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조커(2019): 멋들어지게 춤추고 소리 내 크게 한번 웃어보자! 왜 비명을 지르지? 웃어보라니까?2019.10.03 PM 09:25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스포일러 주의******************************************************

 

 

 

 

 

 

 

 

 

 

 

 

 

 

 

 

 

 

 

블랙 코미디 영화의 기본은 아이러니다. 화면 속 모순된 장면에 관객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왜 씁쓸한가? 인간의 삶도 이 세상도 모두 결국 아이러니투성이니까.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본의와 상관없이 웃게 되는 신경질환이 있다. 그는 상담소에 가며 정신상담을 받고 약을 타기도 한다. 그의 웃음 자의가 아니다. 세상은 그를 억지로 행복한 표정을 짓게 했다. 아서 플렉은 코미디언으로서 사람을 웃게 만들고 싶었지만, 세상은 그를 비웃을 뿐이었다.



한계에 도달한 아서 플렉은 얼굴의 분장을 하고 새로운 자신을 연기해낸다. 자 보아라! 멋들어지게 춤추고 소리 내 크게 한번 웃어보자! 웃지 않는 자들에게는 총을 내밀고 미소짓는다. 왜 비명을 지르지? 웃어보라니까?



어느덧 아서의 춤사위 뒤에는 선혈이 펼쳐진다. 어느새 그의 뒤에는 그를 따르는 폭도들이 줄을 선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공권력도 더는 그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뭐, 나중에 배트맨이 배트랑은 던져주겠지만.



영화 조커는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슈퍼히어로물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영화가 이 영화를 받은 것은 최초이다. <다크 나이트>도 해내지 못한 쾌거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한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서 다수의 관객은 이 영화의 수상이 이해가 갈 것이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정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낸다. 게다가 영화는 단순히 조커라는 희대의 인기를 자랑하는 빌런에 대한 끝내주는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사회 보장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두 작품 모두 선악의 개념을 벗어나 희극과 비극이 교묘히 뒤엉킨 사회 고발 영화다.


영화 개봉 전 모방 범죄 이슈가 일어난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영화는 보는 이에 따라 강렬한 선동 선전 영화가 될 수 있다. 희극 연기자인 조커는 너무나 매력적인 연기자(퍼포머)니까. 그만큼 조커는 멋들어진 춤사위를 보인다.  60년대 말 최고의 록밴드 중 하나인 Cream의 히트 넘버 White Room이 배경에 깔리고 아서 플렉이 조커로서 자아를 완성하는 장면은 분명 카타르시스가 관객을 휘감는다. 영화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서 플렉에 공감하고 조커처럼 광기 어린 분노를 내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특히 계속되는 총기 사건이 벌어지는 미국에서는 현실에 직면한 문제다. 이미 미국에서는 수 없는 조커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 영화가 모방 범죄를 일으키니 사람들이 보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거나 영화를 평가 절하해서는 곤란하다. 꽤나 한심한 소리다. 유튜브였다면 바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영화나 게임이 실제 사건의 트리거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막아야 하는 것은 트리거가 아니다. 막아야 하는 것은 ‘총’의 존재다. 바로 총을 생산하고 유통하며 발사까지 하게 만드는 사회의 문제다. 사회의 탓을 트리거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총을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존재해야 했다.



총은 곧 폭력이다. 이 영화는 폭력이 어떻게 탄생하며 대물림되고 퍼지는 가에 대한 이야기다. 아서 플렉의 가족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도중에 지원이 끊긴다. 고담시의 사회 보장 시스템은 형편없다. 아서 플렉을 그나마 보호했던 유일한 안전장치는 상담소였다. 상담소라는 사회 보장 시스템이 사라진 순간 조커는 탄생했다. 시스템의 부재가 폭력의 큰 동기가 되어 버린다. 아서는 가정 폭력의 피해자이며 사회 시스템이 버린 남자인 것이다. 조커에게 총을 건네준 사람은 그냥 그럭저럭 나쁜 인물이지만, 사실 아서가 트리거를 당기게 한 것은 바로 사회다. 마치 도널드 트럼프를 상징하는 것 같은 모습의 토마스 웨인이 시장에 출마하는 것은 이런 조커의 등장에 호응하고 모방하는 폭도들을 등장시키는 장치다. 사회의 탓을 영화에 돌리는 것은 농담거리도 못 되는 비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다크 나이트>를 능가할 코믹북 원작 영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다크 나이트>가 이정표라면 <조커>는 종착역이다. 마스터피스라는 표현은 이런 영화를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가 훌륭한 작가주의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상적인 컷의 연결, 상징이 가득한 높은 이미지 몽타주, 미려한 미장센을 보이는 무대의 화면구성 등은 작가주의 영화로써도 상당한 완성도를 보인다. 아서 플렉이 스탠드 옆에 눕혀있는 권총과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장면이 있다. 천장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카메라 쇼트다. 이는 하나의 총, 조커가 되어가는 고뇌를 그리는 장면이다.


