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조선의 왕들(추가)2011.08.20 PM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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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1. 무인 출신으로 호탕하면서 소탈했다. 왕이 되던날 아침밥이 물에만 밥 한그릇 이었다고.


2.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보니 등에 서까래 3개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되기 때문.


3. 능은 구리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인데, 처음 죽기 전에 "나를 고향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함흥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는데, 잔머리 대왕 태종은 여기서도 머리를 써서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4. 무용에 대한 일화만큼이나 활실력이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성계가 활로 성안에서 농성하는 원나라 병사 70명의 얼굴을 맞춰 성을 버리고 도주하게 만들었다는 일화와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아기바투)의 투구를 활로 맞춰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정사인 고려사에 실린 내용이다.


5. 돼지띠다. 민간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곤 한다. 꿈에서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꿈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다.



태종


1. 조선왕들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 공무원 출신 왕. 태조(이성계)는 "군바리 집안의 한을 풀었다" 며 태종의 임명장을 몇번이고 읽게했다.


2. 세종대 이루어진 쓰시마 정벌은 상왕에 있었던 태종의 지시에 의한것.


3. 머리가 비상하고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으며 산전수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했다.


4. 종친 조대림이 무고한것을 알고 있음에도 역모를 꾀한다는 소리를 해 맹사성으로 하여 곤장을 때리게 했다. 후에 무고한 종친 곤장때린 죄로 맹사성에게 사형을 내려 목에 칼 닿기 직전에 살려줬다.(...)


5. 진정한 논쟁의 달인으로 참모로 활약한 하륜등 모두 데꿀멍시키는 엄청난 포스의 소유자. 말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도 서슴지 않았으며 방대한 지식으로 인정사정 안 봐주는 독설가였다.


6. 사냥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고." 라고 하거나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 지랄이셈?" 등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 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말로는 이겨먹을 수가 없다….


7. 상왕이 된 후에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壽康宮)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에 편안할 강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 그런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송나라 광종이 6년간 유폐되었다가 죽은 궁 이름이잖아. 그런 이름을 왜 내 궁에 붙이는 건데? 이거 <송감>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야"라고 면박을 주었다.


8. 사관에겐 약했다. 몰래 사냥나갔다가 "지금 사냥 온거 사관들이 아냐 모르냐?"고 끊임없이 물어봤을 정도. 사냥에서 낙마하자 "이거 사관이 적지 못하게 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낙마한 사실은 물론 그 말까지 그대로 실록에 적었다(...) 이 기록은 실록과 사관의 위대성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다.


9. 자식에게도 약했다. 자신이 직접 폐세자 시킨 양녕대군을 신하들의 끝없는 반대에도 싸고 돌아 왕실에 거주하게 했으며 폐하던 날에는 하루종일 울어댔다. (황희는 내쫓았으면서...) 이는 양녕위로 자식이 3명이 더 있었으나 어린나이에 죽어버렸고, 양녕을 감싼것도 자신이 직접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0. 즉흥적인 면모도 있어서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에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 그 외에 노련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대단히 뛰어났다.


세종


1. 조선시대 왕은 신하(이면서 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는 '경연'을 자신이 신하를 가르치는 자리로 바꾸어 버렸다.


2. 공직에 오른 신하들 다수는 당연히 공부를 멀리하게 되지만, 경연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안하면 대왕이 '니깟놈이 뭘안다고' 하는 식으로 깠다고.


3. 흔히 집현전 학자들과 만들었다고 알려진 한글은 사실 대왕의 독자적 프로젝트였다. 집현적 학자들은 소장파 만이 나중에 만들어진 훈민정음으로 한자 정리하는 작업에만 참여했고 실제적인 작업은 세종. 문종. 세조. 안평대군 넷이 했다고 한다.


4. 스스로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도 강해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반대 상소 올리자 "설총은 옳고 임금인 나는 옳지 못하냐? 니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며 신랄히 까고 반대하는 신하들을 감옥에 하루 가둬버렸다. 최만리는 파직.


5. 육식매니아. 태종이 죽을때 "내가 죽어도 충녕에게 고기반찬을 먹게하라" 라고 할정도. (당시 3년상 기간엔 고기 금지)


6. 4군 6진중 4군은 실패. 억지로 이주시킨 사람들이 죄다 죽었다.


7. 물물교환 경제 였던 조선을 화폐경제로 바꾸려 했지만 실패했다. 유통망과 장시의 부족이 원인.



세조


1.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그렇지 않은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면 겨울날에 사냥갈 때에도 가벼운 여름 차림으로 사냥을 다녔다고 하고,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 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세종과 문종 앞에서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2.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3. 군주로써의 책임감과 자의식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세조의 후궁은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뿐


4. 과거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시절에는 묘하게도 그를 국가의 백년대계를 염려한 나머지 악역을 자처한 혁명가로서 해석하는 시각이 득세하기도 했다. 목적은 당근 정권 정당화.


5. 현재 공주의 남자에 나오는 세조 캐릭터가 역대 세조 캐릭터 중 가장 미화가 덜하고 실제 세조와 가장 가까운 캐릭터이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넘치며 정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것. 특히나 정적이나 친족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역대 사극들의 세조와 가장 다른 점.


6. 야사 용재총화에는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 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인조


1.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내려간 건 인조 시기부터.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인조의 집권세력은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성리학적 종법질서를 강화해 내부의 반란을 방지하려 했다.


2. 한 짓을 보면 과연 어질(仁)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들인 효종이 신하들이 올린 열종(烈宗)이란 묘호에 발끈하여 이런 묘호가 올려졌다.


