른(20세)이라 할 수 있고 관념이 가르칠 정도가 되면 자아가 원숙한 지성인(30세 이후)이라 할 수 있고 모든 관념이 변하지 않게 되면 자아의 완성이자 지성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나이는 평균으로 사람마다 다르다) 사상가는 자아형성이 마무리되기 전에 머무르는 것이 좋고 창작자는 자아가 성숙하게 되는 시기에 머무르는 것이 좋고 지성인은 자아가 원숙해지는 시기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사상가가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면 만드는 사상은 고정된 관념의 파생사상에 불과해진다. 유교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관념이 고정되면 만드는 사상은 유교의 파생사상에 불과하다. 다른 기초적인 관념도 모두 동일하다. 사상가를 시작하기 가장 적합한 시기가 13세 정도고 만약 이후에 사상가를 하고 싶다면 자아붕괴를 한번 해보는 것이 좋다. 본인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다시 생각하면 자아가 붕괴되고 다시 자아형성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 창작자가 관념을 가르칠 정도가 되면 창작물이 식상하고 재미없어 질 수도 있다. 가르친다는 것은 체계가 어느 정도 잡혔다는 걸 의미하고 체계가 잡히게 되면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기가 어려워진다. 창작자는 언제나 배우는 입장에 있어야 한다. 무언가 타인에게 알려줄 때에도 가르친다기보다는 정보를 교류한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성인이 자아가 완성되면 새로운 것을 떠올리거나 받아드릴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지성인이라 할 수 없게 된다. 관념이 고정되더라도 누군가 고정관념이라 지적하면 받아드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관념은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 유무와 취향으로 고정되어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바라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면 바라는 것에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많이 바라면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는 것이기에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신세대의 취향에 어울릴 수 있다면 관념이 고정되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추측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통계화가 되면 쓸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다.

 

바라는 것 천 개 적기는 인사 입장에서 아무래도 평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를 떠올려보자. 포탈의 검색을 떠올려보자. 데이터가 쌓이면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다. 성격 검사를 받는 사람이 데이터 수집 프로그램에 직접 바라는 것을 적는다. 포탈의 검색은 오타가 나도 비슷한 검색어를 추천하여 검색을 원활하게 한다. 그와 같이 알고리즘으로 비슷한 바람을 집단으로 묶어 정리한다. 그렇게 정리된 바라는 것을 조합하여 각각의 특징으로 분류하고 특징을 조합하여 개성으로 분류하고 개성을 조합하여 유형을 만든다. 이런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실제 채용 후 채용자의 태도나 성과를 보며 검증한다. 검증된 자료를 바탕으로 고유한 해석체계를 갖춘다. 고유한 해석체계가 갖춰지면 성격 검사자가 데이터를 입력만 해도 대부분 빅데이터로 축적된 통계에 따라 비슷한 유형으로 정하거나 새로운 유형을 만들 것이다. 성격 검사자가 원하는 역할에 맞춰 바람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천 개쯤 쓰면 바람을 조작하기 어렵다. 전부 조작하기보다 어떤 경향만 맞추는 조작을 할 수도 있다. 해당 역할에 적합한 바람을 많이 쓰는 것으로 역할에 적합한 바람으로 위장할 수 있다. 그건 단순히 바람의 양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성격 검사자가 조작할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해석체계를 갖추면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자기실현적 예언에 따라 역할에 적합한 바람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본인의 바람으로 여기게 되어 정말 그런 바람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철학의 사유와 빅데이터을 통한 성격 검사는 아마 지금까지 없던 방식일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에는 시행착오가 많을 수 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이 분명 새롭고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한다.  

 

 

능력에 대해 알아보자. 능력이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역할에 필요한 능력은 역할마다 달라 어떤 일정한 기준으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농업과 상업에 필요한 능력이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전문적일수록 해당 분야의 경력자가 인사를 담당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힘의 종류가 다양하여 능력 또한 다양하다. 친화력은 인간관계에 관련된 역할에 적합할 것이고 창의력은 창작에 관련된 역할에 적합할 것이고 인내력은 참고 견뎌야 하는 역할에 적합할 것이다. 무력, 지력, 매력, 권력, 재력을 비롯해 암기력, 이해력, 성장력, 행동력, 사고력, 논리력, 판단력, 감각력, 생활력, 전투력, 학습력, 정신력, 적응력, 경쟁력, 통찰력, 수용력, 통제력, 통솔력, 관찰력, 추리력, 문장력, 정치력, 설득력 등 역할에 적합한 힘과 역할에 적합한 능력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면 인사 업무인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분야에 걸쳐 정리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다. 너무 길어진다. 핵심적인 부분만 정리해보겠다.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보겠다. 하나는 문제풀이능력이고 둘은 문제해결능력이다. 이 능력과 함께 분야마다 필요한 능력이 세세하게 다를 것이다.

