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구두 - 계용묵2011.07.11 AM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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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 >

- 계용묵(桂鎔默)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도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빼어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라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여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귀막에 역(逆)했다. 더욱이 그것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혀 낼 때에는 그 음향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이 아닌 말 발굽 소리다.

어느 날 초어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 창경원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느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던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몰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한 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 사이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 딱 땅바닥을 박아내어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써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흥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이 일어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한참 석양 노을이 내려비치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이삼 보만 더 내어 디디면 앞을 나서게 될 그럴 계제였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힘을 다하는 걸음이었다. 그 이삼 보라는 것도 용이하게 따라지지 않았다. 한참 내 발뿌리에도 풍진(風塵)이 일었는데, 거기서 이 여자는 뚫어진 옆 골목으로 살짝 빠져 들어선다. 다행한 일이었다. 한숨이 나간다. 이 여자도 한숨이 나갔을 것이다.

기웃해 보니 기다랗게 내뚫린 골목으로 이 여자는 휭하니 내닫는다. 이 골목 안이 저의 집인지, 혹은 나를 피하느라고 빠져들었는지 알 바 없으나, 나로선 이 여자가 나를 불량배로 영원히 알고 있을 것임이 서글픈 일이다.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우대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여성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 데다가 다 신경을 써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1955)

▲ 계용묵 (桂鎔默, 1904.9.8~1961.8.9)
1904년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에서 출생.
소설가. 1935년에 대표작《백치 아다다》를 발표.《청춘도》,《유앵기》,《신기루》, 친일적 수필《일장기의 당당한 위풍》을 썼다. 광복 후에는 《별을 헨다》,《바람은 그냥 불고》,《물매미》 등을 발표하였다. 수필집으로 《상아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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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때나 지금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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