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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한국 예능계의 역사2011.06.02 PM 01:21
[Ⅰ] '광대[廣大]', '희극인'이 되다.
'광대[廣大]'라는 표현은 구한 말(조선 후기)까지나 널리 쓰이던 말이었다.
가면을 쓰고, 인형을 들고, 줄을 타고, 노래를 빌려 서민들의 애환을 녹여주던 전문 예능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광대'는 예로부터 '재인[才人]'이라고 불리며 천인으로 분류되었다.
주로 부모의 신분이 세습되었으며, 주어진 운명을 따라 평생을 떠돌며 살았다.
일제 강점 이후 전통적인 개념인 '광대패'는 사라졌다.
서민들의 애환을 위로하던 '광대'의 빈자리는 '서커스'와 '악극단'이 대신했다.
해방 이후에도 '악극'은 성행했다.
예전과 같은 신분적 세습과 차별은 사라졌으나 다양한 사연을 가진 재주꾼들이 '악극단'에 몰려들었다.
'악극'은 한 편의 잘 짜여진 버라이어티 쇼였다.
음악과 극이 어우러진 쇼는 물론, 다른 사람이나 동물 흉내를 잘 내는 사람들의 재주, 말 잘하는 사람의 만담, 우스꽝 스러운 몸짓 등.
각 '악극단'마다 다양한 레파토리를 구성, 전국을 떠돌며 서민들의 힘든 일상을 위로했다.
신분적 세습이 없어졌으니 다양한 출신의 단원들이 무대에 올랐다.
악사 출신의 구봉서, 간판공이었던 서영춘, 트럭을 몰던 배삼룡 등 출신도 다양했다.
6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의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방송 문화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TV에서 하루 종일 드라마와 뉴스만 틀어줄 수는 없는 일, 사람들을 자지러지게 하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악극단' 출신의 '재인[才人]'들이 TV에 출연하여 브라운관에서 연기를 했다.
'악극단'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순발력과 재치를 단련시켜 온 이들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건 당연한 결과,
방송사들은 '악극단' 출신의 '재인[才人]'들을 픽업하는 것을 넘어, 자체적으로 희극인들을 뽑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공채 규모는 아니었지만 최초로 '희극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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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희극인'의 시대
브라운관에 나와 자신만의 트레디드 마크가 되는 연기를 선보였던 '희극인'.
그 중에서도 트로이카를 구성하며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건 역시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 이 세 사람이었다.
이들을 ' 한국 코미디의 삼황[三皇]'이라고 일컫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트로이카니 삼황이니 하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어도 통일된 리더쉽은 없었다.
그저 방송이 생기고, 예능인들이 나오니 나온 줄 알았다.
예능인들이 지금처럼 프로그램을 이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저 프로그램에 꼭지를 만들어주면 한 판 신명나게 놀다가거나,
그나마 위세를 떨치던 예능인들 몇을 모아두고 그네들끼리 돌아가면서 할당 시간을 채워보라며 편성을 해 줄 따름이었다.
이 시기에서 이름을 떨친 예능인들은 그저 '유명한 광대' 수준이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기는 했지만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희극인들의 방송 장악력과 사회적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앞서 말한 '삼황[三皇]' 이외에도 김희갑, 남철, 남성남, 송해, 이상해, 남보원 등도 나름대로의 시대가 있었다.
당연히 위의 삼인방에게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
장소팔, 고춘자, 이은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윤부길 등도 그저 각자의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 정도로만 평가된다.
90년대 중반까지 예능인들이 희극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희극인'였던 선배 개그맨들의 활동을 모방해 온 이유에서 였으리라.
그런면에서 이주일은 혁명이었다.
악극단의 단원으로 출발한 그가 전국구 스타로 인기를 얻은 것은 조금 늦었지만,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는 감히 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극인'으로서는 전례없는 인기를 누리다 간 그였지만, 이주일 역시도 예능인이라기 보다는 희극인이었다.
물론 희극의 시대가 무너진 후 예능의 시대에서도, 그는 이주일 쇼로 그의 전국민적인 인기를 증명해 보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예능인'이라고 평가받기엔 '희극인'으로 살아 온 인생이 너무 길고 대단했기에, 재평가 받기엔 너무 늦은 나이었다.
어쨌든 그는 희극계의 마지막 별이었으며, 가장 밝게 빛난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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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한국 예능계의 첫번째 혁명 - '웃으면 복이와요' , 그리고 '개그맨' 세대의 등장
유신 정권의 사회 규제가 극에 달했던 70년대 후반, 희극인들도 저질논란에 휩싸이며 한국 코미디는 잠시 침체기를 가졌다.
그런 상황에서의 방송통폐합은 그나마 방송 활동을 지속하며 명맥을 유지하던 희극인들에게는 활동 영역의 축소로 인한 시련을 안겨줬지만,
안정된 양대 방송국 시스템 하에서 다양한 코미디 포맷이 쏟아져 나오며, 한국 코미디는 또 다른 도약기를 가질 수 있었다.
1980년대는 다양한 예능 포맷이 공존하던 한국 코미디의 르네상스기였다.