 

첫째, 문제풀이능력. 문제풀이능력은 문제와 답이 있다. 배운 지식으로 문제를 푼다. 그렇기에 문제풀이능력이 높은 사람은 우수한 지식과 효율적인 지식 습득능력과 암기력과 이해력과 인내력을 가지고 있고 평범한 사고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와 답이 있기 때문에 문제에 다루는 사물에 관련된 관념은 답으로 고정된다. A는 B다라는 식으로 관념이 고정되게 된다. 영원진리에 가까운 수학과 과학은 진리기 때문에 관념이 고정되어도 대부분 성장할 수 있지만 진리조차 아닌 사상과 철학은 관념이 고정되면 성장할 수가 없다. 문제풀이능력으로 지식을 많이 쌓을수록 고정관념이 늘어난다. 고정관념이 많은 인간의 특징이 바로 신속 정확한 생각과 행동이다. 주로 문제와 답으로 고정된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효율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 그래서 문제풀이능력이 높은 사람은 프로세스가 정형화된 업무를 하는 역할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사회가 체계적으로 조직될수록 정형화된 업무가 많기 때문에 문제풀이능력자의 수요가 높다. 그러나 고정된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받아드리기가 어려워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를 할 때에는 부적합하다. 그게 적합한 능력은 문제해결능력이다. 둘째, 문제해결능력. 문제해결능력은 문제도 답도 없다. 어떤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한다. 문제와 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울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문제해결능력이 높은 사람은 우수한 사고와 깊고 넓은 사유와 관찰력과 통찰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고 평범한 암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와 답이 없기 때문에 관념이 고정되기가 어렵다. A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여 관념이 고정되지 않는다. 그 어떤 학문도 새로운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수학과 과학도 진리인 영역을 암기하고 이해하면 그 뒤에는 직접 문제를 만들고 답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이 필요해진다. 문제해결능력은 지식을 쌓아도 관념이 고정되지 않는다. 고정된 관념이 적은 인간의 특징이 바로 창의와 혼란이다. 고정되지 않은 관념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창의적이지만 비효율적인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래서 문제해결능력이 높은 사람은 프로세스가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를 하는 역할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사회가 새롭게 변화할수록 정형화되지 않은 업무가 많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자의 수요가 높다.

 

인사에서 문제풀이능력자가 필요하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하나, 문제와 답이 있는 시험을 보게 한다. 문제와 답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지식을 담은 문제를 풀어보게 한다. 둘, 역할에 관련된 매뉴얼을 지급하고 지식을 습득하게 한다. 지식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습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하게 한 뒤 문제와 답이 있는 시험을 보게 한다. 셋, 습득한 지식을 실제 실행하게 한다. 습득한 지식을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느냐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 업무를 지식에 담긴 절차대로 수행하는지 확인한다. 지식과 지식 습득능력과 지식 실행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제풀이능력자의 채용절차일 것이다.

 

인사에서 문제해결능력자가 필요하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하나, 어떤 주제를 주고 문제와 답이 없는 과제를 제출하게 한다.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역할에 관련된 주제를 주고 문제와 답이 없는 과제를 제출하게 한다. 둘, 문제해결이 필요한 주제와 관련된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확인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참신하고 흥미로운 해결방법을 제시하는지 확인한다. 셋, 제출이나 제시한 해결방법을 실제 실행하게 한다. 이론적으로 만들어진 해결방법이 실제로 적용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보게 한다. 문제해결방법이 담긴 과제와 문제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것과 문제해결방법의 실행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문제해결능력자의 채용절차일 것이다.

