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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의 아요디야 사태 (0)
2015/06/11 PM 01:51 |
LINK : //www.sisainlive.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9900 |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4월7일 시작되는 인도 총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인도국민당은 힌두교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수구적 극우 정당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제도권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인도국민당이 종교 근본주의와 증오를 활용한 선동으로 집권 가능 세력으로까지 발전한 경로를 짚어본다.
국민회의당은 인도 독립 이후 40여 년 동안 ‘네루 왕조’ 혈통주의로 이 나라를 통치해왔다. 극우 성향의 인도국민당은 오랫동안 권력의 언저리에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힌두 근본주의 노선을 본격 채택하면서 제도권 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당시 이들은 왜곡된 역사를 퍼뜨리며 ‘수구 집권 전략’을 가동하기 시작한다. “고대 인도는 세계 최고의 힌두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침략해 초토화해버린다. 이후 중세의 암흑시대가 열린다.”
이는 원래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인도 민중을 분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퍼뜨린 ‘신화’다. 역사적으로는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러나 이미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이슬람은 힌두 사원 파괴자’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뿌려놓은 가운데 인도국민당의 역사 왜곡은 민중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인도국민당 세력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무굴제국의 개조인 바바르가 16세기에 인도를 침략한 뒤 아요디아 지역의 힌두교 성지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그 위에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회의당의 라지브 간디(인디라 간디의 아들)가 총리에 오른 1984년부터 극우 세력들은 아요디아의 이슬람 사원을 다시 파괴하고 라마 사원을 복구하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서 무력충돌 기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종교를 정치로 끌어들여 민심을 자극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라지브 간디와 국민회의당 정부는 이들의 준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힌두교 세력의 지지를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종교로 민중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인도국민당은 좀 더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마침 국민회의당은 연립정부를 간신히 유지하는 등 ‘일당 지배 40여 년’ 체제가 동요하던 시기였다. 1986년 인도국민당 대표로 선출된 아드와니는 ‘힌두트와(힌두 근본주의 혹은 인도 사회 전반의 정체성을 힌두교로 정립하자는 정신)’를 사실상 당의 노선으로 천명했다. 그러자 힌두 근본주의 사회단체들인 민족의용단, 세계힌두회의, ‘하누만의 당’ 등이 즉각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인도국민당의 ‘수구 집권 전략’은 1989년 총선에서 대성공을 기록한다. 인도 연방의회의 545석 중 무려 91석을 장악한 것이다. 인도국민당이 1984년 총선에서 단 2석을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힌두 근본주의 선동의 위력을 절감할 수 있다.
인도국민당은 매년 열리는 힌두교 축제 ‘라트야트라’(위)를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총선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인도국민당 아드와니 대표는 민중의 종교 감성을 좀 더 민감하게 자극할 수 있는 소재를 다시 찾아냈다. 바로 ‘라트야트라(Rath Yatra)’라는 힌두 축제다. 원래 이 축제는, 힌두교의 신을 거대한 전차 위에 안치한 뒤 정해진 코스를 따라 행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 축제를 정치에 이용할 기막힌 방법이 있었다. 행렬이 구자라트의 솜나트 사원에서 출발해 아요디아에 이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죽고 죽이고…피로 물든 인도
출발지인 솜나트 사원은 상징적인 장소다. 무슬림 측 기록에 따르면, 아프간 출신 침략자인 마흐무드가 1026년에 솜나트의 힌두 사원들을 연이어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도 서부의 한 사원에 대한, 당시에는 흔했던 약탈 사건에 불과했다. 무슬림 측 역사 기록은 자신들이 가한 침략 행위를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리거나 과장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이 기록은 힌두 근본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무슬림이 힌두 문명 전체에 역사적 압살을 가했다’는 걸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지인 아요디아는 비슈누(힌두교의 주신)의 화신인 라마가 탄생한 곳이다. 또한 무굴제국의 바바르가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고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아드와니는 1990년 9월25일 라마 신상을 앉힌 전차를 끌고 솜나트에서 아요디아로 출발한다. 전국에서 모인 힌두 근본주의 세력들은 아드와니와 함께 이후 한 달여 동안 인도 대륙을 서부에서 북동부로 가로지르며 ‘힌두 사원 회복’ ‘세속주의 폐기’ 등을 떠들며 민심을 자극했다.
