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구석 동네의 30년 된 복도식 아파트다. 그나마도 친척 중에 우리 가족이랑 유난히 각별했던
이모가 세를 내려고 마련했던 집을 남편 없이 누나와 나를 어떻게든 키워 보겠다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어머니를 돕고자 넘겨주신 거다. 그렇다. 우리 힘으로 얻은 집이 아니다.우리 가족은
한 번도 우리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여자친구와 연애초기에는
우리 둘 사이에 차이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지지배가 우리 동네로 찾아 왔다고
불쑥 연락을 했다.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우리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할 게 정말 없었다.
나는 더운 여름 이 굽이진 동네까지 용케도 찾아온 여자친구가 너무 고맙고, 미안하기도 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당장 수중에 돈이 없었기에
방에 뒹굴던 동전들을 긁어모아 설레임을 두 개 사서 하나를 입에 딱 물렸다.
"이젠 뭐하지..."
곧 해가 져서 오래 못 머무는 여자친구를 데리고 할만한 게 참으로 없었다.
그렇게 20대 중반 남녀는 어린 애들마냥 설레임을
쪽쪽 빨며 나란히 그네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러면서 여자친구는 쉬지를 않고 장난을 치면서 내 반응에
꺄르르 웃어댔다.
귀한 손님이 방문하며 보낸 데이트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나도 여자친구 동네로 찾아가기로 했다.
우리 집과 꽤 멀었던 그 곳을 찾아가며 나는 이 거리를 반대로
똑같이 거닐었을 여자친구가 떠올라 또 반가웠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여자친구의 집에 도착했는데.
후회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보안문을 따로
지나야 하는 집을 살면서 처음 겪어봐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호출방법을 물었고. 그 문을 지나니 펼쳐지는 내 기준에선 마천루라 충분히 부를만한
웅장한 아파트 단지.
그리고 그 주변에는 고급스러운 식당과 프랜차이즈 빵집, 카페 등이 보였다.
저 멀리서 웃으며 달려오는 여자친구, 이번엔 자기가 쏘겠다고 말했다.
동전을 긁어모아 산 설레임 하나에 대한 보답으로 여자친구는
단지 주변에 있는 예쁜 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저녁을 사줬다.
그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우리 동네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 된 슈퍼마켓과 나물가게, 문구점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던 우리 아파트 단지 내부.
할 수 있는게 없어 놀이터 그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기가 우리 집!"이라고
곰팡이 핀 복도 외벽이 보이는 그 싸구려 아파트를 가리켰던 내 자신이 떠올라 창피해졌다.
그리고 곧 여자친구 '집 근처'따위에서 하는 이 소소한 데이트가
내가 돈을 아끼고 아끼며, 가끔은 친구들에게 빚도 지고 아무도 몰래 단기알바까지 해야
가능했던 번화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내 딴에는 '거사'로 치르던 그 데이트들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음을
깨달았다.
우선 괜한 생각 말고 음식이나 계속 먹으려는데
이상하게도 분명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들인데 퍽퍽해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러다 맞은 편에 앉은 여자친구의 얼굴을 봤는데
후줄근한 그네에 앉아서 수다를 떨 때와 전혀 다름 없는 밝고 신난 얼굴로 내게 재잘재잘
말을 걸었다.
억지로 꾸역꾸역 음식을 삼키던 나는
그 날 결국 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