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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2 (0) 2018/10/02 PM 11:46

제 02장 -제왕과 죠코(上皇)

 

 

三. 병란의 발발

 

◇ 셋칸케(摂関家)의 무서움

~ 선술했듯이,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 진영에서는 이미 토바인(鳥羽院)의 호쿠멘 무사(北面武士) 등의 겐페이(源平) 양측의 유력 군사 귀족들이 6월 1일 시점에서 소집되어 있었다. 7월 5일에는 케비이시(検非違使)가, 이윽고 관아(国衙)를 통해 여러 나라의 병사도 동원되었다. 그야말로 국가 권력을 통한 공적 동원이었다.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 처럼 스토쿠(崇徳)와의 연고(縁故)로 망설이는 이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고시라카와 진영에 투신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텐노의 정당성에 따르기 위함이었다. 즉위 경위에 문제는 있었지만, 텐노는 조정의 정점에 선 대권의 보유자에 지나지 않았다. 

 인(院)이 커다란 권위를 갖고 인정(院政)을 행한 것도 텐노를 자신의 곁에서 보호, 그 권위를 이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쿠는 텐노의 형이자 죠코(上皇)였지만 아버지 인이 아닌 이상, 인정을 행할 수 없었다. 스토쿠는 단순한「元텐노」에 지나지 않아, 텐노와 대립할 경우에 그에게 정당성은 없었다. 키요모리가 망설이면서도 고시라카와를 따랐던 건 그 때문이다. 그런 만큼, 조정의 적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스토쿠, 요리나가(頼長) 진영에 참전한 무사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스토쿠와의 개인적 연고로 참전한 이는 타이라노마사히로(平正弘)의 일족, 그리고 인지(院司)로 근무하고 있었던 자들로, 그리 큰 전력이 되지는 못 했다. 여기에 반해, 전투의 주력이 된 미나모토노타메요시(源為義)나 타이라노타다마사(平忠正)의 일족, 미나모토노요리노리(源頼憲) 등은 셋칸케(摂関家)의 주류인 타다자네(忠実), 요리나가를 오랜 기간 모셔왔던 케닌(家人)들이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면을 모두 셋칸케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셋칸케의 동향에 종속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토쿠의 존재가 영향을 준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셋칸케와의 주종관계가 텐노의 명령을 초월하고 있었다고 해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부터 30년 정도 뒤인 분지(文治) 5년(1189) 6월,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는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에게 요청한 오우슈 후지와라(奥州藤原) 씨 공격을 위한 선지(宣旨)가 도착하지 않아 애태우고 있었다. 그때, 노신인 오오바 카게요시(大庭景能)는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군 안에서는 쇼군(将軍)의 명령을 듣지, 천자(天子)의 칙서를 받들지 않사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요리토모는 선지를 받지 않은 채로 공격에 들어가게 된다. 텐노의 권위를 요리토모와 토고쿠 무사(東国武士)와의 주종관계가 능가하기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유명한 말이다. 

 그와 같은 현상이 셋칸케와 무사들과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셋칸케에서의 무사와의 주종관계가 중세적인 성격을 띄었던 것은 명백한 데다, 텐노의 귄위마저도 상대화(相対化)한 긴밀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미수로 끝나버렸지만, 코후쿠지(興福寺)의 악승(悪僧) 신지츠(信実) 이하는, 주군인 요리나가의 위급을 구원하고자 했다. 이것은, 난이 발발한 뒤에 신지츠들이 처형당하고, 코후쿠지에 타다자네가 숨어있었던 것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타메요시 이하의 무사들과 함께, 신지츠 이하의 악승들도 타다자네, 요리나가 부자와 밀접한 주종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선술한 대로인데, 여기서도 주종관계를 통해 악승들이 요리나가의 무력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들이 전투가 일어나는 동안에 합류하지 못 햇던 것은, 사태의 진전이 요리나가 등 셋칸케 측의 예상을 뛰어넘어 급속도로 진행되었음을 이야기해준다.

 또, 선술했듯이 고시라카와 측은 셋칸케령(領)인 장원(荘園)에서 거주하는 무사들의 상경을 금하는 처치를 미리 해두었다. 미나모토노요리노리(源頼憲)는 재경 군사 귀족이긴 했지만, 셋칸케령인 셋츠노쿠니(摂津国) 타다노쇼(多田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듯, 셋칸케령의 장관(荘官) 등으로 하여금, 셋칸케의 가산기구(家産機構)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무사들이 참전하려는 움직임도 보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스토쿠, 요리나가 진영의 중심적 무력이 된 것은, 타메요시 이하의 셋칸케 케닌, 코후쿠지의 악승, 셋칸케령의 장관들이었다. 즉, 그들은 셋칸케의 사병(私兵)이나 다름 없었다. 고시라카와 측이 어찌됐든 인정기 이래의 공적 무력 동원 형태를 취했던 데에 반해, 스토쿠, 요리나가 진영은 셋칸케의 권문(権門)으로서의 무력에 의거했다는 뜻이다. 일찍이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씨가 해명했듯이, 호겐의 난이라는 것은 국가 권력과 권문인 셋칸케의 충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결과는 자명했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 권력과 대항하려는 무력의 조직화라는 사실을 통해, 셋칸케의 무장화가 상당한 단계로 진행되어 있었음이 확실해졌다. 그야말로 셋칸케의 무서움이다. 거기다 그것이 인의 근신들에게 위협을 주었고, 결국에는 요리나가가 거병을 하기에 이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선술했듯이, 호겐의 난이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있어서 종래의 정변(政変)처럼 궁정 내부의 음모로 완결되지 않고, 결국에는 전쟁으로 발전한 최대의 이유는 이러한 점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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