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성게] 법성게(2)2018.01.24 PM 01:09
URL : //mypi.ruliweb.com/m/mypi.htm?nid=725132&num=7218
법륜스님 본지발행인
내가 그 생각을 일으켰다
우리가 보통 옳다 그르다고 할 때 잘 살펴보면 다 자기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객관성의 근거로 국민의 이름이나 마을 사람의 이름으로,
또는 윤리와 도덕·법률을 들먹입니다.
그러나 근거로 대는 법률이나 윤리·도덕이 객관성을 보증할 만큼
충분히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깊게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지요.
한쪽에서는 법률이 정당하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그건 악법이라 정당성이 없다고 합니다.
또 한쪽에서 윤리와 도덕이 이렇다 하면 다른 쪽에서는 고지식한 따분한 소리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옳고 그르다는 시비(是非)는 자기관념을 중심으로 해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관념은 변하지 않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지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부부싸움의 예를 들어봅시다.
조그만 집안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이 먼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덩달아 아내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지요.
“그만한 일로 왜 화를 내느냐” 하면서 자기도 화를 냅니다.
또 어떤 때는 ‘아이고 참지, 또 시끄러워지니까.’ 하고 마음먹으면서 참기도 하지요.
그런데 생각은 이렇게 돌아가요.
‘아니, 저 사람이 며칠 전에도 그랬고,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 또 그래?’
하면서 생각이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성질이 더 나지요. ‘한 번 같으면 참겠는데 벌써 몇 번째야?’
이렇게 생각이 미쳐서 확 쏘아붙이려다가 ‘아이고, 마 참아야지.’ 하고 또 참습니다.
이러는데 생각이 또 어디로 가요? 이번엔 미래로 가요.
‘저거 내버려 두면 내일 또 저럴 거 아니냐?
앞으로 계속 저럴 테니 이번에 딱 고쳐야지,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이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 나쁜 것이 점점 자랍니다.
과거를 먹고 미래를 먹고 자라요.
이번이 몇 번째냐. 저거 내버려 두면 앞으로도 계속 저럴 거 아니냐.’는 말은 뭘 뜻합니까?
내 생각이 객관적으로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바탕 싸우죠. 목소리가 커집니다.
아내 목소리가 커지면 남편도 안 지지요.
그러다가 ‘이 여편네가 어디다 대고...’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이제는 생각이 어디로 미치냐? ‘여자라고 무시하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봐주려 했는데 이거 도저히 안 되겠네.’
자기 혼자의 문제에서 모든 여자에 대한 문제로 생각이 돌아가면
모든 여성을 대변해서 이번 기회에 저 남자의 사고방식을 뜯어고치는 게 좋겠다가 됩니다.
여성을 대변하니까 이제 더 큰 소리가 납니다.
이러면 남편이 뭘 집어던지든지 하게 되죠.
그러면 애들이 나와서 울거나 합니다.
상황이 이 정도로 되어 애들 앞에서 모욕받았다는 생각이 들면 이번에는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애들 교육상 참으려고 했다가 싸움이 일단 커지면 어떻게 생각이 돌아가느냐?
‘이거 놔두면 애들 교육상에도 나쁘겠다.
아빠가 하는 저 꼴을 애들이 혹시 잘못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애들 교육을 위해서도 남편의 행동을 뜯어고쳐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미쳐요.
이렇게 자꾸 생각이 자랍니다.
이 과정은 뭘 의미하죠? 내가 옳다는 겁니다. 객관성이 확보되면 될수록
내가 옳다는 확신은 더 강해지고 목소리도 더 커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사와 민족,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냥 둘 수가 없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겁니다.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아니면 순교라도 해야 하지요.
목소리가 커지고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고 여자가 욕을 하고 그러면 남자는 주먹을 날리고.
여자가 악이 복받치니까 ‘날 죽여라.’ 고 나옵니다.
이렇게 상황이 발전하면 숨죽이고 지켜보던 애들까지 나와서
‘엄마, 아빠’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웁니다.
이쯤 되면 이웃집에 알려질까 봐 창피해 하던 것은 이미 사라지고
이웃 사람은 이미 안중에 없습니다.
싸움이 커지면 이웃집에서 창문을 열고 보는 구경꾼이 생깁니다.
그런데 구경꾼들은 이 싸움을 보고 무슨 생각하겠어요?
‘어이구 어리석은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네. 자기 마누라 때리고,
자기 살림 깨고, 자기 남편 욕하고, 자기 아이들 교육에도 나쁘고,
집안 망신시키고...’백 가지 해만 있지 한 가지의 이익도 없다는 것을
담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훤히 알게 되지요.
부처님 법은 문자나 어떤 모양에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그것을 고집하는 것을 ‘아집(我執)’이라 하지요.
