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보급해야할 3B.
1. Bean - 식사
2. Bullet - 탄약(무기)
3. Bandage - 붕대(의료지원)
--- 오래된 보급관련 부서의 경구.
근대와 현대 군대에서 지급되는 식량은 통상 다음 범주에서 출발합니다.
1. 주둔지 지급 식사(garrison ration)
2. 전투 식량(combat ration) 혹은 오래된 표현대로 행군 식량(marching ration).
3. 일반적 상황을 벗어난 특수식. (생존, 병원, 포로등등)
1의 주둔지 지급 식사는 간단히 말해서 짬밥 되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료가지고 적당히 요리한 그런 물건이고 보통 그 사회의 중류정도에서
먹는 수준에 맞춰지면 다행인 그런 겁니다.
물론 맛이야 '괜찮은데' 보다는 '맛있으면 다행이게? 죽지 못해 먹는다!' 가
일반적이지만 말입니다.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offee'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커피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It looks like muddy water and tastes like turpentine
흙탕물같고 맛은 테르빈유같아요.
(다른 버젼)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offee'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커피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It's good for cuts and bruises and tastes like iodine
베고 타박상에 좋은데다 맛은 요드 소독약 같아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how i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밥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a chicken jumped off the table and started marking time
닭이 식탁에서 뛰어내려서 기다리고 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hicken'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닭고기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One jumped off the table and killed a friend of mine
식탁에서 떨어진 것에 맞아 내 친구가 죽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biscuit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빵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one rolled off the table and killed a friend of mine
식탁에서 떨어진 것에 내 친구가 맞아 죽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training's might fine
걔들이 군대 훈련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last night there were ten of us, now there's only nine
어제 밤, 열명이던게 지금은 아홉이래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pay i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월급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they give you a hundred dollars and take back ninety-nine
걔들은 100달러 주더니 99달러는 가져가버렸대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shoe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신발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You ask for size eleven, they give you size nine
니가 11문을 달라하면 걔들은 9문을 줘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pancake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팬캐익(핫케익)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You can try to chew them, but you're only wasting time
그거 씹는다고 시간만 날려버렸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bed'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잠자리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But how the hell would I know, I've never slept in mine
근데 얼마나 지옥같은지 난 푹 자보질 못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mail is so great
걔들이 군대 편지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Today I got a letter dated 1948
오늘 난 1948년에 쓰여진 편지를 받았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hours are just right
걔들이 군대 시간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Start early in the morning and work on through the night
아침일찍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대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tents are waterproof
걔들이 군대 텐트는 방수라고 했대요.
You wake up in the morning and you're floating on the roof.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붕위에 떠있대요.
(후렴)
Oh Lord, I wanna go
오 신이시여, 난 가고싶어요
But they won't let me go
근데 쟤들이 못가게 해요.
Oh Lord, I wanna go hoo-hoo-hoooome EH!
신이시여, 집에 보내줘요.
--- 미군 군가(cadence)중 They Say That In The Army중
2번의 경우는 바로 먹을 수 있는 저장 식품이 나오면서 본격화된 겁니다.
그 전에는 1과 2의 경계가 모호했죠.
이런터라 때때로 긴박함 덕분에 식사를 거를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령 워털루 전투 당시 전장으로 동원된 많은 영국군들은 -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일부도 마찬가지였지만 - 행군한다고 지급받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전투에
투입됩니다.
어느정도였냐면 밥먹자고 지급된 고기가 익기도 전에 행군 시작이 명령됐고 덕분에
익고있던 고기 전부가 버리져 버립니다.
결국 전투 전날 겨우 목적지에 도착해서 젖은 땅에서 가까스로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조차 제대로 못먹고 전투에 투입되죠.
그리고 1이라고해도 이전 시대라면 그럭저럭 먹을만한 수준이 나온건 아닙니다.
오래 보관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과 경제성, 식량 조달자들의 경직성은 재료를 상당히
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꽤나 오랫동안 1일에 이정도 양의 음식물이 지급됐으니 말입니다.
1. 1 ~ 1.5파운드 가량의 빵이나 비스킷 혹은 그에 준하는 곡물 가루 또는 그 가공품
2. 1파운드 가량의 육류 (통상 염장)
3. 1/2파운드 가량의 콩이나 야채나 근채류등.
4. 기타 온스 단위의 치즈나 버터, 식초와 같은 품목
5. 술, 이건 맥주냐 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맥주 기준으로 1리터 안되는 양이
나옵니다.
이중 빵과 고기는 필수적이었고 다른건 양을 줄여도 이건 더주면 더줬지 덜주지는
않으려곤 합니다.
다만 그럴려고 했다지 실재로 그랬다는 아닌게 좀 뭐하지만 말입니다.
한편 1의 경우는 사실 빵이나 건빵과 같이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줄 수도 있지만 그냥
밀가루를 줄 수도 있고 귀리와 같은 다른 잡곡의 가루를 줄 수도 있습니다.
빵의 경우는 야전 제빵소가 만들어져 화덕에서 구워지며 이렇게 만들어진 빵이
지급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빵의 질이 그렇게 좋을리도 없는데다 상황이 나빠지거나
돈때먹기 좋아하는 운영자에게 걸리면 질은 더욱 요상해졌습니다.
톱밥따위가 들어간다거나 석회가 들어가는 일까지도 벌어졌으니.
또한 제빵소에서 병사들의 손까지 들어가는데 어느정도 걸릴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죠.
더욱이 요즘의 식빵과 달리 이 시기의 빵이란건 손으로 그저 때서 먹는다가 통하지
않는 그런 물건이었죠.
심지어 군대빵이 아니라 민간의 빵마저도 그걸 손으로 찢어낼 수 있으면 성인
취급해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딱딱하고 질겼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것이라도 빵이랍시고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거죠.
야전 제빵소가 운영되고 거기서 빵이 올 정도면 일단 굶을 일은 적은거니.
건빵은 오랜기간동안 병사들과 선원들을 먹였던 것이고 그 역사또한 오래된 것입니다.
이미 로마 시대때 군에서 비슷한걸 만들어 먹은 경우가 있는데다 오래 저장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1차대전때까지 애용됩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류의 밀가루 덩어리를 구운 물건은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2차대전 이후로는 부수다가 손 다쳤다는 소리는 안나옵니다.
아마도 영국 선원들의 음식에 대한 속어인 tack에서 출발한 hardtack 이란 단어외에
그저 biscuit, hard bread, ship biscuit, sea biscuit, sea bread등으로 불립니다.
동네에 따라서는 비슷한 류의 물건을 츠비박(zwieback)이라 부르기도 하죠.
별명도 이빨을 무디게 하는 것(tooth duller)니 철판(sheet iron), 벌레성(worm
castle)등이 붙여지기도 합니다.
이 건빵은 비스킷이란 말이 말해주듯 2번 구운, 즉 가급적 습기를 최대한 제거한 빵과
비슷한 물건이다란 의미입니다.
전통적인 제조법은 밀가루를 약간의 소금과 혼합해 반죽하고 이걸 두께 1/2인치,
가로세로 3인치의 사각형이나 지름 3인치의 원형으로 만들고 여러 개의 구멍을 낸 다음
오븐에서 구워서 살짝 말린 다음 다시 굽는 겁니다.
이러면 내부에 습기가 거의 사라지며 아주 단단해지죠.