이 때 가장 사랑받았던 프로그램은 가장 사랑받던 희극인들이 나와 코너를 꾸렸던 정통 코미디쇼 류, '웃으면 복이와요'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웃으면 복이와요'를 시작으로 정통 코미디 쇼가 매주 일정한 시간에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이전에는 같은 코미디를 반복하던 희극인들의 인식의 한계, 방송사의 지원 및 기획 역량 부족, 광고. 협찬 시스템의 미성숙 때문에
단지 이런 저런 쇼의 자투리에 초청을 받았을 뿐 감히 '코미디 쇼'를 만들어서 방송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대 방송국에서는 공채 시스템을 도입한다.
이 때 뽑힌 '개그맨'들이 '정통 코미디 쇼'를 통해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며 정통 코미디를 계승, 발전시킬 역량을 쌓을 수 있었다.
'개그맨'이라는 단어의 원류에 대해서는 서로 원조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 정확하게 규정할 수가 없으나,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부터 방송사 공채 시스템을 통해 등장한 코미디언들을 '개그맨'이라고 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어쨌건 이 때문에 '웃으면 복이와요' 류의 정통 코미디쇼의 등장, 그리고 '개그맨' 세대의 등장. 이 것을 한국 예능계의 첫번째 혁명이라고 한다.
물론 전문 MC의 진행하에 편을 갈라서 가요쇼나 청백전을 하는 포맷도 여전히 유행했다.
한 때 방송사들은 개그맨 공채와 별도로 이런 쇼나 교양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전문 MC' 공채를 통해 '전문MC'를 따로 뽑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후반까지의 일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전문 MC란 당대 트랜드를 주도하고 있는 가수나 연기자들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개그맨'들은 MC 반열에 오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개그맨'들은 희극인이었다.
개그맨들이 얼굴에 분장을 하지 않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진행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80년대 초중반에는 정말 재능있는 '개그맨'들이 양 방송사에서 많이 등용되었다.
양 방송사에서는 연기력을 갖추고 있는 젊은 개그맨들을 데리고 콩트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심형래, 임하룡, 김형곤을 비롯 수 많은 스타가 탄생한다.
요즘도 종종 브라운관에 나와 자신의 전성기를 얘기하는 최양락, 이봉원 등도 이 때 두각을 발휘했던 개그맨이다.
콩트 역시 초반에는 문화방송이 우세였으나 콩트 스타가 많았던 한국방송이 콩트에서 두각을 발휘하자,
80년대 중반까지 문화방송이 주도하던 예능계의 패권을 한국방송이 차지하게 된다.
이 때 문화방송에서는 예능의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요즘말로 하면 퓨전이라고나 할까.
전문 MC가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 안에 다양한 포맷의 예능 꼭지들을 섞어 넣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서서 진행만 하며, 멘트만 읽어주는 MC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한계가 생겼다.
순발력과 재치를 겸비한 MC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MC가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김병조이다.
물론 김병조는 정치논리에 휘말려 장기집권 하지는 못했지만 개그맨 MC의 시초로서, 후배 개그맨들이 굴기할 가능성을 열어놨다.
그리고 김병조의 후임으로 걸출한 MC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면서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후속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등장한다.
아무리 개그맨 MC가 필요하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개그맨이라고 하면 얕잡아 보던 시절.
희극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소위 '싸고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서 자유로웠던 말 잘하는 신사 개그맨, 주병진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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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천재 개그맨 주병진이 열어놓은 '개그맨 MC'의 전성시대
아마 주병진이 개그맨 MC로 성공하지 못했다면, 개그맨 MC의 등장은 10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물론 주병진의 파트너 이경규도 있었지만, 이경규가 '개그맨 MC'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임을 혼자 받았다면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천재라는 표현을 쉽게 쓸 수는 없지만 감히 말하기를, 주병진은 천재였다.
2010년 현재 TV를 볼 때, 소위 잘 나간다는 유재석이나 이휘재와 같은 MC들의 말장난들 속에서
이미 80년대 후반 주병진이 구사했던 코드의 유머들을 만날 수 있다.
주병진의 스타일을 유재석이나 이휘재나 도용해서 연기하거나, 벤치마킹 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만큼 '개그맨 MC'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주병진의 천재성이 많은 시민들에게 웃음을 줬으며, 그걸 보고 자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진행을 하면서도 적재적소에서 출연진들을 살살 긁으며 다양한 리액션을 유도할 줄 알았고, 그들의 재치도 끌어낼 줄 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예능 프로그램은 콩트 프로그램이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방청객을 깔고 시작했다.
주병진은 필요에 따라 방청객들도 긁어서 웃길 줄 알았다.
2010년 누가 뭐래도 가장 잘 나가는 MC는 강호동과 유재석이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도 인정하고, 방송가에서도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 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2010년 예능에 특화된 개그맨이자 방송인이다.
20년 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방송사 예능국 구성원들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지원도 대단해졌다.
제작진과 스태프라는 아군들만 놓고 예능을 만들어낸다. 짧은 시간을 녹화하며, 항상 웃겨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길게 녹화해서 편집 과정을 거쳐 최상의 결과물만 내 놓으면 되는 것이다.'
20대를 코미디의 시대에서 보낸 80년대 개그맨들은 코미디에 대한 상당한 애착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코미디언 김형곤은 이런 말을 했다.
"관객을 두 시간동안 계속해서 웃기지 못하면 개그맨이 아니다."
