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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글]] 즉문즉설 '손자 손녀들아, 나는 그 때 통일의병이었단다.'2017.06.06 AM 10:02
이른 아침 전국에서 통일의병 티셔츠를 입은 정토행자들이 경주 태종무열왕릉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오늘은 제 5차 통일의병 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오후에 실내에서 진행될 통일의병 대회에 앞서
오전에는 이번에 새롭게 임명될 통일의병들과 경주 역사기행을 함께 했습니다.
이번이 벌써 5번째 행사이지만, 법륜 스님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새롭게 선발된 통일의병들을 맞이했습니다
평소 통일의병 역사기행은 법흥왕릉 앞에서 시작된 반면에 오늘은 무열왕릉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 때문입니다.
지난 50년간 우리가 일구어 온 삶의 성과인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지난 50년간 발전한 토대 위에 앞으로 더 발전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였습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은 과거에 이런 위기와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기회를 잡았는지 배우기 위해서 우리가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신라 법흥왕 당시의 교훈을 이야기했습니다.
법흥왕은 신라와 금관 가야의 평화적인 합의 통일을 이끌어내며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왕입니다.
당시 신라와 가야는 역사적으로 철천지 원수의 관계였습니다.
신라의 국력이 나날이 강해져 가야를 앞서게 되자 법흥왕은 가야와 평화롭게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당시 신라 내부에서는 금지하고 있었으나
가야에서는 국교와 다름없던 불교를 공인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또한 금관 가야의 왕족들을 모두 신라의 왕족 안에 그대로 받아들여 신분을 유지해주기로 약속을 합니다.
이런 폭넓은 포용 속에 신라는 피 한 방울 흘리질 않고 가야와 통합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만일 지금 우리 국민들이 통일을 위해 북한의 공산주의 활동을 먼저 허용하고,
북한 지배층의 신분을 이후에도 그대로 인정해줄 수 있겠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열릴 준비가 된 만큼 통일이 가능하다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이후 통일의병 일행은 황룡사지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고등학생 시절 출가했던 분황사 앞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뒤,
차에서 내려 바로 앞 황룡사지까지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넓은 황룡사지 터 중앙에는
이미 펄럭이는 깃발을 든 통일의병 기수들이 일렬로 서서 새로운 통일의병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쾌청한 하늘, 드넓은 벌판에 줄 지어 모여드는 통일의병들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신라는 당시 빈번하던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극복하고 삼한의 통일을 기원하며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웠습니다.
스님은 오늘날 우리 역시 밖으로는 미국·북한의 대립과 미국·중국의 경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안고 있고,
안으로는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신라인들이 국난을 극복하려 9층 목탑을 세웠듯이
우리도 이곳에서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하자고 했습니다.
이어서 법륜스님의 통일 발원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신라인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황룡사 9층탑을 짓고 국난위기 극복을 발원하였듯이
저희 또한 오늘 이곳 황룡사 9층탑 앞에서
한반도가 전쟁위기에서 벗어나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신라인들이 국난위기를 삼한 일통의 기회로 삼았듯이
우리 또한 오늘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이 간절한 발원이 불보살님들과 천지신명님들의 가피를 입어 성취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제불보살님들께서는 오늘 저희 정토행자 통일의병의 이 간절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시옵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발원 기도를 마친 후 통일의병들은 2줄로 길게 줄을 서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황룡사 9층 목탑 주위를 돌았습니다.
간절하게 염불을 하며 탑돌이를 하니 지금은 터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탑돌이를 한 후 통일의병들은 황룡사지 터에 있는 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하였습니다.
대중들이 한 번에 움직이기에는 인원이 많은 터에 그룹을 셋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구역에서 돌아가며 관람을 했습니다.
스님은 한 그룹과는 9층 목탑을 1/10 비율로 복원한 모형을 살펴보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그 와중에 다른 두 그룹은 영상관과 2층 전시실에서는 황룡사가 소실되기 이전 예상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이처럼 장엄한 건축물들이 외침으로 모두 소실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목탑과 금당을 복원하는 것은 스님의 오랜 꿈이기도 합니다.