얼마나 단단했냐면 이걸 깨다 손다쳤다는 소리부터 돌이나 소총 개머리판으로 깨트려야
한다거나 맨이빨로 씹다간 이빨이 나간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이걸 경험하고 싶으신 분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가래떡 있죠?
그걸 전자렌지에서 타지 않을 정도로 잘 돌려준 다음 완전히 식으면 한번 씹어보시길
바랍니다.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여튼 이 건빵은 오래 간다라는 점 때문에 군대의 저장식량으로 자주 사용된데다 특히
2번의 행군 식사에 곧잘 나오던 품목이었습니다.
빵보다 부피도 적고 저거 2개나 3개면 하루치 식사가 됐거든요.
더욱이 이건 제빵소를 만들 필요도 없고 일치감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것만 주면 병사들도 인간인데 가만히 참을 수가 없죠.
식사 거부같은 방법까지 동원됩니다.
그러니 이런 건빵도 적당히 상황봐가면서 줬다는거죠.
This the song that is uttered in camp by night and day,
이 노래는 병영에서 주야에 걸쳐 불려졌던 노래라네.
This the wail that is mingled with each snore.
이 울부짖음은 코고는 소리에 섞여있네.
This the sighing of the soul for spring chickens far away,
이 영혼의 탄식은 도망친 닭을 위한 것이라네.
Oh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이여, 이제 그만!
This the song of the soldier, weary, hungry and faint,
이 노래는 지치고 배고프고 무기력한 병사의 것이라네.
Hard crackers,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 건빵 이젠 그만.
Many days have I chewed you and uttered no complaint,
수많은 날동안 나는 씹었고 진정 불평도 안했다네.
Hard crackers,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 건빵, 이젠 그만.
---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간에 불렸던 노래중.
건빵은 그냥 먹기보다는 어떤 식으로건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다른 재료와 함께
요리했고 곧잘 써먹었던 요리법은 적당히 돌(개머리판)로 쳐서 부스러트리거나 해서
물이나 차, 국물등에 담궈 불려 먹거나 아니면 고기의 지방분등을 첨가해 같이 끓여
먹는 것이었죠.
'적당한 용기에 건빵 1조각, 베이컨 1/3 파운드를 넣는다.
그리고 베이컨에서 기름이 베어나와 건빵에 스며들 때까지 볶다가 커피를 반잔 정도
부어준다.'
--- 남북전쟁중 coosh(혹은 cush)라고 불렸던 건빵 요리법
'식사조(mess mate)의 건빵을 모래 주머니에 담는다.
그리고 이걸 땅에 묻고 물을 뿌린 다음 그 위에 불을 피운다.
모래 주머니를 꺼내 총검으로 잘라내고 상황에 따라 건포도나 건조과일류, 연유등을
곁들여 먹는다.'
--- 1차대전중 영국군의 건빵 요리법중, 그나마 불을 피울 정도로 좋은 환경일 때.
육상에서보다 불을 피운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배에서라면 이 건빵은 더욱
처참한 요리법으로 변형됩니다.
그냥 물에 적당히 불리고 어떻게 그 염분을 제거할 수 없는 염장 고기 조각을 곁들인
다음 여기에 식초따위를 쳐서 이걸 럽스카우스(lobscouse)니
스킬리골리(skillygolee)같은 이름을 붙여줍니다.
한편 이 건빵은 육상에서건 해상에서건 언제나 바구미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처럼 캐러웨이(caraway)의 씨를 추가한다든지 미국인들처럼 상자를 알코올로
충분히 소독하고 담는다든지 하는 시도를 해보기도 하나 언제나 실패했고 덕분에 worm
castle같은 별명이 붙여질 수 밖에 없었죠.
덕분에 해상처럼 보유식량에 제한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것이라도 먹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밤에 눈딱감고 먹던지 아니면 먹기 전에 가급적 안속에 있는 바구미가 모누 나올
때까지 어딘가 대고 쳐서 털어내고 먹어야 했죠.
한가지 좋은 점이라면 바구미가 속에 구멍을 내서 부숴트리기 좀 더 쉬워진다는
점이랄까요.
그리고 이런 빵과 건빵외에 곡물 가루 혹은 볶은 곡물가루(미숫가루 비슷한)종류가
지급되기도 합니다.
이걸로 즉석에서 fire cake를 굽거나 죽(오트밀)따위를 끓여먹기도 하죠.
fire cake는 오늘날 인도등에서 화덕등에 붙여 만드는 자빠띠나 난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든 빵입니다.
돌판이라든지 이런데다 밀가루 반죽을 바르고 불옆에 두고 굽거나 총검 따위에 밀가루
반죽을 꼽고 불에 바로 굽는 것이죠. (로마군들도 해먹던 오래된 방법중 하나입니다.)
한편 일부 지역 - 이탈리아 - 에서는 파스타와 같은 밀가루로 만든 저장식품이
등장합니다.
이건 건빵처럼 조리된 것이 아닌 그냥 말린 밀가루 덩어리나 판자 조각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적당한 냄비만 있다면 뜨끈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죠. (파스타라
하면 국수형태만 생각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 있던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간혹 우스개로 2차대전중 사막에서 이태리군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군이 달려갔더니
파스타 데치고 있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듣고 웃으시고 진실로 믿으시면 좀 곤란합니다.
식당처럼 정성스럽게 파스타를 소금물에 삶고 건져서 소스에 비빈다거나 하는건 물있고
시간있을 때나 할만한 일이고 보통 저 군대에서 나온 물건은 잡탕의 재료로 사용될
뿐이었습니다.
위에 건빵가지고 고기 지방과 물로 불려서 먹듯이 저 파스타라는 놈도 비슷하게
활용됩니다.
건빵 대신 파스타가 들어간다는 것만 다른 것 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제조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장기 보존식품이랄까요? (굽는 과정이
빠지니)
고기는 염장 고기가 압권입니다.
당시엔 냉장시설이 없었고 신선한 고기를 운반해서 줄 수 있는 기간은 도축후 일주일
이내였으니 천상 염장하는게 최선의 방책이었죠.
그렇다고 이 염장 고기만 줄창 준건 아닙니다.
끌고 다니거나 혹은 주변에서 구입된, 아니면 군대말로 위치이동되거나 원주인에게서
해방된 가축을 도축하여 지급했으며 여기에는 소나 양말고 말이나 노새등도
포함됩니다.
뭐 때에 따라서는 총검에 꾀어 불에 구운 쥐고기도 먹은 판인데요.
여튼 이 염장 고기란게 그저 소금에 절인 수준이 아니라 소금에 고기를 파묻었다할
정도였고 반쯤은 마른 것같은 정체 불명의 덩어리였다 하죠.
색깔도 시퍼렇게 변색된 경우가 흔했고 오늘날 정육점에서 팔았다간 망하기 좋은 털이
아직 남아있는 껍질이나 흙과 같은 오물따위도 있었죠.
당연하게도 맛이 아주 괴로울 정도로 없었답니다.
씹으면 뭔가 연골을 씹는듯한 느낌이었다는데...
베이컨이라 불리던 물건 자체도 우리가 상상하는 훈제되고 얇게 저며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답니다.
염장된데다 훈제는 흉내만 냈을 수도 있거나 아예 안했을 수도 있는 반건조상태에
가까운 고기 덩어리 였다하니.