이 ‘아요디아 이슈’로 인도국민당은 또다시 톡톡히 재미를 본다. 1991년 총선에서는 의석이 119석으로 늘어났다.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는 지방정부까지 구성했다. 탄력을 받은 수구 세력들은 1992년 12월6일을 ‘바브리 사원을 해체하고 라마 세원을 건립하는 행동의 날’로 선포했다. 국민회의당 중앙정부는 아요디아에 군대를 파견해 바브리 사원의 파괴를 막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랑곳없었다. 아드와니 등 인도국민당 소속 유명 정치인이 ‘행동의 날’에 참여하겠다고 잇따라 선언했다. 여기 선동된 힌두 행동대원 수십만 명이 아요디아 바브리 사원으로 몰려들었다. ‘행동의 날’ 당일에는 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브리 사원으로 돌입해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라마 신상을 모신 천막을 치고 주변에 담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행동의 날’, 바브리 사원이 파괴되는 장면이 텔레비전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면서 인도 전역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충돌이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이후의 유혈 사태로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요디아 사태 이후 힌두 근본주의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1996년 총선에서는 161석을 차지해 제1당 지위에 오르면서 소수 정당과의 연정으로 비록 13일간이지만 집권당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에는 182석(제1당)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해 2004년까지 집권했다. 그사이 인도 방방곡곡은 힌두교도의 집단 학살과 무슬림의 보복 테러로 피에 물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요 선거를 앞둔 시기엔 어김없이 테러와 학살이 벌어졌다. 이렇게 인도는 공포와 보복이 일상화된 나라로 전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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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구자라뜨 무슬림 학살은 인도판 나치 홀로코스트 (0)
2015/06/11 PM 01:42 |
LINK : //www.redian.org/archive/77170 |
구자라트 학살 당시 차량을 불태우고 있는 힌두교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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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아요디야 비극 이후 인도국민당의 권력은 우후죽순처럼 커져 갔다. 그런데 그것은 힌두 수구세력의 난동이 격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소수인 무슬림의 저항이 격화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무슬림의 저항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테러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테러는 아요디야 사태가 일어난 직후인 1993년 3월 12일, 인도 최대의 경제 중심지인 뭄바이에서 터진 폭탄 테러다.
이날 뭄바이에서는 증권거래소, 쇼핑센터, 공항, 시장, 호텔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만 집중적으로 열세 군데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는데 한번에 257명이 목숨을 잃고, 1,400 여명이 부상당했다. 그렇지만 무슬림의 테러는 힌두의 더 잔인한 학살을 낳았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광란의 학살이 2002년 2월 27일, 인도 서부 구자라뜨 주의 작은 도시 고드라Godhra 역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직후부터 짧게는 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일어난 사태다.
구자라뜨 학살은 느닷없이 발생한 어느 기차 화재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27일 역을 막 떠난 기차 안에서 난데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5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불타 죽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는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 아이들인데, 수구 난동 세력인 세계힌두회의 대원들이 아요디야를 다녀온 길이었다.
기차가 고드라 역을 떠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무슬림 밀집 거주지에 비상 정지한 직후 무슬림 군중이 몰려 들어와 돌을 던졌는데 동시에 기차에서 불이 났고, 앞 뒤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58명이 불에 타죽었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이면서 주 정부의 여당이던 인도국민당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발표한 바에 따르면 무슬림 폭도가 휘발유를 구입해 바닥에 뿌리고 내부에서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분명한 무슬림 폭도에 의한 방화 사건이었고, 그 가운데 죄질이 무거운 31 명을 유죄로 판결했다.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민 단체는 조사위원들이 뇌물을 받았다고 반발하였으나 별 영향력이 없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의 여당이 바뀌면서 조사위원회는 다시 꾸려졌고, 결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났다. 방화가 아니고 식당 칸이나 아니면 또 다른 우연한 인자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하였고, 외부에서 온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여전히 기차가 왜 그 자리에서 섰는지, 누가 그들을 선동 자극하였는지, 불은 어떻게 해서 났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그리고 그 사건의 기획자로 많은 사람이 지목한 자는 그 다음 선거에서 주 수상으로 압승을 거두고 정치인으로 승승장구를 한다. 진실은 밝혀진 바 없고 정치만 난무한다. 그리고 그 정치는 음모를 깔고 권력을 행사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987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전국 순회가 폭력으로 물들며 대선의 물꼬가 지역주의로 순식간에 바뀌었음을 잘 알고 있다.
사건은 광주 유세에서 노태우 후보의 연설 때 청중 가운데 일부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후보에게 돌을 던지자, 옆에서 자극을 받은 상당수의 시민이 폭력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계속적으로 방송을 탔고, 그 때문에 전국은 지역감정에 불이 붙었다. 그 다음 날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수많은 시민들의 보복성 돌팔매질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선거는 그 후 지역감정 중심으로 흘러갔고, 그 결과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 년 후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 광주 유세장 폭력은 안기부가 깡패를 동원해 조장한 작품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진다고 그것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역감정은 곪을 대로 곪아버렸고, 그 지역감정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이란 이미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고드라 열차 사건의 경우 그것이 무슬림의 보복 방화 사건인지, 아니면 고도의 음모에 의한 정치 작품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건 직후 세계힌두회의를 비롯한 수구 세력들이 구자라뜨 지역의 무슬림을 학살하려 계획하고 집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런 법적 행정적 권한이 없음에도 구자라뜨 전역에 철시(strike)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대법원은 그것을 불법이라 규정했지만 주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지역 전체는 자연스럽게 철수되었다. 그들은 구자라뜨 주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면서 서서히 인간 사냥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우선 이 사건이 무슬림의 소행일 것이라며 모든 무슬림을 남김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가 운영하는 방송은 희생자 가족의 울분과 증오 그리고 애도로 가득 찬 방송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폭동을 자극하는 방송이었다.
그런데 그 방송은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인 회의당(I)가 1984년 델리 시크대학살을 자행할 때 인디라 간디의 죽음을 놓고 실행했던 그 방식이었다. 더불어 밑도 끝도 없이 무슬림들이 힌두 여성을 집단 강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고드라를 넘어 삽시간에 구자라뜨 주 전역에 퍼졌다.