 

문제풀이능력과 문제해결능력을 정리하면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이다. 문제풀이능력은 지금까지의 지식을 암기하고 이해한 것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행할 수 있어야 하기에 현상유지에 적합하다. 문제해결능력은 처음부터 현상을 보고 직접 문제를 만들고 직접 답을 찾아 해결한 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어야 하기에 미래개척에 적합하다. 문제풀이능력은 보통 노동자에 적합하고 문제해결능력은 보통 창업자에게 적합하다. 한국은 주로 문제풀이능력을 가르쳐서 고학력 노동자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경제참여인구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을 기본으로 다양한 능력을 더하면 적절한 역할이 나온다. 현상유지에 친화력이 더해지면 매뉴얼에 따라 시민이나 고객을 응대하는 공무원이나 상담사에 적합할 것이다. 미래개척에 경쟁력을 더하면 시장경제에서 상품 판매 경쟁을 하는 상품을 개발하는 기획자에 적합할 것이다. 인사는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에 각각의 지식과 능력을 조합하여 그에 해당하는 역할을 정리하고 거기에 맞춰 채용을 하면 될 것이다. 구체적인 정리는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현상유지와 미래개척으로 기준이 확실하기에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인사 또한 낮은 기회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풀이능력은 보통 고학력이 우수하다. 그래서 높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그만큼의 이윤도 얻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문제해결능력은 학력과 크게 관계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낮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높은 이윤을 얻을 확률이 높다. 이런 차이를 염두에 두고 효율적인 인사를 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한다. 이력과 경력에 대해 잠시만 언급하겠다. 이력과 경력은 신용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은행이 개인정보에 신용을 새기면 대부분 개인의 이력과 경력의 신용이 보장되는 체계가 구축될 것이다.

 

 

평가에 손익을 부르고 손익이 감정을 일으킨다. 손익이 없는 평가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대충 평가한다. 대충 평가하니까 엉망이 된다. 이걸 생각해보면 인사는 손익과 직접적으로 연관될수록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하게 된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이러면 간단해진다. 인사에 의해 채용된 사람의 성과가 높아질수록 채용을 제안하거나 결정한 사람의 이익이 높아지면 된다. 채용된 사람의 성과가 낮아질수록 손해가 되면 신입에게 지나치게 높은 간섭을 하게 될 수 있으므로 그건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보너스 정도라도 충분히 적절한 평가를 하게 될 동기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혈액형을 운운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정말 싫다.

 

이러면 채용을 제안하거나 결정한 사람을 중심으로 일종의 파벌화가 진행될 수 있다. 파벌이 없는 집단이 드물기는 하지만 그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인사 제안이나 결정권자를 사원의 의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파벌이 생길 정도가 될 쯤에 인사권자가 바뀌는 것이다. 매번 인사권자가 바뀌면 커다란 파벌의 형성을 견제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정치의 임기제와 비슷할 것이다. 인사는 제안자와 결정자로 나뉠 수 있는데 인사 제안자는 능력으로 채용하고 인사 결정자는 사원과 주주의 투표로 선출하면 좋을 것이다. 이는 관료제와 의회의 결합과 비슷할 것이다.

 

대표나 주주는 이런 인사권자의 민주적 절차가 기업의 선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이런 방식을 부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거대한 국가의 쇠퇴는 커다란 파벌의 고착화로 인한 부패가 만들고 거대한 기업의 쇠퇴도 커다란 파벌의 고착화로 인한 부패가 만든다. 작은 기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수많은 주주가 있는 주식회사에서 이런 절차가 없이 파벌을 용인한다면 그 파벌의 고착화로 인해 큰 기업도 잘못된 결정을 저지를 수 있다. 자유주의 국가의 건전한 성장은 양방향 평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모든 이기주의는 본인의 의지로 행한 것이고 모든 이타주의는 타인의 의지로 행한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행한 것은 모든 것이 이기적이어야 한다. 타인을 돕는 행위를 했다고 하여 자유의지로 한 행위를 이타적이라 해버리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게 된다. 남을 도우려고 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남이 지게 되는 거라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의지로 행한 것은 모든 것이 이타적이어야 한다. 본인이 이익을 얻는 행위를 했다고 하여 자유의지가 아닌 행위를 이기적이라 해버리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버리게 된다.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니 그에 대한 책임도 나보고 지라고 할 수 있다. 책임 소재가 엉망이 되어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거나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악은 정당한 기준이나 절차 없이 과한 이익을 얻을 때 나타난다. 이런 혼란이 악을 유발할 수 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본인의 의지로 한 행동은 모두 이기적이고 타인의 의지로 한 행동은 모두 이타적이라 인식해야 바람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역할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설령 타인을 위하는 역할이라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면 이기적인 것이라 생각해야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을 수가 있다. 본인이 책임진다고 생각해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법이다.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역할이라면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진정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길 바라며 마친다.

