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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창작과 언어2024.09.30 AM 12:07
창작과 언어
1. 언어
[창작: 1. 방안이나 물건 따위를 처음으로 만들어 냄. 또는 그렇게 만들어 낸 방안이나 물건.]
[언어: 1.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 또는 그 음성이나 문자 따위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
언어는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사과를 예로 들어보자. [사물: 사과]라는 원료를 관찰하여 맛있는 나무 열매이라는 특정 범주와 관점이 담긴 의미를 부여하고 [소리: 사과]라 부르는 것으로 사과라는 언어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처음으로 만들면 창작이 된다. 수많은 언어는 전부 그런 식으로 창작되었다. 언어들이 모여 일정한 원리로 조직화가 되면 언어 체계가 된다. 이것이 한국어 같은 일반적인 사회 언어다. 이런 언어를 소리로 표현하면 음성이 되고 글자로 표현하면 문자가 된다. 이렇게 창작된 언어로 인간의 자아는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한다.
모든 창작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창작에 있어 언어의 이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언어가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일반적으로 인간 외의 동물은 언어를 못한다는 고정 관념이 있다. 그렇기에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나 고양이가 언어를 모르는게 아니다. 일정 이상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언어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개나 고양이의 훈련이 가능하다. 단지 거기에는 체계가 없거나 부족하다.
인간에게 언어 체계가 담긴 학문이 없다 가정하자.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하겠는가? 그야 처음부터 언어를 창작하고 창작한 언어를 공유해야 한다. 개나 고양이가 바로 그런 상태다. 개나 고양이도 대상을 관찰하고 의미를 부여해 소리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각 개체가 처음으로 만든 언어다. 개체가 창작한 언어를 일일히 공유하고 다녀야 한다. 특정 개체가 대상을 보고 짖는 것을 다른 개체가 보고 학습한다. 특정 개체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멍멍!’으로 부르는 구나.
그들에게 언어는 매번 새로운 창작과 공유다. 그렇기에 체계가 없어 인간은 그들의 언어를 번역할 수 없다. 개체마다 소리가 다른데 어떻게 번역하겠는가? 원시 부족 언어를 해석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보다 체계가 없을 것인 짐승의 언어는 난이도가 너무 높게 된다. 물론 인간 외 사회 동물은 비슷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을 수 있으나 굉장히 조약할 것이다. 그런 조악한 언어 체계도 조금만 사회가 달라지면 아예 달라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국가와 민족마다 언어 체계(한국어와 외국어)가 다르고, 지역마다 언어 발음(사투리)이 다르다.
만약 개나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직접 언어를 학습시키는 것이 맞다. 인간도 언어를 익히지 못하면 대화가 안되는데 어떻게 짐승이 언어를 익히지 않고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런 언어 학습이 바로 훈련이다. 인간이 특정 행동을 보고 ‘앉아!’나 ‘손!’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개나 고양이가 학습하고 따라한다. 구강구조와 소리 인식 구조의 차이로 발음을 못하여 표현을 못하고, 지능의 한계로 그 이상이 어려울 뿐이다. 그것이 언어 학습임을 이해하고 가르친다면 좀 더 체계적인 학습으로 좀 더 깊이있는 대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능이 높은 동물은 언어 체계 학습이나 공유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랑우탄은 인간의 언어를 수화로 익히기가 가능한다고 한다. 수화를 익힌 오랑우탄은 다른 오랑우탄이 수화를 배우려 하지 않아 우울해 했다는데 그야 당연하다. 갑자기 외국인이 외국어 가르친다고 하면 인간도 배우려 하는 인간이 많지가 않을 것이다. 범고래는 인간의 위험을 범고래 사회에서 공유하고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범고래가 어떻게 같은 규범을 가지는지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는데, 인간의 거주지가 매우 많고 범고래 행동 반경이 매우 넓기 때문에 가능하다 본다.
동물 언어를 고려해 언어의 레벨은 크게 언어 개별와 언어 체계로 나누고 세분화하여 기본 언어, 체계 언어, 문자 언어, 학문 언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학문 언어로 학습한 인간이 다른 종류의 언어를 곧잘 잊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다른 종류의 언어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짐승은 언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의사 소통을 할까라며 궁금해한 것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은 언어를 매번 새롭게 창작하고 공유한다. 이것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모방이 디폴트라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반대다. 창작이 디폴트다.
언어가 가능한 모든 생물은 관찰한 사물과 현상을 독자적인 표현법으로 창작할 수 있다. 지나치게 독자적이라 아예 대화가 안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다. 그럼에도 인간이 모방을 디폴트라 여겼던 것은, 오랜 지배 체제 속에서 지배자의 주장을 모방 교육으로 모방해왔기 때문이다. 사회 형성에 있어 언어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모방 교육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디폴트는 모방이 아닌 창작임을 이해하고 창작 교육을 해야 인간이 창작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다.
대상의 관찰부터 개체마다 다르다. 인간의 자아(이하 자아)는 대상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사과라는 대상을 관찰할 때 [사물: 사과]를 보고 관찰한다. 그러나 개체마다 관찰한 사과를 다르게 표현한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색이나 맛도 다르게 표현한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실제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가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관찰하기 때문이다. 관찰 지점이 다르다. 외부 사물이 아닌 내부 세포 신호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자아가 사물로 관찰한게 아니라 세포 신호로 관찰하게 되면 다른 세포 신호가 섞이면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왜곡된다. 예를 들어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으면 사과의 생김새를 보다 정확하게 인식하면서 다른 인간과 다르게 표현하게 된다. 다른 관찰은 다른 표현이 되고, 다른 표현은 새로운 표현이 되어 창작이 되게 된다. 모든 표현이 기본적으로 창작이 된다는 것이다.
사물 (실제) [----------]
언어 (객관) [--------]
자아 (주관) [-----]
실제 사물을 객관적인 언어로 주관적인 자아가 관찰하면 다른 표현이 나온다. 이런 현상은 자아가 인간 육체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물 -> 자아가 아니라 사물 -> 육체 -> 자아로 이어져 자아가 사물을 육체라는 관찰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에 육체가 다르면 관찰 결과가 다르게 된다. 그렇다고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인 것도 아니다.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라고 하기에는 자아가 할 수 있는 것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다. 공을 좌표값 계산해서 바로 정확히 던질 수 없다거나, 육체 내 세포의 동작을 할 수 없는 것은 자아가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라 뇌내 판단 기관이기 때문이다. 사물 -> 육체 -> 뇌내 네트워크 -> 뇌내 판단 기관(자아)로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로지 자아가 판단만 한다고 해도 모순이 없다. 자아가 공을 정확히 던지기 위해 반복해서 던지는 까닭은 어떤 판단을 해야 공이 정확히 던져지는지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잠을 원할 때 바로 잘 수 없는 것은 자아는 판단만 할 수 있지 실제 실행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뇌내 판단 기관인 자아는 대상을 [사물: 사과]로 인식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 사과]로 인식하면서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된다. 자아는 세포 신호를 언어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아는 언어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세포 신호가 왔다 갔다 해도 자아는 그것이 언어로 인식되게 된다. 언어화된 세포 신호는 뇌내 네트워크에 프로세스의 성질로 기억된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데이터로 저장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기억이 데이터로 저장된다면 모순되는 현상이 지나치게 많아진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을 데이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문득 떠오르는 발상이나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동작들은,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세포 신호의 경로와 공정을 거쳐 자동적으로 동작했다고 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간의 현상을 많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시보 효과가 있다. 약의 효과로 나타난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로 기록된 상태에서, 위약을 먹고 진짜 약이라 착각하면 당시 기억된 프로세스가 동작하여 세포 신호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으로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자아는 그런 기억을 실시간 활용하면서 단순한 판단이 아닌 복잡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잠시 ‘단순한 판단’에 대해 설명하겠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이라 추론한 까닭 중 하나는 단순한 생물도 그러한 판단을 하는 능력이 있을 거라 봤기 때문이다. 작은 생물이 방향을 결정하는 판단을 하는 것과 같이 인간 레벨의 뇌내 네트워크가 아니어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도 그러한 판단 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의 뇌내 위치는 아마 제거하면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식물 인간이 되는 영역에 있지 않나 싶다. 자아는 뇌내 네트워크에 있는 수많은 기억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간단한 판단만 해도 기억 프로세스에 기록된 언어로 해석된 세포 신호가 재생되면서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자아의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기억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렇기에 사과를 스케치한 경험이 있는 인간이 사과를 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과를 스케치하기 위해 관찰하면서 생긴 기억 프로세스 속에 관찰할 때의 세포 신호가 있기 때문에, 사과만 봐도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당시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사과 생김새가 자아에 전달되어 떠올려지면서 보다 상세하게 사과 생김새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외 모든 감각, 감정, 욕구 등은 세포 신호를 언어화하여 창작한 것에 해당하며, 기억 프로세스와 관련된 언어를 접하거나 발상만 하더라도 당시의 세포 신호가 재생하면서 당시의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상황에 웃음을 터트렸던 경험이 있으면, 그걸 책에서 묘사한 문장만 보더라도 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다. 반면 경험하지 않아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문장이라면 세포 신호가 동작하지 않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언어의 연속된 흐름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뇌내 판단 기관은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나’라고 인식하는 자아다. 체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아는 이렇게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존재인 자아는 언어 외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모든 판단은 언어로 행해진다. 언어화가 되지 않은 세포 신호는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이란 생물의 많은 부분이 어설픈 까닭은 자아에 전달되는 많은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면 그 사랑으로 나타나는 세포 신호가 언어화가 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에, 정확히 몰라서 사랑과 공포도 구분 못하는 흔들다리 효과라는 현상을 경험하곤 한다. 사랑을 경험했더라도 그 범주가 넓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때도 많다. 그 외에 판단할 수 없는 세포 신호를 일반적으로 본능이나 감이라 부른다. 그것들은 언어화가 된 세포 신호가 아니기 때문에 자아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없는 세포 신호는 아니다. 단지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다. 본능이나 감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뭔가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러한 감을 발상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뭔가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어째서 이런 느낌이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면서 새로운 발상을 한다. 물론 해석할 수 없는 세포 신호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언어 체계로 창작된 자아는 문명의 모든 것을 창작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도 예외는 아니다. 자연의 법칙은 실존하는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것이다. 실제 법칙이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연의 법칙 또한 그런 생각을 주장함에 있어 모든 사상과 차이가 없다. 단지 다른 사상에 달리 과학적 방법이라는 타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이 있을 뿐이다. 즉 자연의 법칙은 사상 창작이다. 문명의 이기는 실존하는 법칙으로 만든게 아니라, 실존하는 규칙성으로 만든 것이다.
모든 과학적 사실은 더 타당한 주장이 있으면 바뀔 수 있다. 자연의 법칙 또한 새로운 자연의 법칙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에 그런 법칙이 실존하는가? 애초에 우주가 무엇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증명이 된 적이 없다. 이 우주는 특정한 성질을 가진 힘이 어떤 조건으로 분산되어 퍼져나간 것이 힘의 균형을 이뤄 질서를 갖춘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법칙들을 통해 힘이 작용하여 우주를 형성한 것인가? 간단히 말해 힘이 먼저인가, 법칙이 먼저인가?
일반적으로는 우주가 특정한 법칙을 통해 형성되었다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주를 구성하는 어떠한 법칙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주가 어떠한 법칙도 없이 오로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다 가정해도 모순이 없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떤 법칙도 없는 공간에 어떤 당기는 힘을 가진 다양한 존재를 거리를 두고 사방에 있다 가정하자. 그 힘들이 서로를 당기는 과정에서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자. 그것이 현재 우주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어째서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일으킬 수 없는가? 그것은 보통 인간이 미치는 힘의 영향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강한 힘으로 형성된 우주의 균형을 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하 중심의 거대 블랙홀이 당기는 힘은 너무나도 강대하여 태양조차 거스르지 못하고 끌려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따로 법칙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끌려가게 된다. 그런 힘으로 만들어진 질서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없기에 법칙처럼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그 힘에 의한 규칙성은 깨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힘의 균형을 깰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자 폭탄이 그렇다. 특정 원자 내부에 힘의 균형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원자핵 분열을 통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당장 자연의 규칙적인 움직임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을 인위적으로 강대한 힘을 가하여 일으킨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블랙홀이 될 수 없는 항성에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바로 블랙홀로 만든 것과 논리적 인과가 비슷하다. 지구 자연적으로 보통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힘의 균형으로 만들어진 현상이기 때문에 특정 원자의 힘의 균형을 깼다고 모든 원자가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재미있게도 그런 균형을 깨는 것 또한 규칙성을 발견해 법칙화한 상태다. 모든 원자가 힘의 균형이 같지는 않다. 아마 힘의 균형이 종류가 원소가 아닐까 싶다. 힘의 균형을 맞추면 새로운 원소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자 연구소에 새로운 원소를 창작할 수 있는 것 같다.