그때 1년 전에 전임자의 사임으로 수상직을 맡은 모디는 방송은 물론 군중들의 움직임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힌두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런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고드라 열차가 ‘테러리스트’에 의해 불에 탔고 우리의 형제가 모두 불타 죽었다는 언어로 선동하였다. 누가 듣더라도 무슬림이 힌두를 테러했다고밖에 들리지 않는 언어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무슬림에 대한 원한은 고드라를 출발하여 구자라뜨 전역으로 퍼졌는데 특히 구자라뜨 주도인 아흐메다바드Ahmedabad에서는 한 달 동안 학살 난동이 벌어졌다. 아침부터 힌두 수구 세력의 색깔인 황토색 옷을 입고 힌두 전통 칼과 도끼 그리고 활, 몽둥이 등으로 무장을 한 폭도들이 규칙적으로 각 시내 전역에 배급되었다. 수백 명이 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집단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먼저 집에 돌을 던지고, 석유를 뿌린 후 불화살을 날려 불을 질렀다.
경찰이 진압을 시작한 후 그들이 사살한 사람 또한 모두 무슬림뿐이었다. 그 결과 셀 수 없이 많은 무슬림들이 힌두 수구 세력의 난동에 쓰러졌다. 그 쓰러진 사망자 수가 적게는 1,000여 명에서 많게는 5천 명이 넘었다.
칼에 찔려 죽거나 불이 타 죽는 사람은 대부분 현장에서 알라를 욕하라거나 힌두 신을 찬양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런 경우 칼로 목을 베거나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여성의 경우 강간당하거나 젖가슴이나 생식기를 도려냄을 당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사지가 절단된 어린이 수 또한 집계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여성을 강간하는 방법을 현장에서 가르쳐 주기도 했고, 인도의 종교 공동체 간 폭력 갈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적극적으로 폭동에 가입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은 이곳에서 저질러졌다. 식민주의가 나쁘고, 전쟁이 나쁘다 한들 2002년 인도 구자라뜨 무슬림 학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고드라 열차 사고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화재 사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건 이후 즉시 힌두 수구 세력은 구자라뜨 전역을 계획적으로 난동질을 했다는 것이다.
난동은 집중적으로 무슬림 상가와 섬유 공장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면, 그렇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무슬림 경제 기반만 약탈하고 마비시킬 수는 없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각본이 짜여 져 있었고 누군가가 지휘하였음에 틀림없다. 원래 이 지역은 무슬림이 상당한 섬유 공장을 소유하면서 경제 산업계에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힌두와 무슬림 간에 경제적 갈등이 심한 곳이었고,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것이 종교 공동체 갈등의 모피를 두른 모습으로 폭발하곤 했다.
집단 폭력은 그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배후가 정권과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결탁되어 잇고 그 정권은 다음에도 교체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 발생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권력은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난동자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권력의 확실함을 보여주는 행사를 수시로 열게 되어 있다.
구자라뜨 학살의 경우, 이 난동을 일으킨 모디 정권은 갖은 수를 써서라도 차기 선거에서 재선을 이루어내야 했고, 그래서 그들은 대규모 대중 집회를 열어 끊임없는 선동을 일삼았다. 2006년 구자라뜨의 의용단일가는 선거를 한 해 앞두고 250헥타르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장에 22개의 힌두교의 목욕 의례 시설을 만들어 100만에 가까운 대중을 동원했다.
그들은 의례를 통해 힌두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면서 정치적 세를 과시했는데, 그 안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화도 물론 포함되었다. 그들에게는 종교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선거 운동은 없었다. 대중은 이러한 집단주의에 쉽게 환호하고 현혹되는 법이다. 결국 2007년 선거에서 구자라뜨는 학살자 모디를 다시 선택하였다. 수구 난동은 인민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다.
구자라뜨 폭동은 전형적인 인종 청소 형태의 학살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획한 것은 주 정부였고, 실행한 것은 공무원과 경찰 그리고 수구 난동 세력이었다. 영화감독 라케시 샤르마(Rakesh Sharma)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그 이름을 최종 해결 (Final Solution)이라 지었다. 명백하게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이 비견한 것이다.
영화는 힌두의 학살을 피해 고향을 떠나 임시 정착한 무슬림 난민 캠프를 유대인 게토에 비유하고, 힌두 수구 세력이 무슬림을 인도에서 모조리 쓸어 없애버려야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이 사건이 단순한 종교 공동체 갈등을 넘어 나치의 홀로코스트 형 인종 청소 형태로 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수구 세력은 이제 무슬림은 이 나라 국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나라 안에 그 무슬림이 살 공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나치가 유대인을 10년의 기간 동안 차별, 탄압, 분리, 학살 등을 단계별로 실시하면서 마치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는듯한 레토릭을 한 것과 유사하다. 나치 인종 청소 담론의 명백한 차용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나치는 그 사악함을 강제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은폐한 채 자행했다면 인도의 수구 난동 세력은 그 학살을 대낮 길거리에서 보란 듯이 저질러졌고 그것이 티브이로 중계방송 되었던 점이 다를 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 당시 주 수상이던 나렌드라 모디는 여전히 주 수상의 위치에 있다.(지금은 지난 총선의 결과 인도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사건 이후 모든 기준은 ‘우리’ 힌두로 통합되었고, 그 안에는 빈부의 격차도, 노동의 조건도, 시민의 얌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주 수상의 요청에 따라 희생을 묵묵히 견뎠고, 그 결과 구자라뜨 주의 거시 경제 지표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기는 구자라뜨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을 조장하고 감정에 불을 지르며 공무원과 경찰들로 하여금 학살을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모디는 2012년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판결 받았다.
