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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범한 흡혈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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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날이었다.
장 선생은 오늘도 어김없이 죽었다. 혼세중학교 과학실이 폭발하는 곳에서 화학동아리 학생들을 구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화학동아리도 아주 바보는 아니어서 정식으로 인가된 실험을 안전장비까지 갖춰서 하고 있었고, 폭발에 휘말려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 선생의 죽음은 오늘도 무의미했다.
학교가 일찍 끝난 덕에 미르는 담벼락에서 고양이들과 낮잠을 즐겼고, 나라는 그 옆에서 고양와 미르의 투샷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묘란은 논밭에서 거대 식인지렁이를 한 자루의 괭이로 토벌했다. 예전이라면 그저 귀찮은 지렁이었지만 요즘엔 이야기가 달랐다. S시로 이사온 메를렌이 이 지렁이 시체를 마법재료로 매입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스카 슈퍼마켓의 점장 알 파카는 저녁세일을 노리고 몰려들 무투파 아줌마들을 대비해 만년한철로 만든 매대에 공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학교 수위인 케이젤은 학생들의 등굣길을 습격하는 그리폰을 쫓아내는 대신 아예 길들일 방법을 찾기 위해 학교도서관 아래의 저주받은 지하던전을 탐색하는데 열을 올렸다. 자정 전에는 찾고있는 책이 있는 지점까지 진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진연구소의 로봇소년 디엠은 옥청진 박사의 부탁을 받고 공중에 멈춘 운석의 시료를 채취하러 가다가, 하필이면 공중에서 모히칸 대학생들을 만나 급히 도망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오후.
“…어라라라라리요?”
평범한 회사원이자 흡혈귀인 카밀라 체페쉬는 문제의 거대 운석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이상한데요오오오…….”
카밀라는 눈을 찡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있던 일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분명 사무실에 갑자기 흡혈귀 사냥꾼이 들이닥쳐서 저를 17등분하네 어쩌네……. 아.”
차디찬 고지대의 바람을 마시고 머리가 맑아진 카밀라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 대낮에 흡혈귀 사냥꾼이 사무실을 습격한다는 게 법적으로 말이 안 됐다. 애초에 흡혈귀 사냥꾼은 동화로나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그리고 두 번째로, 복장이다. 그녀가 입고있는 건 정장이자 정장이 아니었다. 옷은 정장이 맞았지만, 브래지어를 와이셔츠 겉에 걸치고 자켓을 허리에 묶어 스커트처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입에서 고기와 마늘, 양파, 소주냄새가 감돌았다.
이 세 가지 정황을 통틀어 볼 때, 그녀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이런 젠장. 꿈이었네요오. 술해 취해서 맛이 갔던거예요오오.”
정확했다. 카밀라는 전날 회식 술자리에서 상사가 권하는 술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해버렸다.
그리고는 ‘달까지 날아가 주게써!’라고 외친 후 날개를 펼쳐 날아온 곳이, 바로 이 거대 운석 위였던 것이다.
현실을 인식하자, 이번엔 두통과 함께 진실이 밀려들어왔다. 신선한 공기가 카밀라의 뇌를 활성화 시켜,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어제의 이를 강제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전부터 생각했는데요오, 사장님하고 부장님하고 나란히 서 있으면 성희롱 아닌가요? 둘다 반질반질 대머리라 합쳐놓으면 가슴이라고요? M컵이잖아요?’
두둥탁! 드럼을 다루듯 리드미컬하게 사장과 경영지원부 부장의 머리를 두들긴 카밀라의 손이, 오늘은 자신의 머리를 드럼처럼 두들겼다.
“두둥탁은 얼어 뒈질! 미쳐버린 건가요, 나느으으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회사생활이 끝났다는 절망감도 있었으나, 그 눈물에는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반들반들한 대머리’도 만만치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밀라가 사장과 부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모든 사회적 리미터를 소주로 해제한 그녀의 웃음 코드는 대머리들하고 최악의 상성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문자가 왔다는 걸 안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어쩐지 안 봐도 내용을 알 거 같은데요오오…….”
불행히도 카밀라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술자리에서의 폭주와 무단결근을 이유로 해고조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기업이라면 중간 과정이 조금 더 까다로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중소기업. 사장과 왕이 같은 의미라고 착각하는 작자가 꼭대기에 있는 곳이었고, 그의 심기가 뒤틀린 시점에서 카밀라가 해고당하는 건 예정된 일이나 다름 없었다.
“자고 일어나니 하늘 위에서 백수가 되어버렸네요오오오…….”
상실과 허무. 온갖 감정이 피어올랐지만 그마저도 잠깐이었다. 창공에 휘몰아치는 바람은 카밀라에게서 걱정근심을 가져가버렸다.
“따져보면 말이죠. 딱히 좋은 직장도 아니었다고요? 세금내고 이거 내고 저거내고 하니 남는 게 토마토 주스 하나 살 정도의 돈이라니. 솔직히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문제는, 걱정근심만이 아니라 상식까지 가져가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요. 저는 자유인 거예요! 이런 정장 따윈, 이제 필요 없어요!”
카밀라는 경쾌한 웃음소리와 함게 상의를 전부 벗어버렸다. 자켓과 브래지어, 와이셔츠는 상공에 휘몰아치는 광풍을 타고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자유에요! 카밀라는 그 어느대보다 자유라고요오오오오!”
항공역학에 최적화 되었으며, 오렌지빛 머리카락과 강하게 대조되는 흡혈귀의 하얀 나신이 상공에 노출된- 그때였다.
여객기 한 대가 카밀라의 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여객기 안에 있던 한 소년과 카밀라의 시선이 맞닿았다.
“엣.”
***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거대 운석은 혼세중학교의 위, S시 상공에서 멈춰있지만 충돌 직전이 아니라 상당히 위에서 멈췄다. 게다가 크기도 커서 윗부분은 성층권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거대 운석을 비행 중의 관광요소로 꼽은 여행사도 있었던 만큼, 이곳을 지나가는 여객기를 탄 사람이라면 한두명 쯤은 운석 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날 카밀라와 눈이 맞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이 아이는 준비성도 철저한 타입이라 쌍안경도 소지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바지만 입은 이상한 누나가 운석 위에 있어.”
“얘는 무슨.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
아이의 말도, 부모의 말도 모두 맞았다. 아이가 관측한 순간의 카밀라는 분명 운석 위에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들이 아이에게서 쌍안경을 넘겨 받아 관측한 순간, 그곳에는 희끄무레한 안개밖에 없었다.
물론 카밀라는 이때도 운석 위에 존재했다. 인간으로서도, 흡혈귀로서도 수치심의 한계를 돌파한 그녀는 고위급 흡혈귀만 할 수 있는 안개 변신을 터득한 것이다.
‘…집에 가자.’
생각하는 것도, 옷을 찾는 것도 포기한 카밀라는 안개가 된 채 S시로 돌아갔다. 고전 장르소설의 흡혈귀들이 자신만의 고성에서 나오지 않듯, 카밀라가 밖으로 나오는 일은 한동안 없으리라.
어느 평범한 여름날에 일어난 일이었다.
***
이곳은 K국의 S시.
거대 운석이 낙하하다 허공에서 멈춘 기묘한 도시.
이것은 S시에 사는 사람들의 혼돈과, 혼돈의 이야기다.
세계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9,987화.
텐 링엔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SAN 치 대신 흥이 깃든 사다코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