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글] 이 시대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2014.01.16 PM 08:02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함께 사는것, 더불어 사는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 남을 쓰러뜨리고 밟고 넘어서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누구의 핑계를 댈것도 없이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스스로가 부모님에게 그렇게 교육받으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대개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 이 우주와 대자연안에서 결코 합리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생물들은 놀랍게도 20%의 열심히 일하는 것들과 80%의 덜열심히 일하거나 어리고, 미숙하고, 모자란 존재들 즉 잉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이 부여한 비율이기 때문에 인간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만을 떼어서 가장 효율적인 사회, 국가, 기업을 만들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을 위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능력있고 열심히 일하는 20%만을 따로 떼어서 100%의 조직을 만들어도 그안에서 다시 80%는 잉여로 변화합니다. 그게 개미사회든, 인간사회든 마찬가지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20%안에 들어있다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누군가 아픈 사람들, 모자란 사람들, 그리고 덜 열심히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까지도 한데 뭉쳐서 살아가는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20%라는 것은 우열이 아니라, 기능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예로 들자면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는 심장이 별로 하는일 없이 노는것같은 엉덩이를 향해서 너도 나처럼 열심히 일해라 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몸의 모든것이 심장처럼 열심히 굴러간다면 그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하나가 경쟁하고, 비교대상이 되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모두를 하나로 뭉쳐서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처럼 기능하는 공동의 존재,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안에서 우열은 없습니다. 기능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이 국가에는 그런 관용의 정신이 없습니다.



1. 지식과 기술,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은 지혜로워지는 것인가?

역사를 백수십년, 수백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전부터의 인간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시대의 어떤 존재였을까요?

자신들의 존재, 정체성을 깨닫는데서 부터 변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우리는 게으르게 살지도 않았는데 이처럼 힘든 삶을 이어가야 하는가? 이것은 위정자나 언론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우리가 덜 노력했고,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리고 덜 노력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받고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또는 낮은 금전적 보상을 받는것은 당연한 것인가?

혹시 이런것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각은 아닌가?

인디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드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미합중국이 세워지기전 북아메리카대륙에 만년가까이 살아오던 인디언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간의 분쟁과 전쟁이 뭉쳐서 살면서 도시를 이루는데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족들처럼 도시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 공동체가 150세대가 넘으면 그들을 따로 떼어서 독립시켜, 멀리 거리를 두고 서로의 영역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극단적 물질의 소유가 아닌, 물질과 정신의 평형임을 알고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았던 인디언들


인간은 살아가면서 150명이상의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밝혀진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간접적으로, 건성으로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면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는 최대의 단위를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지켜나갔습니다. 그리고 도시를 만들지 않아 대규모의 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미개해서 도시를 만들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야 말로 말도 안되는 편견입니다. 언젠가 동남아시아의 어느 부족이 다큐멘타리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자신들은 수백년간 전쟁하지않고 평화롭게 살아왔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비결을 묻자 그들이 말하기를 일정규모가 되면 사람들을 분리시켜서 아메리카 인디언들 처럼 떨어져서 영역을 지키며 사는것, 그것이 비결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분명히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그것을 알고 지혜로왔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대규모의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 그 해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도시화입니다. 도시가 만들어지면 전쟁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젠가 제가 6도(六道: 인간이 거치는 우주안의 6개의 시공)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우주의법칙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아뭏튼 그들 인디언의 세계에 대해서 들여다보면 아주 놀라운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1년에 평균 두달을 일하고 열달을 쉬었다고 합니다. 두달동안 사냥한것으로 일년을 먹고 지내면서 나머지 열달동안은 사색하고 다른 일을 했습니다.


자연속에서 힘들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인디언들이 오히려 여러분보다 훨씬 많은 여가시간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디언 연구가가 이야기 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석기 시대, 석기시대 이런 시대에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24시간을 정말 힘들게 살았다고 여러분은 배웠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겠군요.


인디언 정도의 문명만 가지고 있었으면, 틀림없이 비슷한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 '발전'했다고 하는 여러분은 어찌하여 새벽같이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배우자와 자식들하고 대화할 시간도 없이 뼈빠지게 일년 열두달을 일하는데 행복은 커녕, 여가를 보낼 열달의 시간은 커녕 지친몸을 쉴만한 여유도 없는 것인가?

자 여기에서 부터 여러분의 자각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이 시대, 이 사회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존재는 무엇이냐?


도시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디언들의 사회에는 추장이 남들보다 더 잘먹고 잘사는 그런 수직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의 지도자인 추장은 정신적인 멘토이며, 마을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민원을 해결해주는 상담자 였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배고프면 제일먼저 자신의 식량과 가진것을 내어주고 달래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추장이 수직적인 위계가 되는 때는 오로지 '전쟁'을 할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도시화, 산업화가 극도로 이뤄진 현대의 국가, 사회시스템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애써서 만들어낸 부는 공평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독점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능력보다 훨씬 행복해지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그 시스템안에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수직적 위계가 있는한 독재적인 시스템이 존재하는한 문제는 똑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가장 독재적인 시스템은 국가가 아닙니다.