 


솔직히 토드 필립스 감독에게 큰 기대를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코미디 영화를 주로 찍어온 그였기에 오히려 코미디언의 정체성을 가진 '조커'란 캐릭터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고민하고 내면을 성찰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훌륭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훌륭한 연출보다 더 대단한 것은 배우의 연기다.



호아킨 피닉스는 분장 없이도 조커 그 자체다. 조커의 상징은 얼굴에 바르는 물감이 아니다. 분노를 웃음으로 표현하는 아이러니한 농담을 하는 자(Joker)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지 못한다면 아카데미 자체가 하나의 농담이 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조커가 그 자체가 되었다. 기존의 조커들과 비교해 어느 조커가 좋은가에 대한 비교는 하고 싶지 않다. 기존의 영화 속 조커들과는 캐릭터의 성향이 다르다. (기억에서 사라진 사랑꾼 조커를 제외하고) 그들은 모두 훌륭했으며 매력적이었고 최고의 조커였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는 것 또한 질 나쁜 블랙 코미디다.



개인적으로 앨런 무어의 걸작 만화 <킬링 조크>는 조커를 다룬 모든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 생각을 접었다. 나에게는 이 영화 <조커>가 더 훌륭하다고 느껴졌다. 그 정도로 좋았다. 슈퍼히어로물이라는 한계 안에 존재했던 그 만화와 달리 <조커>는 세상 밖으로 나온 현실의 이야기다. 초창기 마블의 빌런들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반작용에 가까웠다. 혹은 왕위 쟁탈전에 가까웠다. 타노스는 극단적인 사상가이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혼돈이 인격화된 괴물 그 자체였다. 하지만 영화 <조커>의 아서는 다르다. 대단한 신화적인 플롯이나 사상적 면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낸 응축된 분노에 관한 엉뚱한 농담이다.



조커가 혼돈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불만족할 관객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슈퍼히어로물 덕후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반대로 영화적 완성도와 메시지를 중요시하는 시네필 영화 덕후라면 극찬을 아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TV 쇼 장면은 전후로 벌어진 엄청난 에너지에 비해 김이 샌 느낌도 있었다. 힘이 없는 번역 탓도 있겠지만, 광기보다 분노에 집중한 탓일 것이다. 이는 필자 개인의 호불호에 따른 불만이다. 오히려 주제 의식과 조커의 탄생을 알리는 점에서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연기자에게 무대와 카메라는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상당수 관객은 토마스가 조커의 실제 아버지인가 아닌가 문제가 확연하지 않은 것에도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맥거핀일 뿐이다. 똑같이 확연하지 않고 맥거핀을 마음껏 뿌려댔던 영화 <곡성>의 명대사가 있다. "뭣이 중한데?" 설정을 중시하는 DC 덕후에게는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영화적으로는 크게 상관없는 이야기다. 아버지로서의 토마스 웨인, 시장으로서의 토마스 웨인, 어느 쪽이든 부싯돌과 같은 존재다. 그는 아서 플렉이라는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고 불 속에서 조커는 탄생했다. 맥거핀을 활용한 영리한 연출이다. 유투버와 위키러는 신이나 자신의 주장이 옳다며 의견을 나눌 것이다. 이때 미소짓는 건 영화사다.



<조커>는 분명한 걸작이다. 완성도나 메시지 뿐만 브루스 웨인을 등장시키고 각종 DC 영화의 트리비아를 담은 것으로 보아 장르 팬에 대한 배려도 충분하다. 하지만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보이더라도 워너 브라더스는 애초 의도대로 이 작품을 억지로 DC 유니버스에 끼워 맞추지 말고 독립적인 영화로 남겼으면 한다. 이 훌륭한 작품에 억지로 시퀄을 만들고 세계관에 연결 지어 버리면 관객에게 남은 건 실망하는 선택지뿐이다. 단독 영화는 단독 영화대로 만들고, 배트맨과 조커의 대립을 다룬 영화는 또 그것대로 만들면 어떨까? 다양한 선택지를 관객에게 선택하게 해주는 것은 어떨까?  거대한 서사시가 되어 버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맞설 좋은 방법이 되진 않을까?

댓글 : 2 개
  • joker
  • 2019/10/03 PM 09:38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디가 조커 시라니 부럽네요 ㄷㄷ.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