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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6 (0) 2018/09/25 PM 11:41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一. 정계의 격변

 

◇ 타메요시(為義) 일족의 억압

~ 큐쥬(久寿) 원년 11월,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는 또 다시 케비이시직(検非違使職)에서 해임되고말았다. 자신의 품행이 불량했기 때문에 해임, 근신을 명령받은 것이 수차례에 달해, 인(院)으로부터 기피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전장에서 말했던대로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인 친제이 하치로(鎮西八郎)... 즉, 타메토모(為朝)의 난행을 방치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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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활솜씨와 전장에서의 활약상으로 수많은 전설을 남긴 미나모토노타메토모]

 

 타메토모는 분고노쿠니(豊後国)에 거주하며 다자이후(大宰府)의 지배하... 즉, 큐슈(九州) 각지를 어지럽히고 다녔던 것이다. 그가 아소(阿蘇) 씨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실은 사츠마(薩摩)의 아타곤노카미(阿多権守) 타이라노타다카게(平忠景)에게 옹립되어 있었다. 타다카게는 셋칸케령(摂関家領)인 시마즈노쇼(島津荘)의 장관(荘官)이라 여겨지며, 타메토모의 친제이행도 토고쿠(東国)로 내려간 요시토모(義朝)와 마찬가지로 셋칸케의 가산기구(家産機構)의 지원을 엿볼 수 있다. 타메토모의 세력은 간단히 진압할 수 없어, 익 큐쥬 2년 4월에도 타메토모에게 협력하는 자를 금압(禁圧)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타메토모의 활동도 요시토모의 경우와 같아서, 자력구제(自力救済)를 전개하는 무사의 움직임에 편승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직후인 5월, 이번에는 넷째 아들인 요리카타(頼賢)가 카스가샤(春日社)의 호소로 관직을 박탈당해버렸다. 그는 사에몬노죠(左衛門尉)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고, 요시토모가 이를 배신, 후술하듯 요시카타가 실책으로 관직을 잃었기 때문에, 이 요리카타가 쿄(京)에서 타메요시의 후계자로 예정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카스가샤는 당시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의 관리하에 놓여있었을 것이기에, 권문(権門) 내부의 분열이 있었거나, 아니면 타다미치(忠通) 측의 공작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8월에 대규모의 사건이 발발한다. 무사시노쿠니(武蔵国) 히키 군(比企郡) 오오쿠라노타치(大蔵舘)에서, 요시카타가 조카이자 요시토모의 장남인 요시히라(義平)의 공격을 받고 멸망해버렸다. 그는 요시토모를 쫓아내고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의 적류(嫡流)가 되어있었으면서도 범죄자를 숨겨주는 실책을 범해 관직에 머무르는 게 아슬아슬했기 때문에, 부친과 마찬가지로 타다자네(忠実), 요리나가 부자에게 종속하게 되었고, 특히 요리나가에게는 선술한대로「몸과 마음을 바쳐」모셨으며, 노토노쿠니(能登国)의 장원을 맡았던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요리나가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요시카타는 닌페이(仁平) 3년(1153)에 코즈케노쿠니(上野国) 타코 군(多胡郡)으로 내려가, 거기서 무사시노쿠니의 호족 치치부 시게타카(秩父重隆)의「야시나이기미(養君)」로 받들어져, 무사시로도 진출해 있었다. 그를 습격한 요시히라는 요시토모의 장남으로, 미우라 요시아키(三浦義明)의 딸을 모친으로 두고 있었다 하며, 카마쿠라(鎌倉)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관직도 없고, 장남이면서도 적자로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이는, 수도의 적자에 반해, 반도(坂東)의 거점을 확보한 형이라는... 일찍이 부친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전투의 배경에는 치치부 씨의 적류인 시게타카와, 사가미(相模)의 미우라 씨와 손을 잡은 하타케야마 시게요시(畠山重義)들과의 치치부 씨 내부의 대립, 코즈케의 닛타 요시시게(新田義重)와 혼인을 맺어, 칸토(関東) 북부로의 진출을 도모한 요시히라와, 무사시 남부 진출을 꾀한 요시카타의 대립이라는 무사단 끼리의 경합이 존재했다. 하지만, 쿄에서도 토바인(鳥羽院),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대립이 격화해 갔던 데다, 전장에서 말했듯이 사건을 묵인한 당시의 무사시노카미(武蔵守)가 고시라카와(後白河)의 측근이 된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였기에, 요시토모가 장원 기부를 통해 비후쿠몬인들과 밀접하게 제휴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시카타가 타다자네, 요리나가의 측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전투에 쿄에서의 정치적 대립이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건의 여파는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동년(큐쥬 2년) 10월, 요시카타의 양자가 된 요리카타(頼賢)가 보복을 위해 동쪽으로 내려갔고, 시나노노쿠니(信濃国)에서 토바인령 장원을 침해한다. 이 때문에, 인의 명령을 받은 요시토모가 추토를 하기 위해 떠나기도 했다. 요리카타는, 동년 연말의 카야노인(高陽院)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하니, 전투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이미 타메요시파와 요시토모의 대립은 수복 불가능해졌다. 그 배경에는, 셋칸케에 속한 타메요시파의 억압이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무사들의 세상에 있어서도, 타다자네와 요리나가 진영은 궁지에 몰려있었다. 난의 발발은, 익년에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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