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륜스님 [글]] 즉문즉설 '나를 이기는 법'2015.11.10 PM 09:52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LINK : https://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0706

야단법석 책 속에서 밖의 100만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큰 장부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대목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부처님이 계신 건물 이름을 ‘대웅전’이라고 그러잖아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영웅보다도 부처님보다 더 큰 영웅은 없다.

즉, 가장 큰 영웅이라는 뜻으로 ‘대웅’ 이라고 하는데 붓다는 바로 자기를 이긴 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이겼다고 할 때 그 ‘자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의 까르마, 업(業)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그래서 이 업에 늘 끌려다니면서 살기 때문에 운명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만큼 고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운명론을 부정하시고

이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이것을 건강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이 방안을 무균 상태로 만들었다면 우리가 병들 이유가 없겠죠.

이것이 바로 천당, 극락이라고 말해지는 이상 세계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과 열반은 이런 무균 상태에서 건강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 어떤 세균이 들어와도 능히 이겨 낼 면역력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방안 뿐만 아니라 천하 어디를 다녀도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면역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해탈입니다.

아무런 장애가 없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어떤 장애가 벌어지더라도

내가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해탈입니다.

어떤 객관적인 상황을 두고 좋은 세상 나쁜 세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런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우리의 까르마가 경계에 부딪히면

그 경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까르마에 대한 충동적 반응이라고 그럽니다.

의식에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반응을 자기가 그 즉시 바로 알아차리면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어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진짜 자기를 이기는 영웅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자기 까르마를 아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수행일 것이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시죠.








화가 일어날 때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심리가 불편할 때 자기 상태를 딱 알아차려서 진정을 시키는 것입니다 .

‘너 또 욕심내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 마음을 자기가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러면 옆에 사람이 볼 때는 ‘저 친구는 화도 안 내고 욕심도 안 내고 사람 참 좋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화가 있고 욕심이 있는 줄을 잘 알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모르는데 나는 나를 압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넌 욕심도 없니?’ 라고 물으면

‘아니야. 나도 욕심이 있어.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사실대로 얘기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야, 저 사람은 겸손까지 하네’ 이렇게 얘기합니다. (청중 웃음)

이렇게 내가 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밖을 주시해서 알아차린다는 뜻이 아니고,

자신의 기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생각을 알아차리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기분이나 마음 작용은 무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이 잘 못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아주 예의주시해야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12연기에서는 ‘수(受)’, 즉 느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수’에서 맹목적인 충동으로 일어나는 것이 ‘애(愛)’ 즉 마음입니다.

마음은 감정입니다. 이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사랑과 미움은 남녀 간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고 싫고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죠.

좋으면 반드시 가지려고 하고, 싫으면 멀리하려고 합니다.

이 좋고 싫고 하는 감정을 12연기에는 ‘애’라고 합니다.

좋다는 것을 ‘갈애’라고 하고, 싫다는 것을 ‘혐오’라고 합니다.

이 좋고 싫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집착이 일어나요. 이 집착을 ‘취(取)’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고 싫고 하는 감정은 일어나지만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의지로 차단하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좋고 싫은 감정이 일어나지만 적어도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났는데 화를 안 내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 참게 되지만 압력이 쌓여서 나중에 폭발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발하지 않도록 계율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터지게 돼요.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도 큰 수행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킨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전 단계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선정을 닦기 위해서는 첫째,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야 합니다.

둘째, 집중을 해야 합니다. 셋째, 뚜렷이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즉, 아주 고요한 가운데 아주 뚜렷한 알아차림이 유지되는 것이 선정입니다.

이 선정에 든 상태에서는 느낌이 일어날 때나 마음에서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을

아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고요한 것만이 선정이 아니라 거기에는 뚜렷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선정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유지하려면 긴장이 돼요. 그래서 고요함을 놓치게 됩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해서 긴장을 하거나 애를 쓰게 되면 고요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를 악 다물고 하면 그것은 선정이 아닙니다.

선정은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한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졸리고 멍청해집니다.

그리고 망상이 치성해요. 온갖 잡념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온갖 잡념이 일어나고 졸리는 가운데도 뚜럿이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연습되면 상대를 보고 기분이 팍 나쁘면 벌써 자신이 감지를 할 수 있어요.

호흡이 가빠지거나 몸에 열이 나거나 하기 때문에

벌써 ‘너 화날 조짐이 보여’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화가 나면 ‘너 화 나고 있어’ 하고 바로 알아차려지는 것입니다.