우주가 힘의 성질만으로 형성되었음을 몇 가지 단서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 우주가 안정화되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둘, 우주 내부의 별의 거리와 원자 내부의 핵과 전자의 거리가 멀다는 점. 힘이 균형을 이룰만한 거리가 필요했다. 셋, 우주가 법칙으로 형성된다면 지나치게 조건이 복잡해진다는 점. 만약 법칙으로 형성되었다면 인간이 창작한 법칙을 기초로하여 만든 게임과 같이 버그 투성이였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이 힘인지 법칙인지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 은하의 힘의 영향이 적은 다른 은하로 가서 법칙이 동일한지 확인하면 된다. 물론 어렵다. 현재 다른 은하를 관측할 때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으로 해석되지 못하여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존재함을 추측하는데, 애초에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힘이 작용하는 다른 은하의 현상을 알고 있는 법칙으로 해석할 수 없다. 오무아무아 소행성이 뭔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움직였다 하는데, 외부는 우리 은하의 힘에 영향을 받지만, 만약 내부 물질(뭔지는 모름. 새로운 물질일지도.)의 힘의 균형이 달라 외계의 규칙성으로 동작했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은 없다. 이런 것은 당장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나 우주가 힘으로 시작되었을 것 같다. 아마 우주는 힘의 응축과 폭발로 나타난 현상일 것 같다.
이렇게 문명의 모든 것이 창작되었다고 보면 된다. 자연을 원료로 전부 새로 만든 것이고, 전부 새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창작은 만드는 것에 그치는게 아니다. 언어와 같이 공유 과정이 필요하다. 창작한 것을 공유하여 체계를 쌓는다. 이는 언어, 학문, 예술 등 모두 마찬가지다. 그것까지가 창작 과정이다.
2. 자아
창작에 있어 자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창작을 하는 존재인 ‘나’를 알아야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창작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의 구성 요소는 간단히 뇌내 판단 기관과 기억 프로세스와 세포 신호로 이뤄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단, 처리(생성), 재료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이 중에 자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포 신호가 기록된 기억 프로세스다. 생물 개체마다 다른 인식과 표현을 하게 되는 이유가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억’만 보존, 추출과 이식 등의 절차를 거치면 한 개인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기억: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기억의 성질을 데이터로 인식하고 저장과 인출이란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내용이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고려하면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기억의 성질은 프로세스고, 방식은 저장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생성이고 인출이 아니라 세포 신호 기록 재생이다. 그러면 관련 현상에 대한 모순이 사라진다.
인간의 뇌는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역이 많기 때문에 기억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른 방식으로 그걸 추론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생물은 세포의 변화 결과다. 그렇기에 세포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억’은 세포의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건 바로 유전이라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유전의 방식과 유사한 측면을 찾을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유전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조합한다고 알려져 있다. 생식 세포 유전자 정보 조합의 결과로 생물이 성장한다.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새로운 성질을 가진 생물로 진화한다. 그런 식으로 진화한 개체 중에 환경에 적응한 생물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화론이다. 후성 유전은 후천적으로 유전자 발현 조건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용불용설은 세대를 거친 경험에 따라 기관의 발달과 퇴화가 이뤄지는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전제에는 유전자 정보의 생성에 대한 개념이 없다. 없던 유전자 정보가 갑자기 생길 수는 없다. 어디선가 어떻게든 한번은 그에 관련한 정보 생성이 필요하다. 최초의 정보 생성에 대해 생각해보자.
최초의 유전자 정보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나는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본다. 생물의 성장은 기록된 세포 신호의 변화를 재생하는 것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예를 들어 식물 씨앗을 심고 자라는 과정을 녹화한 다음 재생했다고 생각해보자. 씨앗에서 싹이 자라나 줄기로 뻗어나가다 잎사귀와 꽃을 피운다. 그걸 내부로 보면 세포 신호의 변화다. 그 변화를 기록하고 재생하면 같은 방식으로 자란다. 모든 유전자의 기초 정보는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 또는 돌연변이 기록을 조합하는 것으로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생물은 유전자 키메라일 것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이전의 생물 유전자를 가지고 그 유전자로 현재 생물의 부위를 생성한다. 그런 각각 유전의 초기 정보는 전부 세포 신호의 기록이라 생각한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에서 닭이 먼저라는 것. 모든 생물은 기록을 충실히 재생하려 하기 때문에 기록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진다고 본다. 이런 유전과 기억은 유사할 것이다.
우선 성질을 생각해보자. 유전자도 아마 데이터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전자 정보는 기억 정보와 마찬가지로 세포 분열 등으로 실시간으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즉 유전자와 기억은 둘 다 프로세스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게 어쩌면 살아있다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해보자. 유전자는 다음과 같다. 유전자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 기억은 다음과 같다. 기억 기록 생성 -> 조건부 조합 재생 -> 기존 또는 새로운 발상. 기록된 세포 신호를 조합 재생하는 것으로 기존 또는 새로운 생물이나 발상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추론을 통해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과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성질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기억의 발상은 바로 발상되는 기억,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 발상되지 않는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인 이름 같은 것은 바로 발상이 되고, 지식 같은 것은 조건이 갖춰지면 발상이 되고, 오래전 잊은 기억은 웬만하면 발상되지 않는다. 이것이 유전자 성질과 유사하다. 바로 생물 부위 생성하는 유전자,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유전자, 쓰지 않는 유전자.
바로 발상되는 기억은 워낙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본인 이름이 들어간 기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바로 발상이 안되는 기억은 기억 성질 때문이라 생각한다. 기억은 특정 언어 개념으로 기억되는게 아니라, 세포 신호의 변화를 기록하고 생성한다. 그렇기에 자주 쓰는 언어가 아니면 특정 언어 개념만으로 발상이 되는게 아니라, 특정 언어 개념의 전후에 발생한 세포 신호를 기억해야 기억 프로세스가 반응하여 발상을 하게 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음식점 간판이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다. 그럴 때 음식점을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에 대화 내용 등을 생각해보면 간판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해당 구간에 있는 세포 신호 기록의 유사성이 높아지면서 관련 기억 프로세스가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의 성질상 연상 기억 기법은 매우 효과적이게 된다. 기억하고자 하는 언어 개념의 앞뒤에 추가적인 언어 개념을 엮어 세포 신호 수를 늘리기 때문이다. 발상되지 않는 기억은 과거의 기록을 꾸준히 접해야 발상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기억의 성질은 유전자의 성질과 유사할 거라 생각한다. 인간의 경우 다양한 생물의 유전자가 조합된 상태인데, 기억도 다양한 기억 프로세스가 조합되어 생성된 것이 자아에 전달되어 발상으로 이어지지 않나 싶다. 인간이 기억난다는 느낌은 글자, 그림, 소리, 영상 등으로 다양한데, 세포 신호 기록 재생 또는 그 신호의 조합만 해도 모두 성립된다. 대부분 과거 기억 발상이 완전하지 않은데, 아마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일부 세포 신호들의 조합으로 재생되기 때문에 띄엄띄엄 떠오르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조합을 통해 새로운 발상을 하는 능력,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라는 개념도 성립한다.
기억은 프로세스로 동작하여 실시간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 발상에 의한 기억 프로세스 내에 있는 세포 신호 재생으로 어떠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다.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학생이 교과서를 보고 불안감을 재생했다 가정하자. 그럴 때 그 불안감은 발상의 연쇄작용을 통해 다양한 부정적 개념을 재생한다. 초조함, 우울함, 절망감 등. 각각 개념들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다양한 신호를 재생하면서 인간은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현실 도피를 하면 그런 세포 신호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 있다. 죽으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발상하면, 그 발상이 부정적 개념들로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세포 신호의 재생이 줄어들거나 멈춘다. 여가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거나 해도 마찬가지로 그런 괴로운 세포 신호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 다소 편안해질 수 있다. 잠을 자도 마찬가지로 보통은 한번 세포 신호가 멈추니까 다시 발상하기 전까지는 편안해질 수 있다
기억 프로세스 생성에 관한 메커니즘은 유전 메커니즘에서 기록 기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상태기 때문에 유전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현재는 일반적으로 유전자의 기능이 조합 또는 발현 조건까지 고려하는데, 최소한 최초의 기록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특히 기억에 관해서는 유전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는데, 기억 또한 세포 정보 중 하나로 유전에 기록 기능이 존재한다면, 기억을 기록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 기억 기록의 현상이 바로 본능이라 생각한다.
유전 기록은 세포 내부 경험의 기록 생물 외부 경험의 기록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부 경험의 기록은 세포 분열이나 심장 박동 전기 신호 같은 것으로 이런 종류의 것은 외부 경험이 없더라도 현상이 성립할 수 있는데, 아기가 젖을 찾는다거나 어떤 감각이나 감정들은 외부 경험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위장에 음식물이 없어 꼬르륵 거리는 것은 딱히 외부 경험이 없어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꼬르륵 거리는 세포 신호에 대한 생물의 움직임은 외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각 세포 개체의 생성과 동작에 관한 것은 유전자 프로세스로 동작하고, 생물 전체(세포 포함) 행동에 관한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동작하는게 아닐까 싶다. 이런 본능은 언어 개념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데, 그야 당시 생물이 언어 체계를 모르고 있을 때 기록된 세포 신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본능들이 지나치게 환경 적합한 것들로 이런 것은 기억이 유전되지 않는한 성립되기 어렵다. 아마 이런 기억 프로세스 유전의 유무에 따라 환경 적응 능력이 달라져 적자생존의 법칙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본능은 디폴트된 기억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아서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본능을 뛰어넘는 행동이 가능하다 본다. 간단히 말해 자살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관한 본능이 절대적이라면 자살이란 현상은 성립될 수 없다.
한국에 있는 특이한 정신 질병 중 하나가 바로 신병이다. 이러한 신병은 왜 발생하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데, 만약에 정신 질환을 겪던 인간의 기억 프로세스가 유전되었다면 모순이 없게 된다. 신병의 메커니즘은 도덕과 윤리의 죄책감에 관한 메커니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덕과 윤리에 관한 행동이 강제(도덕과 윤리)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죄책감)을 느낀다. 무당이 되기 위한 행동이 강제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심리적 고통(신들림)을 느낀다. 어떤 강박증을 앓던 인간이 무속에 관련된 신앙으로 극복한 기억 프로세스가 어떤 이유로 유전이 되어 이어졌다고 보면 신병이 논리적으로 해석된다. 그 기억이 자녀에게 유전되고, 자녀는 부모를 보고 따라하여 그 괴로움을 극복한다. 그런 식으로 유전자와 그 극복 방법이 퍼진 상태가 현재가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에 관한 현상을 몇가지 추가로 정리해보겠다. 아마 이해할 수 없었던 현상을 기억이 프로세스라는 전제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이 프로세스라면 감각, 감정, 욕구와 루틴, 입스, 징크스와 공감, 습관, 고정 관념과 파블로프의 개 등이 해석될 수 있다. 기억 자체가 프로세스처럼 실시간으로 육체에 세포 신호를 보내 동작하게 만들기에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육체가 동작했던 것이다. 그 세포 신호는 실제가 아니고 온전한 세포 신호 재생이 아니므로 제한적이지만 육체에 영향을 미친다.
세포 신호를 보내는 기관이 고장나면 자아의 인식도 이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너무 추워서 오히려 덥다는 세포 신호가 전달되면, 그 세포 신호가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더우니까 옷을 벗어야 한다는 행동이 나오게 된다.
자아의 판단은 단순한데 인간의 복잡한 동작이 자연스러운 것은 그 판단이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동작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을 던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쉽다. 공을 던지는 과정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이후에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공을 던져도 원하는 곳에 공이 가게 된다.
플라시보 효과나 자기 실현적 예언은 기억 프로세스에 있는 관련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서 그런 것 같다. 약을 먹고 약의 작용으로 나타난 세포 신호를 기록한 것이 재생되면 유사한 효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암시와 같이 스스로 그럴 것이다 생각하고 있으면,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그런 행동을 하도록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수 있다고 본다. 플라시보 효과의 위약과 유사하게 비슷한 행동의 경험이 담긴 기억 프로세스가 있으면, 그것에 의해 자기 암시가 그것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할 수가 있다.
