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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국민돌격대2011.06.02 AM 10:34
Der Deutsche Volkssturm.국민포풍[1]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나치 독일에서 벌인 최악의 병크이자 막장에 몰린 독재정권이 어디까지 발악할 수 있나를 보여주는 사례. 스탈린의 형벌 부대를 본 히틀러가 병신력에서도 질수없음! 을 외치며 구상한듯한, 스탈린의 라이벌다운 병신짓
목차
1 배경
2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3 막장 중의 막장
1 배경 ¶
본래 나치 정권은 과거의 독일 정권 및 국가조직 전체에 대해 비판적인 극우정당이 기반이었으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정당 내에서는 독일의 국방조직인 국방군 전체를 척결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애초에 나치 돌격대(SA)부터가 예전의 군대는 제국 시절의 잔재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2]이므로 민족사회주의 이념으로 뭉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창설된 조직이었고, 무장친위대 역시 이와 같은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심지어 헤르만 괴링은 공군으로 돌격대나 무장친위대와 비슷한 짓을 하려고 할 정도로, 나치 정권에서는 기존의 군부를 대체할 새로운 군을 만들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3] 그리고 이런 기존 군부 세력에 대한 불신과 그간 전쟁 수행 및 군사력 확보에 직접 기여하지 못했던 나치당 선전부장 겸 독일 국가계몽/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권력욕이 결합하여, 나치당은 1940년대 초반부터 나치당은 전국민의 총동원을 근간으로 하는 제5의 군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이 국민돌격대의 창설 기반이었다.
2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
그리고 이런 국민돌격대의 소요가 실제로 제기된 것이 1944년 말이다. 1944 11월까지 독일은 총 누적 영구손실 500만을 입어, 이때까지 동원한 전 남성 인구의 1/3 가까이[4]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상 이제는 군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나라의 남자 씨가 마르기 직전에 이른 셈이었다. 현재 동원이 유지되고 있는 인원은 거의 600만이었으나, 이중 군인으로서 동원 가능한 인구는 이제 겨우 300만을 넘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괴벨스 이하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모든 남성을 총동원해서 전쟁터에 내보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미 독일은 전체 남성 인구 3천 500만 중 1300만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했다가 손실됐고[5] 나머지 남성 대부분은 산업 생산에조차 기여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산업현장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숙련노동자 및 지도층이었다. 이런 상태인데도 전선의 병력은 부족하고 국가는 사실상 패전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으니, 어차피 망할 거 전국민이 다같이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은가라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돌격대의 창설이 현실화되었고, 결국 44년 10월 18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명의로 국민돌격대의 창설 명령이 떨어졌다. 소집 대상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이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독일국방군의 일원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독일국방군의 군수지원 및 작전협조를 받는 나치 정당의 군대였다.
쉽게 말하자면, 남자란 남자는 죄다 있는대로 징병해서 전쟁터로 다 내몰았는데 죄다 죽고나니 더이상 징집할 젊은이가 없어서 이전에는 징집대상으로도 안 넣던 노인과 어린이, 후방의 근로자들까지 아무 무기나 쥐어주고 전쟁터로 몰아넣으면서 국민돌격대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하물며, 최종 결정권자는 군인도 아닌 나치당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였다.[6]
나중에 가면 이게 더욱 발전해서 독일 국민은 전원 전투병이란 선언을 때려버린다. 전원 전투병이 돼버린 상황에서 후퇴하면 사살한다는 명령까지 내린지라, 피난민=탈영병으로 피난민이 되면 아군에게 사살되고, 전쟁터에선 소련군에게 죽는상황이 되고 만다. 이뭐병. 그래도 서부전선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별로 싸우지도 않고 미군이나 영국군에 항복하거나 그냥 탈영(?)해서 민간인으로 돌아가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3 막장 중의 막장 ¶
당연히 장비 보급은 형편없어서 정규군 쓰기도 부족한 MG42나 MG34는 사실상 지급할 계획 자체가 없었고 대부분은 폭격기용으로 생산되었으나 폭격기가 없어 장착할 수 없게 된 항공기용 MG15 기관총이나 과거 1차 세계대전때 쓰던 수냉식 MG08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할 계획이 없었다.
