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잡담] 쪽★빠★리2011.06.15 AM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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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다 빡쳐서 올려봄. 한국에서 녹을 처먹는 일본인 교수라는게 이딴걸 교재라고 들고오다니..이걸 일본가서 책이라고 내서 돈벌 궁리를 한 사람도 한국에서 호적을 파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 생각엔 말이지...

제 1장 . 해방 후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문화

1.일본대중문화 규제의 논리 - 식민지체험과 일본문화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대중문화의 규제는 역사 문제와 함께 일한관계의 진전에 커다란 장벽이 되어왔다. 냉전구조 속에서 일본과 한국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력 밑에서 [유사동맹]과 같은 관계를 형성했다. 일한양국은 [공산권]이라는 [공동의 적]과 대치하고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경제체제 속에서 경제적상호의존관계를 깊게 했다. 말하자면 한국은 일본의 안전보장에 공헌하고, 일본은 그 한국을 경제적으로 떠받치는 역할 분담을 통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보완해왔던 것이다. [일-미-한]이라는 구조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일한관계의 외교노선의 하나의 옵션으로해서 계속해서 중요시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 경제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대중문화만은 일방적으로 규제되었다. 일본영화의 일반상영이나 비디오 등의 유통, 일본 가요곡의 레코드나 CD의 판매, 일본인가수에 의한 일본어 가요의 공연, 일본의 TV프로그램콘텐츠의 방송, 일본대중 취향의 잡지나 사진집, 만화의 유통이 사실상금지 되었었던 것이다. 어느것이나 법률에 의한 규제가 아닌, 영화진흥법이나 공연법등의 관련법률(예를 들면 공연법19조의 [국민감정에 해를 줄 우려가 있거나 공공질서나 미풍양속에 반하는 외국의 공연은 행해져선 안된다] 같은 조문)에 기반한 정치조치였다.

일반의 일본인으로서, 해방후 얼마되지 않은 시기라면 몰라도 국교가 정상화된 1965년 후에도 일본문화만이 규제의 대상이 되는 것에 있어서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전후는 평화주의가 퍼지고 70년대 후에는 문화면으로 융성해서, 팝컬쳐로 아시아나 세계에 그 존재를 어필해온 일본. 그러한 평화로 재미있는 나라의 대중문화를 거부하고 있는 한국.
그 구도에 반감을 가진 일본인이 많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우방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하고 있는건가? 그러면...] 이라는 것이 많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속고 있다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일본대중문화의 규제를 정당화 하는 이유로는 [과거의 역사 문제],[자국문화산업의 보호]라는 두가지의 측면이 지적되어왔다. 이것은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한국인의 심리 까지 파고 들어 이해를 돕도록 하는 기술은 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의 연구자는 그런 면에 대한 것을 애써 피하고, 또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에, 접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이러한 한국인의 심리를 파고든 위에, 상기한 두가지 이외의 요인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을 밝히는 것에는 어째서 김대중정권하에 문화개방이 실현되었을까, 그리고 왜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일류]라고 불리우는 현상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기 쉽게 하는 토대가 될것이다.

[일제시대]의 기억과 앙금 - [포스트코로니얼]로서의 한국.

우선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한국(과 북한)이 [포스트코로니얼(식민지후)국가]라는 사실이다.
전쟁과 다르게 식민지지배는 그 실질적인 지배가 종료되면 금방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피해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식민지 지배는 사회나 문화 사람들의 사상과 내면에도 색 짙은 영향을 남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권력, 정치구조, 경제사회구조, 문화와 사상체제가 뿌리 깊게 지속된다.
식민지후의 국가에 있어서 이것을 극복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자립과 독립을 확립하는 것을 원하는 정치목표가 설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국제환경이라는 중요한 요인이 연동하는 형태로, 식민지시대의 권력구조가 유지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내셔널리즘이 동원되는 케이스가 많다. 한반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은 [해방후]의 대한민국과 북한을 가르는 중요한 팩터도 , 이 식민지 때의 권력과 사회구조의 변혁을 둘러싼 경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식민지 때의 [고목정수]라는 일본 이름을 쓰고 만주를 무대로 [황군]의 일원으로 중국인이나 조선인에 있어 항일전쟁의 진압을 맡았다고 하는 박정희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같은 만주를 무대로 항일전쟁을 해왔던 장군이었던 김일성이 북한 건국의 아버지가 된 것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제국에 의한 식민지배는 [황민화정책]이라 불리는 동화정책이라는 형태로 진행되었다.(한국에서는 [민족말살정책] 라고 불리우고 있다)
일본과 조선은 같은 피를 가진 형제국으로 한때 일본이 한반도의 일부를 지배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지금의 역사학계에서는 이것은 사실에 반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에 의거한 [일선동조론]을 근거로, 조선은 [외국]이나 [이민족]이 아닌 것이 되어서 조선지배를 식민지배가 아닌 [내지의 연장]으로 봤다.
2000년이상의 역사를 가진, 독자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자존심 높은 한민족을 [일본인화]하려는 인류사상 유례 없는 [대실험]을 한 것이다. 그 실험을 지배하는 논리가 [뒤쳐진 조선]을 [문명국일본]이 보호하고 통치하는 것으로 근대화와 문명화를 유도한다는 식민지주의이다.