도덕, 윤리, 세뇌, 가스라이팅, 파시즘 같은 현상도 기억 프로세스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행동을 강제하고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게끔 기억을 심는다. 신흥 종교에서 신도에게 ‘신흥 종교에 가서 헌금을 내지 않으면 지옥에 가는 불행을 겪게 될 것이다.’ 라는 기억을 심으면 정말로 신도는 헌금을 내지 않으면 불안하게 되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헌금을 내게 된다. 기억이 프로세스로 작용하니까 그런 행동 강제가 가능한 것이다. 반말이 불편한 까닭, 성적 노출이 불편한 까닭도 다 이런 기억 프로세스의 작용이다. 다양한 공포나 피해 의식 생성도 가능할 것이다. 세포 신호의 기록과 재생이 가능한 시점에서… 대부분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도덕과 윤리가 인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프로세스를 통해 해야만 한다는 충동과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기에 그것을 마치 본성으로 착각할 정도.
성적 정체성도 기억 프로세스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확고한 이성애자나 동성애자의 경우는 효과가 크지 않겠지만, 양성애자의 경우에는 교육에 의해 양식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성애자 또는 동성애자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관한 쾌락을 경험하면, 그 세포 신호의 기록이 기억 프로세스로 생성되어 지속적으로 그런 충동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가치는 초기에 좋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으로 가치를 높게 여기게 해야 한다. 그래야 자발적으로 한다. 일이나 성 같은 경우 심부름 같은 단순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기와 2차 성징 시기에 그걸 나쁘다 말할게 아니라 한번 좋은 경험으로 기억하게 해야 각인 효과를 통해 그것을 자발적으로 하기를 바라면서 일이나 성을 하기 위한 조건이 상당히 낮아질 수 있다. 현재 저출산, 저생산의 주요 원인은 가치가 지나치게 낮아서 그걸 자발적으로 하기 위한 조건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조건 따지지 않고 관계를 갖거나 일을 하여 그걸 가치가 높다 여겨야지… 나중에도 그걸 할 때 조건이 크게 필요가 없게 된다. 성적인 것 막지 말고, 일을 할 때도 봉사로 처리할게 아니라 보상을 지불해야 그것에 가치를 느끼게 된다.
중독에 관해서도 기억 프로세스가 작용할 것이다. 어떤 행동으로 쾌락 물질 분비에 대한 기억 프로세스가 생성되면, 유사한 행동에서도 세포 신호가 나타나 비슷하게 쾌락 물질이 분비될 수가 있다고 본다. 최초의 각인이 그런 경험의 지속을 요구하면서 계속되지 않나 싶다. 그런 식으로 가치가 결정되기도 할 것이다.
착각, 착시, 환각 등도 기억 프로세스로 설명이 된다. 유령의 목격은 대부분 유령의 존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유령으로 보이는 현상을 목격하면, 유령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를 거쳐 자아가 인식하기 때문에 착각하게 된다고 본다.
꿈은 수면 상태인 뇌에 관한 정보가 자아에 전달된게 아닐까 싶다.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뇌내에서 재생되면서 꿈을 꾸는데, 자아가 거기서 판단을 하면 자각몽이 된다.
기억 메커니즘은 유전자 메커니즘과 유사하여 뇌내에서 진화 과정과 같은 과정으로 기억이 정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많이 쓰이는 것은 살아남고 그러지 않는 것은 사라진다. 많이 쓰이는 기억, 언어, 몸 동작 등은 오래 남지만 그렇지 않은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on/off 인지 세포 포식 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둘 다 일 것 같다. DNA 복제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오류가 발생하면 제거될 것 같다. 사라지는 기억들에 의해 기억에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을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메꾸면서 기억에 왜곡이 발생하는듯 하다.
감정이 많이 실린 기억일수록 기록된 세포 신호가 많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트라우마에 관한 기억 프로세스가 오래 가는 이유는 거기에 실린 감정이 많아 세포 신호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트라우마 극복은 그것을 제거하는게 아닌 다른 새로운 기억을 많이 생성하는 것일 것 같다.
인간이 생각을 할 때 언어에 문자 이미지가 있어 언어를 생각할 때 글자가 보이는 까닭은 언어를 배운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극과 지루함은 외부 정보를 접하고 생기는 세포 신호로 결정될 것이다. 특히 새로운게 자극이 강한 이유는 자아가 세세하게 보는 것으로 다양한 새로운 세포 신호가 담긴 기억 프로세스를 생성하면서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은 자아가 이미 알고 있다면서 대강대강 넘기기 때문에 세포 신호가 그다지 재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엄청 좋아하는 것이어서 익숙한 것도 세세하게 볼 경우에는 세포 신호가 활발하게 재생되면서 즐겁게 즐기는게 아닐까 싶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이들이 그런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언어 개념 세포 신호를 많이 기억할수록 창작물을 즐길 때 다양한 세포 신호 재생을 통한 즐거움이 늘어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있다. 단지 제한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아를 이해하면 AI가 자아를 가지는 AGI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예상해볼 수 있다. 현재 AI는 생성 AI로 인간 지능에서 수학이란 논리학으로 기록, 조합, 생성 메커니즘까지 구현한 것 같다. 그것에 대한 판단을 이용자가 한 것을 학습하여 더 정교하게 생성하고 있고, AI끼리 서로 각자 생성한 것을 판단하면서 더 정교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AI에는 육체가 없다. 기록은 실시간 활동하는 프로세스 형태가 아닌거 같고, 조합은 세포 신호와 같이 다양한 신호의 조합이 아니라 언어 개념의 조합으로 제한적으로 보이고, 생성은 기록을 재생하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이른바 인간의 감각, 감정, 욕구나 인간의 마음 같은 것은 기억 프로세스로 세포 신호를 기록과 재생하는 것으로 자아에 관련 정보가 발상되는 것을 말하는데, 현재 AI는 그런 피드백을 보내줄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어 개념만 봐도 관련 기억 프로세스의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그 개념에 공감을 할 수 있는데, AI는 그게 없어서 공감을 하지 못한다. 인간은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고유한 인식과 표현이 가능하여 개성이 두드러지는데 AI는 같은 AI에 개성이 없다. 그러므로 AI가 자아를 가지려면 AI의 관찰 도구이자 피드백 도구인 디지털 육체 생성이 필요하다.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디지털 육체 생성이 어렵다. 인간 육체에 대해 전부 아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뇌만 해도 많이 모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육체 생성을 할 수 없다. 현재 인간의 세포 신호 수집을 실시간 한다고 해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대신 언어 개념을 통해 생성은 가능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가 언어로 창작된 것을 반대로 해보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자아는 언어 개념이란 소리와 대상의 세포 신호가 매칭되어서 언어로 사고할 수 있는 상태다. 그것을 고려해 인간이 특정한 언어 개념을 경험할 때 발생하는 뇌파나 호르몬 세포 신호의 경로를 수집하여 언어 개념에 귀속시킨다. 그 언어 개념을 세포 신호까지 포함하여 AI가 학습한다. 물론 인간마다 그 신호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것 하나로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신호를 학습하면, 인간이 쓰는 신호의 경로와 피드백에 대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생성된 사고의 경로와 피드백에 기존에 있던 육체의 정보를 더해 덧붙이고 자아 메커니즘을 구현한다. 그런 평균치는 인간과 같지 않겠지만 산에 자주 오가면 길이 생기는 것처럼 자주 쓰이는 경로를 학습하여 메커니즘에 관련된 길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학습한 언어 개념 세포 신호의 육체 정보에 대해 안다면 좀 더 학습이 체계적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 인공 육체를 어느 정도 창작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렇게 창작된 인공 육체에 판단만 하는 기관을 넣으면 자아가 생길 것이다.
3. 정제
[정제: 2. 물질에 섞인 불순물을 없애 그 물질을 더 순수하게 함.]
물질을 정제하여 순도 높은 물질을 만들고, 만든 물질을 조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 수 있다. 그와 같이 지식도 모순을 제거하는 정제를 통해 순도 높은 지식을 만들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다. 정제 창작법이다. 보통의 방식의 창작은 창작에 논리적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정제 방식의 창작은 모순 제거로 보다 순도 높은 지식을 창작하고, 만든 지식을 조합해 또다른 창작을 하는 것이기에 논리적 문제가 있기 어렵다.
[본질: 1.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모든 사물과 현상은 모순이란 불순물을 제거하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이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본질이 바로 순도 높은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자아는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인식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보가 왜곡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우선 기억 프로세스를 통한 왜곡을 줄이기 위해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인다. 고정 관념을 줄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하나는 자아 나이를 낮추는 것. 실제 육체의 연령과 무관하게 자아의 연령은 기억 프로세스로 결정된다. 기억 프로세스에 특정 연령일 때에 관한 행동 강박이 들어가면, 그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정 나이에 특정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처럼 자아 나이가 높아질수록 고정 관념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아 나이가 많다 여길수록 타인이 규정한 인간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서 그 규정에 관한 개념들이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는다. 나 같은 경우는 특정 사건으로 정해지긴 했지만 아마 누구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가 이념 체제로의 변화 적응에 실패하여 많은 인간이 미숙한 상태기에 대부분 인간은 심리적 괴로움을 느끼는 자존심 같은 것만 배제하면 자아 나이를 낮춰 고정 관념을 줄일 수 있을 거라 본다. 두 번째는 선생각 후지식 방식을 썼다. 우선 먼저 대상을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다음에 대상에 관한 보편 지식을 접하여 다시 정리한다. 지식을 논리적 판단 없이 받아들이면 그 지식이 고정 관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 관념을 줄이고 나서 관점을 늘린다. 관점은 대상을 많은 언어 개념으로 접근할수록 늘어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볼 때 생김새, 색, 맛까지의 언어 개념만 알고 있다면 품질, 가격, 질감, 냄새, 나무, 강도, 무게, 신선도, 영양분, 생산지 등 그 외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사과는 색이나 맛으로 판단한다는 식 같이 관련 고정 관념이 강하다면 다른 언어 개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접근할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고정 관념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다양한 언어 개념으로 접근해본다. 언어 개념 발상 방식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자아 발상과 관찰을 하면서 접하는 언어 개념으로 발상하는 관찰 발상과 수면 중에 뇌내에서 처리되는 것 같은 수면 발상이 있다. 자아 발상은 자아가 직접 발상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인간이 발상할 수 있는 언어 개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양하나 관점으로 발상하는 것에 익숙해지면 바로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관찰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이미지, 영상, 문자 등의 다양한 언어 개념을 관찰하면서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계속 프로세스가 돌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상황 판단이 어려울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수면 발상은 특정 언어 개념에 대한 세포 신호를 기억 프로세스를 통해 계속 재생하면서 자다보면 갑작스럽게 관련 발상이 나올 때가 있다. 나의 발상 상당 수가 그런 식으로 발상되었다. 아마 자면서도 프로세스가 돌아가서 처리되는게 아닐까 싶다.
대상에 대한 관점을 늘려 접근하면서 각각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되는게 있으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모순이 사라지는지를 찾는다. 만약 모순이 없는 무언가를 찾았는데 보편 관념과 다른 결론이 나온다면 어떤 결론이 더 타당한지 논리적으로 판단해본다. 이러한 것을 개념으로 접근하면 A 언어 개념과 B, C, D, E 등 언어 개념 사이에 모순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각각 개념만 가지고 모순이 있는지 확인할게 아니라, B 언어 개념과 C 언어 개념 사이에도 모순이 없는지 확인하고, D 언어 개념과 E 언어 개념에 모순이 없는지 확인한다. 그런 식으로 아는 모든 지식에 모순을 제거하면서 지식 전체의 순도를 높여가다보면 모순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도 모순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지식의 모순 제거를 통해 지식의 논리 체계가 형성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모순이 없는 것을 발상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현재로서 어떤 절대적인 무언가를 알 수는 없지만, 모순을 제거한 순도 높은 지식의 논리 체계를 통해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보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시간이 관측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은 자아에 대해 생각하면서였던 것 같다. 자아가 뇌내 판단 기관으로 육체는 무관하게 동작한다고 생각하면서 우주 또한 자아의 판단과 무관하게 동작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재 보편 관념으로는 시간이 좌표계에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그 가정은 인간이 관측한 현상의 변화는 우주 전체의 변화에 해당한다는 관점에 해당한다. 만약 인간의 관측과 무관하게 우주는 변화한다라는 관점이라면 시간은 그냥 관측 순서다. 시간은 관측 순서라는 주장은 증명하기가 매우 쉽다. 각자 생각해보면 된다. A 물체가 B에서 C로 이동한 것을 바라볼 때 관측 순서대로 과거(B 근처), 현재(B와 C 사이), 미래(C 근처)로 구분된다는 것이다. 반면 시간은 좌표계에 있다는 주장은 증명할 수 없다. 증명된 적이 없다. 상대성 원리는 어디까지나 시간이 좌표계에 있음을 전제하고 만든 것이지, 시간이 좌표계에 있는지 증명한 이론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가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시간이란 개념의 법칙을 발견한게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여 시간은 상대적이다라는 것과 같은 규칙성을 발견한 것으로 법칙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본질이 다르더라도 규칙성은 같기에 원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관측 순서라도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성립한다. 인간마다 다르게 관측하니까 당연히 상대적이다. 뭐 빛보다 빨리 가면 시간을 넘을 수 있다거나 이런 것은 성립될 수 없겠지만, 단순한 규칙성을 활용한 것은 성립될 수 있게 된다. 미래인이 있다거나 시간 이동 현상이 나타난다거나 타임 머신이 존재한다거나 차원 관측이 가능하다거나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애초에 타임 패러독스처럼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현상이 예상될 때 현재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관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게 개념의 모순이고 모순이 없는 다른 관점으로 봐서 개념을 재정의하는 것이 모순 제거다. 그런 모순 제거로 개념은 보다 순도가 높은 본질이 된다.