무슬림 진영과 시민 인권 단체는 대법원의 판결에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고 또 다른 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올 4월부터 치러지는 총선에서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로 확정되었고, 현재로서는 여론 조사에서 회의당(I)의 라훌 간디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학살자’가 수상이 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은 ‘학살자’가 아니고 순결자임을 국민으로부터 평가받았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난동의 학살극의 진실을 국내외 언론, 시민 단체, 그리고 인도의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양심적이고 헌신적으로 드러내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앙 정부의 정권 교체가 바뀌지 않고 인도국민당이 계속 집권하였다면, 난동 세력 가운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학살의 난동은 그 후 일상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 풍경은 인도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금은 비록 무슬림에 대해 칼끝이 겨누어져 있지만, 시간이 가면 그 칼끝이 같은 힌두의 일부 즉 공산당원, 불가촉천민, 기독교인, 시민운동가 등에게 향할 가능성이 농후해졌을 것이다. 난동은 배후 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 일어나고, 그것을 저지르는 수구 세력은 항상 새로운 상대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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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권력은 총구가 아닌 역사 교과서에서 나온다 (0)
2015/06/11 PM 01:14 |
LINK : //www.redian.org/archive/76506 |
역사교과서 논쟁의 당사자가 된 샤르마와 타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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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독립 후 줄곧 집권 여당이던 인도국민회의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야당이 처음 집권을 해 본 것은 1977년 국민당(Janata Party)에 의해서였다.
국민당은 인도가 독립 투쟁을 하던 당시 힌두 종교공동체주의에 기운 보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해 만든 당이었다. 현재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전신이고, 민족의용단이나 의용단일가 등 수구 세력들이 정당체로 결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1977년 처음 집권 후 2년도 못 가서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 뒤 발전적으로 당을 해체한 후 인도국민당으로 재창당을 하여 20년 후인 1998년에 다시 집권하였다.
그들 힌두 민족주의 수구 세력들이 두 번의 집권기 동안 똑같이 한 일이 있다. 역사 교과서 문제를 정치의 중심 이슈로 끌어올린 것이다.
무엇이 왜 그들로 하여금 교과서 문제를 그만큼 중요하고 절박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들 정권은 인도국민회의 정권의 역사 교과서를 공산주의에 의한 역사 왜곡이라 단호하게 규정하였다. 그리고 검인정 교과서 가운데 최고 권위 있는 교과서로 인정받는 국립교육연수원(NCERT)이 발간한 역사 교과서를 새로 집필하게 하였다.
인도의 역사 교과서는 검인정 체제 아래에 서 국립교육연수원이 교과서를 발행하고, 그것이 공교육 체제 아래 운영되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채택되기 때문에 그 교과서는 압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국영 기관인 국립교육연수원이 주체가 되어 그 동안 30년 동안 정사(正史)로 배워 온 역사를 폐기하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집필하여 가르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이었다.
국민당의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 정부는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인《인도고대사》(Ancient India)의 저자인 샤르마(R.S. Sharma)를 공산주의로 학문을 벌겋게 물들인 자로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역사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78년에 샤르마가 집필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국립교육연수원 책 목록에서 퇴출시켜버렸다.
그리고 중학교 역사 교과서 저자인 타빠르(Romila Thapar)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였다. 타빠르에게는 본격적으로 힌두 종교공동체주의의 색채를 가했다. 정부는 타빠르를 무슬림 왕조인 무갈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자신들의 고대 힌두 문명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라면서 왜 적을 이롭게 하는 역사를 기술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저자와 정부를 넘어서서 진영 싸움으로 번진 교과서 논쟁의 중심에는 종교 공동체주의가 있었다. 민족주의 수구 세력은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이간질 차원에서 만든, 즉 영국 이전에는 역사적으로 실체가 없는 힌두 공동체와 무슬림 공동체를 역사적으로 만들려 안간힘을 다했다.
무슬림을 악마로 만들어 힌두를 종교 기준으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어 그를 기반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책략이었다. 힌두와 무슬림 사이를 이간질 하고 그 과정에서 소수인 무슬림을 희생시키며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좌파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애써 민족의 위대함을 무시한다는 논리를 폈다.
학계에서는 우파 민족주의 의견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파장은 매우 컸다. 그들이 대중화 한 역사 문제는 학문으로서의 역사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 도구로서의 역사 문제였고, 그 점에서 수구 세력의 문제 제기는 큰 성공을 가져왔다.