3. 선조 Ver 2. 이런저런 병크 때문에 특별히 많이 까이는 왕이기도 하다. 신하관리 잘 못해서 반란이 일어났지(이괄의 난), 피난 자주했지, 외적들이 처들어와 혼란에 빠트렸지(정묘호란), 오랑캐에게 무릎 꿇었지(병자호란)


4. 친아들인 세자를 미워하여 결국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배후로도 지목되고 거기에 그 일가를 박살냈다. 따지고 보면 선조보다 더하다는 말도 있다. 애당초 집권 자체가 유혈 쿠데타였던데다 집권 중 며느리와 손자들을 손수 죽였으니 최소한 친족들 피는 안 본 선조보다도 더하다. 적어도 선조 때에는 신하들 능력은 좋았고 선조는 그나마 임진왜란 전까진 무난한 군주였다.


5. 적자계승의 원칙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세손이 되어야 하나 이걸 무시하고 차남 효종(당시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며느리(강빈)까지 역모를 꾀했다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신하들이 소현세자의 자녀들을 강조하여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소현세자의 자식들을 개새끼(구추狗雛)라고 칭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숙종


1. 성질이 매우 같았다고 한다.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해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대비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지랄발광을 하자 빗등으로 머리를 패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2.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 원자(원손)-세자-왕 테크를 제대로 탄 거의 유일한 왕이다.


3. 왕위에 정통성(정비의 장남 이면서 왕위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오름)이 강해 왕권이 매우 강했다. 스스로 환국을 유도해서 신하들에게서 살았을때 존호를 받았다. 죽은후에 올리는게 보통인데...신하들이 벌벌 떨었단 소리.


4.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두 번째로 긴 임금이다(1674~1720. 45년 10개월). 참고로 1위는 영조(1724~1776, 51년 7개월) 3위는 고종(1863~1907, 43년 7개월), 40년 재위한 선조가 4위.


5. 송시열을 싫어했다. 숙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숙종을 임신했을때가 효종의 초상기간 이었는데 송시열이 "상중의 임신은좀..." 하며 태어나지도 않은 숙종을 디스한것. 이후 명성왕후는 송시열이 왕실에 한소리 하기만하면 "저 놈의 영감탱이는 네가 태어났을 때 부터 어쩌구"하면서 송시열 디스에 열중했다고 한다.


6. 조선의 헨리 8세. 드라마 "동이"에서의 깨방정 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비정했다.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아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을 15살 때 귀양 크리 태우고 29살 때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다. 인조, 효종, 현종의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은 "어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인현왕후와 장희빈등 자신의 아내들을 이용해 경신.기사.갑술환국을 일으켜 신하들을 떼죽음 시켰다.



영조


1, 왕권이 약했다. 즉위전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진상한후 경종이 먹고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음식 궁합을 이용한 독살설에 시달렸다. 소론 강경파는 영조에게 "신은 몇 년 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을정도. 실록에도 나온다.


2. 즉위과정의 불안함으로 인해 왕위에대한 집착이 강했으며 그로인해 변방의 군사를 시찰하러 가려는 사도세자를 의심해 반역죄로 죽여버렸다.


3.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 채식 위주의 식단이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즐기고 장수하지 못한 세종과 대비된다. 특히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4. 성격이 변덕이 심하며 강퍅하고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 잘못된 점을 신하가 간하자 곧바로 울며불며 뛰쳐나가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이대로 빠져 죽겠다고 엉엉 울어댔다고 한다.


5. 죽음을 앞두고 정조 왕위 계승시 보여준 모습은 공포 그 자체. 신료들을 모아놓고 세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하자 홍인한이 반대하자 밖을 보라고 하니 칼을 뽑아든 갑사들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말안들으면 다 죽여버리...) 후덜덜 그 이후로는 다 데꿀멍. 순식간에 세손의 왕위계승이 확정되었다.


6. 영조의 쌍커플지고 길쭉한 눈과 오똑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 미인상이였다. (정작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아름답지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 여담이지만, 가슴이 큰 여자도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



정조


1. 태종, 세종과 비슷하게 신하들을 까댔다."공부좀 하시오." "경들에겐 배울것이 없다"고 경연을 폐지. 자신이 관리를 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했다.


2. 세손시절 노론의 암살기도에 시달린 탓에 무예를 익혀 매우 뛰어났다. 화살 50발중 48, 49발씩 맞췄다. 나머지는 신하들 기죽을까봐 안맞췄다고.


3. 조선시대 왕중 언쟁 능력은 최강급.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 라고 조롱했다.


4. 성격이 불같았다. 신하 심환지 와의 편지에서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진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 "호로자식" 등 욕설이 많이 쓰여있다.


5. 다른 편지에는 한자로 쓰다가 너무 격해져서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갑자기 한글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 되었을 때는...)라고 쓴 표현도 있고 어떤 편지에는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요즘으로 치면 "ㅋ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댓글 : 9 개
정조랑 세종이랑 키배 떴으면 누가 이겼을라나 ㅋㅋ
조선의↗ 궁궐에↗ 온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나는 백성을 굽어살피는~
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
2. 공직에 오른 신하들 다수는 당연히 공부를 멀리하게 되지만, 경연 때문에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안하면 대왕이 '니깟놈이 뭘안다고' 하는 식으로 깠다고.


패기...
솔직히 세종때야말로 조선 최 전성기였죠...
세종 이후 세종때의 위세를 가진적이 없죠
사도세자 뒤주에 가두고 굶겨죽인 것에 대해 사학자들은 다양한 설을 내놓고 있죠.
탕평책을 실시했다고 하지만 정작 왕권과 기반세력이 약했고, 노론의 힘이 만만치 않았기에 영조는 어쩔 수 없이 노론의 모함에 사도세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정조 5번 재밌네요 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呵
오오미 왕들 패기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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