셋으로 나눈 각 의병 그룹의 차례마다 스님은 좁은 공간 안에서 이동 동선까지 고려하여 세심히 안내를 해주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머지 대중들의 진행상황을 살피며 관람을 진행했습니다.
박물관에서 관람을 마친 후 통일의병들은 4열로 맞추어 선덕여왕릉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청명한 하늘과 따갑게 내려쬐는 햇볕 속에 꽤나 오랫동안 행진한 신참 통일의병들은 힘들 법도 했지만,
“이 정도 행군으로 지치면 의병 자격이 없다”는
스님의 농담에 모두들 웃으면서 통일 노래를 불러가며 즐겁게 걸어갔습니다.
4차선 차로를 건널 때는 300명의 통일의병이
한꺼번에 일사분란하게 건너야 해서 경찰 분들의 교통 통제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슨 작전이라도 벌이듯 때를 기다리다 일시에 건너가니 다들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의병들은 먼저 그늘에 앉아 점심식사를 한 뒤
다시 하나로 모여 국난을 극복한 선덕여왕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임금인 선덕여왕의 릉입니다. 선덕여왕은 삼한 일통을 발원한 임금입니다.
그러나 선덕여왕 당대에는 통일을 못 했고요, 결국은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4대를 내려가서 통일이 완성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선덕여왕릉 바로 앞에 사천왕사가 생기게 된 설화를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선덕여왕이 대신들을 불러놓고 내가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을 거니 내 시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얘기했어요.
갑자기 아무 날 아무 시에 죽는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도리천에 어떻게 묻어요?
그래서 다시 물었더니 이 낭산 정상에 묻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여왕이 죽어서 시킨 대로 이 산꼭대기에다가 무덤을 썼습니다.
그러고도 도리천에 묻어달라는 말이 이해가 안 갔어요.
그러고 나서 30년 가까이 지난 뒤에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이 붙었는데,
사람의 힘으로 못 이겨서 불보살과 신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이곳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짓고 보니 선덕여왕릉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도리천이 된 거예요. 우주의 중심에 수미산이 있고,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수미산 중턱에 사왕천이 있고, 그 밑에 인간이 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 밑 산기슭에 사천왕사를 짓고 보니 이 곳 산꼭대기는 도리천이 되고, 낭산은 수미산이 된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걸 우리가 유추를 해보면,
선덕여왕은 삼국 통일을 발원하며 국난 극복을 위해 황룡사 탑을 세운 것도 그렇고,
앞으로 통일 전쟁의 과정에서 이후 신라하고 당나라가 싸울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했다고 할 수도 있어요.
사람의 힘으로 못 이기면 신들의 힘을 빌려 사천왕사를 짓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측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당나라가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번에는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고,
당나라에서는 신라를 치기 위해 20만 대군을 서해바다로 보냅니다.
그러자 사천왕사에서 고승들이 문두루 비법을 행하였고, 폭풍이 몰려와 당나라 대군이 모두 침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도대체 신라에 뭐가 있어서 보호가 되는지 궁금해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와봤더니 ‘경주 남산에 있는 천룡사라는 절의 호국 용이 신라를 보호하고
있어서 천룡사가 흥하면 신라가 흥할 거고, 천룡사가 망하면 신라가 망할 것이다’ 라고 얘기했다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흐르면서 신라 말에 천룡사가 망하니 정말로 신라가 망했고,
결국 고려 초에 최제안에 의해 다시 복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려 말에 다시 천룡사가 망하자 고려 역시 망했어요.
그래서 조선 초에 무학대사가 다시 천룡사를 복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선 말에 유생들이 천룡사에 불을 질러 버렸고, 조선 역시 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용성 스님이 ‘여기 천룡사를 다시 복원을 해라.
그럼 통일된 대한민국이 앞으로 800년은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중 박수)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의 문을 연 선덕여왕릉 앞에 서서 삼배를 드린 후
통일의병들은 바로 앞 사천왕사지로 이동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신라 고승들이 외세인 당나라 대군의 침략을 막아내는 문두루 비법을 행했듯이
우리는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주변 강대국들의 장애를 이겨낼 수 있도록 기도를 합시다.”
스님의 말에 모두들 동그랗게 둘러앉아 진언을 염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언을 외운 후,
법륜 스님의 발원이 이어졌습니다.
