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난 처음부터 복권을 싫어하진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땐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다.
일요일마다 즐겨보는게 '준비하시고~ 쏘세요! 파파팍!' 으로 유명한 주택복권 방송을 즐겨봤고
그게 추첨공으로 바뀌면서 그걸 뽑는 누나들을 보는 것도 하나의 낙으로 삼곤 했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건 즉석 복권이었는데 간혹 누군가가 윗부분만 긁고 꽝이네~ 하고 버리는 복권을 습득해서 동전이든 열쇠든 갖고 있는 쇠뭉치로 삭삭 긁어 '소나타 소나타 카세트~! 아놔 ㅋㅋ' 하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게다가 언제나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로 같은 그림을 두개씩 배치해 희망고문을 하게 하는 것도 묘한 재미였다.
그렇게 대학교에 가기전까지 복권에 큰 악감정없이 가끔 돈이 생기면 즉석복권을 긁는 재미도 작은 취미 처럼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때는 한창 전국을 강타한 로또라는 특이한 복권이 들어온 시기였다.
다른 주택복권이나 즉석복권과는 달리 상금이 이월되는 특징을 지닌 이 복권은 처음 부터 선풍적인 주목을 받았고, 나 역시 관심을 가졌었지만 마치 OMR 카드 마킹을 연상하게 하는 사악한 디자인과 숫자를 고르라는 점 역시 시험을 연상하게 해 별 호감을 갖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500원 정도 하는 즉석복권 보다 4배나 비싼 2천원이라는 가격역시 비호감에 한몫을 더했는데....
이 로또가 들어오고 몇주 후, 1등 당첨자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아 누적 상금이 무려 1천억원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연일 뉴스는 이 1천억의 당첨금을 떠들어댔고, 사람들도 모이면 로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복권이 여흥이나 재미가 아닌 삶의 일부분이나 목표처럼 삼아가는 모습이 나에겐 점점 불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천억의 당첨금의 주인을 정하는 토요일을 이틀 앞둔 목요일.
나에게 둘째 외삼촌의 연락이 왔다.
둘째 외삼촌은 원래 카센터를 하시던 기술공이셨는데, 당시엔 카센터를 접고 복권방을 운영하고 계셨었다.
연락의 내용인 즉슨, 대목이 다가오고 있으니 와서 용돈벌이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여러가지 알바를 하며 일에 대한 경험은 자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외삼촌의 부탁이었기에 지체없이 가리봉으로 올라갔다.
외삼촌에게 들은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로또의 방법을 알려주고, 원하는 액수를 받고, 자동은 자동대로 긁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박스에 가득놓인 플러스펜을 나눠줘라. 라는 내용이었다.
가판대 한쪽에 몇박스씩 쌓인 플러스펜을 보고 속으론 '3평도 안되는 복권방에 뭔 오바야'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10시 땡하고 가게문을 열자 인근 아파트 단지와 상가단지에서 쏟아져나온 인파가 삼촌의 가게를 덮친 것이다.
내가 아는 복권방은 적당히 사람 없고, 가끔 아저씨나 할아버지가 와서 주택복권을 사가고 즉석복권을 긁으며 '에이씨 꽝이네' 하며 투덜거리는 그런 조용한 공간이었는데 이곳은 달랐다.
에버랜드에서 알바하던 시절. 그것도 피크 중의 피크인 다음날이 토요일인 어린이날에 몰려든 인파가 놀이기구에 줄을 서는 듯한 광경이 한낱 동네 복권가게에 펼쳐진 것이다.
가판대에서 얼핏봐도 2-300미터는 되는 줄이 횡단보도를 건너서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어느새 출동한 경찰이 교통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충격을 받은건 줄을 선 사람의 수때문만은 아니었다.
1천억이라는 인생역전을 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은 아저씨 아줌마는 물론이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부터 글을 모르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에 수녀님, 스님, 심지어 병원에서 나왔는지 목에 깁스를 하고 팔에 링거를 달고 나온 환자까지 있었다.
이들은 한사람당 최소 만원에서 2-30만원을 인생역전을 위해 '투자'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목요일 하루만 기계가 4번은 고장나 로또 본사에서 정비공이 인파를 힘겹게 뚫고 들어오곤 했다.
이렇게 토요일까지 2박 3일을 버티고 나서 나와 삼촌 그리고 외숙모는 사무실로 올라가 그간 벌은 돈을 정산했는데... 그간 모인 돈이 대략 5천만원을 넘어섰고, 순수익만 5-600은 될거라고 하셨다.
난 2박 3일간 수고한 대가로 60만원을 받았고, 한우까지 후하게 얻어먹고 내려갈 수 있었다.
돈도 두둑히 받았고 맛있는 것도 먹었으니 로또를 미워할 필요가 없을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천만에 말씀.
그날 본 광경은 나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에게 있어 복권이란 삶을 위한 즐거움이자 여흥의 요소 정도면 충분한 것일 뿐이었다.
복권은 인생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기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은 1천억이라는 돈.
그리고 인생역전이라는 단어에 끌려 3평 남짓한 비좁은 복권방에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도대체 인생역전이라는게 뭔가?
돈이 많으면 인생이 바뀐다는 것인가?
돈에 인생이 역전될만큼 그동안 살아온 인생은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일. 꿈. 희망. 인생 이 모든게 1천억의 돈이 있으면 다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수없이 내 머릿속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일요일날 접한 뉴스는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이 1천억 광풍이 불고 지나간 이후 인생역전을 위해 전재산을 로또에 투자한 이들이 목숨을 끊은 사례가 적잖이 보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복권은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삶속의 작은 희망을 주고 지치지 않기 위한 원동력이 되어야 하지 삶 자체를 지배해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나는 그 사건 이후로 로또를 백안시 하게 되었다.
(또, 더 웃긴건 그때 당시 1등이 너무 많이 나와서 1등 당첨금은 2-30억 수준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년이 지나 지난주 나는 서울의 경복궁역에 있는 한국... 아무튼 뭔 센터에 가서 기업추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상담의 기술이라고 저 밑에 '남자와 밥을 먹었다' 등으로 쓴 경험담이 있는 그 글인데......
강사는 강의를 하는 내내 돌발 퀴즈를 내어 상품을 주곤 했다.
하얀 봉투에 담은 정체모를 물건이었는데 보통 그런걸 주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상품권이나 문상이겠지? 하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 센스를 발휘하여 돌발퀴즈를 예상하고 훌륭히 맞춰냈고,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았는데.................
봉투를 열어본 순간 내 표정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봉투에 들어있던 것은 다름아닌 제 56회 연금복권................................
차라리 5천원짜리 문상이 들어있길 바랬는데.........
게다가........... 오늘 추첨이 있다고 봤더니 역시나 꽝이었다.
아 문상달라고!!!!!!!!!!!!!!!!!!!!!!!!!!!!!!!!!!!!!!!!!!!!!!!!!!!!!!!!!!!!!!!!!!!!!!!!!!!!!!!!!!!!!!!!!!!!!!
위 긴 글을 쓴건 다 연금복권때문이다.
아무튼 난 그래서 복권이 싫다.
너무 싫어한다.
이번에 더 싫어졌다.
앞으론 더 더 더 싫어할거다.
거기 누님들 예뻤죠 추억보정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