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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글]] 즉문즉설 '각자 다른 결정의 기준 (캐나다 밴쿠버에서)' 2014.11.07 AM 05:40
오늘은 노력하는 삶과 만족하는 삶 사이에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면 좋을지 묻는
한 청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첫째, 개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화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방법 모두 듣기에는 너무 좋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이프 스타일을 보면 첫 번째 것은 치열해져야 하고,
두 번째 것은 여유롭고 욕심도 적은 삶이라고 보여지거든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면 스님께서는 어떤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만약 지구상에 100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면 몇 명 정도가 첫 번째에 속하고
몇 명 정도가 두 번째에 속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하신 청년은 남에 대해서 관심이 많네요, 그렇죠? (청중들 웃음)
‘스님은 어떻게 하나’, ‘남은 어떻게 하나’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저는 남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저 같으면 첫 번째 길을 선택하는 편이예요. 그래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요.
편안한 것을 추구하면 제가 한국에서 살던지,
한국보다 낫다고 하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와서 살텐데,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활동은 주로 필리핀 민다나오나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 같은 데서 합니다.
저는 환경이 더 열악한 곳에 가서 “저 좀 도와주세요”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보람 있어요.
이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천국에 가고 싶죠? 천국에 갈 자격도 안 되면서 천국에 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천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천국이 어떤 곳이냐고 물어봤더니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살기 좋은 곳이면 남에게 부탁할 일이 없을 것이고 내가 가면 할 일이 없잖아요.
심심한 천국이죠. 그런데 지옥은 살기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겠죠. 그러면 제가 가면 할 일이 많겠지요.
내 작은 능력도 그곳에 가면 도움이 될 테니까 도와주면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하겠죠? 재밌잖아요.
그래서 가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전도하시는 분들이
저한테 “너 지옥간다” 하시면 저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합니다. (청중들 웃음)
어떤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고, 사람마다 다 다르게 선택해서 사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두 가지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저는 1번을 선택할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느 것을 선택할까요?
제가 볼 때에는 80~90%는 후자를 선택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살아야 되니까요.
그러면 스님께서는 결정을 하실 때 ‘내가 어디에서 가장 많이 쓰일 수 있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역할을 많이 할 수 있나?’ 그런 것을 보고 결정을 하신다는 건가요?
그렇죠. 내가 가진 재능이 어느 곳에 쓰여야 가장 효과적일까 생각합니다.
효과적이면 보람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저는 한국에서는 돈을 많이 절약하고, 인도에서는 돈을 많이 씁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의 천원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적은데,
인도에서 천원이면 아이들 다섯 명의 점심을 먹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벌기는 쉽고 써도 별 표시도 안 나요.
그래서 한국에서 조금 절약해서 인도에서 쓰면,
같은 1달러인데 저기에서는 100달러의 효과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여기서 100달러를 벌고 100달러를 쓰는 것이나,
여기서 1달러를 벌고 저기에서 100달러를 쓰는 것이 같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진 재능이 어떤 데에 더 필요한가? 효율적일까?
그러면 효율적인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효율적이거나 효과적일 때
사람의 심리에 보람이라는 기쁨이 일어납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긍심이 생겨나죠. ‘나는 필요없는 사람이네, 죽을까’
이런 자살충동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해서 더 도와줘야겠다’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에게 물으니까 저는 그렇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번 세계 100강을 다닐 때도 리스본 같은 경우는 교민이 100명에 지나지 않지만
리스본에서도 강연을 했습니다.
리스본에서 강연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큰 도시에 가면 환영을 더 받을까요? 작은 도시에 가면 더 환영을 더 받을까요?
작은 도시에 가면 숫자는 더 적지만 교민 전체 수에 비해 강연에 참여하는 비율은
더 높고 환호도 더 높습니다.
누구도 잘 오지 않는 데다가 초청하려면 돈도 많이 드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와 주니까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으니 ‘사람 수’를 기준으로 할 수 있고,
아니면 ‘강의료’를 기준으로 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작은 지역에서 도움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인생을 살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 원주민 마을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아이들이 몇십명씩 있는데 학교도 없습니다.
옥수수나 고구마를 심어서 먹으므로 굶어 죽지는 않지만 병이 들었을 때나
학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곳을 가면 교실 한 칸을 짓는 데에 5,000달러면 짓습니다.
그래서 15,000달러면 교실 두 개와 선생님이 계실 교무실을 지을 수 있어요.
식수 공급하고 개발하는 것까지 해도 20,000달러면 다 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수가 50명쯤 되면 25명씩 나눠서 두 반을 만들어요.
그리고 학교를 지어 줄테니 선생님을 파견해달라고 교육청에 요청합니다.
물론 교사 월급 줄 돈이 없다고 교사 파견을 잘 해주지 않지만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여기 한국에서 아이들 공부시키는 데에
엄청난 돈이 드는 것과 대비됩니다.
같은 10,000달러가 든다고 해도 거기서는 혜택이 엄청나게 크지 않습니까.
그럴 때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한 보람이 훨씬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저는 시간이 나면 주로 오지에서 활동을 하는 편이예요.
사람들은 양이냐, 질이냐, 돈이냐, 보람이냐,
이렇게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각자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개인적인 관점보다는 세상에서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 하는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그런 관점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특별한 계기보다는, 제가 인도에 가서 불가촉 천민을 돕게 된 것은
제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인도 여행을 처음 갔을 때였습니다.
제가 밤에 물을 사러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구걸을 하면서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따라갔더니 조그만 구멍가게에 가서 아이 분유통을 가리켰습니다.