소총도 부족해서 kar98, MP44, Gew 43, Mp40 등의 제식 총기는 정규군 수요도 맞추기 턱없이 부족한 양이어서 노획한 총기나, 과거 1차대전때 쓰이던 구식 Gew98이나 심지어 9mm나 22구경등을 사용하는 민간용 사냥총도 징집하여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턱없이 부족하여 비밀병기 독일군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이런 볼트액션식 소총이나,[7]
이런(MP3008) 기관단총이나,
이런 반자동 소총을 생산하기에 이른다.[8]
심지어는 남아도는 공군용[9] 기관총열을 사용해 국민돌격총을 만들거나, 제식도 아닌 온갖 외국 노획무기들도 지급했다. 그러나 이런 노획무기도 보급 1순위는 정규군이었는데다 이미 많은 숫자를 손망실해버려 실제 지급은 개미 눈물만큼 이뤄졌다.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하면서 얻은 소총 등을 억지로 독일의 7.92mm탄을 쓸 수 있게 개조하기도 했는데, 이러니 탄창은 쓸 수가 없고 총열은 억지로 넓혀 명중율은 극악으로 떨어진 단발총이 되버렸다나.
결국 민간용 산탄총이나 라이플까지 박박 긁어모은 것도 모자라 온갖 구식 총기까지 나왔다. 아무리 볼트액션 소총의 시대라지만 민간용 엽총으로 군용을 대신하기는 무리. 절대 무리.
더구나 국민돌격대 전용의 저가형 총기들 역시 생산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권 다툼이 발생하는 바람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지방 정당 지도자와 그 당수가 후원하는 기업체들끼리 자재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독일국방군을 위한 생산시설을 멋대로 뜯어가는 등의 병크를 연발한 끝에 제대로 생산조차 못 하고 국방군을 위한 무기 생산까지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덕분에 국민돌격대는 무장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팬저파우스트 같은 대전차화기는 비교적 충분히 지급되었다. 말하지만 비교적이다. 이것도 선전사진 찍을 때는 근처 군 부대에 빌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만 팬저파우스트를 들어서 그 숫자가 많게 보이는 훼이크를 썼다고. 물론 촬영 끝나면 반납. 그래도 히틀러 유겐트 따위가 이거 들고 쏴댔다는 걸 감안하면 지급은 된 것 맞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군복이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만약 총기만 없다면 동부전선은 몰라도 서부전선에서는 포로수용소로 가서 거기서 일 좀 하고 전쟁 끝나면 나오면 그만이였다. 그러나 만약 군복이 없이 잡히면..... 그사람은 군인이 아니므로 제네바 조약에 의한 포로로서의 보호를 받지못하고 심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어 즉결쳐형되어도 별소리 할수 없다는 소리이다!! 정규군도 모자른 판에 예비군이라 하기도 뭣한 집단에게 나누어 줄수도 없었고 결국 나치는 완장을 재작하여 나누어 주었는데
쓸데없이 멋있다
군복을 입었건 사복을 입었건 인정사정 봐줄 생각이 없던 동부전선의 소련군 앞에서는 당연하게도 의미없는 조치였다.[10]그나마 이 완장의 장점이라면,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눈을 피해 탈영 후 민간인으로 탈바꿈하려면 군복을 처리하는거에 비해 완장만 팔에서 쏙 빼서 주머니에 숨겨버리면 될 정도로 간편했다는 정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데는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캐삽질이 겹치고 겹친 것이 가장 주효했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 나라가 다 망한 시점에서도 지방 정당 지도자와 군수기업체, 지방 유지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갖은 삽질에 삽질을 거듭한 탓에 생산 가능한 무기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해 국민돌격대의 무장 자체가 실현되지 못했던 것. 어떤 의미로는 덕분에 독일인이 훨씬 덜 죽었다고 볼 수라도 있을 정도[11]의 삽질이었다.
베를린 전투 때 국민돌격대의 비참함이 등장하는 영화는 몰락이 있다.
이런 상황까지 간 나치도 참으로 막장이지만. 바다건너 어느 섬나라에서는 국민돌격대가 델타포스로 느껴지고 나치가 참 양심있는 집단으로 느껴지는 곳이 존재하였고.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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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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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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