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토끼 MY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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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로판]실수로 악당을 길들여 버렸다 - 프롤로그 (0) 2019/07/08 PM 11:19

나의 이름은 이브리아 오필드. 오필드 공작가의 차녀다. 황당하겠지만 나는 한밤중에 현자 말라카이트에게 납치되었다. 


현자는 마탑의 수호자로 제국의 마법 장벽을 관리하며 백성들을 지키는 굉장히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인기인 것은 당연 지사. 


그렇게 앞에서는 온갖 착한 척은 다하더니, 뒤에서는 다짜고짜 연약한 공녀를 납치한 거다. 높으신 공녀를 납치하다니 미치광이가 분명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 돌은 자가 아닐 리 없었다.


황당한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내가 납치되어 온 곳은 놀랍게도 시그루드 제국, 황궁의 알현실이었으니까. 


나를 납치해온 장본인은 그곳에 나를 툭하니 던져 놓고는 마법으로 사라졌다. 납치하고는 그대로 버리고 가버리 다니 역시 돌은 자였다.


거대하고 장엄한 기둥 사이로 새빨간 존재감을 과시하는 레드 카펫이 이곳이 알현실 임을 상기시켜 줬다. 카펫을 따라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니 금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황좌가 보여왔다. 황좌 위로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황태자, 엘 시그룬. 


그는 3황자였지만 현자와 소드 마스터, 암흑가의 지배자를 측근으로 거두며 두 명의 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는 황태자에 오른 인물이었다. 


이제는 황태자가 됐으니 황좌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까? 아직 황제가 된 것도 아닌데 무엄하기 그지없다. 거기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공녀를 납치하다니 겁을 상실했나 보다. 유유상종 이라더니 현자만 미친 게 아니라 황태자도 미친 거 같았다.


"이브리아 공녀, 갑작스러운 초대에 당황스럽겠지만 그대에게 거래를 제안하려 한다."


납치해 오더니 다짜고짜 거래를 제안해 온다. 기가 막히고 황당했지만 일단은 말을 들어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좋아요. 일단은 거래라는 걸 한번 들어보지요."


내가 긍정하는 반응을 보이자. 평소의 급한 성격대로 황태자는 대뜸 자신의 용건을 술술 말해왔다. 


"순순히 의식의 제물이 된다면, 짐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그대의 가족을 건드리지 않겠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얌전히 죽어 준다면 가족은 살려 주시겠다, 이 말이었다. 


황태자는 황자 시절부터 호시탐탐 우리 오필드 공작가를 노리고 있었다. 틈만 나면 시비를 걸며 공격해 왔다. 


그런대 자비를 베풀어? 웃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냐면 당연하다. 무서웠지만 가족의 안전이 우선이다.


애초에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병약했다. 7살 때 의사에게 10살이 고비라며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고. 덕분일까? 나는 18살까지 8년이나 더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앞으로 살아봤자 1~2년이 한계다. 어차피 죽을 시한부 인생이었다. 가족을 위해 사용한다면 목숨 따위 아깝지도 않았다.


황태자는 나의 대답을 듣고는 훌쩍 알현실을 나섰다. 측근들에게 나의 대답을 전하러 간 걸 거다. 측근이라지만 모두 미치광이라 불러도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알현신에 홀로 남아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병사들이 들어와 나를 둘러메고는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나 보다. 솔솔 잠이 쏟아져 왔다. 어차피 들려가는 거 잠깐 잠들어도 되겠지. 나는 꿈에 파묻혔다.




아무래도 잠깐 잠든 다는 게 한참을 잤다 보다. 밤에 납치되어 왔었는데,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주변에는 나를 감시하는 병사도 없는 거 같다. 나름 손님 대접인 걸까?


어두운 돌벽과 낡은 나무 문이 보였다. 등 뒤로는 아이 한 명이 간신히 드나들 수 있을 듯한 빽빽한 쇠창살로 된 창문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곧 여기가 어딘지 알아차렸다. 황궁 지하에 존재하다는 감옥의 귀빈실인 거 같다. 내 평생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귀빈실은 죄를 저지른 귀족을 수용하는 곳으로 평민들을 가두는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라 들었다. 


귀빈실이라도 감옥은 맞는지 매캐한 냄새가 진득하니 흘러와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잠깐 탈출할까 고민했지만 나는 탈출할 수 없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공작가를 이유 없이 공격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는 미치광이 폭군인 황태자다. 내가 탈출한다면 그 즉시 황태자가 나의 가족을 반역자로 몰며 공격하려 들겠지.


뭐, 애초에 내가 허약해서 금방 쓰러지니까. 탈출해도 금방 붙잡히고 말 테지만.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간수 한 명이 슬금슬금 찾아와 빵과 죽을 주고는 사라졌다. 