여튼 염장 고기의 경우는 먹으려면 담수에 담궈 염분을 빼내야 했죠.
이런 면에서 그나마 지상은 나았습니다.
해상에서는 염장 고기에 포함된 염분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닷물에 담궈 그래도 약간의 염분을 제거한 다음 눈딱감고 먹는 것이었죠.
(한때 이 고기의 과다한 염분이 괴혈병의 원인이었다고 생각된 적도 있습니다.)
여튼 이런 재료로 만든 요리는 그래도 주둔지나 숙영지에서라면 수프라도 나온다든지
운좋으면 샐러드도 나올 수 있었고 품목도 좀 더 다양해질 여지가 있었죠.
한가지 참고하시면 좋은게 이 시대에는 전문 취사병이 병사들의 식사를 만든게 아니라
식사조(mess mate)가 자신들이 먹을 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식사조는 보통 6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1개의 텐트에서 같이 자는 인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행군중이라면 저 위의 워털루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다 변변찮은
조리기구조차도 없던터라 할 수 있는 요리란게 빤했습니다. (지금의 반합같이 가벼운
식기 겸 조리용구는 19세기 넘어가야 이뤄지는 일입니다.)
불에 굽는 것이었죠.
건빵도 굽고 고기도 굽고 돌판이라도 하나 주우면 운이 좋은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기병의 흉갑이 프라이팬 목적으로 전용되기도 했다죠.
이건 중세시대의 요리 풍경을 제현한 겁니다.
2갤런 정도 들어가는 무쇠솥에 번철따위가 보이죠.
그런데 이런걸 행군하는 병사들이 이고지고 간다고 생각해보시길.
그러니 아예 저런 호사는 행군중에는 깔끔하게 포기하는게 좋았다는거죠.
다 나쁜건 저 모습이 적어도 19세기까지 주욱 유지됐다는 점입니다.
물론 한가지 차이라면 19세기쯤에 들어서면 저보다는 가볍고 값싸게 만든 기구들이
사용됐다는 점이죠.
한편 건조 고기류도 시도되거나 활용이 됩니다.
개중에는 17세기 중반 프랑스군에서 보급하려던 말린 고깃가루 마르텡 보로스처럼
처절하게 실패한 - 병사들이 식사를 거부했다죠 - 경우도 있습니다.
이 건조 고기류 역시 오래전부터 유목민등에서 활용되던 방식이었고 특히 소금을
구하기 힘든 곳에서는 곧잘 사용되던 방법이었죠. (덕분에 남미 지역에서도 이런
식품류가 이전부터 활용됩니다)
고기를 최대한 얇게 저미거나 해서 햇빛이나 불로 건조시키고 여기에 적당한하
곡물가류등을 첨가할 수 있으면 첨가해서 가루나 뭉쳐서 만든 덩어리 상태로 만들어서
보관하는 것이었죠.
먹는건 역시나 물에 불리며 끓여서 먹는다였는데 그닥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의외로 곰팡이가 핀다든지 할 수도 있고 먹을 수 있게되기까지 어쩌건 손이 더 갔으니.
그외에 다른 종류의 식품류를 종군 상인들로부터 사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 때는 군대가 이동하면 그 뒤에는 각종 상인들부터 군인 가족,
창녀들까지 포함된 거대한 집단이 움직였죠.
이건 2008년 미군의 Natick Research에서 우리 병사에게 어제와 오늘 뭘줬나 전시회에
나온 남북전쟁 당시의 조리 풍경입니다.
그래도 이 시대는 이전보다 좀 나아진게 적어도 조리 기구가 이전보다는 비교적
가벼워졌다는 점이죠.
그러나 여전히 건빵과 염장 고기 - 돼지고기가 보통입니다 - 혹은 베이컨이 나왔죠.
이러다 한가지 매우 중요한 발명이 나오며 이제 1과 2에 영향을 미치며 슬슬 둘이
확연히 분리가 되게 됩니다.
바로 통조림의 등장과 대규모 공장에서 나오는 식품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죠.
부패를 막는 방법은 이전부터 다양한게 실행됩니다.
이중 열을 이용한 방법으로 건조가 아닌 그 때는 몰랐지만 미생물을 죽이는 방법이
18세기 들어서며 슬슬 등장합니다.
가령 오래전부터 불어로 콩피(confit)라고 부르는 요리법을 본다면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미 어느정도 감은 잡았더란게 나오죠.
이 콩피는 고기를 동물성 지방에 담가 서서히 익힌 채로 식혀서 굳히는 방법으로
동물성 기름이 굳으며 몇개월까지 저장되는 방식이었죠.
그러다 안톤 반 레벤후크의 현미경 발견과 부패에 대한 실험이나 니덤의 실험처럼
가열과 밀폐를 통해 부패가 지연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 1800년, 프랑스 활제 나폴레옹은 1만2천 프랑의 상금이 걸린 '음식물 오래
보관하기' 현상 공모를 겁니다.
그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승승장구했으나 보급과 식량 지급에서 개판 오분전
상황이란게 나오자 내린 공모였죠.
여기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입니다.
바로 오늘날 통조림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에서의 그의 이름을 따 통조림 제조를 아예
아페르법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있기도 하죠. (파리의 한 구역 이름에 아페르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죠. 감자를 대중화시킨 파르망띠에처럼 식품 산업계를 바꾼 사람이랄까요.)
젊었을 때 맥주 양조, 하인, 여관업, 그리고 과자 제조업자이자 한 마을의 읍장
노릇까지 하던 그는 1790년대부터 이미 어떻게하면 식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을지
연구중이었죠.
그리고 1800년경 그는 큰 가마솥에서 채소(주로 콩)를 익히고 병에 담아 저장하는
공장을 차리게 됩니다.
그가 만든 채소가 담긴 병은 곧 오래가는 식품으로 인정받게 되며 1804년의 선상
실험도 통과한데다 1809년에는 파르망띠에가 포함된 위원회에서도 인정받고 그
이듬해에는 게이 뤼삭이 포함된 과학자들에게도 인정받게 됩니다.
1만2천프랑의 상금도 타게됐고 말입니다.
'아페르가 계절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공장에서 나온 병속에는 봄, 여름, 가을이 모두 살아있다.'
--- 1`809년 2월 10일자 신문 기사중
1911년, 아페르는 그가 고안한 방법을 책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합니다.
독점이나 특허에 대한 권리등을 깔끔하게 포기한거죠.
'저장하고 싶은 식품을 병에 넣고 병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막을 것.
이 마개를 막는 가정에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밀폐된 병을 식품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시간만큼 방 마리(baine marie)에
담긴 끓는 물로 처리한다.'
--- 아페르가 그의 고안법에 대해 설명한 대목.
아, 위의 방 마리는 큰 대접에 물을 넣고 그 속에 작은 그릇을 넣은 다음 그 전체를
오븐에 넣어 데우는 방법입니다.
현대화 버젼입니다.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런드(Peter Durand)라는 영국인이 비싸고 깨지기 십상인 유리병
대신 주석 도금된 양철 깡통을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특허는 1813년에 죤 홀(John Hall)과 브라이언 도어킨(Bryan
Dorkin)이라는 영국인들에 의해 상용화가 됩니다.
또 이 시기, 수증기를 쓰는 방법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페르는 고국 프랑스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지는 못합니다.