이 동화정책 밑에서 조선인은 언어, 이름, 종교, 문화등의 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빼앗기게 되었다. 이러한 기억을 가진 한국의 찻집에서 일본어나 일본의 노래, 옷이나 토산물등의 일본문화가 TV등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이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고 상상한다.

한국의 근대화는 일본의 근대화와 일체가 되어 있었다. 행정기관, 법체제, 군대, 경찰조직등의 나라의 근간이 되는 골격에 있어서,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학제도 일본과 같은 6.3.3.4제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교, 대학, 대학원이라는 명칭도 같다. 학기도 한국은 3월에 시작하는 형태로 일본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학생복도 70년대 까지는 거의 같았다.

여성(주로 50대 이상)의 이름도 일본식의 [X코=X子=X자]가 붙은 예가 많다. 나는 중학교 시대의 학교 전생님이 미자였다.
식민지 때의 조선의 엘리트는 다수가 일본에 유학을 갔었기 때문에, 그들이 해방후의 한국에서 리더가 되었을 때는, 일본을 모델로 하거나 일본과의 개인적인 인맥에 의거하는 일은 당연한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이 있어도 근대화한 선진국이었던 일본을 [모방]하는 것이 포스트코로니얼국가로서의 한국의 모습이었다. 일본이 자랑스러워 하는 산업을 위협하고 스포츠에서도 일본이 특기인 종목을 위협한다. 일본의 본떠서 프로야구가 탄생하고 축구에서도 일본이 J리그라는 이름을 쓰니까 곧 K리그로 바꿔버린다. 일본이 월드컵개최를 하려고 하면 곧 따라서 개최하려고 한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가는 곳마다 일본에 의한 침략이나 지배의 상처가 남아 있다. 게다가 갈 수록 쌓여가는 전화에 의해 문화재가 큰 피해를 입은 한국에서는, 경주에 있는 세계유산 [불국사]등의 국가의 긍지가 되는 문화유산에 마저, 도요토미의 조선침략 때문에 소실되었었다는 안내판이 있는 등, 과거를 잊는 것보다, 상기하려는 경향이 크다.

서울의 북부에 있는 한국인에게 있어선 특별한 위치에 있는 북한산에는 일본의 식민지권력이 조선민족의 [정기]를 멸하기 위해 산 정상에 [말뚝]을 꽂아 넣었다는 소문이 돌고, 긴 시간 한국인의 대일인식에 영향을 미쳐왔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승만 정권이 [탈일본화]정책을 편 것이나, 박정희 정권이(자신의 경력을 감추기 위해서도) 일본문화를 [왜색문화]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규제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독립이라는 것은 [일본색]을 불식하는 것이기도 했던 한국에서, 이것은 [반일]이라기 보다도 [탈일본화=한국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울린다.

실제로 진짜 [반일]이었다면 한국은 일본과 국교따위 회복하지 않고, 일본과의 경제관계나 문화교류까지도 부정해야 했을 것이다. [반일]이라는 [일]은 [일본제국주의]나 [식민지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인이나 일본문화 그 자체에 대한 원리주의적인 반대는 아닌 것이다. 이 씨발쪽빠리들이..

한국인의 [국민감정]- 한국인의 대일인식

유난히 문화면에 있어서의 [탈일본화=한국화] 노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감정에 의해 지배되었다. 민주화이전,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나의 실체험을 쓰는 편이 리얼리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소학교1년생 때 쯤이라 기억한다. 복싱의 [일한전]이 있었다. 이 당시 일본과 호각이상의 시합이 가능했던 스포츠 종목은 축구와 복싱정도였기 때문에, 군사정권하에서도 TV에서 방송되었던 것이다.
나는 특별히 복싱이 좋진 않았지만 [일한전]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그 시합을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치 자신의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것 같이,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내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 마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일본에게 지지 않게 해주세요... 한국에게 승리를 안겨주세요! 비바!!!]
당시, 국력 면에 있어서 일본은 절대로 따라 잡을 수 없는 구름위의 존재였다. 피해자의식을 내면화 하고 있던 나는, 그나마 스포츠의 세계만이라도 한국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신에게 [정의]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다양한 스포츠의 일한전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굉장한 투지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이 밉다거나 때려부수고 싶다는 [공격성]보다는 일본에 진다면 자신은, 즉 한국은 정말로 영원히 안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공포심, 체념, 방어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스트 코로니얼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과 능력을 가늠하는 상대는 미국도 북한도 중국도 아닌 유일하게 [일본]만이었던 것이다. 국력으론 그럴 수 없지만, 스포츠라면 다르다. 온갖 일한전에서 [목숨을 걸고] 절대로 이겨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도 이승엽이 일본 프로야구에 입단한 당초엔 4타수1안타라도 한국의 아홉시 뉴스의 메인뉴스로 나왔던 것이다.

