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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1 (0) 2018/09/20 PM 11:59

제 01장 -분열 하는 정계

 

 

三. 무사의 세상, 전야(前夜)

 

◇ 요시토모(義朝)의 약진

~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닌페이(仁平) 3년(1153) 8월, 시모츠케노카미(下野守)에 취임한다. 그는 같은 날에 서작(叙爵)을 받았으며, 이 즈료 인사(受領人事)는 어떠한 관직을 거친 공로가 인정 된 결과가 아니라, 급격한 발탁이었다. 어찌됐든, 이 결과, 그는 케비이시(検非違使)에 지나지 않았던 부친 타메요시(為義)의 입장을 넘어서버렸다. 부자관계가 역전 된 것이다.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즈료 취임은 12세기 초두에 요시치카(義親)가 츠시마노카미(対馬守)에 취임한 이래, 실로 50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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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요시토모(맨 위). 카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인 요리토모와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한 요시츠네의 부친이다. 그의 약진으로 인해 토고쿠에서 할거하던... 이른바 반도 무사(坂東武士)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어째서 그는 부친을 넘어설 수 있었던걸까? 즈료의 면면을 보면, 시모츠케는 셋칸케(摂関家)의 지행국(知行国)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서, 셋칸케의 추천에 의한 서작은 아닐 것이다. 전임 시모츠케노카미로서, 인(院)의 근신(近臣)이자 이케노젠니(池禅尼)의 형제에 해당하는 후지와라노무네나가(藤原宗長)가 임명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판단하면, 시모츠케노쿠니(下野国)는 인의 주변세력들의 지행국으로 보인다. 따라서, 요시토모는 부친인 타메요시나 동생들과 달리, 토바인(鳥羽院)에게 접근해서 관위를 급상승시켰다고 생각된다.

 요시토모가 부친과 뜻을 달리하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그는 큐안(久安) 3년(1147), 타이켄몬인(待賢門院)의 측근인 아츠타구우지(熱田宮司) 가문의 후지와라노스에노리(藤原季範)의 딸과의 사이에서 훗날의 요리토모(頼朝)을 얻었다. 인의 근신과의 접근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타이켄몬인을 배출한 칸인류(閑院流)는, 당시엔 아직 요리나가(頼長)나 타다자네(忠実)와 연계하고 있어, 아츠타구우지 가문과의 혼인은 셋칸케를 매개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토바인의 인정(院政) 중추에 접근한 요인으로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닌페이 2년(1152)에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메노토(乳母)인 후지와라노치카타다(藤原親忠)의 자식인 치카히로(親弘)가 사가미노카미(相模守)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코노에 텐노(近衛天皇)의 국모(国母) 비후쿠몬인과 그녀의 사촌인 후지와라노이에나리(藤原家成)는 각지에서 수많은 왕가령 장원(王家領荘園)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태반은 훗날에 하치죠인령(八条院領)이 되었다. 사가미노쿠니(相模国)에서도, 큐쥬(久寿) 원년(1154)에는 안라쿠쥬인령(安楽寿院領)인 카스야노쇼(糟屋荘)가 성립되었으며, 훗날에 쵸코도령(長講堂領)이 된 야마노우치노쇼(山内荘)도 당초에는 하치죠인령이라, 토바인 인정기에 성립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시기를 감안하면, 치카히로가 두 장원의 입장(立荘)에 관여하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카스야노쇼의 재지영주(在地領主)인 카스야(糟屋) 씨는, 젠쿠넨 전투(前九年合戦)에 참전한 사에키 모토카타(佐伯元方)의 자손이라 여겨지며, 야마노우치노쇼에는 겐지 누대(累代)의 심복인 스도(首藤) 가문의 후지와라노토시미치(藤原俊通)가 거주했다. 이것은, 이러한 입장(立荘)에 요시토모가 관여하고 있었음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재청관인(在庁官人)이기도 한 미우라(三浦) 씨를 통해 코쿠슈(国守) 치카히로와 제휴한 요시토모는, 자주 왕가령의 입장(立荘)을 행사하고 있던 이에나리, 비후쿠몬인에 대한 장원 기부의 기회를 획득한 데다, 토바인에게 접근 할 기회를 얻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에 그의 즈료 발탁의 원인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가미에서 재청(在庁)을 조직한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비후쿠몬인에 대한 접근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셋칸케와의 결별과, 부친인 타메요시나 동생들과의 대립을 의미하고 있었다. 선술했듯이, 닌페이 원년(1151), 사다이진(左大臣) 요리나가는 인의 총애를 원하고 있으면서도 비후쿠몬인의 사촌형제나 토바인 제일의 근신인 후지와라노이에나리를 습격했다. 인의 근신과 셋칸케의 대립은 발화점에 도달해 있어, 요리나가는 토바의 신롸를 잃었다. 이 단계에서 비후쿠몬인파에 선다는 것은 셋칸케나 그 가산기구에 들어가 있는 부친 타메요시, 또는 동생들과의 대립으로 연결 되는 것이었다. 

 큐쥬 2년(1155) 6월에는 장인인 아츠타구우지 후지와라노스에노리가 모시고 있던 타이켄몬인의 황자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가 즉위한다. 이를 기회로, 요시토모는 텐노나 텐노의 친누이인 죠사이몬인(上西門院)에게도 접근하게 된다. 타다자네 & 요리나가가 코노에 텐노를 저주했다는 소문 때문에 실각하였고, 그와 동시에 궁지에 몰리게 된 부친 타메요시들을 무시하고, 요시토모는 비후쿠몬인 & 고시라카와 텐노 쌍방에게 봉사하여 현재 한창 이름 높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동년 8월, 귀족들의 이목을 놀라게 한 전투가 반도(坂東)에서 발생했다. 요시토모의 장남으로 카마쿠라(鎌倉)에 거주하고 있던「아쿠겐타(悪源太)」... 즉, 요시히라(義平)가 무사시노쿠니(武蔵国)로 진출하여 치치부 시게타카(秩父重隆)의「야시나이기미(養君)」가 되어 있던 숙부 요시카타(義賢)를 습격해 멸망시켜버린 것이다. 상세한 것은 후술하겠지만, 이미 타메요시, 요시토모 두 계파의 대립은 화해불능의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당시의 무사시노카미(武蔵守)는 훗날에 고시라카와인의 근신으로서 활약하며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의 주모자가 된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였다. 무사시에서의 활동과, 그와의 연계는 불가결했다. 노부요리와 요시토모 & 요시히라 일족의 밀접한 관계는 이때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요시토모에게 있어서 중요 거점 중 하나였던 카즈사노쿠니(上総国)의 즈료, 지행국의 주인이었던 미나모토노스케카타(源資賢)도, 토바의 근신으로, 후술하듯, 토바의 장례식에서 입관역을 맡았을 정도의 측근이었다. 이렇듯, 토고쿠(東国) 여러나라의 즈료는 모두 인의 근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요시토모를 옹립한 미우라(三浦), 나카무라(中村) 씨나 카즈사노스케(上総介) 씨는 선술했듯이 원래는 셋칸케령의 장관이었지만, 동시에 재청관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셋칸케의 내분이나 정치적 영향력의 후퇴와 맞물려, 그들이 재청관인으로서의 입장을 강화해, 국내 지배를 위해 인의 근신계 즈료에게 접근한 것도 당연하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통솔하고 있던 무사단의 동향도, 요시토모의 정치적 입장을 좌우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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