나폴레옹 이후 복귀한 왕정체계는 나폴레옹 시대에 이름을 날린 아페르에게 지원을
하길 꺼려했죠.
그나마 1822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이란 영광과 연구 장소까지 제공받긴 합니다만
그는 가진 돈을 모두 실험에 날려버리고 부인마저 떠난 채로 1841년 6월 1일,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심지어 공동 묘지에서조차도 극빈자 구역에 묻혀버리죠.
이 때까지만해도 통조림은 저렴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식품이자 모험가나 군대에서나 필요한 정도로 인식됐고 위험하기도 했죠.
특히 문제가된 것은 바로 통조림의 덩치가 커질수록 내부에서 부패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점은 1850년대의 영국 해군이 경험한 일로 6파운드 이상의 크기를 가진 고기
통조림이 썩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며 알려지게 됩니다. (이 일로 영국해군은 구매한
통조림 수만개를 폐기합니다)
이 때만해도 그 원인이 통조림속에 남겨진 공기가 문제일 것이다라고 추측됩니다만
실상은 열처리 과정이 제대로 안되서 였답니다.
통조림이 커지면서 열이 속에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건 훗날 알려지게 되지만 뚜껑을 밀폐하는 납땜이 문제가 됩니다.
당시 통조림은 뚜껑 부분을 밀폐하는데 납으로된 테이프를 대고 이걸 녹여 땜질하는
방식으로 처리됐거든요.
덕분에 통조림을 오래 먹으면 납중독에 걸릴 수도 있다라는 점이었죠.
이 문제는 바로 프랭클린의 잃어버린 원정(Franklin's lost expedition)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영국 해군의 유능한 함장이자 모험가였던 프랭클린 경(Captain Sir John Franklin)은
1845년 북국해로 모험을 떠나나 그 탐험대는 실패하고 맙니다.
남겨진 기록에서 그들은 기묘하고도 이상한 행동을 하며 사라져버린 것으로 남겨지죠.
후일 1980년대에 그들의 남겨진 유해에서 주변 환경보다 더많은 납이 발견되죠.
(2천년인가에 얼어붙은 시체가 발굴되어져 다시 검사됩니다. 역시 납이 검출되죠.)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통조림은 상당히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 넓은 땅 때문에 자칫하다간 염장 고기와 밀가루 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자니
케이크(joney cake)만 먹을 수도 있던 상황에서 통조림은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으니.
덕분에 발전은 계속되어 1847년, 앨런 테일러(Allen Taylor)가 손으로 말아서 만들던
깡통 생산 과정을 기계화하는 특허를 냅니다.
덕분에 신대륙에서 통조림 산업은 급격히 신장되며 1856년에는 게일 보든(Gail
Borden)에 의해 연유 통조림이 생산되죠.
1860년, 토마토 통조림 공장을 운영하던 이삭 솔로몬(Isaac Solomon)에 의해 그 당시
열처리 하는데 걸리던 시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공정이 개발됩니다.
당시 통조림의 열처리 시간은 5 ~ 6시간인데 솔로몬은 그걸 1시간대로 줄여버린거죠.
이 발견은 공장 하나에서 하루에 2 ~ 3천개 만들던걸 하루에 2만개 만들어낼 정도로
통조림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켜 통조림 가격까지 낮아지게 만들죠.
그리고 남북전쟁이 터집니다.
뉴욕시 하나로 남부 연맹의 공업 생산량에 맞설 수 있다던 북부의 통조림 공장들,
호황을 누릴 기회를 잡게 되죠.
1860년에 5백만개의 통조림이 생산되더니 1865년에는 이게 3천만개가 생산될 정도였고
이미 이 때 통조림에 든 커피와 연유의 혼합물을 물에 타서 먹을 정도가 됩니다.
'망치와 끌로 주의하여 따시오.'
--- 1840년대 영국에서 생산된 12파운드 쇠고기 통조림에 붙은 라벨의 내용
한편 통조림의 발전과 함께 통조림 따개도 여러가지가 등장합니다.
망치와 끌에서 군에서는 개머리판으로 치거나 대검으로 찔러 따기도 했으며 아예
소총으로 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죠.
그러다 1855년 영국의 로버트 예이트(Robert Yates)와 미국의 이즈라 워너(Ezra J.
Warner)가 지랫대 원리를 사용한 커다란 통조림 따개를 개발합니다.
1858년에 워너의 따개가 미육군에 공식 채택되며 이 황소대가리 따개(bull’s head
opener)가 지급됩니다.
그 후로 이 따개는 여러가지가 발명되며 마침내 덩치가 작은 P-38 따개까지 등장하죠.
가장 아래가 바로 P-38
위로 갈수록 참 흉기스럽게 생겼죠.
이렇게 통조림이 나오고 저장에 대한 기술도 발달하며 군대의 식단이 풍요로워질려고
폼을 잡습니다만 그렇게 좋아진건 아닙니다.
더욱이 이 통조림이란게 항상 소모되는건 아니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분명한건 통조림이 물론 1의 주둔지 식사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주가 된건 아니었다는
점이고 2의 행군식량에 포함된다해도 항상 전투중 통조림만 까댄건 아니었다라는
점이죠.
어떤 군대가 한달 30일동안 전투를 나갔다고 쳐봅시다.
이 군대, 하루 3끼, 총 90끼를 인원수대로 먹여놔야 전투를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런...
한달내내 90일동안 통조림으로 구성된 요상한 보존식품들, 다르게 말하자면 전투식량만
줬다 쳐보시길.
병사들이 환장안하면 이건 진짜 다행입니다.
이게 농담같으신 분은 1끼를 통조림 참치나 스팸 깡통, 치즈 1장에 인스턴트 커피 1잔,
담배 2가치, 2리터 정도의 물과 한숫가락 분량의 소금과 설탕, 바짝 마른 빵
200그램정도로만 먹으면서 얼마나 갈 수 있나 버텨보시길.
중간에 과일이나 야채 이런거 드시면 무효입니다.
물론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죽고 싶어질 뿐인게 탈이죠.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맛대가리 상실한 요상한 보존 식품만을 줬다가는 병사들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군대는 저 위의 2번째 전투 식량은 말그대로 밥해먹기 거시기한 상황에서나
주는거고 보통은 1번에 해당하는 밥을 해서 전투중에도 주려고 합니다.
1. Bean - 식사
2. Bullet - 탄약(무기)
3. Bandage - 붕대(의료지원)
--- 오래된 보급관련 부서의 경구.
근대와 현대 군대에서 지급되는 식량은 통상 다음 범주에서 출발합니다.
1. 주둔지 지급 식사(garrison ration)
2. 전투 식량(combat ration) 혹은 오래된 표현대로 행군 식량(marching ration).
3. 일반적 상황을 벗어난 특수식. (생존, 병원, 포로등등)
1의 주둔지 지급 식사는 간단히 말해서 짬밥 되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료가지고 적당히 요리한 그런 물건이고 보통 그 사회의 중류정도에서
먹는 수준에 맞춰지면 다행인 그런 겁니다.
물론 맛이야 '괜찮은데' 보다는 '맛있으면 다행이게? 죽지 못해 먹는다!' 가
일반적이지만 말입니다.
오늘 식사는 먹을만 하지 말입니다.
기자들이 왔거든여.