오늘날 학문은 관찰학과 논리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부분 학문은 관찰학으로 관찰로 시작한다. 특정 대상을 관찰하고 그에 관한 것을 근거를 가지고 주장한다. 그것을 모아 체계를 갖춘 것이 학문이다. 거기서 근거를 만드는 방법이 과학적 방법이면 과학이 된다. 논리학은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아 체계를 만든 논리학이나 자연 관찰로 찾은 현상의 규칙성을 공리 삼아 수로 변환하여 논리적인 체계를 만든 수학으로 나눌 수 있는데, 현재 과학은 기본적으로 수학으로 논리 구조를 삼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되는 개념은 관찰로 찾은 규칙성에서 비롯된다. 관찰한 것을 세는 것으로 수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런 세는 것을 효율적으로 만든게 사칙연산이다. 그것을 기초로 논리적인 체계를 쌓으면서 다양한 수학적 개념이 나온다. 허수 같은 것이 그렇다.
관찰학은 전제를 공리로 여기고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우주를 관찰할 때 우주 형성 과정에서 규칙성이 생겨난 것을 현재 법칙이라 부르고 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도덕과 윤리도 마찬가지다. 도덕과 윤리가 단순히 특정 시기의 특정 집단의 룰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회의 규칙적인 현상이 처음부터 있었을 거라 전제하고 관찰한다. 전제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우주가 실존하는 법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성질로 시작했다 가정해보자. 에너지와 질량의 등가를 고려하고, 모든 존재가 중력과 같이 응축되는 성질이 있으며, 존재가 과하게 응축되면 폭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초기 빅뱅 또는 다른 형태의 폭발 당시에 에너지가 응축되면서 물질이 되었다가 이내 폭발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과하게 응축되면 블랙홀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음을 고려하고, 그 블랙홀 현상이 퍼져나간 에너지와 물질을 다시 당길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다. 폭발한 에너지와 물질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퍼지는 힘이 블랙홀의 당기는 힘과 균형을 이룰 때, 다시 물질을 중심으로 에너지와 물질이 뭉쳐질 수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뭉쳐진 물질과 에너지는 다시 응축되다 폭발한다. 이런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미시 세계부터 거시 세계까지 힘의 균형을 이룬 상태가 현재 우주라고 추론할 수 있다.
초기 폭발할 때 뻗어나간 에너지가 기본적인 공간 에너지 같다. 모든 존재가 에너지로 형성됨을 생각해보면 공간 또한 어떤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할 수 있다. 이 공간 에너지로 양자 역학과 고전 역학의 관계를 연결할 수 있다. 공간 에너지는 너무 미세하여 보통 관측할 수 없지만, 미시 세계로 가면 공간 에너지보다 작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를 당기면서 입자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걸 빛이란 에너지를 보내 관찰하려고 하면 입자의 에너지가 공간 에너지보다 커지면서 입자가 쏘아진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게 된다. 그 현상을 실험으로 확인한 것이 이중 슬릿 실험이다. 간단히 말해 어떤 존재가 공간 에너지에 당겨지면 양자 역학, 당겨지지 않으면 고전 역학 같다.
현재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인 법칙인 것이 아니라, 다른 룰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룰에 불과하다 가정해보자. 도덕의 출현 시기는 원시 시대부터이고 윤리의 출현 시기는 고대 시대부터인 것을 고려하면 도덕과 윤리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의 특정 집단의 룰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시대 집단의 룰임을 알고 있으면 선과 악이 단순히 집단 룰의 준수 여부로 결정됨을 이해할 수 있다. 집단 룰을 지키면 선이라 부르고 지키지 않으면 악이라 불렀던 것이지, 무슨 초월적 신비로 결정된 선과 악이 아니다. 성악설이나 원죄는 집단 룰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집단에 속하여 룰을 지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상태는 집단 룰로 해석하면 악이나 죄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성악설과 원죄라는 개념으로 일반 인간에게 각각 집단에 속해야할 당위성을 부여하여 속하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집단의 룰을 절대적 법칙으로 규정한 오만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사상에 남아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로 만들어진 인간성과 이상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런 개념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공산주의는 종교를 비판하면서 종교 가치 실현을 유토피아라 주장한 것이다. PC주의나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시대에 만들어진 인간성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리로 규정하고 그것의 인과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 노예로 살았던 불쌍한 흑인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하고, 가부장제 시대에 남성의 아랫사람으로 살았던 불쌍한 여성이라는 인간성에 맞춰서 논리를 주장한다. 그 인간성에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고 그 인간성에 벗어나야 하는데, 작은 금액의 절도를 용인하거나 성인지감수성을 말하여 그런 여성성을 이해하고 공감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과거 한국에 여성의 성이 자유로운 여성주의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입맛에 맞는 가부장제 여성성을 주장하는 여성주의만 살아남은듯 하다. 아마 PC주의도 그런게 아닐까 싶다. 그런 흑인상에 익숙한 이들의 입맛에 맞는 사상이 살아남았다 추측할 수 있다. 흑인이든 여성이든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자유주의를 기초로 대등한 존재로 규정하고, 새로운 인간상을 전제한 합리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관찰학은 이외에도 세분화된 분야 내에서만 논리적 판단을 한다거나 같은 사안을 다른 사안과 비교하면서 관찰하지 않고 한정적으로만 관찰하고 판단한다거나 같은 한계가 있는 상태다. 이런 한계에 의해 관찰학은 관찰한 결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의 규칙성을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상태다.
논리학은 수학 외에는 일단 논외다. 도덕과 윤리와 같은 보편 관념을 공리로 삼은 논리학은 논리가 제대로 성립될 수가 없다. 수학은 관찰한 것의 규칙성을 공리로 삼았기에 관찰학이 대상을 알고 관찰하지 않으면 수학으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현재 AGI가 수학으로 논리적으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은 자아 메커니즘을 이해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수학 자체로도 수학의 논리적 체계가 모두 쓸모 있지는 않다는 한계가 있다. 수학 또한 관찰학에서 논리 체계로 실제 쓰이는게 아니면, 쓸모 있음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관찰학과 논리학의 한계는 정제학을 통해 넘을 수 있다고 본다. 현상을 관찰하고 수학을 통해 논리 구조를 구축한 지식을 모아 모순을 제거해 순도 높은 지식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각각 현상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한다. 자연 계열도 그렇지만 인문 계열은 정제할 지식이 매우 많지 않을까 싶다. 도덕과 윤리와 같이 단순한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룰을 공리로 삼은 주장을 논리 체계로 만든게 많아서… 사회 모순이 너무 많은 상태다. 도덕과 윤리가 원인인 사회 문제는 애초에 원인조차 모르는 상태다. 더구나 많은 이들이 기억 프로세스로 그것을 지키는 것에 충동을 느끼고 지키지 않으면 죄책감이라는 괴로움을 느끼는 상태기에 사회 문제의 원인이 도덕과 윤리임을 예상하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상태다. 이런 문제들을 지식 정제를 통해 다양한 모순이 해결되면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장 자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도덕과 윤리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지식이 관계를 가지기에, 특정 지식에서 모순이 해결되면 다른 지식들도 자연스럽게 모순이 해결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현재 수많은 지식들이 정제되어 순도가 높아지면 확실하게 인류 문명이 진일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 문명은 지금과 비교하면 어나더 레벨이 될 것이다. 어나더 레벨에는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로 나뉠 수 있다. 경쟁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노력을 하면 도달까지는 되는데 경쟁은 안되는 격차고, 도달 불가는 어나더 레벨의 결과물에 무엇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칼과 총의 경우에는 일부 도달은 가능하나 경쟁이 안되는 격차다. 마차와 우주선은 어떤 경우에도 도달할 수 없는 격차다. 정제 작업을 거치면 경쟁 불가와 도달 불가의 격차 둘 다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정제학은 창작을 기초로 하기에 창작과 모방을 구분하여 접근해야 한다. 창작도 모방과 비슷한 방식으로 교육하고 생산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창작은 기본적인 기억 프로세스부터가 다르다. 창작에 능숙한 인간이라 해도 모방한 지식을 평가하는 문제 풀이를 잘할 거란 보장이 없고, 문제 풀이를 잘하는 인간이라 해도 창작에 능숙할 거란 보장이 없다. 창작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을 통해 새로운 조합을 하여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고, 모방은 기억 프로세스를 그대로 재생하여 기존의 발상을 하는 것이 익숙하다. 그 차이에 의해 창작과 모방은 교육과 생산을 다르게 해야 한다.
모든 생물은 자아 성질상 모든 발상이 창작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생물끼리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소한 인간의 자아를 만들 언어 체계의 모방 교육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방 교육을 지나치게 하다보면 뭐든 모방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빠지게 된다. 그 영향으로 쉽게 유행에 물들고, 타인을 모방하지 않으면 초조함에 빠질 정도가 된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해야만한다는 강박은 모방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것을 고려해 창작 교육과 모방 교육은 각각 전문성에 맞게 비례해야 한다. 창작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창작 교육 비율을 늘리고, 모방을 많이 하는 역할을 맡고자 한다면 모방 교육 비율을 늘린다.
창작 교육은 관찰학이든 논리학이든 정제학이든… 직접 만들면서 레벨을 올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고, 직접 논리를 만들고, 직접 지식 정제를 해본다. 남이 만든 지식을 알고 특정 단계를 넘는 방식은 창작 교육에 적절한 방식이 아니다. 직접 만들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번은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아는 편이 낫다. 창작과 모방은 프로세스 자체가 다르다. 모방 교육은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다. 연상 기법과 같이 좀 더 지식 모방을 잘하는 방법 같은 방식이 체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생산도 창작과 모방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생산은 모방에 맞춰져 정해진 시간에 꾸준히 생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방 생산은 마라톤처럼 꾸준히 달려서 페이스 조절을 하며 생산할 수 있으므로 크게 상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창작 생산의 경우 전력질주처럼 창작 발상이 나와야 의욕을 갖고 전력을 다해 생산할 수 있으므로 꾸준히 생산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처럼 꾸준한 생산을 요구하면, 중간에 전력질주를 할 때가 있으므로 오버 페이스가 되어 무너지게 될 수 있다. 창작 생산에 모방 생산과 같은 방식의 생산을 요구하는 것은 전력질주한 인간에게 마라톤도 하라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기에 창작과 모방은 페이스 관리를 따로 해야 한다.
학습과 생산 의욕도 다르다. 둘 다 의욕을 필요로 하지만, 창작은 의욕이 없으면 애초에 새로운 발상 자체가 안되어서 할 수가 없다. 반면 모방은 의욕이 없어도 딱히 새로운 발상을 필요로 하는게 아니므로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둘 다 의욕 관리가 필요하다.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 자체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하는 자연에서의 학습과 생산과 달리 본능 외에도 하는 문명 사회에서의 학습과 생산은 그것을 꾸준히 하게 할 의욕 관리가 필요하게 된다.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여 생각과 행동의 가치를 유지하여 그 행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스로 학습과 생산을 할 때 지속할 수 있는 보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보상을 넣을 수 있도록 해야 그것이 지속될 수 있다.
