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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17 (0) 2018/09/26 PM 11:51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二. 치천의 군주의 사망

 

◇ 고반자이 사태(御万歳の沙汰)

~ 토바인(鳥羽院)은 병약했다. 그는 몇번인가 큰 병을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닌페이(仁平) 2년(1152)에 무사히 쉰 살을 맞이하는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당시의 텐노(天皇)는 대체로 단명하였기에, 일흔일곱 살까지 장수한 시라카와인(白河院)을 제외하면, 쉰 살까지 존명한 선례는 젊은 나이에 황위를 떠난 10세기 후반의 레이제이 텐노(冷泉天皇)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시라카와, 토바 2대 인의 장수가 없었다면, 인정(院政)의 정착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런 토바인은, 쉰 살이 지나면서 매년 중태에 빠졌는데, 호겐(保元)으로 연호(年号)를 고친 직후, 다시 병석에 눕게 된다. 

 이번의 병세는 절망적인지라, 5월말에는「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一切不食)」라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30일에는 회복을 위한 기도도 행하지 않게 되는... 한마디로「고반자이 사태(御万歳の沙汰)」가 있었다 한다. 고반자이(御万歳)라는 것은 귀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죽음을 전제로 다양한 처치가 치러지는 것이다. 이미 회복은 절망적이라 여겼다는 뜻이다. 익 6월 1일, 증상은 점점 악화하여, 호코(法皇)의 복부나 팔, 다리에 종기가 발견되던 중에 사다이죠(左大将)인 후지와라노킨노리(藤原公教)가 고반자이 사태를 봉행(奉行)한다.  

 이날, 토바도노(鳥羽殿)에는 미노 겐지(美濃源氏) 출신인 미츠야스(光保),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방류(傍流)인 타이라노모리카네(平盛兼) 이하, 토바인의 호쿠멘군(北面軍)의 유력한 무사들이, 그리고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의 사토다이리(里内裏)인 타카마츠도노(高松殿)에는 카와치 겐지(河内源氏) 출신인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 요시야스(義康)가 동원되었다. 그야말로「고반자이 사태」의 일환이나 다름 없었다. 이 동원을 다가올 장례식의 경호 등으로 보는 코치 쇼스케(河内祥輔) 씨의 견해가 있긴 하지만, 과연 어땠을까? 

 애시당초, 이때에는 장례식장과 무관했을 고시라카와의 다이리에도, 수많은 무사가 동원되었다. 또, 코치 씨가 선례로 제시한 코노에 텐노(近衛天皇)의 장례에 동원된 무사는 타이라노모리카네 뿐이었다. 

『兵範記(효한키)』에는「수천 기(数千騎)」라 나와있는데, 모리카네가 단독으로 인나이(院内)의 경호를 담당했기 때문에, 이 수치는 과장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번에는 다수의 무사가 동원되었으며, 그 규모가 전혀 다르다. 또, 호쿠멘의 중심인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일족이 동원되지 않은 것도 후술하겠지만 그와 스토쿠(崇徳)의 관계가 고려되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점도 병란에 대비한 동원임을 명시한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코치 씨의 설은 아무래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일찍부터 하시모토 요시히코(橋本義彦) 씨가 지적받았듯이, 이번의 무사 동원을 실제로 행한 것은, 중태에 빠진 토바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 주변의 비후쿠몬인(美福門院), 타다미치(忠通), 인의 근신들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토바인의 죽음은 스토쿠, 요리나가(頼長)들의 복권을 가져다 줄 중대한 위기나 다름 없었다. 6월 1일이란 단계에서의 무사의 동원이, 토바인의 죽음과 거기에 따를 정변(政変)에 대비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코치 씨는 토바인이 병란의 위기감을 품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인은 아무런 대책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당시의 정정(政情)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완전히 그렇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확실히 왕권을 둘러싼 병란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는 헤이제이 죠코(平城上皇)의 난 이후 뿐이었지만, 시라카와인, 토바 텐노와 스케히토 친왕(輔仁親王)의 대립에서도 경호에 유력한 무사가 동원된 선례가 있어, 황위 계승 문제가 병란으로 발전하는 위험성은 인식되었을리라 생각된다. 

『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당시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이었던 후지와라노무네요시(藤原宗能)는, 그런 토바인에 대해, 인이 죽은 뒤에「즉시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이옵니다」라고 말하며 신중한 대응책을 취하라고 주상했다. 이 주상을 받은 인은, 호쿠멘들 중 타이라노키요모리,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들 열 명에게 사이몬(祭文: 서약서)을 쓰게 해 비후쿠몬인에게 헌상케했다 한다. 이는 단순한 호쿠멘의 양도(譲渡)가 아니다. 키요모리, 타메요시가 특필되어 있듯이, 호쿠멘 무사들 중에서도 스토쿠, 요리나가파인 자들을 경계한 것이다. 타메요시와 요리나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는 전장에서 말한대로인데, 그런 타메요시도 호쿠멘 무사의 일원이었다는 것은 최근의 요코자와 다이스케(横澤大典) 씨의 연구에 의해 해명되었다. 요코자와 씨의 연구에 따르면, 토바인의 인정기, 강소(強訴) 방어에 동원된 것은 호쿠멘 무사들 뿐이었으며, 케비이시(検非違使)는 경호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무사의 동원이 있었을 때에, 케비이시, 에후(衛府) 같은 조직들보다도, 인 개인과 무사와의 결합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뜻이 된다.

 또, 키요모리의 계모(継母)이자 부친인 타다모리(忠盛)의 정실(正室)인 후지와라노소시(藤原宗子)가, 스토쿠의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의 메노토(乳母)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일 것이다. 가장이 죽은 뒤, 그 가장의 정실은 집안에서 커다란 발언력을 가진다. 그런만큼, 키요모리가 고시라카와 측으로부터 경계받은 것도 당연했다. 키요모리를 포함한 호쿠멘 무사들은 치천의 군주(治天の君)인 토바인의 권위로 조직되었다. 따라서, 토바인이 죽고 그를 대신할 치천의 군주가 나타나지 않게 되면, 무사들은 개인적 연고(縁故)를 통해, 스토쿠, 요리나가 측의 편에 설 가능성이 있었다. 토바인은 사이몬을 쓰게 하는 것으로 그것을 저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 요코자와 씨에 따르면, 왕가 구성원과 무사와의 개이적인 관계는, 6월 1일의 동원형태에서도 나타난다고 한다. 토바인의 호쿠멘의 중심적인 무사들은 비후쿠몬인이 있는 토바인의 이궁(離宮)에 배치되었고, 고시라카와 텐노의 근신인 아츠타 구우지(熱田宮司) 가문과 인척 관계를 가진 요시토모와 요시야스는, 모두 고시라카와의 다이리인 타카마츠도노의 경호를 맡고 있었다. 조직보다도 개인들끼리의 결합이 표출된다고 하는 시대의 특질(特質)이, 명확하게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앞에서 다뤘던 하시모토 씨는, 토바인의 중병과 함께, 인의 근신은 가장 먼저 무사들을 동원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였고, 스토쿠, 요리나가를 도발하여 거병으로 내몰아갔다고 여긴다. 이러한 견해는 기본적으로 정확하다. 하지만, 동원의 실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관계를 전제로 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도 있을 것이며, 도발의 개시도 7월 2일에 토바인이 죽은 뒤가 된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여, 개전에 이르는 경위를 재검토 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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