담 너머에서 구경하는 것과 같은 것을 ‘아집을 버렸다,
아상을 깼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모든 것이 자기가 생각을 일으켜서 만든 것인데도
이걸 객관화시켜 마치 이 세계에 실제로 그런 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상(相)이라고 하지요.
육조 혜능대사께서는
내 가르침은 무념(無念)-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으로 종을 삼고
무상(無相)-모양 짓지 않는 것-으로 체를 삼고,
무주(無主)-집착하지 않는 것-로 근본을 삼는다고 말씀하였어요.
핵심은 뭐냐? 모양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생각을 일으켜 짓는다는 것,
그것을 알라는 겁니다.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 ‘내가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일으켰다’고 보라는 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게 본래 아름다워서
그걸 보고 아름답다고 알게 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전도몽상이라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해 보면,
원효 대사께서 당나라로 유학 가는 길에 동굴에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었는데,
전날 밤에는 어두워서 그 바가지가 해골인 줄 몰랐어요.
그때 그 물맛은 꿀맛이었어요.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날이 밝아 그 사실을 알자마자 구역질을 했어요.
만약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 본래 더러운 것이라면 왜 엊저녁에는 구역질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것을 통해 바로 깨달으신 겁니다.
깨끗하다 더럽다는 것이 그 물 자체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에 있구나,
내 생각이 지은 것임을 알았어요.
이미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불교 가르침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것을 스스로 체득한 것이지요.
깨달음이 인도나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어리석은 내 생각,
그 망상을 깨는 데 있음을 아신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신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셨어요.
참모습은 움직임 없이 고요할 뿐
우리는 물거품이나 그림자를 보듯이 꿈을 꾸듯이,
환청이나 환각 상태에 있는 것처럼 사물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존재의 참모습에는 어떤 모양이 없습니다.
법의 참 성품은 둥글고 두루 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어요.
시비분별은 다 내가 일으키는 생각이지, 존재 자체에 그런 시비분별이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속의 시비분별이 끊어지면 제법은 그대로 여여하고 청정합니다.
본래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어서,
더러운 것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취해서 청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거 더러운 것이 본래 없는 줄을,
그것이 다 내가 일으킨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제법이 본래 청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다시 말해 내 마음속의 분별이 끊어지면 이 세계가 바로 있는 그대로 ‘청정 불국토’라는 것입니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더),
존재의 참모습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 고요하도다.
이 말은 더러워졌다가 깨끗해지고 깨끗해졌다가 더러워지고 하는
이것은 내 생각이 바뀐 것이지 실체의 존재 자체에 더러운 것,
깨끗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전에는 남편의 행동이 참 나빴는데 자꾸 잔소리했더니 이제는 집에 일찍 일찍 들어와요.
그래서 저 사람이 전에는 나빴는데 요즈음 좀 착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남편이 나빴다가 착해진 게 아닙니다.
남편이 선했다가 악했다가, 악했다가 선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실상은 여여한데 그것을 바라보는 부인의 생각이 바뀐 거지요.
약이다 독이다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인삼의 경우, 과학적인 분석을 해 보면 무슨 무슨 성분이 있어서 약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몸이 허약한 사람이 먹을 경우는 보약의 구실을 하지만,
몸에 열이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해롭습니다. 그
러므로 인삼 성분 자체는 약이라 할 것도 독이라 할 것도 아니에요.
어떤 조건에 처했을 때는 약성을 나타내고,
어떤 다른 조건에 처했을 때는 독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렇다고 약이 됐다가 독이 되거나, 독이 됐다가 약이 되거나,
약이기도 하고 독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의 존재로 어떤 인연에서는 약 구실을 하고
어떤 인연에서는 독 구실이 되는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본래 독이라든가 약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이로운 쪽으로 작용하면 약이라 하고,
불리한 쪽으로 작용하면 독이라 이름 지어진 거지,
인삼이란 존재 자체에 따로 약이다 독이다 할 만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에게 약이 된다 해서 반드시 미국 사람에게도 약이 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저 히말라야 산맥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해조류를 못 먹기 때문에 몸에 필요한 요오드가 상당히 모자라요.
그래서 요오드 결핍으로 신체 불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만약 그 사람들이 미역이나 김 같은 것을 먹고 몸의 기능이 회복되면
그 사람들에겐 김이나 미역이 보약이 됩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김이나 미역을 매일 먹고 있으므로 그것이 보약이 될 수가 없지요.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은 굉장한 양약입니다.
그러나 배가 부른 사람이 권유에 못 이겨 밥 한 그릇을 더 먹어 탈이 나게 되면 독이 되는 거지요.
밥 자체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닙니다.
본래 여여한 것이지요. 제법은 변하지 않아요.
그래서 본래 고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법성게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일중일절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時無量劫)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化)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현대인경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