주병진 역시 타고난 개그맨이었다. 1시간 방송이면 1시간을 웃기면 된다. 그리고 1시간을 웃겼다. 녹화가 길어질 필요가 없다.
주병진과 함께 '개그맨 MC'의 시대를 열었고, 본인 역시 20대를 코미디의 시대에서 정통 코미디를 연기하며 보낸 이경규 역시 그렇다.
그 역시 VTR을 틀어주는 프로그램도 아닌데 1시간 방송이면 1시간 20분을 녹화하고 끝낸 일화도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소위 '날방송'이라는 용어로 매도되며, '불성실함'으로 비춰지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거리로 쓰이지만,
무릇 개그맨이라면 지금 찍고 있는 영상의 결과를 생각하기 보다는 당장 앞의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는 피가 끓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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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20년 후, 예능계의 대부가 된 이경규의 도약
이경규로 말할 것 같으면 1981년 MBC 개그콘테스트 인기상으로 데뷔,
개그계의 삼황[三皇] 중의 한 분으로 평가 받는 구봉서 선생에게 '웃으면 복이와요' 시절부터 개그를 사사받은 유일한 현역 MC이다.
물론 그 역시 튀어나온 입에서 비롯된 강한 인상과 지독한 사투리 때문에 방송사 차원에서 무시당하며, 지독한 무명생활을 했다.
라디오가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시절 우연히 투입된 '별이 빛나는 밤에'.
일단 방송사에서 자체 필터링 할 정도의 외모는 노출이 안 되며, 사투리 발음은 철저히 지양해 방송 심의를 빗겨나가자
당시 라디오계의 옥좌를 철옹성 같이 지키고 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박살내고,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그리고 데뷔 5년만인 1986년 신인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경규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동기였던 김정렬, 최양락, 김보화 등에 비해 늦게 열린 출세길이라 그 속도가 남달랐다.
그 도약의 시발점에서 이경규는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개그계의 오제[五帝] 중의 한 분인 김병조를 만나고, 개그맨 MC의 가능성을 배운다.
이전 편을 만들다 보니 '개그계의 오제[五帝]'에 대한 질문이 많더라.
첫째는 희극인으로서 정상의 인기를 누리다 간 이주일이고, 둘째는 개그맨 MC의 시초가 된 김병조이다.
셋째는 당시에는 주춤했지만 훗날 한국 예능계의 세번째 혁명인 개콘의 등장을 견인한 전유성이고,
넷째는 최고령 MC로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송해이다.
다섯번째는 필자가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있지만, 서열매기고 싸움질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말싸움하기 싫어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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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한국 예능계의 두번째 혁명 - 일요일 일요일 밤에
천재 개그맨 주병진 옆에도 항상 일정 수준 이상의 웃음을 담보하는 조력자가 필요했고, 그래서 '일밤'에 합류한 게 이경규이다.
그렇게, 1988년 12월 대망의 일밤 1회. 주병진과 이경규, 김흥국과 노사연 이렇게 네 명이 일밤 신화의 신호탄을 쏜다.
사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역시 처음엔 콩트에 기반을 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주병진을 필두로 이경규 등의 MC들의 스튜디오 토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일밤은 예능계에 전무했던 프로그램으로 새로운 예능의 트랜드를 만들어 내게 된다.
만담이 아니고서야 MC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물고 뜯으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며,
스튜디오에서 여러 명의 MC가 나와서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갈 것을 상상했겠는가.
특히 주병진과 이경규의 조합은 당시 설문에서 인기 MC 1위 주병진, 인기 개그맨 1위 이경규를 만들어 낼 정도로 파격이었다.
하지만 초창기 일밤의 순항을 이끌었던 주병진은 일밤에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하차하게 된다.
아마 첫 번째는 메인 MC를 교체함으로써 매너리즘을 극복하려 했음이고, 두 번째는 주병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개그맨MC는 낯설었기 때문이다.
일밤에는 그 후 최수종, 이문세 등의 MC들이 거쳐가나 주병진이 없는 일밤은 이경규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주병진에 대한 향수와 개그맨 MC의 필요성을 공감하며 일밤 진행 스튜디오를 이경규가 접수한 것은 물론,
코너로도 예능 프로그램 사상 초유의 시청률이었던 70%를 기록했던 몰래카메라와 시네마천국을 터뜨리면서 일밤 = 이경규 공식을 만들어낸다.
이 때부터 일밤으로 시작된 한국형 버라이어티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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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1990년대 대표 MC 이경규의 독주
실제로 몰래카메라가 초유의 히트를 친 91년부터는 이경규의 독주였다.
개그맨으로서는 유일하게 연예인 수입 순위 10위에 꾸준히 랭크되었으며, 모든 설문에서는 그가 1위를 차지했다.
MBC는 주병진-이경규 콤비가 만들어 낸 센세이션을 치하하며
연기대상에 코미디 부문을 신설해서 90년에는 주병진을, 91년, 92년에는 이경규를 치하했을 정도였고,
93년, 94년 이 상을 받은 이홍렬이 이경규 때문에 이런 상을 다 받게 됐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95년과 97년에는 다시 이경규가 대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 때쯤 SBS도 등장하게 되는데, 아마 지금의 예능 문화처럼 방송 3사를 누비면서 이경규가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다면
아마 그의 히트 프로그램과 대상 커리어는 더욱 위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당시까지만 해도 전속 개념이 강했던 때이고,
전속 개념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한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문화방송은 연기자는 최불암과 김혜자, 개그맨은 이경규.