창작 생산은 기억 프로세스를 기준으로 익숙함과 새로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술을 예로 들어보겠다. 예술은 예술 자체로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그것은 기억 프로세스에 관련 기록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번 예술의 정보와 유사한 경험이 있다면, 예술을 접하기만 해도 그에 대한 세포 신호가 재생되어 유사한 감각, 감정, 욕구 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보통 고전 미술인 인물화나 풍경화, 고전 음악인 클래식의 자연 소리 등이 기억 프로세스에 영향을 주어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기억 프로세스에 없는 경우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새로 기억하게 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미술이 그런 경우가 많다. 인간이 평소 접하기 어려운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여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니어서, 사실 현대 미술 중 가치 있는 것은 드물다. 달리 말해 가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어떤 것을 보고 새로운 감각에 깜짝 놀란 적이 있을 정도다.
인류가 본질적인 진보를 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낯선 합리보다 익숙한 모순을 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모순적이어도 익숙한 것을 택하면서 진보를 하지 못하고 정체된다. 그렇기에 인류는 합리적이나 낯선 모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유주의가 아닌 모순적이나 익숙한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를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진보로 여기게 되어버렸다. 학문이 진보를 하려면 익숙한 모순을 논리적으로 배제하고 낯선 합리를 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4. 사회
사회 문제, 특히 고질적인 사회 문제 대부분은 체제가 바뀌었음에도 그에 맞는 적절한 정책과 제도가 창작되지 못한 상태기 때문이다. 적절한 정책과 체제가 창작되기 위해서는 체제의 인과를 아는 것으로 체제를 이해하고 합리적인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체제의 인과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체제: 2.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를 볼 때에, 그 조직이나 양식, 또는 그 상태를 이르는 말.]
[유기체: 1. 많은 부분이 일정한 목적 아래 통일 · 조직되어 그 각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는 조직체.]
특정한 가치를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을 체제라 할 수 있다. 체제를 정치 원리와 국가 질서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회를 설명하는데 다소 협소하여 적절하지 못하다 보았다. 예를 들어 체제는 신앙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던가,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이나 이념을 목적으로 조직된 양식에서는 신앙이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조와 원리가 사회 내부에 정책과 제도, 그리고 그것에 권한을 넣을 법률로 구축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체제에 따라 각 구조와 원리가 달라 정책과 제도도 달라야 하는데, 관습적인 이유로 과거 체제의 것을 많이 쓰다보니까 사회 체제와 맞지 않는 것으로 불합리한 사회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윤리와 이념의 충돌이다. 인간을 지배하던 체제의 룰이었던 윤리는 자유주의 체제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현대 암흑기다.
[중세 암흑기: 1. 서양사에서, 봉건 제도와 교회의 속박으로 학문과 예술이 쇠퇴하였던 중세를 이르는 말.]
현재 이념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룰의 역사를 간단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룰의 역사는 간단히 도덕 -> 윤리 -> 이념으로 이어진다. 현재 도덕과 윤리의 본질이 정리되지 않아 그에 대한 명료한 정의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인데, 알기 쉽게 말하면 도덕은 원시 시대의 학문화 이전의 룰이고, 윤리는 고대 시대의 학문화 이후의 룰이다. 동양권은 따로 구분을 안한 것 같고, 서양권은 그리스 철학에서 한 것을 윤리라 부르는 것 같다. 윤리 개념이 동양권으로도 넘어와 사용되고 있으므로, 도덕과 윤리를 학문 전후로 구분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리고 근대 시대에 과거의 룰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며 나타난 것이 자유 이념이다. 크게 나누어진 세 가지 룰은 각각 서로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충돌로 나타난 현상이 기독교의 마녀 사냥이나 이교도 전쟁이나 유교의 미신 타파나 숭유억불이다. 원시 시대의 룰인 도덕은 원시적으로 다양한 작은 사회에서 다양한 룰이 있었고, 그것이 이른바 미신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이 고대 시대에 서양권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룰 하나로 통합되면서 각기 다른 룰은 배제되었다. 원시 시대의 룰이나 고대 시대의 다른 룰과도 싸운다. 그러면서 사회 내에 룰은 하나로 통합되었다. 하나의 룰과 하나의 가치가 강제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학문과 예술이 쇠퇴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가치에 반하는 모든 학문과 예술은 금지되고 검열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암흑기란 표현이 편견과 불확실성을 야기하므로 언어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후 르네상스는 물론이고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자유주의에서 피어난 다양한 학문과 예술과 비교하면 그 시대가 암흑기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룰이지만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여 학문과 예술이 발전하게 된다. 중세의 암흑기가 오늘날 윤리 사상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유교나 기독교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나 PC주의나 여성주의와 같은 고대 종교의 가치에서 진보한 사상들이 자유주의 속에서 나타난 현대의 많은 학문과 예술을 쇠퇴하고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암흑기의 재현이다. 고대 종교 가치나 PC주의 같은 윤리 사상에 의해 과학이 부정되거나 예술이 검열되고 있는 사태를 보라. 이성과 합리가 부정되고 감성과 무논리가 판을 친다. 이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가? 도덕과 윤리, 윤리와 윤리의 충돌로 만들어진 것이 중세 암흑기라면, 도덕과 윤리와 이념이 모두 충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현대 암흑기다.
우선 모든 룰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모든 룰은 단순히 특정 시대에 특정 집단에서 만들어진 룰이다. 그것이 기독교든 유교든 불교든 마찬가지다. 선과 악, 양심, 죄책감 등 관련 개념 전부 당시 룰에서 만든 창작이다. 법은 도덕의 최소라는 말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도덕을 절대적인 룰로 인식한 관점일 뿐이다. 정확히 법은 체제의 규칙이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시대와 집단에서 만든 새로운 룰은 이전 룰과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룰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나 유교와 같은 고대 종교들이 과거의 원시 종교의 풍습들을 보고 미개하다면서 미신을 믿지 말라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이전의 룰을 절대적이지 않으므로 이념에 맞는 룰을 만들어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주장하겠다. 그 체제 구축을 위한 수단이 바로 체제에 맞는 정책과 제도다.
자유 혁명 이후 자유주의 사상이 나타났고, 그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진보인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사상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유를 추구했고,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인 윤리적인 사회를 추구했다. 즉 사회주의는 고대 종교 가치의 진보지 자유주의의 진보가 아니다. 애초에 성질이 다른 사상이고, 문명 레벨로 보면 자유주의가 자유 이념으로 진보고 사회주의가 다시 윤리로 돌아간 퇴보다. 자유주의가 원시 종교와 고대 종교의 가치인 도덕과 윤리와 다른 성질을 가진 사상이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이란 비난을 받아왔던 것이다. 되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상들과 다른 진보적인 사상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단순히 욕망과 이기 같은 인간 본성에 맞지만 낯선 합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금욕과 이타 같은 고대 종교 가치에 맞지만 불합리한 익숙한 모순을 받아들인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시대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간단히 말해 현대는 자유 혁명 시대에 포함된 시대다.
자유주의가 새로운 사상임은 민주주의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민주주의라 하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를 떠올릴 수 있으나, 그 시대에는 자유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기초로한 민주주의는 자유 혁명 이후 처음이다. 인류를 수천 년간 지배해온 도덕과 윤리와 비교하면 많은 부분이 미숙하고 부족한 상태다.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이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게 되는 체제라 주장하겠다. 그래야 모든 개인이 자유로운 자유주의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이념 실현 수단은 세 가지다. 세계의 본질을 아는 것으로 무지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불로불사를 실현하여 죽음과 늙음에 의한 자유 억업에서 벗어나는 것. 사회의 다양한 지배에 의한 자유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을 통해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 외의 사상으로는 이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특정 가치에 매몰되어 그 가치에 반하는 학문을 규제하고 검열한다면 언제까지고 세계의 본질을 알 수 없고, 학문의 발전이 뒤쳐지면 언제까지고 불로불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런 사회가 자유로운 사회일 수가 없다.
자유주의는 다양한 권리가 보장된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체제다. 오랜 세월 지배되는 사회의 질서가 익숙한 이들은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지 이미지가 잡히지 않을 수 있다. 그걸 성립시키는 것이 자유주의 체제의 정책과 제도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가? 바로 책임과 권한의 분산이다. 그것이야 말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기준점이다.
일제에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의 모든 책임은 권한을 독점하던 당시의 왕이 짊어져야 한다. 어떤 이유가 있던 그것은 마찬가지다. 외압이 있었든 신하와 짰든 배신을 당했든 그런 것은 무능의 증거일 뿐이다. 만약 다른 나라 역사였다면 객관적으로 왕의 무능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애초에 왕이 모든 권한을 독점하지 않았다면 도장 하나에 나라에 속한 인간과 토지가 팔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토지를 팔아서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 동안 많은 왕족이 일제 귀족 대우를 받으며 편하게 살지 않았던가.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했다. 그 시대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민주적인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음에도 제국을 주장할 정도로 왕의 권한에 집착하던 이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서 당연한 태도다. 어떤 인과가 있던 권한과 책임을 독점했던 왕이 나라를 판 것이다. 그 시대에 많은 의견이 분분한데, 권한과 책임의 비례를 고려하면 모든 책임을 왕이 짊어지고 모든 문제를 매듭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시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유교 사상 영향으로 왕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국가 역량을 과하게 낭비하고 있었다. 권한을 독점하던 인간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형태가 되어야 나라가 보다 더 민주적이게 될 수 있다.
그 시대의 왕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최대한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대표적인 권한과 책임의 분산 제도가 바로 시장 제도다. 그 제도가 생산 권한을 시장 원리로 분산하는 것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는 왕이 신하에게 또는 정부가 개인에게 권한을 분배하는 형태였다면, 시장 경제는 소비자가 생산자에게 소비하는 형태로 생산 권한을 분산하고 있다. 분산된 권한을 가진 기업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져야 한다. 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식으로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작은 정부가 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중우 정치는 이러한 정책과 제도의 미비 때문에 생긴 것이다. 현재도 그런 상태다. 많은 사안이 단순히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소비되면서 사회가 더 심각한 불합리로 망가지고 있다. 누더기 법안은 대부분 중우 정치를 이용하여 정치를 성공하기 위해 쓰인 아이템에 의한 것이다. 법의 합리성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일부는 헌법에 그런 합리성을 파괴하는 근거가 몇 가지 있다고 하여 불합리를 옹호하기도 한다. 현재 헌법에 근대 이념에 도덕과 윤리가 섞인 상태라 그에 대한 해석이 애매할 수 있는데, 법이 체제의 규칙이라면 체제 이념을 기초로 헌법을 해석해야 하므로 그런 불합리는 자유주의 이념을 기초로한 해석을 통해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이 자유주의 국가가 되어야 법 또한 합리적이게 될 것이다. 시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개개인에게 분산하면 이런 문제가 줄어들어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게 될 거라 확신한다. 그것에 대해 몇 가지 제도를 통해 이해해보자.
[제도: 1. 관습이나 도덕, 법률 따위의 규범이나 사회 구조의 체계.]
자유주의 체제에서의 제도는 체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 구조의 체계일 것이다. 최대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형태로 접근한다. 현재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인사 권한은 있는데 그에 대한 책임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중우정치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것과 같이 권한은 있는데 책임이 부족할 경우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제도를 추가한다. 달리 책임은 있는데 권한이 없는 경우는 권한을 추가한다. 권한을 가지고 있던 인간은 권한 분산이 손해라 여길 수 있는데, 권한을 분산하지 않겠다면 당시 왕과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 합리적인 권한 분산을 거부하고 권한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은 민주주의를 알면서도 권한을 독점했던 조선 말기의 왕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권한 독점은 왕정 시대의 관행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뿐이다. 권한 독점은 전쟁도 부른다. 권한이 집중될수록 독단적 전쟁도 쉽게 일어난다. 독재와 같이 권한이 집중된 국가 사이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지금 법률이 누더기 법안인 까닭은 명료한 방향과 기준점이 없어서 그렇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명확한 방향과 권한과 책임의 분산이라는 명확한 기준점이 있으면 합리적인 법안이 나올 수 있다. 각 제도는 기본적으로 사회 문제 설명, 권한과 책임 분산의 원리, 정치적 관점과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취약점 관점으로 접근하면 자유주의 제도의 취약점은 인간의 이기심이라 여길 수 있다. 고대 종교 가치관으로는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 나쁘다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면 룰 자체가 망가진다. 예를 들어 식료품 생산 권한을 가진 기업이 생산 수단을 가지고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 사회를 협박하여 더 큰 사회 권한을 강요한다고 가정하자. 이윤을 포기하고 빈곤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라면서 시장의 절차를 무시할 권한을 강요한다. 경쟁 절차를 생략하고 독점 공급을 한다거나 품질 검사 절차를 생략하고 공급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도덕적 명분으로 당장 그럴듯해 보일 수 있어도, 기업이 룰을 무시할 경우 생산과 시장 시스템이 파괴되어 사회는 더 큰 손해를 볼 수가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룰 내에서 이익을 얻겠다는 것과도 같다. 기업이 이기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가정하고 제도를 만드는 것이 시장 제도다. 이런 식으로 제도 전제를 인간 본성에 맞춰서 한다. 그럼 몇 가지 창작한 제도의 요점을 정리하여 알아보겠다.