기자들이 왔거든여.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offee'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커피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It looks like muddy water and tastes like turpentine
흙탕물같고 맛은 테르빈유같아요.
(다른 버젼)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offee'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커피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It's good for cuts and bruises and tastes like iodine
베고 타박상에 좋은데다 맛은 요드 소독약 같아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how i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밥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a chicken jumped off the table and started marking time
닭이 식탁에서 뛰어내려서 기다리고 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chicken'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닭고기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One jumped off the table and killed a friend of mine
식탁에서 떨어진 것에 맞아 내 친구가 죽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biscuit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빵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one rolled off the table and killed a friend of mine
식탁에서 떨어진 것에 내 친구가 맞아 죽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training's might fine
걔들이 군대 훈련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last night there were ten of us, now there's only nine
어제 밤, 열명이던게 지금은 아홉이래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pay is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월급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they give you a hundred dollars and take back ninety-nine
걔들은 100달러 주더니 99달러는 가져가버렸대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shoe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신발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You ask for size eleven, they give you size nine
니가 11문을 달라하면 걔들은 9문을 줘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pancake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팬캐익(핫케익)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You can try to chew them, but you're only wasting time
그거 씹는다고 시간만 날려버렸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bed's are mighty fine
걔들이 군대 잠자리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But how the hell would I know, I've never slept in mine
근데 얼마나 지옥같은지 난 푹 자보질 못했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mail is so great
걔들이 군대 편지가 괜찮다고 말했대요.
Today I got a letter dated 1948
오늘 난 1948년에 쓰여진 편지를 받았어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hours are just right
걔들이 군대 시간이 괜찮다고 말했대요.
Start early in the morning and work on through the night
아침일찍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일한대요.
(후렴)
They say that in the Army the tents are waterproof
걔들이 군대 텐트는 방수라고 했대요.
You wake up in the morning and you're floating on the roof.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붕위에 떠있대요.
(후렴)
Oh Lord, I wanna go
오 신이시여, 난 가고싶어요
But they won't let me go
근데 쟤들이 못가게 해요.
Oh Lord, I wanna go hoo-hoo-hoooome EH!
신이시여, 집에 보내줘요.
--- 미군 군가(cadence)중 They Say That In The Army중
2번의 경우는 바로 먹을 수 있는 저장 식품이 나오면서 본격화된 겁니다.
그 전에는 1과 2의 경계가 모호했죠.
이런터라 때때로 긴박함 덕분에 식사를 거를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가령 워털루 전투 당시 전장으로 동원된 많은 영국군들은 -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일부도 마찬가지였지만 - 행군한다고 지급받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전투에
투입됩니다.
어느정도였냐면 밥먹자고 지급된 고기가 익기도 전에 행군 시작이 명령됐고 덕분에
익고있던 고기 전부가 버리져 버립니다.
결국 전투 전날 겨우 목적지에 도착해서 젖은 땅에서 가까스로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조차 제대로 못먹고 전투에 투입되죠.
그리고 1이라고해도 이전 시대라면 그럭저럭 먹을만한 수준이 나온건 아닙니다.
오래 보관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과 경제성, 식량 조달자들의 경직성은 재료를 상당히
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꽤나 오랫동안 1일에 이정도 양의 음식물이 지급됐으니 말입니다.
1. 1 ~ 1.5파운드 가량의 빵이나 비스킷 혹은 그에 준하는 곡물 가루 또는 그 가공품
2. 1파운드 가량의 육류 (통상 염장)
3. 1/2파운드 가량의 콩이나 야채나 근채류등.
4. 기타 온스 단위의 치즈나 버터, 식초와 같은 품목
5. 술, 이건 맥주냐 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맥주 기준으로 1리터 안되는 양이
나옵니다.
이중 빵과 고기는 필수적이었고 다른건 양을 줄여도 이건 더주면 더줬지 덜주지는
않으려곤 합니다.
다만 그럴려고 했다지 실재로 그랬다는 아닌게 좀 뭐하지만 말입니다.
한편 1의 경우는 사실 빵이나 건빵과 같이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줄 수도 있지만 그냥
밀가루를 줄 수도 있고 귀리와 같은 다른 잡곡의 가루를 줄 수도 있습니다.
빵의 경우는 야전 제빵소가 만들어져 화덕에서 구워지며 이렇게 만들어진 빵이
지급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빵의 질이 그렇게 좋을리도 없는데다 상황이 나빠지거나
돈때먹기 좋아하는 운영자에게 걸리면 질은 더욱 요상해졌습니다.
톱밥따위가 들어간다거나 석회가 들어가는 일까지도 벌어졌으니.
또한 제빵소에서 병사들의 손까지 들어가는데 어느정도 걸릴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죠.
더욱이 요즘의 식빵과 달리 이 시기의 빵이란건 손으로 그저 때서 먹는다가 통하지
않는 그런 물건이었죠.
심지어 군대빵이 아니라 민간의 빵마저도 그걸 손으로 찢어낼 수 있으면 성인
취급해준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딱딱하고 질겼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것이라도 빵이랍시고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거죠.
야전 제빵소가 운영되고 거기서 빵이 올 정도면 일단 굶을 일은 적은거니.
건빵은 오랜기간동안 병사들과 선원들을 먹였던 것이고 그 역사또한 오래된 것입니다.
이미 로마 시대때 군에서 비슷한걸 만들어 먹은 경우가 있는데다 오래 저장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1차대전때까지 애용됩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류의 밀가루 덩어리를 구운 물건은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2차대전 이후로는 부수다가 손 다쳤다는 소리는 안나옵니다.
아마도 영국 선원들의 음식에 대한 속어인 tack에서 출발한 hardtack 이란 단어외에
그저 biscuit, hard bread, ship biscuit, sea biscuit, sea bread등으로 불립니다.
동네에 따라서는 비슷한 류의 물건을 츠비박(zwieback)이라 부르기도 하죠.
별명도 이빨을 무디게 하는 것(tooth duller)니 철판(sheet iron), 벌레성(worm
castle)등이 붙여지기도 합니다.
이 건빵은 비스킷이란 말이 말해주듯 2번 구운, 즉 가급적 습기를 최대한 제거한 빵과
비슷한 물건이다란 의미입니다.
전통적인 제조법은 밀가루를 약간의 소금과 혼합해 반죽하고 이걸 두께 1/2인치,
가로세로 3인치의 사각형이나 지름 3인치의 원형으로 만들고 여러 개의 구멍을 낸 다음
오븐에서 구워서 살짝 말린 다음 다시 굽는 겁니다.
이러면 내부에 습기가 거의 사라지며 아주 단단해지죠.
이건 1784년의 쉽 비스킷.
얼마나 단단했냐면 이걸 깨다 손다쳤다는 소리부터 돌이나 소총 개머리판으로 깨트려야
한다거나 맨이빨로 씹다간 이빨이 나간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이걸 경험하고 싶으신 분은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가래떡 있죠?
그걸 전자렌지에서 타지 않을 정도로 잘 돌려준 다음 완전히 식으면 한번 씹어보시길
바랍니다.
별로 다를 것도 없습니다.
여튼 이 건빵은 오래 간다라는 점 때문에 군대의 저장식량으로 자주 사용된데다 특히
2번의 행군 식사에 곧잘 나오던 품목이었습니다.
빵보다 부피도 적고 저거 2개나 3개면 하루치 식사가 됐거든요.