이렇게 세 사람은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전속 개념이 사라진 후에도 특별히 붙잡을 정도였고,
실제로 이 세 사람은 2000년대 들어와서야 타 방송국에도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이 쯤에 이경규는 신 웃으면 복이와요, 오늘은 좋은날, 코미디 동서남북, 콤비콤비, 이경규가 간다, 양심냉장고 등을
연이어 대히트 시키며 예능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이 때부터 이경규는 "너는 끼도 있고, 세상은 최초에 환호한다.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도 옷을 벗겠다"며
훗날 대형 MC로 성장하는 강호동을 발탁하는 등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게 된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규라인'이라는 신조어가 인기를 끌면서 '유라인','강라인,'신라인' 등 다양한 관계어들이 생겨났지만
그것들과 '규라인'이 달랐던 점은 이경규는 소위 '될 놈'만 찍어서 키웠고,
혹독하게 키워내면 벼랑에서 밀어내서 독립을 시켜 자생시켜 모두 예능계를 종횡무진하는 예능인들로 키워냈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같이 얼굴을 내비추는 '유라인', '강라인'의 개념과는 다르다.
물론, 유재석과 강호동 역시 대단한 MC기에 유라인과 강라인의 10년후도 기대해 봄직하다.
이후 이경규는 1998년 말. 1년 후 다가 올 21세기의 또 다른 예능 변혁을 감지하고,
자신의 안정된 모든 영역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결행, 예능인으로서 두 번째 삶을 준비한다.
사실 이경규는 개그맨으로서 양심MC로 이미지가 고착화 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절대 강자였던 이경규와, 그의 우방이었던 이홍렬, 거기에 그와 파트너였던 김국진까지 자리를 비우자
한국방송에서 여러 방송을 진행하며, 한국방송의 대표 MC로 활약하던 서세원이 '서세원쇼'를 들고 나와 위세를 떨쳤다.
서세원의 입지 확장, 일밤의 추락 등을 지켜보던 이경규는 1999년 10월. 밀레니엄을 3개월 앞두고 급히 귀국한다.
귀국하자마자 '일밤'을 든든하게 진두지휘하여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았고, 전파견문록도 히트시키게 된다.
그의 우방 이홍렬은 이홍렬쇼를 히트시켜 호응하였고, 그의 파트너 김국진 역시 21세기위원회를 히트시켜 협조하여 다시 황금분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 때 서세원쇼의 스타 유재석을 시야에서 놓치게 되는데, 이 사람은 훗날 이경규의 지독한 경쟁상대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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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2세대 MC들의 굴기, 개콘의 등장
이경규가 90년대 초반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80년대 후반부터 이경규와 호흡을 맞추며 콩트를 선보이던 이홍렬 역시 예능인으로 성공적인 적응을 하게 된다.
물론 일밤 이후 이홍렬쇼 외에 별다른 예능 히트작이 없었기에, 이홍렬은 MC보다는 코미디언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박미선과 이경실의 등장도 이 쯤이었다. 박미선은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고, 이경규와 함께 라디오를 진행하며 역량을 기르다가
서울방송의 개국과 함께 서울방송으로 이동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게 된다.
물론 박미선은 2000년대 후반까지는 다른 동료들에게 묻혀 후한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2000년대 후반 재평가 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경실은 화통한 스타일로 문화방송을 휘저으며 여성 파워를 보였다.
언제나 제 몫을 다했던 예능인이었지만 스타일 자체가 원톱형이었기에, 여성 원톱이 허용받지 못하던 그 시절 다작은 하지 못했다.
하여 이 두 여인은 1세대 MC에 넣기에도, 2세대 MC에 넣기에도 시기적, 기능적으로 무리가 있어 따로 분류하지 않는다.
'감자골 사태' 이후 MBC로 이적해 온 4인방 중, 테마게임을 통해 9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한 김국진은 과연 신드롬적인 인물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희극인으로서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사람은 이주일이고, 개그맨(콩트)으로서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사람은 심형래였다.
그리고 예능인으로서 가장 큰 인기를 얻은 것은 김국진이다.
90년대 초반 이경규의 독주 시기가 있었지만 그 때는 이경규가 예능계에서 독주하며 예능판을 키워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저물고는 있었지만 콩트 코미디도 여전히 예능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이경규의 그것은 김국진이 누리던 영광에는 버금갈 바가 아니었다.
김국진이 탑을 달리던 시절은 달랐다. 물론 김국진이 탑을 달리던 시절에도 인기 순위 2위였던 이경규가 시청률 면에서 밀릴 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재석과 강호동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설문을 해보면 김국진은 이경규의 두배에 가까운 표를 몰아 받았다. 두 사람이 전체의 8할을 먹어치웠다.
90년대 초반에는 이휘재와 강호동이 잠깐 도약했으나 가라앉았다.
사실 강호동은 코미디 연기로 반짝했던 것이고, 이휘재 역시 MC라기 보다는 인생극장의 연기로 반짝했던 것이다.
이휘재는 제대 후 90년대 후반에 멋진 만남으로 재기하고, MC 이미지를 굳혔으나
강호동은 천생연분을 만나기 전에는 MC 이미지를 가진 개그맨은 아니었다. 따라서 강호동은 3세대 MC로 분류된다.
