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건곰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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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괴담] 손 ~ 19 ~ (0) 2010/06/22 PM 01:53


화장실에서 현관까지는 불과 열 걸음 정도면 닿는 거리였다.

하지만 벽에 있는 ‘손’이 문제였다.

최단거리로 가려면 벽에 붙어야 되는데,

그러다간 ‘손’에게 잡힐게 뻔했다.

결국 손의 사정범위를 최대한 계산해서라도 안쪽으로 빙 돌아 나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거리는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다.

더군다나 천장에 있는 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말 잘 들어. 허리를 최대한 굽히고 걸어야 해. 길이를 숨기고 있을 지도 몰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배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과의 대가는 화장실에서 톡톡히 당한바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벽에서 떨어져서 걸어야 해. 빙 돈다고 생각하면서.”


내 말에 아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꼭 여길 빠져 나가자”


말은 쉽게 했지만 무작정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닥에 있는 ‘손’의 개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 뿐이지,

그 자체로만 보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싱크대의 아랫부분과,

그 바로 앞에 있는 식탁,

그리고 싱크대 오른 쪽 끝에 위치한 냉장고 주변에 손 분포가 높았다.


“주희야 잘 들어. 저 식탁, 싱크대, 냉장고 밑에 손이 제일 많거든? 저곳들만 잘 피하면 될 것 같아.”


듬성듬성 솟아 있는데다가 특정 공간에 밀집 되어 있기 때문에,

잘만 피해가면 소수의 ‘손’만 상대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손의 길이가 어느 정도까지 늘어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식탁과, 냉장고, 싱크대에서 최대한 거리를 두고,

뒤집어진 ‘3’의 형태로 방을 걷는다면 현관 까지는 약 이십에서 이십오 걸음 정도.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을 가정해도 삼십 걸음 안에는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심각한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살며시 아내의 어깨위로 손을 얹는다.


“일단 뜨거운 맛 좀 보여줘야겠지?”


이상적인 루트라면 우리와 마주칠 ‘손’의 수는,

숨겨진 길이를 감안해도 5개 정도였다.

저 ‘손’들에 약하게나마 불을 붙여 놓으면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일 뚜껑을 열고 통을 한 번 흔들어본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팔을 휘두르려는 순간,


“잠깐만.”


아내가 내 손을 붙잡았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한 채로였다.


“응? 왜?”


“뿌린 다음에 불은 어떻게 붙이려고?”


“그거야 라이터로...”


나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손가락 마디만한 불줄기를 오일이 묻은 부위에 일일이 갖다 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다 내가 먼저 '손'에게 당할 게 뻔했다.


“아.. 라이터로 불붙이는 게 힘들겠구나.”


“응. 그리고 베이비오일이라 그런지 불도 그렇게 잘 붙지가 않더라고.”


“그렇다면 가연성도 떨어진다는 말이네...”


오일에 관한 것만큼은 아내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손’과 문에 불을 붙여봤던 경험자니까.


“자기, 상의 좀 벗어봐”


“으, 응? 아...그래 알았어”


얼떨결에 대답하고 옷을 벗어 아내에게 건 낸다.

물과 피에 절어,

옷이라기보다는 걸레에 가까웠다.

아내는 내 상의를 손에 쥐고 이리 저리살피다가 끝부분만 돌돌 말기 시작했다.

양 손으로, 말린 부분을 몇 초간 꾹 눌렀다가 떼고는,

말린 부분이 돌출 되도록 옷의 끝자락을 붙잡고,

채찍 치듯 팔을 휘두른다.

축축한 옷이 바닥을 때리니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물기가 튀어 오른다.


“불이 잘 붙을지 모르겠네. 자기야 오일.”


멍하니 아내를 바라보다가,


“어? 어 그래 여기 있어 오일.”


순간 흠칫하며 반응하는 나.

아내가 방금 전까지와 갑자기 달라진 느낌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침착하게 ‘손’과의 대적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저...기 근데 주희야. 겁나지 않아? 괜찮아?”


아내는 잠시 나를 보며 살짝 미소 짓는다.


“겁나고 두려워. 그런데 조금 흥분돼.”


흥분이라.

다양한 종류의 흥분이 있다.

화남, 기쁨, 슬픔, 즐거움.

지금 아내가 말 하는 흥분은 어떤 종류의 흥분을 말 하는 걸까.

아내는 말을 마치고 뚜껑이 열린 오일 통을 옷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집중하는 눈빛으로 최대한 가느다란 줄기를 만들며 동그랗게 말린 부분을 적시기 시작했다.