“제불보살님들이시여! 오늘 저희 정토행자 통일의병은 이곳 사천왕사 터에 둘러앉아 간절하게 발원하옵니다.
남북이 전쟁 없이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과 미국과 러시아 등 동아시아 지역이 평화를 유지하며 공동으로 번영하기를 발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통일되고,
통일된 한국이 중심이 되어야 주변 나라들이 서로 손을 잡고 공동번영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새로운 아시아 시대가 도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정토행자들은 한국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지역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되어야 함을 알기에 이렇게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저희의 이런 간절한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께서는 부디 감응하시와 옹호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와 같이 통일의병에 참여하고 이와 같이 사천왕사에서 발원한 공덕으로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통일의병 대중 일동의 과거의 업장이 녹아나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사천왕사지에서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은 통일의병들과 함께 의병대회가 열릴 동국대학교로 이동했습니다.
지하에 있는 대강당의 좌석이 가득 메워진 가운데,
선배 통일의병들의 축하 공연과 신규 통일의병에 대한 임명장 수여가 진행됐습니다.
앞선 역사기행에서 일정이 1시간 이상 연기되어서 임명장 수여는 한 번에 진행됐습니다.
스님 : “임명장 드립니다!”
대중 : “잘 받았습니다!”
이후 스님은 통일의병이 가져야 할 의병정신에 관하여 법문했습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 멸망하자 우리 선조들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 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 의병이 바로 다물군이고, 그 다물군은 우리 역사의 최초 의병입니다.
그 다물군의 일부로 참여했던 주몽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그게 고구려이고,
그 고구려, 고려가 지금 코리아(Korea)의 어원이 된 겁니다.
그 이후에 조선시대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 가버려서 나라가 풍전등화같이 되었습니다.
이 때 또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왜병에 저항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임진의병입니다.
또 조선말에 국운이 기울자 일본군이 이 땅에 들어와서 을미년에 명성황후를 시해했는데,
임금이나 관군들은 일본이 무서워서 항의도 제대로 못했지만
백성들은 의연히 의병을 일으켜서 대항했습니다.
또 정미년에 군대를 해산시키자 거기에 저항해서 의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기울어진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일으킨 것이 한말의 의병입니다.
그러나 결국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이제는 독립군으로 변신해서 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우리 의병의 역사는 깁니다. 또 민족사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고구려, 발해 멸망 이후로 천년 만에 가장 국력이 커진 상태입니다.
남한만으로도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될 정도로 커졌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발전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더 발전하기는커녕 지금 미중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해서 남북한 사이의 갈등도 심화되면서 자칫 잘못하면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가 일궈놓은 이 성과를 순식간에 허물어버릴지도 모를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또 더 이상 남한만으로는 발전을 지속할 수 없다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천년 만에 온 기회를 발판으로 해서 더 나아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더 나아가고 싶다면, 우리에게는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국운을 일으켜보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의병들은 한반도에 먹구름처럼 닥쳐오는 이 전쟁의 기운을 막아내고,
한반도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는 통일코리아를 염원하고,
우리가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을 전개하자는 뜻에서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도록 확고한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둘째, 그것을 딛고 통일을 완성해야 합니다.
셋째, 통일 대한민국은 이웃나라와 갈등하지 않고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큰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를 전쟁에 휘말리게 할 것이고,
이것은 또 세계평화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통일은 우리 민족,
우리 겨레에만 이익이 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에게도 이익이 되고, 덕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활동은 우리 민족만 잘 살면 된다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중심이 되어서 주변국과 세계인류가 평화로운 번영의 길로 나아가도록 한다는,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평화운동, 통일운동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한번 해 내자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통일은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호만 외친다고, 노래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의 정책적 판단이 필요하고, 정부의 정책적 결정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와 정부가 통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서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정부를 직접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국민의 권력을 위임할 정부는 우리의 염원을 담은 통일정책을 과감하게 밀고 나갈 정부여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두 정부가 통일에 대해서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정부였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로서는 통일의 기회를 많이 놓친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 냈고,
새로운 정부는 이전 정부들보다는 훨씬 더 평화적이고, 통일지향적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라는 정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강력한 염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전 정부에 비하면 훨씬 낫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부터 새 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문제는 하나의 정부에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통일의 물꼬를 트는 일 뿐만 아니라 통일을 추진해야 하고,
또 통일된 뒤에도 통일국가를 완성해야 할 임무가 정부에 있기 때문에 통일은 시간이 좀 걸리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주인으로서 그런 통일을 추진하는 정부가 구성될 수 있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일원으로 참여하신 겁니다.