90년대 후반에는 서경석이 약진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 줄 모르겠지만 밀레니엄 직전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20세기를 빛낸 개그맨 설문에서 1위는 김국진, 2위는 이경규, 3위는 서경석이 랭크되었다.
1,2위를 보자는 게 아니라 서경석이 그만큼 예능계에서 위세를 떨쳤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밀레니엄으로 넘어가기 직전에는 남희석이 멋진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적이있다.
단일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기에 그 인기는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그 시절을 잘 모르는 독자는 2005년 즈음의 상상플러스의 탁재훈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신동엽과 김용만은 MC로는 활동했으나 그 도약은 밀레니엄 이후이다.
신동엽은 대마초 파문 이후 일밤을 거쳐, 해피투게더를 진행할 때 비로소 정상을 밟았으며,
김용만은 줄곧 김국진의 보조 MC로 활동하다가 김국진이 휴식기를 가질 때 덩치를 불려 일밤에 합류,
이경규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이정도를 2세대 MC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90년대 후반 한국방송에서는 한국 예능계의 세 번째 혁명인 공개 코미디 '개그콘서트'가 등장하게 된다.
아이디어 뱅크 전유성과 코미디계의 대모 김미화 모든 총대를 메고 출범시킨 게 얼마 전 10주년이 되었다.
호흡이 빠른 '개그콘서트'가 등장한 이후로 정통 코미디는 자취를 감췄다.
2000년대 초반에는 쿵쿵따 이후 주가를 올리던 이휘재, 유재석 등 서울예대 팀이,
2000년대 중반에는 코미디의 명가 문화방송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이경규, 김국진이
2000년대 후반에는 남희석과 후배들, 그리고 이성미, 이봉원 등 80년대 개그맨들이 정통 코미디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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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1세대 MC 이경규의 수성 vs 3세대 MC 유재석의 도전
2000년대 이후로는 전통의 강자 이경규의 수성 속에, 김국진의 몰락과 부활이 있었고, 신동엽, 김용만의 도약과 몰락이 있었다.
그리고 2세대 MC들이 조금씩 입지가 좁아진 채로 여전히 활동을 하고 있다.
서세원쇼가 막을 내린 후 문화방송에서 동거동락을 진행하며 MC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유재석은 느낌표를 통해 과거의 촐랑거리던 이미지를 벗고
본격적인 MC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강호동 역시 천생연분을 진행하며 MC로의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한다.
2001년에는 박경림과 박수홍이 급하게 성장했다가 급하게 몰락했다. 2005년을 즈음해서는 탁재훈이 급하게 성장했다가 급하게 몰락했다.
2000년대 10년을 관통하는 MC 세 명을 꼽으라면 이경규와 유재석, 강호동을 꼽을 수 있다.
강호동은 유재석과 몇 작품을 같이 하긴 했지만, 비교적 이경규, 유재석과 부딪치는 것 없이 독자적으로 영역을 확장해왔다.
반면 유재석은 무려 서른 세번이나 유재석과 부딪치면서 성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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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로드쇼 힘나는 일요일 : 이경규 승
비교가 되지 않는 스쿼드였고, 상대가 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의 동맹군이었던 김국진의 진영에 있던 김용만을 거두었으며, 대마초 사건 이후 의탁해 온 신동엽을 거둠에 따라
최강의 진용을 갖춘 이경규의 일밤 건강보감 팀은 예능계를 단숨에 평정하며, 이경규의 화려한 복귀를 알린다.
이에 한 때 서세원쇼의 종영과 함께, 서세원과 잠시 일밤에 또아리를 틀었던 유재석은 한 달도 못 되어 일밤에서 쫓겨난다.
그 이후로 서세원은 예능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제 막 크려고 하는 유재석은 다른 방송사로 옮겨가게 된다.
유재석은 서울방송으로 진영을 옮겨 '로드쇼 힘나는 일요일' 이라는 프로로 본인 세력의 할거를 꿈꾸나 참패한다.
사실 김용만은 김국진의 보조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국진은 자신이 예능계를 지배하던 시절, 최강자의 면모를 보이며 휴식과 활동을 반복하는 여유를 부렸다.
김국진이 휴식하는 동안 김국진은 본인이 진행하던 프로그램은 김용만에게 모두 맡기곤 했다.
김용만이 존재감을 늘리기 시작했고, 이경규가 귀국하고 오자 이경규와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김용만은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그 후 김용만은 브레인 서바이버를 터뜨리게 되는데, 이후에 김용만은 단독 메인 MC 급으로 크게 된다.
신동엽은 대마초 파문 이후 힘든 시절을 보내다가 일밤으로 옮겨와 신장개업, 러브하우스를 통해 재기하게 된다.
재치도 있었고, 프로그램 운도 좋았으며, 추문에 휩싸였던 본인이 공익 프로그램을 선택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건강보감에 합류하여, 최고의 예능인들 사이에서 예능인으로서의 건재함도 보인 것이 주효했다.
이후 신동엽은 2003년 기준 최고의 정점을 찍게 된다.
애당초 서울방송 출신의 신동엽은 필요에 따라 방송사와 협상하는데 매우 능했다.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지도 않았으며, 때문에 그가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시절에는 그를 원하는 3사 방송사를 상대로 자유자재로 거래를 했다.