“흥분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아내는 말없이 옷을 적시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괜찮은 거지? 아까 전에 ‘손’한테 잡히면서 무슨 일 없던 거지?”


아내의 발목에 찍혀있던 ‘손’자국이 떠올랐다.

그리고 민혁이 당한 의문의 폭발도 떠올랐다.


“그냥 그런 거 잊잖아. 묘한 기대감이라고 할까? 우리 결혼하고 많이 싸웠는데 이렇게나마 서로의 소중함도 느끼고 말이야.”


나도 ‘손’에게 수차례나 당했지만 아직까지 별 이상은 없었다.

괜한 생각이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없어지진 않았다.


“자기야 여기 불 좀 붙여줘.”


아내가 오일로 적신 둥근 부분을 나에게 들이댄다.


“어? 어어. 그래 잠깐만.”


-찰칵


-취이이.....화륵, 화르륵


불이 붙는 텀이 약간 있었지만 명색이 오일답게 이내 커다란 불덩이가 생겼다.


“주희야. 위험하니까 그거 이제 나한테 줘.”


아내는 대답 없이 옷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아 위, 위험...”


“자기야! 오일 뿌려!”


아내가 오일을 건 내며 소리쳤다.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서둘러 오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기울여 최대한 곳곳에 닿을 수 있게 흩뿌렸다.


-촤아아아


오일이 닿을 때마다 ‘손’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선처럼 꿈틀 거린다.

나는 그렇게 남은 양의 반 정도를 뿌렸다.


“이정도면 됐겠지! 주희야 그거 나한테 줘! 어서!”


“내 뒤로 물러서!”


아내는 짧은 외침과 함께,

내 상의로 만든 불 채찍을 바닥에 휘두르기 시작한다.


-철썩, 화르륵!


방 곳곳 흩뿌려진 오일마다 차례로 불이 붙기 시작한다.


“물기가 없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불이 더 잘 붙네!”


아내가 계속 팔을 휘두르며 말 했다.

불은 ‘손’들에게 생각 이상으로 효과적인 모양이었다.

제대로 불이 붙은 ‘손’ 몇 몇은,

엄청난 속도로 부르르 떨면서 그 고통스러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염산보다 훨씬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자기야 오일을 조금만 더 뿌려봐. 잘 하면 이것만으로도 몰살시킬 수 있겠어.”


아내의 목소리에 말 그대로의 흥분이 느껴졌다.


“어? 그, 그래 알았어. 조, 조금 더 뿌리자.”


정신없이 팔을 휘두르는 아내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입 꼬리가 약간 들려있는 게 보인다.

난 아내가 말한 흥분의 정체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촤아아아아


이번에는 우리가 가야할 루트를 중심으로 오일을 뿌렸다.


“자기야. 거긴 별로 없잖아. 벽이나 천장 쪽으로 뿌리라고.”


“응? 무슨 소리야. 지금 여기 있는 ‘손’ 전체를 다 상대하겠다는 거야?”


“내가 아까 말했잖아. 이것만으로도 몰살시킬 수 있겠다고. 어서 뿌려. 불 꺼지겠다.”


아내의 이마에서 땀이 송글 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내가 바란 것은 탈출로의 확보였다.

그런데 아내는 온 사방에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더 멀리까지 닿게 하기 위해 점점 앞으로 걸음을 떼고 있었는데,

‘손’들이 아내의 발을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집은 불바다가 되고, 아내까지 붙잡힐 지경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아내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만둬! 지금 집 전체를 태워버릴 셈이야? 우리도 못 나간다고 그럼!”


아내는 들은 척도 안하고 계속 팔을 움직였다.


“그만! 이제 충분해!”


휘두르는 아내의 팔을 움켜잡았다.

가냘픈 팔에 애처로운 힘줄이 느껴진다.


“주희야. 내 말 들어. 이 손 놔!”


나는 다급하게 아내의 손에서 옷을 빼앗았다.

그리고 바닥에 던진 채 맨발인 것도 잊고 옷을 밟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불에 타들어가는 느낌.

하지만 나는 꺼질 때까지 밟고 또 밟았다.


“하아..하아...”


아내의 격해진 숨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아내의 허리를 팔로 감은 상태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붙은 불이 점점 집안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손’때문이 아니라 불 때문에 죽을 판국이었다.

하지만 불에 데여 화상을 입더라도 나갈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다행히 적어도 우리가 상대할 ‘손’들에는 모두 불이 붙어 있었다.


“주희야. 지금이야 어서 가자!”


“.......”


“주희야? 안 들려?”


갑자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 순간 할 말을 잊고 만다.

왜냐하면,



아내의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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