통일의병은 적어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자기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 라고 발심하는 수준은 되어야 해요.
오늘 이 자리에도 남이 가자고 하니 그냥 따라와서 의병이 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지금 제가 강의하는 중에도 조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모두 웃음)
방금 이야기 들어보니까 ‘다리 아파서 못 걷겠다’ 라고 불평하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원래 의병은 자기 옷 자기가 입고, 자기 무기 자기가 구해 들고, 자기 먹을 것 자기가 들고 오고,
자기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지면 그냥 죽고, 이기면?”
“집으로 가야 돼요.”
“예, 집으로 가야 돼요.(모두 웃음) 아시겠지요? 아무런 보상이 없어요.
전쟁에서 졌을 때 관군이 죽으면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 이기면 승진이라도 하지요.
관군한테는 국가에서 지위도 주고, 무기도 주고, 식량도 주고, 훈련도 시켜주고,
관군의 가족들한테는 보훈 혜택도 주고 그러는데도 막상 자기가 죽을 것 같으면 싸우다가도 도망갑니다.
그런데 의병은 자기 밥 자기가 해먹고, 자기 옷 자기가 해 입고,
자기가 쓸 무기는 스스로 구해서 자기 목숨 걸고 싸우다가 죽으면 대충 묻히고,
이기면 집에 돌아가서 본업을 계속 할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의병이라는 용어를 쓰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런 칭찬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통일을 위해서 일하고 싸울 뿐이에요.
이런 인식을 여러분들이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으로 살아왔는지,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러분들은 아셔야 돼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당시에 일어났던 의병의 깃발을 가지고 이렇게 모인 거예요.
앞으로 ‘촛불혁명’의 깃발도 하나 넣어야 되겠지요?” (모두 웃음)
“예!”
“우리가 통일의병을 시작했을 때는 아직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전이라서 그 깃발을 미처 만들지 못했던 것인데요.
우리 하나하나의 힘은 약하지만 그런 우리가 힘을 합하면 우리가 원하는 일을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예!”
“그래서 우리는 역사의 선배님들을 훌륭하다고 칭찬만 할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자는 게 아니에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역사적 사명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자는 겁니다.
그래서 통일된 뒤에 여러분들께서 80세, 90세가 되었을 때
손자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 뭐 하셨어요?’ 그러면 ‘야, 나 그때 의병이었다.
티셔츠 보여줄까? 배지 보여줄까?’ 하세요.
그런 정도는 되어야 할 거 아니겠어요? (모두 박수)
우리가 하는 활동은 선조들께서 하신 일에 비해서 어려운 일도 아니고,
또 실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선조들께서 하신 것보다 더 훌륭하게 역사에 기여했다고 기록될 수도 있어요.
대한민국이 통일대한민국이 된다면 아마
‘최고로 역사에 기여한 것이 통일의병들이었다’ 하는 새로운 역사를 우리가 만들게 될 겁니다.
그런 희망을 갖고 우리가 오늘 의병으로서 출발하는 겁니다.
특히 이번 5차 의병대회는 처음으로 해외에서도 30여 분의 의병들이 참여하셨습니다.
의병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기 때문에 제가 원래 의병 임명장을 한 분 한 분께 직접 드리는데,
오늘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늦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모두 박수)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긴 하루를 보낸 스님은 북한에서 오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경주에서 다시 차를 타고 서울에 위치한 장례식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내일은 새벽 일찍부터 문경에서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이 있고,
이후에는 신규 법사 교육 입재식이 있습니다. 내일도 또 찾아뵙겠습니다.
'이런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하고 신기해서 같이 구경하자는 맘에서 올려봅니다.
- 해리키위
- 2017/06/06 AM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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