산업화사회의 모순을 꼬집었던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


그것은 바로 경제시스템입니다. 여러분이 출근해서 일하는 기업과 다양한 삶의 터전들이야 말로 그런 수직적 시스템의 제일 하위단계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재벌시스템이야 말로 극소수의 사람들을 훨씬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셀 수 없는 다수가 불행해지고 착취당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입니다.


1700년대부터 조선이 망할때까지 우리사회는 민란의 시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느끼고 사회시스템에 저항했을까요? 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이렇게 소수를 위하여 다수를 착취하는 제도,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민화 정책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하층 계급에서 글과 학문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그들을 우민화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시대에는 모두가 공교육을 받으니 그런 우민은 사라졌을 것 아니냐?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럴 줄 알고 모든 국민들을 의무적으로 교육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까, 20:80의 사회처럼 80%의 우중이,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을 마구 늘려서 학비를 대출해주면서 국민들을 서른살이 다되도록 교육시켜도 바로 그 우중이 똑같은 비율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지식을 습득하는가 아닌가 하는것은 그들이 지혜로와지는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글도 모르는 무식한 촌할머니도 지혜로운 분은 있습니다. 지혜란 석사학위따고, 박사학위 딴다고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의 정체는 '직관'입니다. 그리고 직관의 힘은 생을 넘어서, 이전 생에서 지금의 생으로 넘어오는 것 더 명확하게 이야기하면 인생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과 성찰 소위 '도를 닦았다'하는 그것으로 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도 '어리석은 인간'은 어리석은 인간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런 사람들 널렸습니다.


몰라요만 남발하시던 해수부장관도 '박사'이십니다


그럼 그런 우중을 계몽하면 될것 아니냐? 제가 아는 바로는 가르친다고 소위 교육한다고 해서 그 비율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20:80의 사회에서 20%가 나머지 80%에 대해서 보살피고 먹여살리는 어떤 공동체적 의무가 있다고 제가 주장했듯이 깨어있는 20%가 나머지 80%에 대해서도 같은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20%의 깨어있는 사람들(지식인이 아닌)이 나머지 80%를 이끌고 이 사회를 공존가능한 시스템으로 유지시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 깨어있는 사람들이란 바로 호민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선말 200년 민란의 시대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말하는것은 어느시대에나 그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노비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미래의 해법은 없다


시대가 이렇게 흘러서 과학이 발전하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사는데 우리의 삶을 수백년전 '노비'의 삶에 비유하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천년전 인디언의 삶보다도 더 여유가 없는 그 빡빡함과 일하지 않으면 내일 당장이라도 굶어죽을 것같은 불안함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나는 빵집,약국,치킨집,PC방을 하는 자영업자이고 내가 사장인데 무슨 노비냐?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고려,조선시대에도 그렇게 밖에나가서 돈벌어서 갖다 바치는 '외거노비'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임대료를 내고 장사를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외거노비입니다.

여러분이 몸이아파도 결근하면 회사에서 짤릴까봐 아픈몸을 무릅쓰고 출근해야만 하는 그런 직장인이라면 여러분은 바로 조선시대의 '사노비'입니다.

그런 정규직도 되지 못해서 하루하루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라면 여러분은 '노예'입니다.

아니다, 나는 회사에서 비교적 출세해서 상무, 전무 달고있는데 무슨 노비냐 나는 이미 그런 비유 맞지 않는다 할 분도 있겠군요. 그분들은 '마름'입니다. 소작들을 부리고 쇠경을 받는 관리자 말입니다.

아무리 이사가 되어도 노비의 신분이 변할리가 있겠습니까?



구한말 조선시대에서 현대로 탈바꿈 하였다고 해도 인간사회의 시스템은 크게 달라진게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나 수직적으로 되어버린 사회, 그것은 독재의 세상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사악한 사회시스템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입니다.

재벌은 몇백조의 자산을 가지게 되고 서민들은 돈이 없어서 가족이 함께 굶어죽는 시대 그것이야 말로 극단적인 수직적 경제시스템의 세상입니다. 재벌의 세상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1894년에는 전봉준같은 '호민'들이 농민들과 힘을 합쳐 이 시스템을 바꿔 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고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백만이 넘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120년의 세월이 흘러 시간의 수레바퀴는 2014년 갑오년을 맞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노비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여러분 스스로의 삶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 굴레를 대신해서 깨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댓글 : 2 개
2번에 시스템에 관해서...사회주의로 흘러도 비슷한 한계를 보여준 결과가 있었는데...협동조합형태의 기업도 신규채용과 투자, 기술개발같은 혁신과 상생보다는 궁극적으로는 조합원의 이익을 보호하는 쪽으로 흘러가더라구요. 주주대신 조합원을 챙기는게 적어도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더 절실하고 훌륭해 보이는건 사실입니다만은 이쪽도 어느정도 한계는 있으니깐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이 해결해주기를 기대하지말고 이걸 뛰어넘는 공공선이나 도덕성회복 같은걸 주장해야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기대해야 할건 사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사족입니다만은 인디언은 추장과는 별개로 전쟁에서는 전쟁지도자가 임시직으로 따로 선출됩니다. 추장이 권위는 있지만 부족민에게 뭔가를 강제할 만능의 권력은 없기 때문에 전쟁과 같은 위급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이런 권한을 위임받을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 .모
  • 2014/01/16 PM 10:38
감사합니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