그들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권을 잡은 뒤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역사 교과서 문제를 정치와 결부시킨 뒤 본격적으로 종교 공동체 갈등을 일으켰다. 무슬림을 민족이 아닌 세력,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하는 세력, 폭력을 써서라도 복수를 해야 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세계 최고의 고대 문명이 무슬림에 의해 파괴되고, 농락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줄기찬 역사 왜곡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싸움은 10 여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매우 집요하게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직의 중심은 민족의용단이 잡았다. 영국 식민 지배와의 싸움을 조직적으로 해 본 경험이 있던 그들은 전국의 지부(shakha 샤카)에 이 왜곡된 힌두 민족주의 역사관을 널리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 교과서를 토대로 하여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모든 연령의 청소년을 교육하여 의용단원을 양성하였다. 지부는 2004년 이후로 그 세가 줄어 전국 10,000 여 개가 있으나 1990년대에는 6만 개까지 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지부에서는 이 힌두 중심의 종교 공동체주의적 역사관을 토대로 하여 요가, 의례, 예술 등 광범위한 힌두 문화를 가르치면서 국수주의적 세계관을 매일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한다. 그리고 의용단일가에 속하는 교육 중심 조직인 전인도지식교육원(The Vidya Bharati Akhil Bharatiya Shikha Sansthan)이 운영하는 2만 여 개의 학교에서는 전국적으로 2백만 명이 훨씬 웃도는 청소년들이 유치원 나이 때부터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교육을 받는다.
그 학교는 도시보다는 시골이나 소수 부족 거주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다른 정보와 지식을 접하기 어려운 그들을 왜곡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거기에서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민족의용단과 의용일가의 다양한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충원된다. 매우 잘 짜여 진 체계가 잘 운영된다.
민족의용단이 자행한 힌두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적대적 힌두 종교 공동체주의는 효과를 발휘하여 1990년대 초부터 전국의 청소년들에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1977년 이후로 본격화 된 그들의 역사 교육에 의해 자라난 세대가 드디어 힌두 수구 세력의 청년 전위대로 성장한 것이다.
현대 인도사의 가장 큰 분기점이자 비극의 기점이 된 아요디야 무슬림 사원 파괴는 바로 그들 전위대가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02년 구자라뜨 학살의 난동도 바로 그 힌두 민족주의의 왜곡된 역사 교육이 가장 잘 이루어진 구자라뜨 주에서 일어났다. ‘아요디야’와 ‘구자라뜨’는 역사 왜곡으로 연계된 필연적 사실이다.
인도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수구 난동의 역사는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우파의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인해 촉발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인도 우익의 역사 교과서는 역사가 더 이상 과거를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담론이 아니라 정치의 최전선에서 권력을 가져올 수 있는 무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우파는 조직에 강하고 좌파는 논쟁에 강하다. 조직은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논쟁은 사람을 멀리 하게 한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조직이다. 그런 점에서 좌파는 순수하나 무능하고, 우파는 사악하나 유능하다. 그들의 주장 뒤 종교 공동체 갈등을 일으킨 수구 난동 세력의 성장과 그 10년 뒤 인도국민당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인도국민당은 1977년 정권을 잡은 뒤 절치부심의 20년 후 수구 세력은 다시 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들은 1998년 연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나 1년 만에 연정이 붕괴되어 재선거를 치렀고, 1999년에 다시 정권을 잡았는데, 이번에는 다수당이 되어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2002년 그들은 1977년에 이어 다시 역사 교과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은 국립교육연수원 역사 교과서를 다시 퇴출시키고 새롭게 역사를 기술하도록 하였다. 40년 넘게 정사의 위치를 차지해 온 저자들과 그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그 파동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2002년은 구자라뜨 주에서 무슬림 학살이 일어나던 해였다.
국민들은 그들을 ‘빛나는 인도’를 기치로 신자유주의 경제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수많은 노동자, 농민, 서민을 죽게 만들고, 구자라뜨 주에서 종교 공동체 분쟁을 주도하여 수많은 무슬림을 학살한 것으로 판단해,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2004년 총선에서 인도국민당은 정권을 다시 회의당이 이끄는 통합진보연대에게 내주었고, 그 회의당 주도의 정부가 그들 교과서를 다시 개정해 ‘정상화’시켰다.
역사 교과서 논쟁은 학교 교육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사회 정의와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파의 역사는 힌두교 우월주의를 넘어 무슬림이나 기독교와 같은 다른 종교공동체를 부인하였다.
그들은 인도인을 오로지 힌두로만 간주했고, 무슬림이나 기독교인은 인도를 침략한 침략자의 자손들이므로 민족의 이름으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당한 파시즘적인 이데올로기다. 이러한 역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연히 다원 사회를 부인하고 신성 국가를 주창하면서 종교 공동체 간의 사회 갈등을 야기 시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민족의용단이나 의용단일가와 같은 수구 세력은 전국적으로 매우 탄탄한 조직을 갖추고 있는데다, 민족주의 역사관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관으로 쓰인 비(非)학문적 역사 교과서는 전국에서 매우 많은 학교에서 채택되었다.
인도에서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우파 민족주의 정치 집단이 정권을 잡으면서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긴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미 학계에서 그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있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이명박 정권 이후 일어난 역사 교과서 파동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얼핏 보면, 역사 교과서가 집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위치를 잡았다는 점에 인도의 경우가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의 경우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수준과 정도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인도의 경우 그 논쟁이 학계에서 이루어졌으나 한국의 경우는 학문적 논쟁은 없고 오로지 권력의 강압에 의해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수준이 다르다.