이경규는 MBC에 전속 비슷한 개념으로 묶여있었고, 김국진은 KBS를 안 좋게 떠나왔기에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후에 '본좌' 자리를 차지한 신동엽은 달랐다. 신동엽이 정상을 차지했던 시절이 벌써 7년전이다.
신동엽은 300만원 선의 대우를 받던 메인 MC의 출연료를 800만원 선으로 끌어올렸다. 그 출연료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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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헌혈합시다 : 이경규 승
<제 3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황금보물선을 찾아라 : 이경규 승
<제 4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날아라 번지왕 : 이경규 승
<제 5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유재석의 장롱면허 탈출재작전 : 이경규 승
<제 6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유재석의 조용한 가족 : 이경규 승
<제 7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스타 서바이벌 만찬 : 이경규 승
'로드쇼 힘나는 일요일'로 참패를 당한 유재석은 본격적인 진용을 갖추고,
서울방송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일밤'에 대적할 만한 초특급 일요일 만세'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여섯차례에 걸쳐 코너를 갈아가며 이경규를 무너뜨리려고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웬만한 MC 였으면, 신예 MC가 이 정도 프로그램을 말아먹었으면 더 이상 기회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이경규, 김용만, 신동엽이 모두 MBC에 있고, 김국진은 휴식기였다. 쓸만한 MC가 없었다.
때문에 유재석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서울방송에서 기반을 잃는 것으로 끝나고, 한국방송에서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이 때쯤 유재석은 문화 방송에서 동거동락을 히트시키며 MC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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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차 전쟁> '야! 한밤에' 에서의 혈전 : 이경규 승
예능 최대 시장인 일요 예능에서의 승리는 이경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었다.
당시 '야! 한 밤에' MC로서 저조한 성적을 내고 있던 유재석을 자리에서 끌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이경규는 '보고 싶다 친구야'를 히트시키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이에 유재석은 와신상담하며 세력을 규합, 복수를 노린다.
<제 9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티비해결사 : 이경규 승
<제 10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대한민국 만세 : 이경규 승
<제 11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사랑의 쌀나누기 : 이경규 승
<제 12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유재석의 금연학교 : 이경규 승
이후 유재석은 한국 방송으로 옮겨와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에서 이경규를 네 차례 더 공격하나 번번히 참패를 당한다.
한편, 이 때 이경규와 함께 건강보감 연합을 결성했던 신동엽은 다시 본인의 세력을 회복함에 따라 이경규의 품을 떠나 독립 세력을 구축해서 나갔다.
건강보감을 통해 길러낸 박경림 역시 덩치가 크자, 진행 MC에 불과했던 자리를 던져버리고 건강보감을 떠났다.
건강보감 연합군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에 이경규는 천하를 주유하던 에피소드의 황제 조형기를 합류시켜 전력을 정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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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차 전쟁> [규] 건강보감 vs [유] MC대격돌 : 유재석 승
연이은 패배에 고민하던 유재석은 이경규의 막강한 세력에 도전하기 위해 대단한 사람들을 모아 팀을 꾸리게 된다...
이 때, 유재석은 처음으로 이경규를 격파하게 되는데, 이 맴버가 재밌게도 5년 후 이경규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유강이다.
이 때 메인 MC는 명망있는 전통의 강자 이휘재였다. 힘든 침체기를 감내하고 있었던 강호동 역시 합류한다.
마침 신동엽의 탈퇴와 오랜 방영기간으로 인해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이경규의 건강보감을 공격.
대승을 거둔 유재석은 새로운 예능계의 강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네임벨류는 있었으나 멋진만남 이후로 히트작이 없었던 지휘재는 다시 도약한다.
사상 최대의 슬럼프를 겪고 있던 강호동 역시 부활한다.
이 프로그램 이후 천생연분을 맡아 단독 MC로서의 가능성도 인정받게 된다.
사실 호동좌는 천생연분을 맡기 전에는 MC로서의 가능성은 인정받지 못했었다.
어쨌건 MC대격돌은 이경규-김국진, 그리고 신동엽 이후 예능계를 책임질 삼인방을 재도약시킨 프로로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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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차 전쟁> [규] 2002 이경규가 간다 vs [유] (갑작스런 하야) : 이경규 승
인생에 있어서 첫 패배에 와신상담하던 이경규는 이경규가 간다라는 월드컵 필승 카드를 들고 유재석과 재대결을 하러 온다.
하지만 유재석은 이 기세를 짐작하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감행한 상태.
유재석은 무리하지 않았다. 박수칠 때 떠났고, 서울방송으로 옮겨 본인에게는 '한'으로만 남아있는 정통코미디에 도전한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4강 신화를 거둔다.
이경규 역시 스포츠를 예능에 접목시킨 최초의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 이 프로그램을 대히트 시키게 된다.
<제 15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위험한 초대 : 유재석 승
유재석이 떠난 후의 MC 대격돌은 2기로 개편한 후 한없이 추락, 위험한 초대로 개편을 하지만 유재석의 MC 대격돌의 명성을 잇지 못했다.
이에 서울방송에서 정통코미디에 도전했지만, 참담하게 실패하고 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유재석은 위험한 초대에 합류한다.