병약하던 나는 깨어있을 때면 언제나 시녀나 가족들이 곁에 있어줬기 때문인지 처음으로 혼자가 된 것 같다.


차가운 죽과 빵을 먹자 가족들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쯤 가족들이 내 걱정을 하고 있을까?' 가슴 한쪽이 저릿하며 아파왔다.




밤이 되자 고요히 어둠이 찾아왔다. 그림자가 질척하니 스며들며 나에게 속삭여 왔다.


<불쌍한 아이야. 괜찮니? 제물이 되다니.>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 따위 두렵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나에게 소중했고 그들이 사랑해 주었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었으니까. 가족을 생각하니 나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다음날에도 어둠은 찾아왔다.


<너는 외톨이구나. 이런 곳에 혼자라니>


외톨이어도 상관없었다. 나를 사랑해주던 이들은 안전하게 멀리 있을 테니까. 가족들이 행복하게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그곳에 나는 없었다. 


그날 나의 마음속에 외로움이 싹을 틔었다. 가족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 다음날,


<아이야. 사람들이 너를 저주받았다고 욕하는구나 그러니 아무도 너를 사랑해 주지 않겠지.>


믿지 않는다. 가족들은 내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라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었으니까. 그 믿음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그러자 어둠이 다시 한번 속삭여 왔다.


<가족들이 너를 찾기는 했을까? 이제야 귀찮은 아이가 사라졌다고 기뻐하고 있지 않을까?>


외로움의 위로 의심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어둠이 속삭였다.


<정말 가족들이 너를 사랑했을까?>


외로움은 의심을 먹으며 마음에 얽매여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또 그 다음날이 되었다.


<가족들이 정말로 너를 사랑한다면 벌써 구하러 왔겠지.>


정말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까? 마침내 외로움은 열매를 맺었다. 풍족한 의심을 가득 먹을 수 있으니 외로움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건 필연이었다. 




그 후에도 어둠은 매일 밤 찾아와 속삭였다.


머지않아 열매에서 두려움이 싹 틔었다. 두려움이 점점 자라나며 마음을 비추어 주던 용기의 빛을 가렸다. 


빛을 잃은 마음에 영구동토의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만 갔다. 


'추워.. 무섭고, 외로워. 왜 아무도, 나를 구하러 안 오는 거야?'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어둠이 나를 좀 먹어 갔다. 어둠에 점점 좀 먹어 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가족들을 원망하는 마음이 쌓여만 갔다. 


빛이 돌아올 때마다 마음속에 쌓인 원망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원망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내가 싫어졌다.




이곳에 납치당한 지 오래되었지만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있었다. 순환하는 빛과 어둠이 지나간 시간의 족적을 슬며시 알려주었으니까. 


식사 때만 찾아오는 간수들은 대답이 없었다. 덕분에 정적이 계속되고 유지되었다.




열일곱 번째 빛과 어둠이 순환하는 날. 


'또각.. 또각..'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에 정적이 산산이 부서졌다. 


'끼이이이익..' 


삐걱이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잠깐의 정적. 한번 깨어진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한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오고 또다시 또각이는 구두 소리가 알알이 울려 퍼졌다.


시시각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져 온다. 누구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드디어 제물의 날이 찾아온 걸까? 절망이 피어났다. 아니면 가족들이 나를 구하러 온 걸까? 희망이 샘솟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속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맺히며 울려갔다. 


기다림의 끝에 있는 것은 절망일까? 아니면 희망일까? 답은 곳 만날 수 있었다. 문이 열렸으니까.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핑크 블론드의 밝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눈을 한 미인. 바로 나의 쌍둥이 언니인 아멜리아였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지만 꾹 참았다. 


"리아 여기 있었구나! 괜찮아? 무서웠지 언니가 구하러 왔어."


언니가 나에게 상냥히 물어왔다. 그 상냥함에 마음속에 한줄기의 따스한 빛이 내려오는 것만 같았다. 따스함에 마음속 시리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거 같았다.


"왜 좀 더 빨리 구하러 오지 않은 거야?"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내 입이지만 마음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고 폭주하는 것만 같다.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 여러 날 보내는 동안 시리던 마음속에 원망이 자리 잡았었나 보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가족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언니의 다정함에 기대어 나도 모르게 자꾸자꾸 투정이 튀어나와 버렸다. 마음이 아주 엉망이었다.


"미안해..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나의 투정에도 언니는 싫은 말 하나 안 하며 나를 포근히 안아 주고는 늦어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지켜주겠다고 사과하며 달래 주었다. 


그러자 마음속에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무엇인가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둑이 터지듯 설움이 복받쳐 올라와 목 놓아 울 게 되었다. 


언니가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는 한참을 운 뒤에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내가 진정하자 언니는 나를 안심시키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지금 제이드 오라버니가 기사들을 이끌고 병사들의 시선을 끌고 있어 그러니 지금이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우리에게는 세 명의 오빠가 있었다. '제이드 오필드'는 그중에서도 오필드 가문의 장남이었다.