인도의 경우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갖는 보수 세력의 문제라면 한국의 경우는 역사관의 논쟁이 아닌 학문 외적의 강압 폭력 문제로 봐야 한다. 인도에서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중요한 기준이 있다. 좌파는 역사를 사회과학의 일환으로 보는 반면 우파는 역사를 신화와 동일한 것 즉 문학의 일부로 보고 있다.
이는 고대 중국, 인도, 그리스 등의 역사학에서부터 근대 역사학을 거쳐 포스트모던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영원한 논쟁거리다. 인도에서의 역사 교과서 논쟁이 주로 고대사와 중세사 특히 신화와 역사 혹은 민족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파 민족주의 세력은 과학적 역사관에 의해 그 동안 부정되어 온 힌두 신화에 나오는 라마(Rama)나 끄리슈나(Krishna)와 같은 신의 행적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이야기가 역사에 편입되면 인도는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들은 세계 최고인 인도 고대 문명이 무슬림, 기독교도 등과 같은 이민족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반목과 갈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인도 역사 교과서의 문제는 한국의 ‘교학사’ 문제와 직결되고 ‘일베’ 문제와 넓게 연결된다. 우선 ‘교학사’ 역사 교과서 문제를 먼저 보자. 두 나라 경우 모두 역사학의 외피를 두르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정치의 문제다.
그런데 인도의 경우는 고대사와 신화 그리고 종교 등 역사학계에서 사소하지만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가 해당 분야 전문가의 말과 글을 통해 제기되었다는 사실과 그 논쟁이 비록 정치 집단에 의해 부추겨지고 악용되었다 할지라도 학문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에는 학문적 논쟁의 성격이 전혀 없고, 해당 분야의 전문 역사학자 또한 전혀 연루되지 않았으며 권력이 노린 것은 오로지 친일 행위와 독재 정권에 대한 미화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는 인도에서와 같이 최소한의 전문성도 없고 그래서 권력적 방식 이외에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집필하고 채택하는 조직을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이 대목에서 ‘일베’와 관련하여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필요가 하나 있다.
‘일베’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여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합리적 의미 부여라는 데 대한 혐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태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나 그들이 하는 사회적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그것은 그들이 보수 수구 난동 세력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현재까지 들어난 사실만 놓고 볼 때 국정원 세력은 ‘일베’에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고 그 영향력은 매우 효율적으로 확대재생산 되었다. 인도에서 민족의용단과 의용단일가가 사회에서 물질적으로 소외당하고, 지식과 정보의 면에서 배제되어 있는 특정 소수 집단을 부추겨 그들의 행동 대원으로 조직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특히 이명박-박근혜의 수구 세력이 역사교과서 문제를 ‘일베’와 종편 차원에서 하나의 틀로 묶어 수구 난동 이데올로기로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면 ‘일베’ 키우기는 한국판 수구 난동 전위대를 양성하는 일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치밀하고, 끈질기다. 그들이 차마 라는 말을 쓰며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 없는 짓이다. 그런 자들을 키워내는 것이 역사 교과서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역사 교과서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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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의 부패정치와 금권선거 (1)
2015/06/11 PM 12:26 |
LINK : //www.redian.org/archive/76160 |
자얄라리타(왼쪽)와 카루나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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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5월 인도 총선이 치러지기 전에 작성된 것이다. 글의 기조가 총선 결과와 별개로 짚어져야 할 인도정치의 부패를 다르고 있지만 총선 결과를 간략하게 정리한다. 5월 인도 총선 개표 결과 집권당이었던 인도국민회의(INC)는 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나렌드라 모디의 극우정당 BJP가 압승을 했다. 보통사람당(AAP)는 4석을 획득하여 목표치인 5석에 근접했지만 당대표는 낙선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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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치러질 인도 총선에서 유력한 수상 후보로 회의당의 세습 정치인 라훌 간디와 BJP소속의 극우정치인 나렌드라 모디가 꼽히고 있다.
제3의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도 몇 있는데 타밀나두(Tamil Nadu)주의 현 주수상이자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진보연합(AIADMK)의 당수인 자얄라리타(Selvi J Jayalalithaa)도 그 중 한 명이다.
유명 여배우 출신으로 1991년 처음 주수상이 된 이후로 20년 이상 라이벌인 드라비다 진보연맹(DMK)의 카루나니디(M Karunanidhi. 그는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역시 영화계의 유명인사였다.)와 번갈아가며 주수상직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이 세 번째 집권으로 AIADMK는 다음 총선에서도 그녀를 주수상 후보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타밀나두 주의 선거는 금권선거가 판을 치는 인도에서도 유난히 선심성 물품뿌리기로 주목받아왔다.
선심경쟁이 본격화 된 것은 2006년 선거부터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DMK가 당시 공적 분배시스템에서 kg당 3.5루피로 빈곤층에게 공급하고 있던 쌀을 2루피에 공급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자 집권당이었던 AIADMK당 대표인 J 자얄라리타는 쌀 20㎏(공적분배시스템에서 쌀을 파는 단위가 20㎏이다)을, 자신이 재집권하면 10㎏은 무료로 나머지 10㎏은 당시 공급가격 그대로 팔겠다고 공약했다. 이른바 “공짜쌀” 공약이었다.