그리고 이경규가 간다의 승리에 취해 있던 이경규가 방심해서 새롭게 론칭한 프로 대단한 도전의 진용을 채 정비하기 전 이경규를 기습한다.
이에 대단한 타격을 입은 이경규는 반년이 넘는 위기를 겪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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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위험한 초대 : 이경규 승
<제 17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천하제일 외인구단 : 이경규 승
<제 18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운명의 바퀴 : 이경규 승
김용만은 물론 조형기, 박수홍, 윤정수등을 거느리고 진용을 정비한 이경규는 유재석의 위험한 초대를 박살내고,
그 기세로 외인구단까지 잉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버린다. 참패한 유재석은 S본부로 본진을 옮겨 반격을 준비하는데...
<제 19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건강남녀 : 이경규 승
<제 20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태극기 휘날리며 : 이경규 승
<제 21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스타올림피아드 : 이경규 승
<제 22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유재석과 감개무량 : 이경규 승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이경규의 기세가 건강보감 때보다 더 대단한 것을 감지한 유재석은 이경규를 상대하기 위해 총력을 모은다.
이에 호응한 MC는 전통의 강자 이휘재, 슬럼프를 이겨낸 뚝심의 강호동, 그리고 예능계의 이단아 신정환이다.
이들을 이끌고 건강남녀라는 프로그램으로 연합을 구축한 유재석은 이경규와 정면대결을 감행하지만 철저하게 짓밟히고,
그 후 세 차례 진형을 바꿔 공격을 시도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아! 유재석은 이렇게 좌절하고 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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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차 전쟁> [규] 대단한 도전 vs [유] X맨, 반전드라마 : 유재석 승
일요 예능을 차지해야 예능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유재석은 이미 토요 예능으로 자리잡고 있던 x맨을 일요일로 옮겨온다.
단체 게스트를 데리고 짝 짓고, 게임시키는데는 상대할 자가 없었던 유재석과 강호동이 손을 잡은 것은 물론, 객장 김제동도 참여한 연합은
이경규와 일밤의 3년 독재를 종지부 찍는다. 그동안 철저한 수모를 당했던 유재석은 이 기세로 규본좌를 압살하기 위해
사상 초유로 '일요일이 좋다'의 모든 코너에 연속으로 나와 이경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무렵, 신동엽에게 잠깐 옮겨갔던 예능계의 왕좌는 공석이 된다.
이경규, 김용만, 신동엽 외에 신흥 강호 유재석, 강호동이 각자 프로그램들을 히트시키며 생존해간다.
예능의 르네상스기였다. 하지만 유재석의 기세는 이 때부터 상승세였다.
이 무렵부터 유재석은 각종 설문에서 수위권을 차지하며 인기 개그맨의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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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차 전쟁> [규] 상상원정대 vs [유] X맨 : 유재석 승
<제 25차 전쟁> [규] 러브서바이벌 추격남녀 vs [유] X맨 : 유재석 승
유재석에 의해 일요 예능의 패권을 잃은 이경규의 세력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일밤이 총체적으로 위기였기에, 일밤은 이경규와 김용만을 한 프로그램에 쓸 수 없었다.
콤비였던 김용만의 결별은 물론, 객장이었던 남희석, 조형기, 박수홍도 떠나갔고,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충복 이윤석과 반골의 상을 지닌 윤정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예능 패권을 이대로 내줄 수는 없었던 이경규는 여기에 개그콘서트의 유망주인 정형돈을 합류시켜 상상원정대를 조직한다.
당시 일밤의 성적을 어느 정도 끌어올리는 등 선방했지만 유재석의 기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제 26차 전쟁> [규] 돌아온 몰래카메라 vs [유] X맨 : 이경규 승
<제 27차 전쟁> [규] 2006 이경규가 간다 vs [유] X맨 : 이경규 승
이경규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인 몰래카메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초강수를 둔다.
결과는 성공, 유재석의 기세를 잠재우고, 다시 이경규가 간다로 그 위대한 승리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후 계속된 돌몰카로 유재석을 다시 궁지에 몰아넣는데...
이 때쯤 유재석은 무모한 도전을 론칭한다. 참 재밌는 일이다.
처음에는 목표달성 토요일의 한 코너로 출발한 무모한 도전이다.
그 프로에는 꼭지가 세 개 있었고, 나중에는 두 개가 남았는데 그 하나가 이경규의 이미지 서바이벌.
이경규는 토요일과는 운이 별로 없는 것인가. 결국 이경규의 프로는 막을 내리고,
유재석의 무모한 도전은 독립하여 계속 개편의 개편을 거듭하다가 나중에 무한도전이 된다.
그 무한도전이 훗날 지키는자 이경규와 도전하는 자 유재석의 위치를 뒤바꿔 버리니 참 재밌지 아니한가.
그리고, 이 무한도전이 더 재밌는 것은 국내 최초로 다인 MC에게 캐릭터를 입혀서 진행하던 대단한 도전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여
리얼버라어티의 새 장을 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예능계의 네 번째 혁명이라고 한다.