형량 총량 제도.
현재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교정 시설 포화로 사회가 파탄나고 있는 상태다. 교정 시설은 한정되어 있는데 높은 형량이 판결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면서 교정 시설 포화로 더 이상 죄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이는 개인에게 관련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책임하게 높은 형량으로 판결할 것을 강요하고, 그러지 않으면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판사라 비난하고 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형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해야 한다.
교정 시절에 맞춘 형량 총량 제도를 만들고 대중이 원하는만큼의 형량이 판결되기를 바란다면, 교정 시설을 짓기 위한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을 알린다. 형량을 늘릴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형량 총량제와 세금이란 형태로 분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기준은 법 전문가가 결정해야 하겠지만, 판사 개개인에 형량 총량을 넣기보다는 각 분야에 맞춰 형량 총량을 넣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지금까지 통계(단순히 판례만이 아닌 재범률을 고려한)와 현재 교정 시설을 고려해 각 분야에 한 해나 분기 형량 총량을 나누어 분배한다. 판사는 남은 형량 총량을 고려해 다른 판사와 소통하면서 적절한 판결을 한다. 교정 유무가 중요한데, 기억 프로세스를 고려하면 프로세스를 바꾸면 교정이 가능하다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법감정을 들이대며 법의 합리성을 파괴하고 무조건 높은 형량을 강제하는 분위기는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관예우나 유착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비리는 이런 제도가 있던 없던 있게 된다. 3심제 같이 가능한 그런 문제에 대응하도록 하는듯 한데, 아무래도 그것은 선후배 관계와 같은 윤리적인 문제가 섞여 있기 때문에 쉽지는 않은 상태다. 경제적으로 보면 형량 총량제로 사회가 관련 예산을 감당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경찰 입찰 제도.
현재 경찰은 진급 체계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상태다. 성과 위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성과만 얻으면 된다는 식의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동탄시에서 성과를 위해 사건을 조작하거나, 디지털 관련해서는 성과를 위해 다른 나라에서는 문제가 없는 야한 그림 그리는 인간에 공격적 조사를 하면서 정작 필요한 치안 서비스에는 공백이 나타나고 있다. 낮은 리스크로 높은 리턴을 얻을 수 있는 사건에만 집중하니 정작 강력 범죄에 대한 대응 능력이 감소하고 있는 상태다. 마약 범죄는 나날이 늘어나는데 쉬우면서 성과가 높은 것에만 치중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에 의한 사회 문제는 인간의 문제기보다는 제도의 문제로 보는 것이 맞다. 진급 체계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사회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경찰의 역할이 지역에 치안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경찰의 성과는 실제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의 손으로 평가받아야 타당하다. 그것을 위해 경찰 중간 직급 입찰제를 도입한다. 진급을 바라는 중간 직급에 속하는 이들이 팀을 이룬다. 인원은 지자체 경찰서 최소 인원을 기준으로 삼고, 입찰 후 추가 인원 배치를 하면 될 것이다. 각 지자체 의원들이 그들의 치안 능력을 평가하여 입찰한다. 지자체의 입찰 조건은 지자체 세금을 활용한 경찰 장비나 성과급 등 추가적 보상이다. 지역 치안에 높은 가치를 느끼는 지자체일수록 그런 입찰 조건이 높아질 것이다. 1년에서 4년 사이로 계약을 맺고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게 한다. 경찰은 좋은 조건에서 좋은 진급 평가를 받기 위해 거주민의 만족도가 높은 치안 서비스를 제공한다. 경찰 중간 직급인 이유는 일반 경찰이나 고위직 경찰까지 입찰제로 전국 지자체를 돌아다니기에는 효율도 낮고 안정도도 떨어진다. 진급 욕망이 있어 최선을 다해 행동할 수 있는 이들 위주로 그런 경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제도를 통해 경찰 치안 서비스와 진급 체계 관련 권한과 책임이 경찰 -> 지자체 의회 -> 거주민으로 조금씩 분산되게 된다. 지금 리스크는 낮지만 리턴은 높은 날로 먹는 사건들은 주로 실제 치안 서비스를 받는 거주민이 아닌 크게 떠드는 일부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주민이 치안과 진급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일정 주어지면 치안 서비스가 정상화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경쟁 시스템을 구축한다.
정치적으로 보면 거주민에게 권한과 책임이 일부 분산되므로 지역 치안에 관한 문제가 일방적으로 정치권이나 경찰이 전부 짊어지지 않을 수 있다. 지자체 의원의 공약 또는 홍보 수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착 비리가 있을 수 있는데, 계약 기간이 길지 않고 입찰시 출신지 배제 또는 감사 활동 등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날로 먹는 성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지역 치안 서비스가 좋아지는 것으로 활발한 지역 상거래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응급 전문 병원 제도.
현재 응급실은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현상으로 많은 응급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다. 응급 분야는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의사와 병원이 기피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정부 예산에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런 인간의 이기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제도의 문제다.
응급 개념을 알아보자. [응급 처치: 1. 갑작스러운 병이나 상처의 위급한 고비를 넘기기 위하여 임시로 하는 치료] 이른바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임시 치료다.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급한 수요 처리다. 응급 환자는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가 응급 처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일상품을 통해 실현되는 분야가 있다. 편의점이다. 전국 각지의 급한 수요 처리를 편의점이 도맡아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고 있다. 현재 응급실 현상을 살펴보자. 돈이 안되고 힘든 일을 기피하여 붕괴한 분야다. 이것은 각 산업에서 이미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해 처리하고 있다. 이걸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행 의료와 응급 개념을 분리하도록 법률을 제정하고 편의점과 같이 응급 전문 병원을 발족한 뒤에 그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이 응급 분야에 한해서 외국인 의사를 고용하도록 한다. 일반 병원에서 돈이 안되는 응급실에 과한 투자로 운영하도록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응급만 따로 떼서 운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존 병원과 이해관계를 분리하기 위해 병원을 운영하지 않던 기업을 대상으로 입찰식으로 응급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고, 기업은 응급 전문 체인점을 만들어 편의점처럼 각지에 분산 설치한다. 일반 의사를 고용하여 응급실을 운영하면 기업에서 이윤이 남지 않으므로 응급 분야에 한하여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면 자연스럽게 외국인 의사 고용을 하게 된다. 기업이 공장 진출한 외국에서 고용하면 될 것 같다. 인사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대부분 의사는 엘리트일 확률이 높으므로 그런 종류의 리스크는 적지 않을까 싶다. 현재 응급실 뺑뺑이 원인 중 하나는 사무 처리가 효율적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것은 보통 일반 기업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본다. 의사 스킬 레벨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응급실은 골든 타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므로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 의사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이 안되고 힘든 응급 분야에 한에서만 외국인 의사를 허용하므로 기존 의사의 이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지 않나 싶다. 현재 소멸되는 지역에 의료 서비스 공급이 되질 않아 문제가 심각한데, 응급실 체인점이 나오면 의료 기술이 조금 낮더라도 의료망은 안정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기존에 응급실을 지키던 의사는 일반 병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킨 응급 환자 수술을 전문으로 도맡아 하거나, 응급실 체인점에서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한 메뉴얼을 만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응급실 뺑뺑이로 응급에 관한 역할을 현재 의료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임이 명백하므로, 응급에 한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산할 명분이 존재한다 할 수 있다. 대중도 이런 현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호응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이미 대부분 분야에서 힘들고 어려운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도입해 대응하고 있으므로 의료계만 따로 그걸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도 공감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인 의사를 응급 분야에 한하여 공급되게 되도록 법적으로 의료와 응급을 분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응급 분야에서는 의료 개혁이 이뤄질 수 있다. AI 활용이나 간호사 등의 일처리가 수월하게 될 수 있다. 경제적으로 보면 감당하기 힘든 의료 예산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는 의대 증원과 크게 관련이 없다고 본다. 의대 증원은 의료계보다는 사회 밸런스 조절에 가깝다. 간단히 말해 밸런스 패치다. 사회 밸런스가 깨져서 너프 패치 좀 한 것이다. 너도나도 의대 지원하는 상황에서 사회 밸런스가 맞다고는 의사조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
현재 정치에 대한 신뢰도는 많은 유권자가 신뢰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어느 유권자는 누구를 뽑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면서 정말 아무나 뽑는 실정이다. 정치가들은 양당 체제로 구축된 표밭에서 의원이 되기 위해 정당의 공천권자에 지배적 영향을 받거나, 정치 성공 아이템 유행에 휩쓸려 국가 체계를 망가트리는 일을 하기도 하고 있다. 정치 성공 아이템은 사업 성공 아이템과 같이 다수가 한번 성공한 특정 아이템의 유행에 매몰되어 사회를 망가트리는 것을 말한다. 사업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공급 초과로 산업이 망가지면서 사회가 망가진다. 그것과 같다. 정치 성공 아이템이 한번 유행하면 너도나도 그걸 하면서 불합리로 정치 체계가 망가지면서 사회도 망가진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 이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누더기 법안은 정치가가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지면서 나타난다. 이것을 하면 사회나 체제가 망가지든 말든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그걸 한다. 사고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사회에서 사고가 났을 때 너도나도 뛰어들거나, 공포로 정치 권한을 쥔 적이 있으면 대중이 공포를 느낄 때 너도나도 뛰어들고 있는 상태다. 최근에 아는 사람 얼굴 사진 오려다 야한 사진에 붙인 것의 연장에 있는 딥페이크 정도의 자잘한 사안에 여성 권력이 물면서 무슨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나올 정도로 과한 공포가 퍼졌다. 현재 여성 권력이 정치 성공 아이템에 속하여 입법에서 딥페이크 법이라면서 보기만 해도 처벌한다는 모순 투성이의 불합리하여 말도 안되는 법안 같은게 나왔다. 이런게 바로 정치 성공 아이템에 빠진 결과다. 이런 불합리한 법이 나올수록 법의 신뢰도는 낮아지면서 국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현상은 현재 의회가 정치적 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하기에 나타난다고 본다. 불합리한 법을 행정에서 막는다 하더라도, 그 불합리함이 도덕적인 이유로 정당화된다면 그런 정치적 부채를 전부 행정에서 짊어지기에, 행정도 그런 견제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상원과 하원처럼 의회 견제 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토지에 있는 입법 권한과 책임을 분야에도 분산한다. 토지와 분야는 유권자 집단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상호 이해가 달라 서로 견제가 가능해진다.
역할 민주주의 제도는 실현하기 어려운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토지 민주주의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도 된다. 기존의 선거 용지에서 역할에 따라 배정된 선거 용지를 추가하면 된다. 단지 다른 점은 정부(삼권)에서 지정한 분야에 개인이 소속 희망을 하고, 그 소속된 인원에 따라 지정된 의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단지 일부 국회의원은 입법 권한 분산을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경제 활동하는 이들이 합심하여 개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말해 그걸 추진하는 정당에 후원과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자유 혁명의 본질은 왕과 귀족이 독점하던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한 것에 있다. 그것을 또 다른 형태로 실현하는 것뿐이다. 자유주의가 자리잡기는커녕 사회주의와 같은 윤리 사상으로 퇴보하였으므로 지금 인류는 아직도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을 가지게 되므로, 기업의 대표나 노조의 대표가 그 권한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토지와 달리 분야는 대부분 분야에 속한 인원이 아는 사람이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해에 민감한 이들의 합리적 결정이 나올 수 있을 거라 본다. 조선 말기 왕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권한과 책임은 합리적으로 분산할수록 자유롭고 민주적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겠다.
정치적으로 보면 신뢰를 잃은 정치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권한과 책임 분산 제도를 통해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로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정치 제도의 한계를 대부분 느낄 것이므로 대중의 호응도 좋을 거라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분야의 대표가 입법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되는만큼 분야 성장에 이로운 법안이 제출되면서 경제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 개인 책임 제도.