타밀나두 주에서는 전체 주민의 30% 정도에 해당하는 1880만명이 공적 분배시스템의 대상자였다. 이 정도는 생계도 못 잇는 극빈층이 많은 인도 정치에서는 흔히 있는 수준의 공약이다.
그런데 DMK의 카루나니디가 집권하면 칼라텔레비전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추가했다. 이 공약을 실천하는 데 430억루피(약 1조원)가 든다는 계산을 근거로 실행불가능한 공약이라는 비판이 일자 오히려 그는 통 크게 전 가구에 케이블 방송을 무료로 연결해주겠다는 공약까지 덧붙였다.
이 선거에서는 결국 화끈하게 인심을 쓴(물론 이 공약의 실현은 주정부의 재정으로 집행되었다.) 카루나니디가 승리했다. 그 후, 타밀나두 지역의 가정에는 1천 6백만대의 칼라텔레비젼이 공급됐다. 싼 값에 텔레비전을 납품한 가전업체와의 유착 의혹도 당연히 뒤따랐다.
타밀나두의 두명
자얄라리타(왼쪽)와 카루나니디
2011년 선거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이 반복되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DMK는 빈곤층에게 믹서기나 분쇄기를, 공대 학생들에게는 노트북을, 위험한 조업을 해야 하는 어부들에게는 보험을 제공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거기에다 더해서 세탁기와 냉장고는 자격 제한 없이 나누어 주겠다고 공약했다.
야당인 AIADMK는 질세라 물품 목록을 추가했다. 공대학생에 게만 노트북을 제공하겠다는 DMK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2, 3학년에 해당하는 11학년, 12학년과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대학생들에게 노트북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여성에게는 DMK의 믹서기와 분쇄기에 선풍기를 추가했다. 인도는 더운 나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빈곤층에게는 생계를 도울 양 네 마리씩을 약속했다.
가난한 이들도 빚을 내어서까지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해야 하고 금붙이 장신구를 유난히 좋아하는 인도의 사정에 맞게 가난한 계층 신부들에게는 4그람의 금을 약속했다. 6,000개의 마을에 60,000마리의 소제공, 아직 케이블이 보급되지 않은 모든 가구에 무상으로 케이블 텔레비전 보급도 공약에 더해졌다.
양 당의 공약에서 인도에서는 믹시mixie로 불리는 믹서기가 빠지지 않는 것은 남인도 지역의 주식인 떡과 코코넛 처트니를 유용하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가전제품이기 때문이다.
어느 무소속 후보는 타타나노라는 인도의 대중적 승용차(한대당 2,200달러 상당)를 제공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올 해 선거에서는 어떤 양상이 벌어질지 타밀 나두 주민들 중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법하다.
하지만 이런 선거 행태에 모두가 행복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가전제품 소매상들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가 공짜로 가전제품을 주는데 누가 돈을 내고 사려 하겠는가? 필요한 것이 있어도 선거는 꼬박꼬박 돌아오니 그 때를 기다릴 것이다.
좀 더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타밀나두 지역의 사회운동가들은 선심 선거 관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품의 무상 제공은 매표행위이며 정치인, 정당의 사욕을 위해 주정부의 재정을 남용하는 것라는 거다.
이들 사회운동가들은 인도 선거관리위원회에 무상 물품을 제공하는 모든 정당을 대상으로 고소장을 제출했고 이 정당들 소속의 모든 후보자들의 자격을 박탈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이 소송은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물품 무상제공 관행을 금지하는 법률 개정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구사항이다.
현행 인도 선거법에도 “후보자들이 개별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물을 제공하거나 약속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조항이 모호해서 “정당이 성명서 등을 통해 광범위한 계층에게 물품 제공을 약속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한 금지 조항이 없다”고 한다.
타밀나두 주의 선거에서 두 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현상의 또 다른 원인은 부패 스캔들이다. 자랼라리타와 카루나니디 둘 다 부패 스캔들로 유명하다. 하지만 집권당의 부패 규모가 더 크고 대중들에게도 더 잘 알려지기 때문에 그에 따른 반사 이익으로 선거 당시의 야당이 집권하고 집권당이 된 야당은 다시 부패 스캔들을 일으켜 권력을 내주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놈이 그놈이지만 그나마 누가 덜 부패했느냐를 두고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부패행위가 더 가까운 기억인가에 따라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자얄라리타의 경우를 보자. 그녀의 지지자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신처럼 여길 정도다. 종교 행사에서 그녀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암마(Amma,어머니라는 뜻)라고 부른다. 자얄라리타가 어머니처럼 그들의 삶을 돌봐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으로 노동자를 내친 한국의 어느 어머니처럼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쌀과 가전제품 정도를 주는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쿨한 어머니로 알려졌다. 네 채의 대저택을 소유했고 750켤레의 신발, 1만 벌의 사리(인도전통복장) 수백 개의 명품 가방에 비싼 장신구를 가득 넣어 다니는 그녀의 생활은 사실 배우 시절에 벌어놓은 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부패 혐의로 이미 실형을 살기도 한 것을 보면 그 돈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라이벌인 카루나니디도 이에 못지않다. 2008년 인도에서는 2G 통신망 주파수를 경매했는데 통신부 장권을 비롯한 고위 관료, 장관들이 개입해 6개 통신사에게 지나치게 낮은 가격으로 주파수 사용권을 불하해 결국 정부에 1조 7690억 루피(약 400억 달러)규모의 손실을끼친 것으로 드러난 사건이 발생했다. 카루나니디의 부인과 딸, 측근 들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 2011년 선거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었다.