아무래도 제이드 오빠가 기사들을 이끌고 황태자와 병사들의 시선을 끌고 있나 보다. 확실히 병사들이 많이 빠진 지금이 탈출할 기회인 거 같았다.


소리 없이 언니의 뒤로 그림자가 다가왔다. 전조조차 없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푹--, 피가 튀었다. 쓰러지는 언니를 그저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벌어진 일이 현실감 없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언니가 쓰러지고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 


나는 남자를 알고 있다. 레온 하르트. 시그루드 제국의 성기사단 단장이며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나의 소꿉친구.


레온은 차가운 눈을 하며 쓰러진 언니를 내려 보았다.


친한 사람을 벤 건 대도 동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기사들과 제이드는 미끼였나? 양동 작전이라니 뻔하고 시시해. 그런 게 나에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어리석군."


짝짝짝-, 밀실인 방 안에 마른 손뼉 소리가 울리며 또 다른 남자가 문 앞에 나타났다.


청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서글서글한 모습의 남자였다.


"단칼이라니 여전히 솜씨가 뛰어나네요. 하르트경."


얼핏 들으면 칭찬하는 듯한 말로 들리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남자가 시그루드 제국의 재상의 아들인 다인 플루트이기 때문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음흉한 남자, 그건 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제국의 어두운 뒷모습인 암흑가의 지배자였다.


그는 한참이나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레온의 어깨를 잡고는 친한 척 말해왔다. 둘은 사이가 나빴다. 그러니 어깨를 잡은 것도 일부러 한 거겠지. 레온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그런대 문제네요. 그녀를 죽인 걸 전하가 아시면 화내 실탠데요. 약혼녀잖아요."


말속에 칼을 숨기고는 교묘하게 상대를 박박 긁는 게 다인의 화술이었다.


콰드득-, 제법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대도 레온이 이를 꽉 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다. 나는 제국의 적을 벤 것뿐이다. 이만 나머지 반란군을 죽이러 가겠어."


레온은 할 말을 내뱉고는 거칠게 방을 나섰다. 나와 다인은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쯧.. 싱겁기는 재미없게. 얼마나 더 고고한 척할 수 있는지 보자고 성기사 양반."


다인이 혼잣말을 뱉는 동시에 두 명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황태자 엘 시그룬과 나를 납치해온 장본인 현자 말라카이트 레이븐이었다. 둘 다 안 본 지 한참 됐지만 전혀 반갑지 않았다. 반가웠다면 이상한 거겠지.


"쳇, 뭐야. 레온 자식, 황태자인 나한테 인사도 없이 지나치고 말이야."


기분이 안 좋은지 황태자가 투덜 거렸다. 아마 방금 나간 레온이 인사도 없이 지나쳐서 그런 거 같다. 말라카이트는 그 옆에서 말이 없었다. 그는 원체 말이 없는 남자였다.


두 남자를 노려보고 있자 무릎에 뜨뜻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왔다. 붉고 끈적이는 액체, 언니의 피였다.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을 차리곤 셋에게 외쳤다. 


"약속이 다르잖아요! 얌전히 제물이 된다면 가족들은 손대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나의 외침에 순순히 답해준 이는 다인이었다.


"하하~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대로 아직 안 죽었으니까."


퍽--, 예고도 없이 다인이 쓰러져있던 아멜리아를 걷어찼다. 발에 차여 1미터쯤 굴러간 아멜리아가 쿨럭이며 피를 토해냈다. 


"이것 봐요. 제가 뭐랬어요. 안 죽었죠? 힘차게 콜록이는 거 보니 아직 쌩쌩하니 잘 살아 있잖아요."


언니는 안색이 안 좋았지만 다행히 지금 치료를 한다면 살릴 수 있을 거 같았다.


"어서 언니를 치료해 주세요."


안타깝게도 나의 절박한 외침은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무슨 소리예요? 약속대로 가족에게 손 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인은 가족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들먹이며 언니의 치료를 거부했다. 


"뭐, 가만 놔두면 죽겠지만. 그건 자연사에요. 안 그런가요. 전하?"


아멜리아는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다인 플루트. 시끄럽게 웽웽거리지 마라. 내가 아멜리아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탠대!"


황태자가 난폭하게 다인의 멱살을 잡으며 윽박 질렀다. 두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뭐예요, 전하. 설마 지금 약혼녀가 죽어간다고 삐진 거예요? 하르트경이 벤 건데 왜 저한테 화를 내세요. 섭섭하게."


마치 진짜 섭섭하다는 투로 다인이 장난스럽게 말해왔다. 이에 황태자는 정색하며 대꾸해 왔다.