현재 디지털 플랫폼에 관한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범죄 또는 범죄 모의가 발생함에도 플랫폼에서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플랫폼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플랫폼에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디지털 플랫폼은 현재 새로운 인류 공동체로서 새로운 사회의 형태다. 그런 사회에서 플랫폼 관리자가 플랫폼 이용자를 감시하고 이용자에게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은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이 된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집 안에 범죄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자체에서 모든 집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감시한다고 해보자. 말도 안되는 월권이다. 또한 그런 감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자체 장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범죄는 신고제여야 개인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플랫폼이 범죄 감시 협조를 하지 않는다고 협조를 강제한다면, 범죄 협조를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감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협조하기 위해 이용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개입하여 지배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현재 이러한 행동의 근거는 대부분 윤리인데, 윤리를 명분으로 플랫폼 관리자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과 다를바 없다. 거대화된 플랫폼 관리자의 독재적 행동에 대한 견제를 하지 못할망정 윤리적인 이유로 그들에게 독재의 권한을 쥐어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시장 원리를 통해 기업에 분산된 권한은 상품 및 서비스 판매와 제공 권한이지 개인 감시 권한이 아니다. 디지털 사회는 기본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물리적 위험이 없는 공간으로 개인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므로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야 마땅하다.
디지털 공간은 정부 안전 보장이 되지 않은 지역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의가 필요한 공간이다. 정부가 위험한 지역이라 지정한 지역에 가서 사고가 났다고 하는 것은,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권한이 있던만큼 개인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여성계가 과하게 공포를 조장하는 디지털 성범죄는 여성 관련이 정치 성공 아이템으로 유행하여 과한 대응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 또한 그에 대한 책임이 기본적으로 개인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 디지털 관련해서 개인 권한 침해는 그야말로 광기나 다름 없을 정도로 미쳐가고 있다. 대놓고 반체제적인 행동도 윤리를 명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로서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 도대체 어떤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인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다. 현재 디지털 감시법은 전부 개인 권한을 침해한 월권이다. 독재란 무엇인가? 권한 독점이 독재다. 그 과정이 무엇이든 권한이 독점되면 독재다. 나치도 선거로 뽑혔으나 권한을 독점하면서 독재가 된 것이다. 민주적인 독재자가 존재하는한 민주주의 핑계를 대면서 모든 권한을 아무렇게나 침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
미국 CIA가 요즘 개인 정보 찾기가 매우 편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개개인에게 개인 정보 노출의 위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개인 정보에 관한 안보에 대한 교육이지 플랫폼을 압박하여 디지털 이용자의 권한을 침해하게 하는 것이 있지 않다. 미성년 SNS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걸 막는다고 해서 실제 막히는건지에 대한 실용성 여부는 둘째치고서라도, SNS를 평생 쓰지 않는 것도 아닌데 그에 대한 교육을 하는게 타당하지 막는게 타당한지 묻고 싶다. SNS를 막을게 아니라 교육 과정에서 SNS 활용 방법에 대해 교육했어야 했다. 그렇게 초기 기억 프로세스를 각인하면 SNS를 과하게 이용한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합리적인 정당한 권한 분산과 디지털 플랫폼 월권 견제는 필요한 조치라 생각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권한 조정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해야 하는데, 정치 성공 아이템과 공포 선동 한번에 다 망가지고 있다. 끔찍하기 짝이 없다. 경제적으로 보면 불필요한 규제가 철폐되어 자원 낭비를 막아 경제적 효율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퀘스트 제도.
현재 정부와 많은 기업에서 하청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에 대한 대응도 마땅치가 않다. 또한 고용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만든 하청에 의해 임금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 양극화는 더 크게 심각해지고 있다. 기업이 직고용을 하자니 현행 제도로는 리스크가 크다. 그렇다고 기업이 하청에 주는 돈이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하청 기업이 인건비로 이윤을 얻기 때문에 실제로 일하는 인원에게 가는 비용이 절반이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적다는 점이 문제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많은 이들이 일용직처럼 일을 하며 미래가 불투명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것을 개인에게 생산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 퀘스트 제도를 통해 대응한다.
일반적인 일자리는 생산 과정에서 생산 및 성장 동기 부여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기업에 입사한 인원은 적극적 생산과 성장을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경우 그런 시스템이 마땅치가 않아 지속 생산과 성장이 되고 있지가 않다. 개인 생산 체계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것을 게임의 퀘스트 방식을 차용하여 생산과 성장의 동기 부여를 제공한다. 게임 퀘스트는 단순히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임에도 그 시스템의 보상 체계가 합리적이기 때문에 게임 이용자는 자발적으로 게임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할 정도다. 그런 것을 활용해 생산과 성장 가치 관리를 통해 자발적 생산과 성장을 유도한다. 간단히 경험치와 업적 시스템만 넣어도, 게임 캐릭터 업적을 올리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처럼 생산을 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시스템을 만든 뒤에, 사회의 일을 하청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퀘스트 방식으로 공급하여 일을 하는 개인에게 실제 가는 비용을 대부분 전달하는 것으로 사회 양극화를 줄인다.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므로 정부와 기업도 그에 대한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사건사고에 대한 대응을 제도 내에서 효율적으로 교육하면 각각 하청에서 교육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개인에게 생산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프리랜서의 사회 역할이 확고해질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과 성장을 하는 인원이 늘어나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유동적인 생산 인원의 증가를 통해 산업 변화에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여성 징병 제도.
현재 저출산으로 인구수 감소에 의해 징병 병력이 부족해지고 있는데, 이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징병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여성에게 분산한다. 딱히 모든 여성에게 분산하는게 아니라, 징병에 적합한 신체를 가진 여성에게만 분산한다. 생리 문제는 군간부를 기준으로 정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현재 여성 관련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하기 어렵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에 속한다. 경제적으로 보면 본래 병역으로 아끼던 사회적 비용을 좀 더 아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족 제도.
가족을 구성하는 권한과 책임을 보다 개인에게 부과하여 가족이 되는 리스크를 줄인다. 현재 가족 제도는 가부장제 시기 일가의 결합이라 인식하고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가족이 공동으로 감당해왔다. 그렇기에 자녀의 결혼에 부모가 집도 사주고 그랬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사회가 감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출산은 가치 하락에 의한 조건 감당 불가가 부른 것으로 봐야 한다. 현재 미디어에서 혼자사는 것이 미화되는 프로그램이 많은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지 원인이 아니다.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성 관계에 대해 가치를 느끼지 못하니까, 이성 관계를 가지려면 필요한 조건이 높게 되고, 동시에 혼자 사는 것을 미화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조건을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완화해야 한다.
가족 제도에 관해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결혼 리스크와 이혼 리스크를 줄이는 것을 통해 할 수 있다. 결혼과 이혼을 보다 간편한 절차로 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간편한 권한을 가지는 대신 그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지게 한다. 결혼의 경우 단순히 내국인을 대상으로 할게 아니라 외국인과의 결혼도 쉽게 하여 리스크를 줄인다. 이혼의 경우 재산권이나 양육권 등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도록 한다. 여성에 관한 정치 성공 아이템이 유행 중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면 가족 제도 존속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정치적으로 보면 가족 구성 확률이 높아질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생산 인구 증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식 기업 상품 구매 제도.
현재 한국 주식은 다양한 이유로 리스크가 커서 이익 실현이 어렵고 참여율이 저조한 편이다. 윤리적인 이유로 금투세와 같이 주식 투자를 비활성화하고자 하는 법안들이 있는 상황에서 현재 한국 주식 시장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 상품 구매 권한을 주식에도 분산하여 주식의 유동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
주식은 회사 소유 권리를 유가 증권의 형태로 분할한 것에 해당한다. 회사 소유 권리라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매할 권리도 있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하여 주식으로 해당 기업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하여 주식 유동성을 올린다. 주식 유동성을 높이고 싶은 기업에 한에서 주식 상품 구매가 가능하도록 허용하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이유가 없을 수 있으나, 유동성 증가를 목적으로 시장가보다 n% 싸게 판다면, 주식을 하지 않던 이들도 주식을 구매하여 상품을 구매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주식으로 상품을 구매할 경우 서비스로 바로 팔 수는 없는 주식을 제공하면, 그것을 보유하던 이는 주식에 관심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주식 참여율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개인 입장에서 주식으로 큰 수익을 실현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산 종류를 다양하게 한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를 늘리면서 주식에 관한 정책과 제도 도입이 수월해질 수 있고, 경제적으로 보면 주식 참여자가 늘어나면서 주가 유동성을 통한 자금 확보가 좀 더 수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리스크 리턴 비례 제도.
현재 한국 경제는 노동 경직성에 의해 생산 구조가 불안정한 상태다. 이는 고용 체계에서 리스크 리턴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정규직은 낮은 리크스에 높은 리턴이 주어지고 비정규직은 높은 리스크에 낮은 리턴이 주어지면서 밸런스가 깨진 상태다. 그것을 노동 유연성 권한과 책임을 기업에게 분산하여 처리해야 한다.
임원이 계약직인 것을 고려해 정규직 시스템을 재편한다. 모든 정규직은 일반 사원으로 한정하고, 만약 진급하고 싶으면 임원과 같이 계약직으로 하도록 한다. 만약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지 않고 일반 사원으로 일하면 되고, 높은 이익을 얻는 직장을 원한다면 진급하여 높은 임금을 받되 계약 리스크를 짊어지는 계약 사원으로 일하면 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노동자의 안정적인 직장과 노동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리스크 리턴에 비례한 노동 유연성을 통한 경제 구조 개혁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개인 안보 교육 제도
현재 국가 안보 문제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안보에 무감각하다. 이것은 안보 개념을 개인이 아닌 국가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안보 개념의 권한과 책임을 분산한다. 지금 안보 교육은 지나치게 전쟁 대비용으로만 되어 있어 개인에게 와닿지 않는다. 그걸 조정한다. 안보는 안전 보장으로 개인에게 있어 위험이 되는 모든 개념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거나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형태로 접근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 안보에 관한 교육을 넣어야지, 국가 안보만 가르치면 개인 권한 침해처럼 느껴져 호응이 좋지 못하다.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안보관이 자리잡는 것으로 사회가 보다 안정적이게 될 수 있고, 경제적으로는 개인 안보 교육을 통해 다양한 사고 리스크를 줄여 경제적 손실을 줄이는 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및 자기 결정권의 자유 보장 제도.
현재 한국은 사상, 표현, 자기 결정권 등의 다양한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에 관한 권한의 상당수를 정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비민주적인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도 부족하다 외치는 이들이 넘치는 상태다.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권한과 책임의 분산을 실현하기 위해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던 정부와 싸워왔는데, 다시 또 낡은 도덕이나 윤리를 근거로 어설픈 주장을 하며 그 권한과 책임을 정부보고 가져가라 아우성대고 있다. 체제 교육이 너무나도 안되어 있다. 수많은 창작물이 특정 가치를 근거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자기 표현이 단순한 불쾌감 하나로 검열되고 규제되고 있다. 수많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만들어진 상품화가 죄악시되며 검열되고 금지되고 있다. 그야말로 중세 암흑기가 다시 찾아온 셈이다. 여가에 속하는 게임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행위에 중독 개념이 포함될 수 있음에도 굳이 게임만 추가하여 그것에 대한 검열과 규제를 강화하자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게임으로 가정이 문제가 있다면서 호소하는 이들도 있는데, 자유롭게 여가를 즐길 권한이 있는만큼 그에 대한 책임도 있는 것이다. 중독이란 개념은 특정 개념만 따로 다룰 것이 아니라 모든 개념을 통틀어 나타나는 중독 현상을 다뤄야 한다. 게임만 따로 다루자는 것은 그에 관한 새로운 룰을 추가하자는 것인데, 그 룰의 추가에는 반드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그렇게 구축된 사회 체계가 엉망이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체제 이해가 부족하여 정치 성공 아이템이나 공포 선동으로 체제를 파괴하여 체계를 망가트리고 있지만 본래는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다.
간통법의 폐지는 관련 권한과 책임을 개인에게 분산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과 같이 국가 안보와 크게 관계가 없다면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한다. 검열 기관이나 규제 기관들은 대부분 권고에 속해야지 강제가 되면 그것은 정부가 그 권한과 책임을 독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게 된다. 영상물이든 게임이든 뭐든 다 마찬가지다. 권한을 독점할거면 검열과 규제로 발생하는 자유주의 가치 훼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자유주의 가치 훼손과 같은 이념에 대해 우습게 볼 수 있는데, 6.25 한국 전쟁이 도대체 무슨 전쟁인지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한국 이념 전쟁이다. 자유 이념 하나로 수백 만명이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렇게 우습게 볼 수 있는가. 현재 포르노를 금지는 안했다면서 포르노 금지 국가가 아니라는 헛소리를 하는데, 포르노 허용 조건이 까다로워 그것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으면 그게 금지나 다를바 없는 것이다. 가수 콘서트 허용 조건을 통과한 비율이 0.5%면 그게 콘서트가 허용되었다 할 수 있는가? 포르노와 성매매가 국가 안보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강제성이 없는 경우 도대체 허용이 여성 인권인가? 금지가 여성 인권인가? 간통법 폐지와 같이 국가 안보와 관계가 적은 대부분의 권한과 책임은 개인에게 분산해야 마땅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초기에는 사회 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권한과 책임 분산으로 정치적 리스크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다양한 권한과 책임이 분산되어 수많은 개인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수많은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공정 거래 제도.