 

 

 

---

 

제목을 정부와 인사로 한 것은 인사는 특정 기업을 정하기가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회계는 잘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다음 글은 회계입니다.

 

한국이 진정한 자유주의 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낡은 관념을 벗어 던지고 진정 한국을 위한 길을 걷길 바랍니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명 가치가 있는 사상입니다. 역할주의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상이라 생각합니다.  

 

인류 진화에 해가 되는 다툼은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우주 크기를 생각해봤을 때 지구에서 다른 지적 생명체가 어디 있냐고 묻는 것은 아마존 정글에 사는 원주민이 다른 인간은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마 전자가 더 우물 안 개구리겠지요. 인류는 다툴 시간이 없습니다. 특이점이 오면 로봇과 인공지능이 다 하기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지 않고 정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지구 안에 머물러 있을 때만 그런 겁니다. 우주로 진출하면 그 어떤 발전도 부족합니다. 부족해요. 인류가 불로불사로 진화하는 게 우주진출의 첫 단추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로 인류는 갈 길이 멀었어요. 이제 무의미한 전쟁은 그만하도록 하길 바랍니다.

 

자아의 시간이 망가졌음을 이해하자 몇 가지 현상이 해석이 되네요. 예전에 고기를 먹다 역한 느낌이 들어서 원인을 생각해보니 채식주의 관련 영상을 접한 것 때문인 것으로 추측했죠. 그리고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며 계속 고기를 먹으니 다시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다시 생각해보니까 원래 그렇게 고정된 관념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어요. 관념이 고정되지 않다 보니까 육식에 관념에 바뀌어 고기에 거부감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기억상실 이후 기억과 자아를 빠르게 되찾은 적이 있죠. 애초에 자아형성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걸 잃어버리고 되찾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고정된 것이 없었기에 기억과 자아를 되찾는 것이 빨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기초적인 관념이 고정되지 않다 보니 충동적인 우울증과 울렁거리는 혼란과 미칠 것 같은 감각을 느낄 때가 있네요.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이 만든 저출산. 미치겠습니다. 우연찮게 야한 어플리케이션 리뷰를 보았는데 야한 건 안 된다며 화를 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잘못된 성 관념으로 국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죽게 생겼네요. 돼지는 불결하다며 안 먹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데 성은 불결하다며 안 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멍청하게 자살하는 국가로 기록되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되었던 성을 죄악시하는 인간은 인류의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제는 벼랑 끝에 다다랐습니다. 미성년 핑계를 대면 관념도 이해 못하면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성을 알고 불행해졌다고 말하는 건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 때문에 불행의 원인을 성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미성년 임산부가 불행한 것은 임신했기 때문에 불행한 게 아니라 임신한 것을 비난하는 사회 때문에 불행한 겁니다. 실제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더 이상 낡은 관념을 진리라 여기면 안 됩니다. 마녀사냥도 혈액형 성격설도 정조관념도 돼지나 성을 죄악시하는 관념도 진리가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어째서 여성계는 별 거 아닌 피해의식으로 여성의 고귀한 역할을 무시하는 건가요. 출산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여성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런 고귀한 역할을 고작 여성에게 저출산의 책임을 묻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라는 이유로 출생으로 바꾸자고 하는 건 정말이지 황당하네요.

         

낙태나 아기살해 원인을 경제적 원인으로 말하는데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아기의 가치가 고생의 가치보다 낮다는 거죠. 경제적 어려움은 압니다. 그래도 좀 고생하면 먹여 살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아요. 본인이 고생하는 것보다 아기의 가치가 낮으니까, 아기에 대한 애정이 낮으니까 죽이는 겁니다. 본인 입으로 경제적 사정이라 말했다고 그걸 그대로 받아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1차원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깊이 있는 현상해석을 해야 합니다. 이건 심각한 애정결핍인 거예요.

댓글 : 2 개
와...글쓴이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의 분량이네요
어우야;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