‘아 저걸 사달라고 하는 거구나’ 싶어서 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60루피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행을 오기 전 교육받을 때
‘절대 구걸하는 애들에게 1루피 이상 주면 안된다, 여기에서는 1루피도 큰 돈이다’라고
교육받았던 것이 생각나면서 60루피라고 하니까 굉장히 큰 돈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순간 깜짝 놀라서 사주지 않고 그냥 와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물을 두 병 사서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와서 안내해주던 교수님에게
60루피면 우리 돈으로 얼마나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2,400원이라고 했어요. 그 순간 저는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그 사람은 2,400원짜리 분유를 사달라고 하는데
그 순간에 나는 마치 내 전재산을 다 달라고 하는 것처럼 놀라며 와버렸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동안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면서 사회운동을 했거던요.
절에서도 맨날 중생 구제를 얘기해 놓고 직접 내 눈 앞에서 딱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이 돌아서 버린 겁니다. 그걸 보면서 제 자신에 대해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 때부터는 짐정리를 해서 옷도 남는 걸 다 나누어 주고 돈도 나누어 주고 그랬더니
아이들이 더 많이 몰려서 따라다니게 되고 그러니 같이 여행 온 사람들도 불평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시골 마을에 갔는데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어서
사탕을 꺼내서 주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히히’ 웃으면서 다 도망을 가버리는 겁니다. 그 때 제가 또 한번 충격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이 요구했지만 내가 못 준 것이 문제였는데,
다시 살펴보니까 가난하기 때문에 구걸하는 게 아니라 여행객이 뭐를 자꾸 줘서 구걸하게 된 겁니다.
이 시골에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구걸이라는 게 없는 겁니다.
준다고 하는 데도 부끄러워서 도망을 가니까요.
그래서 ‘주는 게 좋은 게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앞으로 절대로 안주는 쪽으로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마을에 갔는데 다리가 없어서 두 손을 짚고 움직이는 아이가
구걸을 하는데 제가 계속 안줬어요.
그런데 1km 이상을 계속 따라오는 겁니다. 그 때 제가 다시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 아이는 볼펜 하나든 껌 한통이든 사탕 하나든 얻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안 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이냐. 그건 또 전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이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였어요.
그래서 제가 ‘안주는 나는 반성을 하되 거지가 되지 않게 주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제가 불가촉 천민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우물을 파주는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잘못한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처음부터 베풀었으면 이런 생각도 못했겠죠. 꼭 잘못한 것이 나쁜 게 아닙니다.
잘못한 것을 잘못한 줄 알게 될 때는 그것이 더 자기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북한동포돕기를 하게 된 것도 중국에 역사기행을 다니다가 저를 안내했던 조선족 친구가
북한에 아이들이 굶어죽는다고 얘기했을 때 제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기 위해 압록강을 배를 타고 갔는데
거기 진짜 초라하게 앉아 있는 아이가 인도 아이들처럼 꽝 말라 있었어요.
큰 충격을 받고 그 아이를 불렀는데 고개를 안 드는 거예요.
인도 아이들은 박시시 하면서 난리인데 북한아이들은 조그만 아이도 벌써 교육을 받아서
외부 사람에게 구걸을 안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아이에게 가지고 있는 음식을 주려고 했지만,
여기는 국경이기 때문에 주면 안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제가 ‘국경이 도대체 뭐냐? 나는 새도 먹을 게 없으면 강 건너 저쪽에 가서 먹는데,
어떻게 사람이 저쪽에서 굶어죽는데 이쪽에는 음식이 많이 있고 나는 줄 수 있는 능력도 있는데
이걸 왜 못 주느냐. 국가라는 것은 다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만든 건데
왜 굶어죽는 사람을 못 돕게 하는데 국가가 작용하고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인도까지 가서 아이들을 돕고 있었는데 내 눈 10m 앞에 있는
북한아이에게는 도울수가 없는 거였어요.
그때 제가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것이 제 마음 속의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북한돕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이것도 제가 잘못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실제로 굶어죽으면 굶어죽는다고 아는 것이 진실인데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고집하게 되면 진실을 볼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불교의 용어는 많이 알아도 민중을 위한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로 자기가 경험하지 않는 이상은 하나의 공염불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제가 종교나 사회적인 일에 대해서 가능하면 실천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갖고 얘기를 하게 된 계기입니다.
질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는데 고민이 많이 해소된 것 같았습니다.
청중들도 박수로 화답합니다.
스님께서는 12명의 질문에 모두 답변해 주신 후 그 내용을 상기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정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재미있었어요? 공짜라서 더 재미있었어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얻는 기쁨은 일시적인 것일 뿐입니다.
기분은 좋지만 이러한 것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아여야 합니다.
남편, 아내, 자식에 대한 기대를 낮추면 만족이 높아지고 지속적인 행복이 옵니다.
욕망에 의해서 오는 것은 쾌락처럼 잠시 뿐입니다. 또한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면 지속적이 됩니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또 종속적이예요.
안으로부터 이미 행복한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이 훼손되지 않습니다.
지금의 즐거움을 위해 나중의 행복을 희생해도 안되지만,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도 안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셔도 안 되고, 너의 행복을 위해 나를 희생시켜도 안됩니다.
진리의 세계는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습니다.
그래서 늘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니깐 살아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지니면 몸과 마음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옵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정리말씀이 정말 좋네요
삶에 지침이 되는 말이네요
일부만 퍼왔습니다.
댓글 : 3 개
- 리미트브레이커
- 2014/11/07 AM 08:27
잘 봤습니다. 스크랩 할게요~
- 운수대통썸남
- 2014/11/07 AM 08:38
불교가 더 와닿는 점이 누굴 믿어라, 찬양해라, 이런게 아니라 실천하거나 행동하는 법(방법)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미트스핀스파게티
- 2014/11/09 AM 12:21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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