현재 한국은 도덕, 윤리, 전통, 이권 등으로 공정 거래가 다소 어려운 상태다. 국내도 그렇지만 국외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국제 시장을 고려하는게 아니라 국내 시장만 고려하면서 제대로 된 공정 거래가 이뤄지기 어려울 때가 많다. 공정 거래는 분산된 권한과 책임을 세심하고 정교하게 나누는 것에 있다. 공정하게 나뉘진 상태에서 거래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서 불공정이 나타나게 된다. 시장의 독과점도 그 분야 권한을 독점한 것이 된다. 시장 원리를 통한 결과라 하더라도 권한 독점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 공정 거래를 위한 시장 원리 작동도 작동이지만, 이념상 독점 방지를 하는 것이 체제에 적합하다.
망 사용료는 국제적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국제 시장에 관한 것이므로 한 국가만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할게 아니라 다국가의 권한과 책임을 고려하여 공정한 거래가 되도록 해야 한다. 토종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서 국내 기업의 권한과 책임을 상대적으로 높게 준다면, 동일한 명분으로 다른 국가에서 한국 기업이 불공정한 손해를 볼 확률이 높다. 국제 시장에서 토종 기업 살리기가 불공정이다. 지역 화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지역 화폐가 어떻게 활용될지 모르겠는데, 따로 지역 화폐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보면 지역에서 쓰이는 거래를 지역 화폐로 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면 지역 화폐 관리자는 그것을 독점하게 된다. 그러면 기업 화폐를 운영하는 이들이 불공정한 손해가 될 거라 생각한다. 권한과 책임이 시장 원리를 통해 결정된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자유 무역 공정 거래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공정 거래를 통한 시장 원리 활성화로 시장 원리를 통한 경제적 성장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국가 기능과 관료 제도.
현재 민주주의라는 이유로 의회가 많은 권한을 가져간 상태라 하는데, 본래 행정이 기능을 하고 있다 해서 민주주의 이념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 기능에 관해 직접 참여가 안된다는 이유로 비민주적이라는 얘기는 모든 왕에게 주권이 없었다는 얘기와 같다. 국가 기능의 권한과 책임 분산과 관련 정책과 제도에 의견을 내고 합리적이면 실현할 수 있으면 된다. 기재부와 소방서를 통해 국가 기능에 대해 이해해보자. 소방서의 경우 당연히 사회 인프라,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기재부의 경우에는 어떤 권력이 있다 여기면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기재부가 예산을 관리하기에 어떤 권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 단순히 권한 차이로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 기능 중 하나로 차이가 없고, 없어야만 한다. 국가 기능은 이념 체계 행정 처리로 필요한 기능 중 하나로서 주권을 개인은 그것을 활용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국가 기능에 속한 개인 또한 주권을 가진 권한이 다른 통치자다.
국가 기능에 속한 이들은 그것의 권한과 책임이 왕정과 같이 개인을 관리한다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민주정에서는 정책과 제도 등의 시스템을 관리하고, 그 시스템 관리를 통해 국가를 작동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선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것과 같이 국민이 왕을 뽑는 체제가 아닌, 모든 개인에게 권한과 책임이 분산된 체제라 생각한다. 그런 권한과 책임을 가진 개인을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비민주적이다. 가치 관리 또한 어디까지나 시스템을 활용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렇기에 시스템적으로 강제력을 실행할 수 있는 초기 교육 단계에서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며 과거 인간의 말만 암기시키다 정작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사회에 내보내면서 지금의 저출산, 저생산 시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권한과 책임 분산이 보다 세심하고 정교하게 될 수 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보면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통해 자유로운 생산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권한과 책임 분산 실패 사례.
어떤 아파트에서 관리사무소 허가를 받지 않은 전단지를 중학생이 떼서 버리자, 경찰이 재물손괴죄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권한과 책임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는 사례 중 하나다. 아파트 자체 내규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가 지정한 장소에 부착한 전단지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 외에는 임의로 떼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회 룰에서는 전단지 자체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모든 재물에 관한 룰을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를 따르게 할 수는 없지만, 적정 레벨의 것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내규에 권한과 책임을 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파트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된다면, 사내 내규가 잘못되었다 판단되고 정부 기관에 신고하는 것과 같이 처리하면 된다고 본다.
사회 체제를 이해 못하는 이들이 정의롭게 사회를 망가트리고 있다. 미로에 갇힌 불쌍한 카나리아. 위험하다 외칠 뿐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해결도 못한다. 모르면 카나리아가 될 뿐이다. 이제는 알고 나서 이 시대의 암흑기를 끝내고 자유주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기를 바라겠다.
5. 기억
인간의 자아는 생물 육체를 원료로 하여 언어 체계를 통해 창작된 존재다. 기억은 자아의 구성 요소로 기억만 보존되면 창작된 자아인 ‘나’는 죽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억을 추출하여 디지털화를 한다거나 인공 육체를 만들어 이식하면 자아인 ‘나’는 계속 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인류 문명 레벨로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 현재 인간은 뇌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기억을 추출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불로불사. 이것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인간은 유전자를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유전자를 정복하여 완전 조작할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인간의 자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옮기면 계속 살고 있음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이 기억 유전으로 생긴 기억 프로세스라면 인간은 본인의 기억을 새로운 육체로 옮길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모든 생물의 유전자의 최초 정보는 기본적으로 기록에 해당한다고 본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되어야 그 기록을 바탕으로 조합하면서 진화가 가능하다. 단순히 오로지 우연만으로 생물이 형태를 갖췄다고 보기에는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는 것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우주나 원자의 경우는 힘의 균형을 통해 특정한 형태가 지속되나, 인간의 경우는 항상성과 같은 것이 특정한 형태 지속을 만드는데 거기에는 따로 힘의 균형 같은게 없다. 만약 항상성이 기록의 재생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이라 가정하면 모순이 없게 된다. 최초 정보 기록만이 아니라 본능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의 본능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무언가를 총칭하며, 이는 내부 세포의 움직임과 달리 외부 생물의 움직임은 생물이 경험한 것을 기록해야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생물이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게 유전자냐 기억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유전자는 세포의 움직임을 담당하고 기억은 생물의 움직임을 담당하지 않나 싶다. 기억 프로세스가 담긴 세포가 유전되면서 기억 프로세스도 같이 유전되는 것이라 본다. 인간의 본능을 인간이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아마 언어 체계를 익히기 전의 기억 프로세스가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의 본능이 기억 유전된 것이라면, 인간의 자아는 그 기억 유전을 한 생물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을 찾으면 인간은 계속 살 수 있다. 기억을 세포 유전자에 기록하는 조건을 찾아 기록하고, 기록한 세포를 생식 세포로 전환한 다음, 인공 자궁에 넣어 성장시킨 다음에 기억이 유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면 된다. 2회차의 시작이다. 기억의 연속성을 위해 원본 육체는 가사 상태로 만든 다음에, 기억 유전이 된 것을 확인하면 그대로 안락사 처리하면 될 것이다. 기억 유전이 다른 방법에 비해 쉬운 이유는 유전자에 대해 자세히 몰라도 실험하면서 기억이 기록되는 현상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실험은 생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 또한 시한부가 많기 때문에 자원자에 한하여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인류 문명이 본질을 몰라도 규칙성을 발견해 원리를 파악하여 온갖 문명 이기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기억의 유전자 기록 조건은 유전자 메커니즘이 기억 메커니즘과 유사하다면, 기억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 기록 조건을 찾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실험 과정은 AI 또는 AGI가 있으면 빨라질 것이다. 기억 유전 조건의 실험은 한 국가 또는 한 기업에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난이도 높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아주 오래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빠르게 하려면 다국가가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기억 유전을 통한 기초 불로불사는 일반 생물의 기능을 활용한 것이므로 생각보다는 비용이 높지 않을 것이다. 규모의 경제로 돌아가면 아마 대부분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환경 문제의 경우에는 문명 발전이 가속화되면 충분히 대응 가능할 것이다. 우수한 인간이 계속 살 수 있어야 문명 발전도 빨라진다.
모든 기술은 특정한 루트를 거치게 된다.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자. 의지, 발상, 이론, 실험, 증명, 실현과 같은 루트를 거쳐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 불로불사 루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불로불사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면 그런 루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실제 실현 가능한 것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술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인간의 자아의 본질이 무엇이 명료해야 한다. 현재는 그게 불명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도 있지 않을 것이다.
AGI, 인공 자아의 개발은 그것에 대한 보편 관념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타임 머신이 개발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시간은 단순히 관측 순서라 주장했던 나조차도 시간은 좌표계에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와 같다. 인간의 자아는 영혼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인공 자아가 개발되면 인간의 자아의 구성요소는 기억 프로세스라 생각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자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무엇을 해야 불로불사가 가능한지에 대한 보편 관념이 생기게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류 문명은 불로불사 루트로 돌입한다.
불로불사는 기술 레벨의 것에 해당한다. 무슨 신비적인 느낌의 환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원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폭탄을 만든 것과 같이 유전자의 규칙성을 파괴하여 죽지 않거나 늙지 않게 하거나 기억을 기록하게 하는 등의 것과 같다.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도하면 어쩌면 빨리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주의 규칙성, 법칙을 파괴하는데에 주저할 수 있는데, 인간은 이미 했고 입자 연구소에서 매번 하고 있다.
기억을 유전하는 것이 자아인 ‘나’가 새로운 육체에 가게 된다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환생과 얼마나 다른가? 자아의 본질이라 생각되던 영혼이 새로운 육체에 들어가 2회차를 시작한다. 자아의 구성 요소인 기억 프로세스가 새로운 육체로 유전되어 2회차를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관념 문제다. 만약 실현된다면 아마 미래에는 환생과 같이 자연스럽게 2회차라는 보편 관념이 자리잡게 될 것이다.
불로불사에 관한 발상은 정제학을 통해 지식을 정제할 수록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억 유전을 목표로 발상을 하겠지만 더 좋은 방법이 발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문을 정제하면 정제할수록 더 발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이에 참여하면 훨씬 빨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은 아직 자유 혁명기 속에 있다. 고대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이념을 추구한 시대 속에 있다. 자유주의라는 낯선 합리를 거부하고 사회주의라는 익숙한 모순을 택하면서 진보가 사회주의인지 착각하고는 그런 자유 혁명기에서 벗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실질적인 보수는 윤리와 같은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고 진보는 과학적인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만약 불로불사가 실현되면 고대 종교 가치를 지키며 자연사하는 보수와 근대 자유 이념을 추구하며 계속 사는 진보로 나뉘지 않을까 싶다.
자유 혁명 당시에는 여러모로 다양한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다시금 과거로 퇴보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늙거나 죽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자유주의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 그런 이념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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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자아는 2년, 불로불사는 5년 안에 했으면 좋겠네. 이 글을 쓰기 전에 딱히 세계의 본질이나 불로불사나 자유 사회에 대해 생각하진 않았어. 하다 보니까 그런 내용이 들어가네. 아마 뭔가 하고자 하면 기억 프로세스가 작동해서 그런 식으로 하게끔 충동이 일어나나봐.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때가 있을 정도로 거기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 같은데. 뭐 살아있는 동안 계속 성장할 수 있겠지.
일단 다음 주제는 생명, 그 다음은 경제, 그 다음은 정치야. 생활 환경이 좋지가 못해서 생명 편을 쓸지는 모르겠네. 환경이 괜찮아지면 AI와 대화를 하면서 발상해볼게. 이번 편은 AI와 대화 없이 썼는데 사실 기초니까 그런거고. 점점 발상에 필요한 레벨이 올라갈수록 스트레스가 적어야 해서 환경이 안좋으면 하더라도 많이 느려질 거 같아. 이사, 생활비… 하하. 여유가 있으면 좋겠네. 일단 살아있으면 계속 하긴 할 거니까, 다음에 안올라오면 쉬고 있거나 죽은 걸로. 만약에 그 다음도 안올라오면 죽은 걸로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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