더욱이 이건 제빵소를 만들 필요도 없고 일치감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것만 주면 병사들도 인간인데 가만히 참을 수가 없죠.
식사 거부같은 방법까지 동원됩니다.
그러니 이런 건빵도 적당히 상황봐가면서 줬다는거죠.
This the song that is uttered in camp by night and day,
이 노래는 병영에서 주야에 걸쳐 불려졌던 노래라네.
This the wail that is mingled with each snore.
이 울부짖음은 코고는 소리에 섞여있네.
This the sighing of the soul for spring chickens far away,
이 영혼의 탄식은 도망친 닭을 위한 것이라네.
Oh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이여, 이제 그만!
This the song of the soldier, weary, hungry and faint,
이 노래는 지치고 배고프고 무기력한 병사의 것이라네.
Hard crackers,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 건빵 이젠 그만.
Many days have I chewed you and uttered no complaint,
수많은 날동안 나는 씹었고 진정 불평도 안했다네.
Hard crackers, hard crackers, come again no more!"
건빵, 건빵, 이젠 그만.
--- 남북전쟁 당시 병사들간에 불렸던 노래중.
건빵은 그냥 먹기보다는 어떤 식으로건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다른 재료와 함께
요리했고 곧잘 써먹었던 요리법은 적당히 돌(개머리판)로 쳐서 부스러트리거나 해서
물이나 차, 국물등에 담궈 불려 먹거나 아니면 고기의 지방분등을 첨가해 같이 끓여
먹는 것이었죠.
'적당한 용기에 건빵 1조각, 베이컨 1/3 파운드를 넣는다.
그리고 베이컨에서 기름이 베어나와 건빵에 스며들 때까지 볶다가 커피를 반잔 정도
부어준다.'
--- 남북전쟁중 coosh(혹은 cush)라고 불렸던 건빵 요리법
'식사조(mess mate)의 건빵을 모래 주머니에 담는다.
그리고 이걸 땅에 묻고 물을 뿌린 다음 그 위에 불을 피운다.
모래 주머니를 꺼내 총검으로 잘라내고 상황에 따라 건포도나 건조과일류, 연유등을
곁들여 먹는다.'
--- 1차대전중 영국군의 건빵 요리법중, 그나마 불을 피울 정도로 좋은 환경일 때.
육상에서보다 불을 피운다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배에서라면 이 건빵은 더욱
처참한 요리법으로 변형됩니다.
그냥 물에 적당히 불리고 어떻게 그 염분을 제거할 수 없는 염장 고기 조각을 곁들인
다음 여기에 식초따위를 쳐서 이걸 럽스카우스(lobscouse)니
스킬리골리(skillygolee)같은 이름을 붙여줍니다.
한편 이 건빵은 육상에서건 해상에서건 언제나 바구미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영국 해군처럼 캐러웨이(caraway)의 씨를 추가한다든지 미국인들처럼 상자를 알코올로
충분히 소독하고 담는다든지 하는 시도를 해보기도 하나 언제나 실패했고 덕분에 worm
castle같은 별명이 붙여질 수 밖에 없었죠.
남북전쟁당시, 식료품의 제조와 검사.
나름대로 상당히 노력은 했으나 전선에서는 언제나 불만.
나름대로 상당히 노력은 했으나 전선에서는 언제나 불만.
덕분에 해상처럼 보유식량에 제한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이런 것이라도 먹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밤에 눈딱감고 먹던지 아니면 먹기 전에 가급적 안속에 있는 바구미가 모누 나올
때까지 어딘가 대고 쳐서 털어내고 먹어야 했죠.
한가지 좋은 점이라면 바구미가 속에 구멍을 내서 부숴트리기 좀 더 쉬워진다는
점이랄까요.
그리고 이런 빵과 건빵외에 곡물 가루 혹은 볶은 곡물가루(미숫가루 비슷한)종류가
지급되기도 합니다.
이걸로 즉석에서 fire cake를 굽거나 죽(오트밀)따위를 끓여먹기도 하죠.
fire cake는 오늘날 인도등에서 화덕등에 붙여 만드는 자빠띠나 난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든 빵입니다.
돌판이라든지 이런데다 밀가루 반죽을 바르고 불옆에 두고 굽거나 총검 따위에 밀가루
반죽을 꼽고 불에 바로 굽는 것이죠. (로마군들도 해먹던 오래된 방법중 하나입니다.)
한편 일부 지역 - 이탈리아 - 에서는 파스타와 같은 밀가루로 만든 저장식품이
등장합니다.
이건 건빵처럼 조리된 것이 아닌 그냥 말린 밀가루 덩어리나 판자 조각으로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적당한 냄비만 있다면 뜨끈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죠. (파스타라
하면 국수형태만 생각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 있던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간혹 우스개로 2차대전중 사막에서 이태리군을 구원하기 위해 독일군이 달려갔더니
파스타 데치고 있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듣고 웃으시고 진실로 믿으시면 좀 곤란합니다.
식당처럼 정성스럽게 파스타를 소금물에 삶고 건져서 소스에 비빈다거나 하는건 물있고
시간있을 때나 할만한 일이고 보통 저 군대에서 나온 물건은 잡탕의 재료로 사용될
뿐이었습니다.
위에 건빵가지고 고기 지방과 물로 불려서 먹듯이 저 파스타라는 놈도 비슷하게
활용됩니다.
건빵 대신 파스타가 들어간다는 것만 다른 것 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제조비용이 더 싸게 먹히는 장기 보존식품이랄까요? (굽는 과정이
빠지니)
고기는 염장 고기가 압권입니다.
당시엔 냉장시설이 없었고 신선한 고기를 운반해서 줄 수 있는 기간은 도축후 일주일
이내였으니 천상 염장하는게 최선의 방책이었죠.
그렇다고 이 염장 고기만 줄창 준건 아닙니다.
끌고 다니거나 혹은 주변에서 구입된, 아니면 군대말로 위치이동되거나 원주인에게서
해방된 가축을 도축하여 지급했으며 여기에는 소나 양말고 말이나 노새등도
포함됩니다.
뭐 때에 따라서는 총검에 꾀어 불에 구운 쥐고기도 먹은 판인데요.
여튼 이 염장 고기란게 그저 소금에 절인 수준이 아니라 소금에 고기를 파묻었다할
정도였고 반쯤은 마른 것같은 정체 불명의 덩어리였다 하죠.
색깔도 시퍼렇게 변색된 경우가 흔했고 오늘날 정육점에서 팔았다간 망하기 좋은 털이
아직 남아있는 껍질이나 흙과 같은 오물따위도 있었죠.
당연하게도 맛이 아주 괴로울 정도로 없었답니다.
씹으면 뭔가 연골을 씹는듯한 느낌이었다는데...
베이컨이라 불리던 물건 자체도 우리가 상상하는 훈제되고 얇게 저며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답니다.
염장된데다 훈제는 흉내만 냈을 수도 있거나 아예 안했을 수도 있는 반건조상태에
가까운 고기 덩어리 였다하니.
여튼 염장 고기의 경우는 먹으려면 담수에 담궈 염분을 빼내야 했죠.
이런 면에서 그나마 지상은 나았습니다.
해상에서는 염장 고기에 포함된 염분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닷물에 담궈 그래도 약간의 염분을 제거한 다음 눈딱감고 먹는 것이었죠.
