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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4 (0) 2018/09/23 PM 11:50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一. 정계의 격변

 

◇ 설마했던 즉위

~ 코노에 텐노(近衛天皇)의 병세가 심각해짐에 따라, 다양한 움직임이 현재화(顕在化) 하게 된다. 9월에는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가 텐노에게 양위를 할 의지가 있다며 토바인(鳥羽院)에게 아뢰는 일도 있었다. 양위 상대는, 당시 열한 살로, 닌나지(仁和寺) 카쿠쇼 법친왕(覚性法親王)의 제자로 들어가있던 모리히토 친왕(守仁親王: 훗날의 니죠 텐노)이다. 그는 토바와 타이켄몬인(待賢門院) 사이에서 태어난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의 황자(皇子)로, 코지(康治) 2년(1143)에 탄생, 그 직후에 모친을 병으로 잃었기 때문에,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 양육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친인 마사히토 친왕이 황위를 경험하지 못 한 이상, 그의 즉위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코노에에게 황자가 생기지 않은 채, 만에 하나의 사태가 생긴다면 황위는 스토쿠(崇徳)의 장남이자 비후쿠몬인이 양육한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하시모토 요시히코(橋本義彦) 씨가 상세하게 분석한 대로, 타다미치의 모리히토 친왕 옹립 발언의 배경에는, 스토쿠인의 인정(院政)과 이어지는 시게히토 친왕의 즉위를 저지하려는 비후쿠몬인의 의향... 또, 딸인 중궁(中宮) 세이시(聖子)가 스토쿠의 총애를 잃은 원인이 된 시게히토와 그의 모친인 효에노스케노츠보네(兵衛佐局)에 대한 타다미치의 증오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코노에 텐노 사후에 대비한 비후쿠몬인, 타다미치의 움직임이 명확해졌다.

 이때, 토바인은 타다미치의 주상을 두고, 어린 군왕을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한 타다미치의 음모라 생각해, 타다자네(忠実)에게「나와 그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황위를 둘러싸고 천하가 어지러워지겠구나」라며 탄식했다. 이 발언은, 왕가, 셋칸케(摂関家)에 있어서 내홍(内訌)이 각각의 가장인 토바인과 타다자네에 의해 억제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정통을 이어야 할 코노에 텐노의 중병으로, 황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의 발생이 필지(必至)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직 타다자네에 대한 토바인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그런 타다자네의 우위도 머지 않아 무너지게 된다.

 극진한 기도도 헛되어 코노에 텐노의 병세는 악화하였고, 결국 2년 뒤인 큐쥬(久寿) 2년(1155) 7월 24일, 타다미치의 코노에도노(近衛殿)에서 텐노는 열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스토쿠를 배제하고 옹립시킨 정통있는 텐노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다, 후계자도 미정인 상태라면, 정계가 크게 동요하는 것도 당연했다. 통상적으로, 중요 정무는 사쿄(左京) 안에 있는 인고쇼(院御所)에서 치러졌으나, 이때는 토바인이 비후쿠몬인과 함께 체재하고 있던 토바도노()에서, 후계 텐노를 결정하는 왕자의정(王者議定)이 개최되었다. 

 왕자의정에 참가한 것은, 전 우다이진(右大臣) 미나모토노마사사다 뉴도(源雅定入道),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인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로, 칸파쿠(関白) 타다미치에게도 두, 세 차례 사자를 보냈다고 한다. 이들 중 마사사다는 이미 출가한 몸이었는데, 선술한대로 비후쿠몬인을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공경 중 한 사람이다. 킨노리는 칸인류(閑院流) 출신이었으나, 비후쿠몬인이나 신제이(信西)와 인척관계에 있었던 인물로, 두 사람은 모두 비후쿠몬인파나 다름 없었다. 때마침 사다이진(左大臣) 자리의 사표를 제출한 직후였던 데다, 정실인 코시(幸子)의 상중이었던 나이란(内覧) 요리나가(頼長)는 물론이고, 그의 부친인 타다자네도 황위를 결정하는 중대한 의정에 호출되지 못 했다. 그들에 대한 토바인의 신임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황위에 오른 것은 왕가 적류(嫡流)로서 제 1 후보라 여겨졌던 시게히토 친왕도 아니고, 비후쿠몬인이 밀어주고 있던 모리히토 친왕도 아니었다. 모리히토를 즉위시킨다는 것을 전제로 그의 부친이자 황위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고 여겨진 마사히토 친왕이 천조(践祚)하게 되었다. 즉,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이다. 마사히토 친왕은 토바인과 타이켄몬인 사이에서 태어난 제 4 황자로, 다이지(大治) 2년(1127)에 탄생, 당시의 텐노치고는 희귀하게도 스물아홉 살의 성인이었다. 게다가, 모리히토 친왕의 즉위를 전제로 한 중간다리라고 하는... 이례적인 텐노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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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대 고시라카와 텐노.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서는 능구렁이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본래, 황통은 코노에 텐노에게 이행되면서 타이켄몬인 계통의 서자(庶子)에 지나지 않았던 마사히토 친왕이 즉위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제왕학을 배운 적도 없고, 제왕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속요(俗謡) 이마요(今様)에 빠져 살았다. 중간다리인 탓에 정치적 권위가 모자랐던 데다, 행동거지나 교양에 있어서도 텐노로서의 위엄, 권위가 모자란 존재였다. 그런 그가 황통의 중심이 되어, 무사 정권과 대립하게 될 귀족 정권의 대표가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 했을 것이다.

『愚管抄(구칸쇼)』는 예에 따라 타다미치가 마사히토 친왕의 즉위를 주장했다고 한다. 훗날의 황통의 중심인 고시라카와 탄생의 공적은 부친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지엔(慈円)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선술한『구칸쇼』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다지 믿기가 힘들다. 이미 밝혀진대로, 모리히토 친왕의 옹립은 비후쿠몬인의 염원이었고, 마사히토 친왕의 즉위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된다. 그 배경에, 그의 메노토(乳母夫)인 신제이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토바인도 자신의 총비(寵妃)인 비후쿠몬인의 탄원에 마음을 움직였던 데다, 출생에 관한 의혹도 있어서 일단 황통으로부터 배제시킨 스토쿠의 부활을 찜찜하게 여겼으리라 생각된다.

 역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스토쿠이다. 원래의 왕가 적류였고, 이번에야 말로 시게히토 친왕의 즉위와 자신의 인정(院政)을 기대하고 있던 스토쿠는, 재차 그 희망을 배신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어쩌면 시게히토 친왕의 모친이 홋쿄 신엔(法橋信縁)의 딸이라는 낮은 신분이었던 것도 화근이었던걸까? 확실히, 셋칸케를 외척으로 둔 텐노가 이어진 뒤에도, 황녀나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칸인류 같은 공경 가문 출신의 모친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비후쿠몬인도 일단은 곤노츄나곤(権中納言)의 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게히토 친왕의 모친은 신분이 낮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위와 무관하다 여겨져 사실상 제왕으로서의 위엄도 견식(見識)도 없는 동생의 즉위 소식을 들은 스토쿠의 절망과 울분은 이뤄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권위 없는 텐노와, 본래 황통의 중심이 되었어야 할 죠코(上皇)의 병존(併存). 왕가는 가장인 토바인 아래에서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내몰려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시라카와의 천조와 동시에 실각한 자가 있었다. 그것은, 셋칸케의 중심으로서 정계에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을 타다자네, 요리나가 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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