어쨌건 이 예능계의 네 번째 혁명을 통해 유재석은 예능계를 이끌어나가는 MC로 등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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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8차 전쟁> [규] 돌아온 몰래카메라 vs [유] NEW X맨 : 이경규 승
<제 29차 전쟁>[규] 돌아온 몰래카메라 vs [유] 하자GO : 이경규 승
<제 30차 전쟁> [규] 돌아온 몰래카메라 vs [유] 옛날TV : 이경규 승
이경규의 돌몰카는 이후 유재석을 계속 괴롭히며 저력을 과시했으나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더불어 한 때 이경규의 제자였고, 한 때 유재석의 혈맹이었던 강호동이 한국방송에 터를 잡고 1박 2일을 성공시켰으며,
돌몰카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 바람에 이경규는 애당초 계약대로 돌몰카는 100회만 채우고 종영하게 된다.
X맨이 종영될 무렵 유재석은 너무 성장해 있었고, 강호동 역시 원톱형 MC라 유재석과 더 이상 한배를 탈 수가 없었다.
1박2일을 히트시키기 전 강호동은 잠시 흔들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야심만만의 안정적인 성적이 그를 지탱해 주었고,
야심만만이 힘을 잃을 무렵에는 황금어장이 성공해서 그의 입지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1박2일을 탄생시켰고 현재 예능 중에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게 1박2일을 이끌고 있다.
이후 유재석은 두 프로그램을 더 시도했으나 강호동에게 참패했고, 이경규 역시 한 프로그램을 시도했으나 호동좌에게 참패했다.
각각 기적의 승부사와 기승史, 그리고 간다투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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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1차 전쟁> [규] 바이킹 vs [유] 무한도전 : 유재석 승
사실상 이휘재의 스펀지에게 이경규와 유재석 모두 당했지만 바이킹은 견디지 못하고 침몰했으며,
유재석의 무한도전은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서 결국 스펀지를 물리치고 승리했기에 유재석의 판정승으로 보겠다.
이휘재는 다시 스펀지로 명성을 되찾고, 김용만이 주춤한 사이에 스튜디오의 강자로 자리매김한다.
후에 세바퀴도 히트시키며 그가 진행하는 스튜디오 버라이어티는 안정적인 성적을 내며 생존하고 있다.
물론 그가 시도한 리얼버라이어티는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만큼은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MC가 리얼버라만 할 수 없는 만큼 탁월한 영역에서 승부를 보고 있는 현명한 처사이다.
<제 32차 전쟁> [규] 라인업 vs [유] 무한도전 : 유재석 승
한편,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았던 토요 예능 시장을 개척한 유재석은 무한도전으로 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이에 일요예능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지 못하시고, 평일 예능에서도 고전하던 이경규는
토요 예능의 절대 강자였던 유재석의 무한도전을 꺾기 위해 사상 최대의 무리수를 던지게 된다.
이른바 규라인! 그의 영원한 동반자인 김용만을 비롯, 김구라, 신정환, 윤정수, 이윤석은 물론 신예 붐을 합류시켜 유재석을 친다.
하지만, 예능사상 이런 개박살이 있을까. 철저하게 유재석에게 압살당한 이경규는 모든 수모를 홀로 뒤집어 쓰고 칩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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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차 전쟁> [규] 남자의 자격 vs [유] 패밀리가 떴다 : 이경규 승
라인업의 대패에 설욕하기 위해 이경규가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일요 예능에서 한동안 고전하던 유재석은 패떴으로 시청률 1위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남자의 자격이 출범한 이후로 그 기세가 예전같지는 않았다.
남자의 자격 출범 9개월,
시청률 5%에서 출발했던 남자의 자격은 시청률 20%에 육박하며 예능 1위의 위세를 자랑하던 패밀리가 떴다를 세 번이나 누르는 기염을 토한다.
패밀리가 떴다는 잦은 내홍과 예전같지 않은 위상, 그리고 유재석의 개인 사정에 의해 종영을 하니 생존하고 있는 이경규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의자격은 이경규가간다라는 필승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 이경규의 완벽한 부활이다.
여기까지 총 33전. 이경규가 26전을 승리했고, 유재석이 7전 승리했다.
그리고, 얼마전 이경규는 윤정수를 이끌고, 이경규가 간다의 KBS판 'D-DAY'를 론칭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승승장구가 화요일에 편성될 것을 감안해보면, 아마 이경규의 새 프로그램은 유재석의 놀러와와 상대할 공산이 매우 크다.
개인적으로는 토요일 밤에 배치시켜 문화방송의 세바퀴의 대항마로 쓸 것 같기도 하지만 세바퀴는 워낙 자두를 탄 상태이고,
놀러와 시간대는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놀러와를 다큐 프로그램인 SOS가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라
차라리 유재석과 이경규의 서른 네 번째 전쟁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번 설을 기점으로 초상집과 다름없는 SBS 예능국과, 그 외 손 볼 프로그램이 몇 개씩 있는 KBS와 MBC에서는
2010년 현재 예능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명의 MC 강,재,규 중 상대적으로 스케쥴이 널널한 유재석과 이경규를 기용하여
새롭게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두 사람을 다시 싸움 붙이기 시작할 것이다.
중요한 건 수치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두 MC의 전쟁이 지금까지 한국 예능을 풍부하게 만들어왔고,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기대에서 이 대단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예능의 역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꾸준히 읽혀져야 한다.
예능의 역사를 부정하려 하거나, 삭제하려 하거나, 거부하려 하는자는 그 속에 흉포한 음모와 저의를 품고 있는 자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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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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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쌈질로만 표시한거 같긴한데 그냥 볼만한글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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