(한때 이 고기의 과다한 염분이 괴혈병의 원인이었다고 생각된 적도 있습니다.)
여튼 이런 재료로 만든 요리는 그래도 주둔지나 숙영지에서라면 수프라도 나온다든지
운좋으면 샐러드도 나올 수 있었고 품목도 좀 더 다양해질 여지가 있었죠.
한가지 참고하시면 좋은게 이 시대에는 전문 취사병이 병사들의 식사를 만든게 아니라
식사조(mess mate)가 자신들이 먹을 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 식사조는 보통 6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1개의 텐트에서 같이 자는 인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행군중이라면 저 위의 워털루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다 변변찮은
조리기구조차도 없던터라 할 수 있는 요리란게 빤했습니다. (지금의 반합같이 가벼운
식기 겸 조리용구는 19세기 넘어가야 이뤄지는 일입니다.)
불에 굽는 것이었죠.
건빵도 굽고 고기도 굽고 돌판이라도 하나 주우면 운이 좋은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기병의 흉갑이 프라이팬 목적으로 전용되기도 했다죠.
이건 중세시대의 요리 풍경을 제현한 겁니다.
2갤런 정도 들어가는 무쇠솥에 번철따위가 보이죠.
2.5갤런들이 무쇠솥. 이거 들고 행군하면 즐겁겠죠.
그런데 이런걸 행군하는 병사들이 이고지고 간다고 생각해보시길.
그러니 아예 저런 호사는 행군중에는 깔끔하게 포기하는게 좋았다는거죠.
다 나쁜건 저 모습이 적어도 19세기까지 주욱 유지됐다는 점입니다.
물론 한가지 차이라면 19세기쯤에 들어서면 저보다는 가볍고 값싸게 만든 기구들이
사용됐다는 점이죠.
중세의 조리기구 셋트들인데 이런 물건은 적어도 18세기까지
군에서 여전히 계속 사용됩니다. 아주 약간 모양만 변한 채로.
군에서 여전히 계속 사용됩니다. 아주 약간 모양만 변한 채로.
한편 건조 고기류도 시도되거나 활용이 됩니다.
개중에는 17세기 중반 프랑스군에서 보급하려던 말린 고깃가루 마르텡 보로스처럼
처절하게 실패한 - 병사들이 식사를 거부했다죠 - 경우도 있습니다.
이 건조 고기류 역시 오래전부터 유목민등에서 활용되던 방식이었고 특히 소금을
구하기 힘든 곳에서는 곧잘 사용되던 방법이었죠. (덕분에 남미 지역에서도 이런
식품류가 이전부터 활용됩니다)
고기를 최대한 얇게 저미거나 해서 햇빛이나 불로 건조시키고 여기에 적당한하
곡물가류등을 첨가할 수 있으면 첨가해서 가루나 뭉쳐서 만든 덩어리 상태로 만들어서
보관하는 것이었죠.
먹는건 역시나 물에 불리며 끓여서 먹는다였는데 그닥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의외로 곰팡이가 핀다든지 할 수도 있고 먹을 수 있게되기까지 어쩌건 손이 더 갔으니.
그외에 다른 종류의 식품류를 종군 상인들로부터 사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 때는 군대가 이동하면 그 뒤에는 각종 상인들부터 군인 가족,
창녀들까지 포함된 거대한 집단이 움직였죠.
이건 2008년 미군의 Natick Research에서 우리 병사에게 어제와 오늘 뭘줬나 전시회에
나온 남북전쟁 당시의 조리 풍경입니다.
그래도 이 시대는 이전보다 좀 나아진게 적어도 조리 기구가 이전보다는 비교적
가벼워졌다는 점이죠.
그러나 여전히 건빵과 염장 고기 - 돼지고기가 보통입니다 - 혹은 베이컨이 나왔죠.
이러다 한가지 매우 중요한 발명이 나오며 이제 1과 2에 영향을 미치며 슬슬 둘이
확연히 분리가 되게 됩니다.
바로 통조림의 등장과 대규모 공장에서 나오는 식품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죠.
부패를 막는 방법은 이전부터 다양한게 실행됩니다.
이중 열을 이용한 방법으로 건조가 아닌 그 때는 몰랐지만 미생물을 죽이는 방법이
18세기 들어서며 슬슬 등장합니다.
가령 오래전부터 불어로 콩피(confit)라고 부르는 요리법을 본다면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미 어느정도 감은 잡았더란게 나오죠.
이 콩피는 고기를 동물성 지방에 담가 서서히 익힌 채로 식혀서 굳히는 방법으로
동물성 기름이 굳으며 몇개월까지 저장되는 방식이었죠.
그러다 안톤 반 레벤후크의 현미경 발견과 부패에 대한 실험이나 니덤의 실험처럼
가열과 밀폐를 통해 부패가 지연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다 1800년, 프랑스 활제 나폴레옹은 1만2천 프랑의 상금이 걸린 '음식물 오래
보관하기' 현상 공모를 겁니다.
그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승승장구했으나 보급과 식량 지급에서 개판 오분전
상황이란게 나오자 내린 공모였죠.
여기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입니다.
바로 오늘날 통조림의 아버지로 불리며 미국에서의 그의 이름을 따 통조림 제조를 아예
아페르법이라 부르며 기념하고 있기도 하죠. (파리의 한 구역 이름에 아페르의 이름을
기념하고 있죠. 감자를 대중화시킨 파르망띠에처럼 식품 산업계를 바꾼 사람이랄까요.)
50대의 아페르, 대머리에 두갈래의 눈섭을 가진 꽤 사나워보이는 인상이지만 쾌할하고
신용있는 사람이었다죠.
신용있는 사람이었다죠.
젊었을 때 맥주 양조, 하인, 여관업, 그리고 과자 제조업자이자 한 마을의 읍장
노릇까지 하던 그는 1790년대부터 이미 어떻게하면 식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을지
연구중이었죠.
그리고 1800년경 그는 큰 가마솥에서 채소(주로 콩)를 익히고 병에 담아 저장하는
공장을 차리게 됩니다.
요런 병에 음식물을 담고 잘 밀봉하고 데우면 아페르식 병조림이 완성됩니다.
그가 만든 채소가 담긴 병은 곧 오래가는 식품으로 인정받게 되며 1804년의 선상
실험도 통과한데다 1809년에는 파르망띠에가 포함된 위원회에서도 인정받고 그
이듬해에는 게이 뤼삭이 포함된 과학자들에게도 인정받게 됩니다.
1만2천프랑의 상금도 타게됐고 말입니다.
'아페르가 계절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공장에서 나온 병속에는 봄, 여름, 가을이 모두 살아있다.'
--- 1`809년 2월 10일자 신문 기사중
1911년, 아페르는 그가 고안한 방법을 책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합니다.
독점이나 특허에 대한 권리등을 깔끔하게 포기한거죠.
'저장하고 싶은 식품을 병에 넣고 병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막을 것.
이 마개를 막는 가정에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밀폐된 병을 식품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시간만큼 방 마리(baine marie)에
담긴 끓는 물로 처리한다.'
--- 아페르가 그의 고안법에 대해 설명한 대목.
아, 위의 방 마리는 큰 대접에 물을 넣고 그 속에 작은 그릇을 넣은 다음 그 전체를
오븐에 넣어 데우는 방법입니다.