소학교1년생의 내 모습을 통해서 한국에 있어서의 반일교육의 뿌리 깊음과 무서움에 놀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무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굴욕과 멸시와 공포를 견뎌온 한국인, 일본이라는 그림자에 떨면서, 건전한 자기인식과 세계인식을 가질 수 없었던 당시의 한국인, 즉 나를.. 지금에 와서야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확실히 역대의 정권은 자신들의 정권의 정통성의 문제나, 실정에 의한 국민의 분노나 불만의 칼날을 대일본 내셔널리즘을 부채질 하는 것으로, 일본에게 돌리려 했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다. 라곤 해도 그러한 책동에 간단히 영향을 받을 정도로 포스트 코로니얼의 한국인에게 있어 일본의 존재는 상당히 무거웠던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민족분단, 국사독재, 분단, 해외로부터의 경멸감등의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괴로움, 굴욕의 원인은 대부분이 [일본 때문]이라는 심정이 작용해왔다.

제국주의라는 시대배경이나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허락해버린 한국의 지도자들과 국민에 대한 자성의 소리 보다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들이라도..원래는 한국이 일본보다 잘나갔었단 말이다.] 라고 천수백년전의 삼국시대를 가까운 과거처럼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비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현 실태에 대한 불만이 생긴다, 과거를 리셋하고 싶은 심정,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다는 기분은 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한국을 긍정했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반일 내셔널리즘을 작동시키기 용이하게 했다. 이 점이 한국인의 대일인식이 비뚤어지게 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지금의 한국에서는 인정할 필요가 있고, 실제로 그러한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거기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 일본에 대한 모멸감을 담은 왜라는 명칭이었다. 90년대 전반까지 일본인을 왜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일본문화도 왜색문화라고 하여 배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왜색문화는 모방만으로 볼 것이 아니고 [퇴폐적, 저급함, 폭력적]이며 한국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문화적편견이 조장되어왔다.
일본의 야쿠자 영화는 [싸무라이문화]와 겹치고, 일본인의 잔인함과 폭력성,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과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이미지와 부합했다. 한국에선 일본대중문화의 개방에 있어서 연구나 언설이 많지만 [일본대중문화 개방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 이란 관점으로부터 어프로치되고 있다.
왜색문화는 볼만한 것이 못된다는 생각은, 9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일본론이 된 전여옥의 저서 [일본은 없다]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내셔널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해 일본은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지는 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퇴폐적, 저급, 폭력적이라는 관점으로 하면, 미국문화가 일본이상이지만 당시엔 왜일까 미국은 OK로 일본의 저급문화는 안된다라고 생각되어 왔다. 또 모방이라는 것이 [모방대국] 일본문화를 [배끼고] 있는 한국은 어떻게 되는 것인다. 이러한 질문을 드러내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황이었던 한국에서 최근 젊은이들이 일본 애니메의 코스프레를 하고 거리를 활보하게 된 것은 프랑스인이나 호주인이 세라복이나 일본의 기모노등의 코스프레를 하는 것과는 완전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단순한 [쿨 재팬] 이나 [J컬쳐]의 침투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기존의 터부를 깨버리는 혁명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로선 이러한 한국인의 비뚤어진 대일인식과 반일 내셔널리즘을 쉽게 비판할 수 없다. 그들의 인식의 긴원에는 커다란 르상티망(=원한,증오,질투 등이 마음에 쌓인 상태) 과 다시 일본에 지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현실적인 공포심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부적절한 질책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식민지배는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강간과 닮았다(고 말해진다). 일본에게 [강간]당한 것 같은 인식이 많은 한국인에게, 해방후, 패전국이 된 일본이 큰 반성도 하지 않고, 미국의 비호 아래, 그것도 한국전쟁을 계기로 숨을 트게 된것도 모자라 이번엔 경제적, 정치적으로 혹은 군사적, 문화적으로 다시 한국에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다... 국내에선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이나 조선멸시라는 식민지주의가 계속되고 정치의 세계에선 [망언]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한 [두번째 강간]의 정신상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키센관광을 통해 가령 가부키쵸등에서 한국인 여성이 일본 남자에게 몸을 파는 수직적 관계는 지속되어왔다. 물론, 국민경제를 위해 그것을 용인하고 일본인끼리 보다는 조금 싸게 한국인 여성을 사는 한국의 지배층, 남성사회도 [공범]관계라는 것을 유지해왔다.

[문화제국주의]

이런 국민감정은 일본대중문화규제의 논리인 두가지 혼네(本音)를 감추는 수단으로 사용된 측면이 있다.
하나는 일본대중문화개방을 [문화제국주의]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자국산업보호]의 논리다. 제1부처럼 나카소네 내각의 대한적극외교나 [부산항에 돌아와요]등의 [문화외교]등을 통해 80년대 중반 이래 일한관계는 대체로 양호한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그 중에 서울 올림픽과 민주화, 냉전의 종언과 노태우내각의 [북방외교]등을 통해 일본문화개방의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중간까지만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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