이렇게 선심성 공약과 부패 스캔들이 타밀나두 주의 선거를 결정짓는 요인이 된 것은 두 당 사이에는 스리랑카의 타밀 족에 대한 입장 차이를 제외하고는 이념이나 정책에서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당은 개인의 사유물리 되었고 당수의 개인적 이미지가 당 소속 의원 후보들의 당락을 결정하는 상황이 수십년간 변하지 않고 있다.
물론 타밀나두 주가 인도 자동차 산업의 허브라 불리며 다른 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두 당의 기여가 크게 차이난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정작 선심선거의 당사자들인 두 정당의 주장을 들어보면 후진국의 수준 낮은 정치문화라고 비웃기에는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두 정당 모두 물품 무상 공급 공약이 매표행위가 아니라 복지의 확대라고 주장한다. 극빈층 주민들에게 식량을 저가나 무상으로 제공하고, 결혼 비용을 보조해주고 문화생활의 기회를 확대해 주며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경감시킬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서구 선진국에서도 시행하는 복지정책이 아닌가?
행정망을 통한 사회적 서비스, 보조금, 바우처 등의 형태로 지급되면 복지 제도고 현물을 주면 매표행위인가? 복지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복지제도 자체를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지 않는가?
인도의 집권 UPA정부는 최근 식량안보법(Food Security bill)을 제정했는데 24조의 예산을 들여 8억 명의 빈곤층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반대파는 이 법안을 총선을 대비한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타밀나두 주의 선심공약과 이 법안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렇게 보면 선심선거와 무상복지의 경계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대중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이래로 선거를 통한 정치는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든 대중의 지지를 얻는 이가 권력을 잡는 방식이 되었다. AIADMK의 설립자 M.G. Ramachandran(인도에서는 MGR이라고 흔히 부른다.)은 현 당수 자얄라리타와 마찬가지로 유명 배우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의 팬클럽 조직을 당 설립의 중요기반으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배우로서의 대중적 인기와 정치적 지지가 개념상으로는 다른 영역의 것이긴 하지만 선거에서 배우로서의 인기로 얻은 표를 걸러내지는 않는다. 돈이나 물건을 받고 찍은 표와 순수한 정치노선, 정책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만 근거한 표를 구별해 집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인도 선거처럼 유권자에게 물질적 보상을 직접주면서 표를 얻는 정치가 지역구 국회의원들이 쪽지예산 편성해서 선거구에 정부예산을 몰아주는 한국의 정치행태나 공식선거 자금만 35억 달러(우리 돈으로 거의 4조원에 달한다.)이상을 쓴 최근 몇 번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 비해 더 부패한 금권정치라고 볼 수 있을까?
미국 대선자금 중에 가장 큰 몫이 텔레비전 광고에 쏟아 부어진 것인데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들을 세련되게 현혹시키는 것이 물품제공보다는 더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정치행태라고 여기는 것은 서구적 선입관에 물든 탓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하지만 고려해 볼만한 여지가 여러 가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정치인들이 돈과 물건으로 표를 얻는 행위가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선거 때 나누어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임기동안에 유권자들로부터 빼앗아간다. 그들이 돈으로 산 권력으로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보장해 준 경우는 없다. 자신들의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면서 이를 이용해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경제적 이익을 자신과 자신의 집단에게 보장해 주는 것이 식량, 가전제품, 결혼자금, 가축을 유권자들에게 주는 이유다.
게다가 그들은 조금 더 공이드는 방식 즉 민주적 공론화, 제도의 개선, 법령 정비 등의 방식은 내버려 둔 채 가장 일차원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매수함으로써 대중을 모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매수는 무자비한 물리적 폭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인도의 금권정치가 비난받고 대중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하는 이유다.
인도는 부패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부패 문제는 국가적 재난이다. 그런데 2013년 주의회 선거에서 혁명적인 사건이 수도 델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당(I)와 인두국민당 두 당이 지금까지 60년이 넘도록 주의회 정부를 이끌어 온 구조를 창당 1년밖에 안 된 신생 정당 보통사람당(AAP)이 깨버렸다. 그들은 의석수 제2당이 되었지만 연대를 통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지난 수년 간 부패 일소를 위한 시민운동의 위력은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거세게 불었다. 국민들로부터 마하뜨마 간디 못지않은 존경을 받는 70대의 안나 하자레가 이끄는 부패 청산 시민운동은 결국 인도 정부로 하여금 부패방지법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인들의 벽에 막혀 결실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계속 하고, 정치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2012년에 보통사람당을 창당했다. 그들은 당의 부패를 쓸어버린다는 의미로 빗자루를 당의 상징으로 삼을 만큼 모든 초점을 부패 일소에만 맞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수도 델리 정부를 접수해버렸다.
그들의 정치 실험이 성공할 것인가? 그리하여 인도에서 부패를 몰아낼 것인가? 인도의 운명이 바로 이 수구세력의 난동에 대해 저항하는 시민 운동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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