"하? 네가 그딴 이유로 섭섭하다고? 그럴 리가 없지. 거기다 이것도 전부 네놈의 계략이겠지. 다인 플루트, 내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의식이나 똑바로 준비해라."


장난스럽게 말하던 다인의 분위기가 변했다.


"지금 제게 명령 한 겁니까? 제가 자꾸자꾸 받아주니까. 분수를 잊었나 본대 덜떨어진 황태자 따위가 언제부터 제 위에 서려고 한 거죠."


제국 암흑가의 지배자다운 품격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둘 사이에 흉흉한 기운이 풍기자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말라카이트가 짧게 혀를 차며 중재했다.


"다인, 그만둬라. 멍청한 황태자라도 지금은 필요하다. 우리의 계약을 잊지는 않았겠지?  지금 우리는 동료다."


말이 중재였지 그냥 시비였다. 카이의 중재에 황태자는 마지못하며 잡았던 다인의 멱살을 난폭하게 내려놓았다.


"건방진 놈들, 기억해둬라. 내가 황제가 되면 네놈들을 가장 먼저 처리하겠다."


황태자는 마지못해 멱살을 놓았지만 화가 식지는 않았는지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 너는 황제가 될 거다. 나는 의식이 끝나면 약속대로 제물의 시체를 갖겠다."


엘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며 지지 않고 카이가 말했다. 흉흉하던 기운이 사라져 갔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세 남자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방을 나섰다.


방에는 나와 언니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언니를 바라보자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미약하지만 눈에 빛이 깃들어 있었다.


"미..안해.. 구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제발 살아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언니의 눈에서 생명의 빛이 점점 꺼져만 갔다. 


언니의 생명의 빛이 꺼지는 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감옥에 정적이 찾아내렸다.


몇 시간 후 반란군이 전멸했다는 급보가 울려 퍼졌다. 


소드 마스터에게 기사들과 오빠들이 토벌됐다는 소식이었다. 나의 세상이 잿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날 밤에도 어둠은 나를 찾아왔다.


<어리석은 아이야, 전부 너 때문이야. 네 결정이 모두를 죽인 거야.>


마음속에서 소중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창밖에 서슬 퍼런 초승달이 모두 죽었는데 왜 너만 살아남았냐며 나를 윽박지르는 것만 같았다. 




언니가 죽은 뒤로 며칠이나 흘렀다. 드디어 의식의 날이다. 오늘날 이 밝기 전에 나는 죽게 되겠지. 신기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나의 소중한 가족들도 모두 잃고 나니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었으니까. 


어스름한 밤이 찾아왔다. 


'끼이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가 말도 없이 매섭게 나를 끌어갔다. 


병사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에 나와 병사의 발 소리만이 자박자박- 구슬프게 메아리쳤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숨이 가빠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걸을 수 있었는데, 감옥 안에만 갇혀 있는 동안 다시 약해졌나 보다. 뭐, 곧 죽을 테니 이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슬슬 이대로는 쓰러지는 게 아닐까 고민할 때쯤 복도의 끝에 한 방에 다다랐다. 의식의 방이었다. 병사는 방 안으로 나를 밀어 넣고는 바로 나갔다.


의식 동안에는 사제만이 들어올 수 있는지 제단의 좌, 우로 수많은 사제들 만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들의 단호한 표정에서 결연한 각오가 느껴졌다.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새어 나온 엷은 달 빛이 은은히 제단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있으면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듯, 달 빛을 머금은 제단이 맹독을 품은 꽃처럼 우아하게 나를 유혹해왔다.


내가 넋을 잃고 제단만을 바라보자 참다못한 사제들이 다가와 나를 제단 위에 눕혔다. 구속구 조차 없었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사제들의 기도문이 읊기 시작하자 나의 몸이 제단 위로 떠오르며 밝은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자칫 성스러워 보였다. 내 몸이 움직여졌다면 말이다. 구속구가 없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계속되는 기도문에 몸에서 점점 더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타오르는 듯한 작열통이 시작되었다. 몸속에서 무언가 강제로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자 덜컥 무서워졌다. 체념했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나 보다. 고통과 두려움에 심장이 옥죄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걸까? 한 줄기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제물의 감정 따위를 걱정해 줄리가 없다. 지금은 사라진 가족들이 하염없이 떠올랐다.


생명의 불꽃이 조금씩 약해져 갔다.


<가엾은 아이야. 너를 괴롭히는 제국이 밉지 않니? 네가 원한다면 내가 부수어주마.>


죽음을 앞뒀기 때문일까?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갈수록 귀속에 어둠의 목소리가 선명해 오는 것만 같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제국이 밉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곳은 나와 가족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였기에.


생명이 점점 빛을 잃어간다. 


<어리석고 가엾은 상냥한 나의 아이야. 내 너를 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마.>


곧 희미한 빛조차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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