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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도움 되는것]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한심한 용인 전투. 더 한심한 쌍녕전투.2010.01.15 AM 12:06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이끄는 군사 4만은 웅치, 이치 전투에서 전라도를 손에 넣으려던 왜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승전 장개에 용기를 얻은 선조는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게 각각 원군을 주어 그들에게 한양 탈환이라는 막대한 임무를 주었다.
이광이 병사들을 몰아 한양으로 진군을 시작하자, 전라도 방어사 곽영도 2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광주목사 권율과 전부사 백광언을 선봉장으로 합류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한양 탈환군의 군세는 정설이 5~6만이고, 일설에는 10만이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 역시 정예병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이 급히 모은 병사들이라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웅치,이치에서 급습이 효과를 거두어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병사들이 하루아침에 역전의 용사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 에선 그들의 진군 광경을 '양때들이 무리지어 봄소풍을 나가는 듯 하다' 라고 적어 놓았다. 군기가 엄중하고 살벌해야할 진군이 양때들에 비유되었으니 군기가 어느정도 엉망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처음에는 순탄하게 진군이 이루어졌다. 가는 길에 몇몇 일본군의 보급기지도 함락시켜 불태웠다. 거듭되는 소규모 승리에 장수들과 병사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갔다. 그렇게 북상을 하던 그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은 바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1000 여명의 정예병이었다.
그 동안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보지 못했던 이른바 '한양탈환군'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것이었다. 와키자카가 이끄는 정예병들은 숫적의 차이에도 전혀 위축됨 없이 조선군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모습에 겁을 먹은 조선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더니, 급기야 하나도 낭김없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와키자카의 정예병들은 그런 조선군을 쫓아가며 마음껏 죽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중에 있던 거의 모든 장수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광, 윤국형, 김수, 권율 정도만이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조선의 병사를 5만으로 보자면 50배, 10만으로 보자면 100배에 가까운 병력 차이를 두고 패배하였으니, 세계의 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참담한 전투가 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쌍녕 전투다. 쌍녕 전투는 임진왜란 아닌, 병자호란때 일어난 전투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때,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광주에 집결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구였다. 이들이 보유한 전력은 막강했다. 4만명의 병사들이 각자 조총 한정씩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정도면 누구와도 싸워볼만한 전력이었다. 당시의 조총은 임진왜란 때의 조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능이 개선되어 있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쌍녕에서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청나라 기병 300 여기였다. 4만명의 조총수와 300여기의 기병. 이미 싸움은 끝난듯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선은 조총병을 제대로 운영해본 경험이 없었다. 조총병들은 조총의 사거리를 감안하여 적들을 충분히 접근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하였으나, 적을 보자마자 겁에 질려 마구 쏘아대었다.
게다가 장수들 역시 경험이 없어 병사들에게 화약 배분을 잘 하지 못하여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화약이 떨어져 무용지물이 된 조총을 들고 우왕자왕하는 조선병사들 머리위로 청나라 기병 300여기가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쁜데, 이 와중에 4만명의 병사들중 절반이 넘는 병사들이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게 아니라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조 선 장수들이 급히 화약을 배분하려 병사들을 불러 모았으나, 여기에서도 경험 부족은 나타난다. 모여든 병사들은 화약고에서 화약을 받자마자 조총에 쑤셔 넣고 청나라 기병들을 향해 발사해대다가 불꽃이 화약고에 튀어 대폭발이 일어나고 수백명이 그자리에서 폭사하였음은 물론이오, 그 여파로 사방이 검은 먼지로 뒤덮여 피아의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런 사이를 청나라 기병들이 마음껏 누비며 더이상 칼을 들 힘도 없어질 때까지 죽여대니, 조선군은 철저히 괴멸되었다.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황이었다고 하니...
이 는 1/30도 모자라 1/130이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이니 아마 전쟁사에 기네스 기록이 있다면 당연히 쌍녕 전투의 청나라 병사들이 1등으로 올라가지 싶다. 스파르타의 전사 300명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막아선 내용이 영화로 제작된 것을 모두 알것이다. 영화제목 300. 하지만 그들은 10만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잠시 버티었을 뿐, 결국 괴멸당했다.
하 지만 이 청나라 병사 300은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을 상대로 방어만 한것이 아니라 한싸움에 괴멸을 시켜버렸으니 영화 300 후속작이 나온다면 이들을 주인공으로 해야하는게 아닌가 싶다. 정말이지 세계 전사에 길히 남을 승리를 일본군과 청나라군에 각각 선물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한줄요약:왕이 남한산성에 사실상 인질로 잡혀있고...명령을 하달할 조정이 봉쇄되어 있으니 오합지졸로 무너진게 당연하지..한반도가 사실상 국토의 대부분이 계곡인지라 북쪽 오랑케의 대군일수록 전쟁이 어렵고 지키는 입장에선 수성과 게릴라 전술이 쉬운데 임진왜란땐 이런걸 잘써먹었지만 병자호란땐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것...
출처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12474
댓글 : 7 개
- 스큐즈수
- 2010/01/15 AM 12:16
패전도 기억해야 하지만..우리에게 명량 대첩이 있지요..-.-;;
- 아루피!
- 2010/01/15 AM 12:48
짱깨가 뻥카가 심해서
- 바보1.
- 2010/01/15 AM 01:12
우리나라에서 5~6만이라... 상당한데요.. 아무리 전쟁중이지만..
- 디블론드
- 2010/01/15 AM 01:15
덧글에 거북선2척으로 50척 박살냈다는데 좀 오버 같네요. 캐리비안의 해적 봐도 대포 수십 발 쏴야 겨우 가라앉던데, 2척으로 50척 부수려면 도대체 탄약을 얼마나 실어야 한다는 건지..
- 마크15
- 2010/01/15 AM 01:18
음..살수대첩이나 명량해전같은건 이의 반대가 되겠군요.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전술적의미나 역사적의미나 전세를 뒤짚는 의외성 면도 크고요.
특히 후자의 경우는 전술적의미나 역사적의미나 전세를 뒤짚는 의외성 면도 크고요.
- 마크15
- 2010/01/15 AM 01:23
음 수치적으로 명량해전의 비는...
왜선 200척에 조선수군 13척이었으니...
게다가 전멸시킴;ㄷㄷㄷ
일본 쫄아서 이후 해전도 없어 그래서.ㅋㅋ
이건 머 반론의 여지가 없을듯.
전세를 뒤짚은 크리티컬 팩터였으니.
전라도 못먹고 보급크리.
왜선 200척에 조선수군 13척이었으니...
게다가 전멸시킴;ㄷㄷㄷ
일본 쫄아서 이후 해전도 없어 그래서.ㅋㅋ
이건 머 반론의 여지가 없을듯.
전세를 뒤짚은 크리티컬 팩터였으니.
전라도 못먹고 보급크리.
- 달님반사쿠
- 2010/01/15 AM 02:12
디블론드// 지금 영화랑 현실을 착각하는거임?? 그리고 백보 양보해서 영화가 현실과 같다고 해도 1600년대쯤인 임진왜란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1800년대 쯤인 영화배경을 비교하는거임 ? 이건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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