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사회] 부산의 어떤 복지원 이야기2014.09.02 PM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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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이후 독재시대동안


열악한 경제, 생활환경과 부족한 일자리로


도시에는 부랑자들이 넘쳐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86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일거에 그들을 쓸어버리는 


'거리 청소' 를 실시한다.


 


 


 




 


 


 




 


 


 


 


 


 


쓰레기의 시간


 


 


 


by 이종 크리에이터


 


 


 


 


 


 


 


 


 


 


 


※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쓰레기처럼 쓸려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1986년 12월, 한 남자가 울주군의 농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이 남자의 이름은 김용원, 직업은 검사였다.


 


 


 



사진 김용원 검사


 


 


"이상한 작업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군인도 아니었고 죄수도 아니었다.


이건 범죄다."


 


 


그렇게 수사가 시작되었다.


 


 


 


 


 


 


 


 


 



1984년 5월 11일


이곳은 대한민국 복지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해


매년 20억의 지원금을 받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곳


 


 


 


 



 


 


부산 사상구 주례동에 위치한


국내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인


 


 


 


 


 


 



 


형제복지원.


 


 


 


 


 


 


그 시작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의 내무부 훈령 410호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부랑인신고, 단속, 수용보호와 귀형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엄무지침)


 


 


 



"'부랑인 선도'를 하면 20억 주겠다."


 


그리고



부산의 한 복지원.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아 일시보호사업 위탁 계약' 체결


 


 


이곳은 '정화'된 사회의


사회복지시설이었다.


 


 


 


 


 


 


 


 


 


 


 


 





1987년 1월,


울산지청 소속 김용원 검사가


높이 솟은 십자가 아래


이중으로 잠긴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부산시장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사를 그만두라고 했다.


당시 김주호 부산시장


 


 


 


 


 


 


 


그제서야 충격적인 진실들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거리의 부랑자들은 경찰을 통해


승합차를 타고 형제복지원으로 인계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부랑자가 아니였다.



 


역에서 TV를 보고 있던 사람,


 


늦은 밤 귀가를 하던 여성,


 


외출하다가 주민등록증을 챙기고 나오지 않은 사람,


 


학교에서 수업이 집에 가던 중학생.


 


타 지방에서 가족을 만나러 온 아이들.






 


 


 


 


 


이것은 부랑자 선도가 아니었다.




 


 


 


 


 


납치였다.


 


 


 


 




 


 


머리를 짧게 깍인 그들은


 


각 소대에 배치되었다. 


 


저항을 하는 이들은 몽둥이에 머리가 깨졌다.


 


 


 


 



 


 



새벽 4시면 모두 파란 체육복을 입고


 태극기와 새마을기를 향해 경례를 하고


군가를 불렀다.


 


이름대신 번호로 불렸다.


 


 


피부병과 영양결핍에 걸린채로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을 했으며


제식훈련을 했다.


 


 


 


쥐를 발견한 배고픈 원생들은


서로 먹으려고 했다.


 


 


 


여자들은 배가 불러왔다.


소대장에게 밤중에 불려간 여자들은


다음날이면 절뚝거리며 돌아다녔다.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죽은 원생들은


병원으로 보내져서


전에 없던 병명이 허위로 기재되었다.


 


일부 시신은 500만원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밝혀진 숫자만


12년간 513명 사망.


 


 


 


 


 


 


복지원 안에는 은행에서나 쓰는


특수 금고가 있었는데


엔화와 달러가 쏟아져나왔다.


 


 


 


 




김용원 검사가 쓴 정보 보고서


 


박인근 "동생아, 안기부와 부산시장을 찾아가라"


 


 


"부산시장 너무한다 두고보자"


 


 


 


 


 


 


1987년 5월 


부산시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박인근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라고 전두환은 대답한다.


 


 


 


 


그는 전두환의 훌륭한 사람이었고,


부산시장이 보호해야 할 사람이었으며


 기독교의 스타였고,


드라마에도 나온 복지계의 거물이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은 복지원이 아닌


수용소였으며,


 


그곳에 끌려간 사람들은


멀쩡한 우리의 이웃이었다.


 


 


 


 


3000명의 원생들 중 100명을 제외한 다른 원생들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1987년 1월


 


박인근 등 5명을 구속


 


7번의 재판, 그리고 징역 2년 6개월


 


 


 



 


 


 


대법원에서 감금이 무죄라고 하니까


하급심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한다


-3차 항소심 판결문 취지


 


 


 


 



 


감금죄에 무죄를 선고한 김용준 대법원장은


2013년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에 지명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강조해 왔던


'법과 원칙'을 중심가치로 구현할 적임자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 자녀 병역기피 등 각종 의혹으로 5일만에 자진사퇴한다.


 


 


 


 


 


 


 


2년 6개월 뒤 출소한 박인근은


다시 이사장 자리로 복귀했다.


 


 


 


 



 


 


 


 


 


 


 


 


 


 


 


 


 


 


'형제복지원'의 원장이자 실로암교회 장로인 박인근은


지금도 국가지원금을 받으면서 느헤미아 재단을 통해


부산에서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느헤미야 :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관리였던 느헤미야가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을


 52일 만에 재건한 이야기를 담은 구약성경


 


실로암 : '보냄을 받았다'의 의미, 요한복음 9장 7절


 


 


또한 사하구 빅월드 레포츠센터, 사상구 사상해수온천,


사상구 피부과학연구소 등의 수익사업소도 운영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부산시 승인하에 이뤄졌다.


 


현재는 건강상의 이유로


자식들에게 빠르게 재산승계가 이뤄지고 있다.

댓글 : 6 개
이럴땐 영화에 나오는 암살단이 있었으면함...
원티드같은데 나오는
정부가 저러니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리가 없지. 할배들은 독재를 그리워하고..
주례면 우리동낸데;;;
저거 아들새키가 우린 인권도없냐? 이 ㅈㄹ하는거보고 어이 털렷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미친;;;;
진짜 죽여버려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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