이건 오늘날의 방 마리
지금도 뷔페 식당등에 가시면 보이는 스테인레스로 된 바로 이런 물건이 방 마리의현대화 버젼입니다.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런드(Peter Durand)라는 영국인이 비싸고 깨지기 십상인 유리병
대신 주석 도금된 양철 깡통을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특허는 1813년에 죤 홀(John Hall)과 브라이언 도어킨(Bryan
Dorkin)이라는 영국인들에 의해 상용화가 됩니다.
또 이 시기, 수증기를 쓰는 방법도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페르는 고국 프랑스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지는 못합니다.
나폴레옹 이후 복귀한 왕정체계는 나폴레옹 시대에 이름을 날린 아페르에게 지원을
하길 꺼려했죠.
그나마 1822년, 인류를 위해 공헌한 사람이란 영광과 연구 장소까지 제공받긴 합니다만
그는 가진 돈을 모두 실험에 날려버리고 부인마저 떠난 채로 1841년 6월 1일, 쓸쓸한
죽음을 맞습니다.
심지어 공동 묘지에서조차도 극빈자 구역에 묻혀버리죠.
이 때까지만해도 통조림은 저렴하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식품이자 모험가나 군대에서나 필요한 정도로 인식됐고 위험하기도 했죠.
특히 문제가된 것은 바로 통조림의 덩치가 커질수록 내부에서 부패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점은 1850년대의 영국 해군이 경험한 일로 6파운드 이상의 크기를 가진 고기
통조림이 썩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며 알려지게 됩니다. (이 일로 영국해군은 구매한
통조림 수만개를 폐기합니다)
이 때만해도 그 원인이 통조림속에 남겨진 공기가 문제일 것이다라고 추측됩니다만
실상은 열처리 과정이 제대로 안되서 였답니다.
통조림이 커지면서 열이 속에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건 훗날 알려지게 되지만 뚜껑을 밀폐하는 납땜이 문제가 됩니다.
당시 통조림은 뚜껑 부분을 밀폐하는데 납으로된 테이프를 대고 이걸 녹여 땜질하는
방식으로 처리됐거든요.
덕분에 통조림을 오래 먹으면 납중독에 걸릴 수도 있다라는 점이었죠.
이전 시대 통조림의 잔해, 납으로된 테가 아직 남아있죠.
이 문제는 바로 프랭클린의 잃어버린 원정(Franklin's lost expedition)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영국 해군의 유능한 함장이자 모험가였던 프랭클린 경(Captain Sir John Franklin)은
1845년 북국해로 모험을 떠나나 그 탐험대는 실패하고 맙니다.
남겨진 기록에서 그들은 기묘하고도 이상한 행동을 하며 사라져버린 것으로 남겨지죠.
후일 1980년대에 그들의 남겨진 유해에서 주변 환경보다 더많은 납이 발견되죠.
(2천년인가에 얼어붙은 시체가 발굴되어져 다시 검사됩니다. 역시 납이 검출되죠.)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통조림은 상당히 인기를 얻게 됩니다.
그 넓은 땅 때문에 자칫하다간 염장 고기와 밀가루 또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자니
케이크(joney cake)만 먹을 수도 있던 상황에서 통조림은 환영받을 수 밖에 없었으니.
덕분에 발전은 계속되어 1847년, 앨런 테일러(Allen Taylor)가 손으로 말아서 만들던
깡통 생산 과정을 기계화하는 특허를 냅니다.
덕분에 신대륙에서 통조림 산업은 급격히 신장되며 1856년에는 게일 보든(Gail
Borden)에 의해 연유 통조림이 생산되죠.
1860년, 토마토 통조림 공장을 운영하던 이삭 솔로몬(Isaac Solomon)에 의해 그 당시
열처리 하는데 걸리던 시간을 대폭 단축시키는 공정이 개발됩니다.
당시 통조림의 열처리 시간은 5 ~ 6시간인데 솔로몬은 그걸 1시간대로 줄여버린거죠.
이 발견은 공장 하나에서 하루에 2 ~ 3천개 만들던걸 하루에 2만개 만들어낼 정도로
통조림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켜 통조림 가격까지 낮아지게 만들죠.
그리고 남북전쟁이 터집니다.
뉴욕시 하나로 남부 연맹의 공업 생산량에 맞설 수 있다던 북부의 통조림 공장들,
호황을 누릴 기회를 잡게 되죠.
1860년에 5백만개의 통조림이 생산되더니 1865년에는 이게 3천만개가 생산될 정도였고
이미 이 때 통조림에 든 커피와 연유의 혼합물을 물에 타서 먹을 정도가 됩니다.
'망치와 끌로 주의하여 따시오.'
--- 1840년대 영국에서 생산된 12파운드 쇠고기 통조림에 붙은 라벨의 내용
한편 통조림의 발전과 함께 통조림 따개도 여러가지가 등장합니다.
망치와 끌에서 군에서는 개머리판으로 치거나 대검으로 찔러 따기도 했으며 아예
소총으로 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죠.
그러다 1855년 영국의 로버트 예이트(Robert Yates)와 미국의 이즈라 워너(Ezra J.
Warner)가 지랫대 원리를 사용한 커다란 통조림 따개를 개발합니다.
1858년에 워너의 따개가 미육군에 공식 채택되며 이 황소대가리 따개(bull’s head
opener)가 지급됩니다.
그 후로 이 따개는 여러가지가 발명되며 마침내 덩치가 작은 P-38 따개까지 등장하죠.
가장 아래가 바로 P-38
위로 갈수록 참 흉기스럽게 생겼죠.
이렇게 통조림이 나오고 저장에 대한 기술도 발달하며 군대의 식단이 풍요로워질려고
폼을 잡습니다만 그렇게 좋아진건 아닙니다.
더욱이 이 통조림이란게 항상 소모되는건 아니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분명한건 통조림이 물론 1의 주둔지 식사에 들어갈 수는 있어도 주가 된건 아니었다는
점이고 2의 행군식량에 포함된다해도 항상 전투중 통조림만 까댄건 아니었다라는
점이죠.
어떤 군대가 한달 30일동안 전투를 나갔다고 쳐봅시다.
이 군대, 하루 3끼, 총 90끼를 인원수대로 먹여놔야 전투를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런...
한달내내 90일동안 통조림으로 구성된 요상한 보존식품들, 다르게 말하자면 전투식량만
줬다 쳐보시길.
병사들이 환장안하면 이건 진짜 다행입니다.
이게 농담같으신 분은 1끼를 통조림 참치나 스팸 깡통, 치즈 1장에 인스턴트 커피 1잔,
담배 2가치, 2리터 정도의 물과 한숫가락 분량의 소금과 설탕, 바짝 마른 빵
200그램정도로만 먹으면서 얼마나 갈 수 있나 버텨보시길.
중간에 과일이나 야채 이런거 드시면 무효입니다.
물론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죽고 싶어질 뿐인게 탈이죠.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맛대가리 상실한 요상한 보존 식품만을 줬다가는 병사들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군대는 저 위의 2번째 전투 식량은 말그대로 밥해먹기 거시기한 상황에서나
주는거고 보통은 1번에 해당하는 밥을 해서 전투중에도 주려고 합니다.
밥비닐에 비벼먹는게 일상.
하지만 행보관님은 반합두고 뭐하냐고 그러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