화가 나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는데 이를 악 다물고 참는 것은 계율은 지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건 알아차림이 아니예요. 선정은 마음이 들뜨거나 상할 때 바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그 기분이 자연적으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는 방법은 첫째,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미 감정이 일어나버리면 그럼에도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기는 이기는데 자기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폭발해서 계율을 어겨버릴 가능성도 높고, 본인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괴롭습니다.

그래서 그 전 단계인 ‘알아차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선 느낌을 알아차리고, 느낌에서 놓치면 그 다음 단계인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감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통해서 저절로 감정이 조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해야지!’ 하는 의지를 불러일이키면 안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자기를 이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기게 되는 것이지 이기기 위해 이를 악 다물면 이기지 못합니다.








북콘서트를 마무리하면서 이주향 교수님이

스님에게 오늘 참석한 청중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스님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긍정적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권리를 제대로 행세를 못해요.

‘아이가 말을 안 들어요.’, ‘남편이 맨날 늦게 들어와요.’

이렇게 자기는 괴로울 수 밖에 없다고 이미 정해놓고 그 이유를 찾아요.

그런데 제가 듣기에는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별로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남편이 죽어서 울고 있는 한 도반의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을 하고 나서는

그 분의 귀에 대고 그랬어요. ‘당신은 좋겠소. 시집 한 번 더 갈 수 있잖아.’ (청중 웃음)

일반 사람 같았으면 뺨때기를 맞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도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가 있는 거예요.

죽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슬프지만,

결혼을 한 번 더 할 기회가 생겼다는 관점에서 보면 기분 좋은 일이예요.

결혼을 한 번 더 할 필요가 없겠다 싶으면 혼자 살면 되죠.

즉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거에요.

왜냐하면 스님은 결혼을 해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결혼을 한 번 해봤잖아요.

그래서 불행해 할 요소가 아니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불행하다고만 생각을 하거든요.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 이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있는 왕위도 버리고 출가를 했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원 떨어졌다고 해서 그게 괴로워할 일이예요?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보지도 못한 사람들도 수두룩 한데요.

재산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슬픈 일이예요? 아니예요.

어차피 부처가 되려면 있는 재산도 다 버려야 하는데요. 뭘.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일은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 일 자체는 공(空)이에요. 그 일 자체는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에요.

그 사람 자체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합시다.

내 쪽에서 보면 배신자이지만 그런데 상대편 여자가 볼 때는 더 진실한 사랑이 됩니다.

총각도 아니고 아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피해까지 감수하고

나를 사랑해준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냥 책 속에 있는 내용 따로 현실 따로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심이 깊지 못한 것입니다.

존재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금이라고 하면 금이 되고 똥이라고 하면 똥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분별이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괴로움이란 것은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면 즐거워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사물을 매사에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자기의 괴로움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스스로 중생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인이 되고 싶어요? 종이 되고 싶어요?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진짜예요? 테스트를 한 번 해볼게요.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저 둘 중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면 누가 주인이예요?

인사하는 사람이 주인이예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면 누가 주인이예요? 돈을 주는 사람이 주인이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인사를 하고 싶어해요? 인사를 받고 싶어해요?








인사를 받고 싶어해요.








돈을 주고 싶어해요? 돈을 받고 싶어해요?








돈을 받고 싶어해요. (청중 웃음)









거 봐요. 주인이 되기 싫잖아요.

내가 주인이 되기 싫어서 주인이 안 되는 것이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는데 못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에는 종이 되는 것이 좋아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못 되는 거예요.

부처가 되는 것이 어려워서 못 되는 것이 아니고, 되기 싫기 때문에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큰 바가지를 들고 빗물을 받아도 거꾸로 들고 있으면 물이 안 고입니다.

즉, 주인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행복하기 싫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행복해지는데, 사랑 받으려고 하면 내가 상대에게 종속되잖아요.

내 행복이 상대의 손에 달려있게 되잖아요.

상대에 따라서 내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잖아요.

그래서 사랑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도움 받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어라. 이해 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해해라.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무슨 억한 심정이 있어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겠어요?

우리 자신을 가장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거에 사생아로 태어났든, 고아로 자랐든,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든,

사업에 실패했든, 자식이 없든, 자식이 먼저 죽었든, 누가 돌아가셨든,

그 수많은 경험을 겪고도 여러분들은 지금 살았어요? 죽었어요?








살았어요.








살아있는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자식이 죽었다고 해서 불행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나의 자유와 행복은 다른 누구에게 양보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도 주인이 될 권리, 행복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수정해서 잘라왔으니 원본을 보시려면 링크를 따라가세요.
댓글 : 2 개
재밌게 봤습니다.
루리웹에서 법륜스님을 뵈니까 반갑네요 ㅎㅎ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