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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2021.09.25 PM 02:30
이런 수준으로 에세이 같은 글 잘쓰고 싶어서 기록용으로 남겨 둠
그녀와그녀의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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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초 봄으로, 그날은 비가 왔다
그래서 그녀의 머리카락도 내 몸도 무겁고 눅눅해졌고
주위는 너무 좋은 비 냄새가 가득했다
(전화벨 소리)
지축은 소리도 없이 천천히 회전하고
그녀와 나의 체온은 세상속에서 조용히 계속 열을 빼앗기고 있었다
(-딸깍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용건을 남겨 주세요-)
그 날, 그녀가 날 주웠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고양이다
(음악)
(일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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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머니처럼 상냥하고 연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금새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그녀는 혼자서 살며 매일 아침 일하러 간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을 무척 좋아한다
깔끔하게 묶은 긴 머리, 가벼운 화장과 향수 냄새
그녀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서
(묵음 텍스트 - 갔다 올게)
...라고 말하고서 등을 쭉 펴고 기분 좋은 구두 소리를 내며
무거운 철문을 연다
(문 소리)
비에 젖은 아침의 풀밭같은 냄새가 잠시동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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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되고 내게도 여자친구가 생겼다
이 고양이는 미미다
미미는 작고, 귀엽고 응석을 부리는 솜씨가 좋지만
역시 그래도 나는
나의 그녀처럼 어른스러운 여자쪽이 좋다
(묵음 텍스트 - 있잖아, 쵸비)
왜? 미미
(묵음 텍스트 - 결혼하자)
저기 미미,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내게는 어른인 연인이 있어
(묵음 텍스트 -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묵음 텍스트 - 만나게 해줘)
안돼
(묵음 텍스트 - 어째서?)
있잖아 미미, 몇번이나 말했듯이 이런 이야기는 네가 좀 더 큰 다음에...어쩌구 저쩌구
이런식의 대화가 계속된다
(묵음 텍스트 - 다음에 또 놀러와)
(묵음 텍스트 - 정말로 와야 해)
(묵음 텍스트 - 꼭 와야만 해)
(묵음 텍스트 - 꼭 꼭 와야만 해)
이렇게 나의 첫 여름은 지나고
점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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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길고 긴 전화통화 후
그녀가 울었다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곁에서 오랜시간 울었다
나쁜건 그녀쪽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만이 언제나 보고 있는...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상냥하고
누구보다도 예쁘고 누구보다도 현명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여성목소리와 텍스트 - 누군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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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어둠 속을
우리들을 태운 이세상은 계속해서 돌고 있다
계절이 바뀌어 지금은 겨울이다
내게는 처음인 눈오는풍경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다
겨울에는 아침이 늦어지기 때문에
그녀가 집을 나가는 시간이 되어도 아직 바깥은 어둡다
두꺼운 코트에 감싸진 그녀는 마치 커다란 고양이 같다
눈 냄새에 빠진 듯한 몸의 그녀와
그녀의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과
먼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와
그녀의 마음과
나의 기분과
우리들의 방
눈은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린다
하지만 그녀가 타고 있는 전차의 소리만은
쫑긋하게 서 있는 내귀에 닿는다
나도
그리고 아마 그녀도
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여성목소리와 텍스트 - 이 세상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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