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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30 (0) 2016/12/27 PM 02:06

4장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센고쿠 사상 최고의 전설이 된 「일본 제일의 츠와모노(兵)」~

 

◇ 도묘지 전투(道明寺の戦い)

~ 4월 26일 미명(未明)... 오오사카(大坂) 측이 야마토(大和) 코오리야마 성(郡山城)을 공격하면서 오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의 막이 열렸다. 코오리야마 성은 28일에 함락되었다. 28일,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가 사카이(堺)에 방화를 했다. 29일에는 오오노 하루후사, 반 나오유키(塙直之)가 키이(紀伊)를 침공했지만, 아사노 나가아키라(浅野長晟)의 반격을 받아 반 나오유키가 전사하면서 철수한다.

 5월 6일, 야마토지(大和路)에서 토쿠가와(徳川) 측을 방어하기 위해 오오사카 측은 사만여의 군세를 도묘지(道明寺: 후지이데라 시)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오오사카 측은 확실히 연계가 부족했다.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가 평소와 달리 돌출행동에 나서면서 고립되는 형태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모토츠구는 전사하여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은혜에 격문을 날렸다 한다(『長沢聞書』). 모토츠구는 사전에 적의 첩자를 사로잡아 자신이 놓인 상황을 파악해 분전하긴 했지만,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맹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모토츠구 전사 후에 도착한 스스키다 카네스케(薄田兼相)도 전사, 오오사카 측은 각개격파당하는 형태가 되었다.

 그후에 도착한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는 패주해 오는 아군을 눈 앞에서 지켜보며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와의 합류를 기다렸다. 노부시게는 조금 늦게 도착해 다테 마사무네와 충돌했다. 한때는 다테군을 붕괴시켰지만, 다테 가문의 가로(家老)인 카타쿠라 시게나가(片倉重長)에게 되밀려 재차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고토와 스스키다의 전사도 있어서 사실상 작전 그 자체가 실패인 상황이었다. 거기다,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로부터 카와치(河内) 와카에(若江), 야오(八尾) 입구에서도 패배했다는 보고를 듣고 오오사카로 철수했다. 고토 모토츠구의 가신인 나가사와 쿠로효에(長沢九郎兵衛)는, 노부시게가 적의 배후로 돌아가 도묘지까지 밀고 들어가 챠우스야마(茶臼山)로 귀진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덧붙여, 카와치 입구에서는 키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가 전사, 오오사카 측의 패색은 더욱 더 짙어졌다. 

 도묘지 전투에서 군공을 세운 가신에게 노부시게는 장기말에 글자를 써서 감사장을 대신했다고 한다(『可観小説』). 통상적으로, 감사장은 귀진한 뒤에 주는 것이었지만, 이미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장기말은 글자를 쓰기엔 너무나 작았기 때문에, 장기말의 형태를 한 나무조각 같은 것이었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나무조각의 상부에는 구멍이 뚫려있었기 때문에, 줄을 달아 허리에 차게 했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서 기록되어 있는 노부시게의 카오(花押)는 겨울 전투 이후의 것과 일치하며, 사실상 노부시게의 절필(絶筆)이다. 덧붙여, 동서는 실명을 「信仍(노부요리)」라 기록하고 있는데, 본장 모두에서 말한대로 이는 「繁」의 아래부분이 카오와 겹쳐지는 바람에 오독(誤読), 오사(誤写)한 것에서 기인한다.

 이 장기말 감사장에서 아오노 칸뵤에(青野勘兵衛), 키누카와 야자에몬(絹川弥左衛門), 시오노 카몬(塩野掃部), 아오지 규스케(青地牛助), 니시무라 키자에몬(西村喜左衛門), 카네야스 마츠에몬(金安松右衛門)은 적의 수급 여섯을 취한 전공을 칭찬하며 써준 것으로, 귀진한 뒤에 약속대로 금자(金子) 다섯냥을 주었다. 한번의 전투에서 수급 여섯이라는 것은 전장에서는 개인이 어지간히 세우기 힘든 상당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다섯냥이라는 파격적인 상금에는 납득이 간다. 또, 마찬가지로 장기말 그림이 코야 산(高野山) 죠케이인(成慶院: 현 요치인) 소장 『武将文苑(부쇼분엔)』에도 서사(書写)되어 있다. 이쪽은 금자를 준다는 문언이 아니라, 대신에 뒤쪽에 마루인(丸印)이 찍혀 있다. 카오와 마루인을 병용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공이 상기 여섯명보다 떨어지기에 순수한 감사장으로서 내주었을 것이다. 수취인은 미요시 사부로노스케(三好三郎助)이다. 따라서, 이러한 장기말을 받은 가신은 많았던 게 아니었을까? 가신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부시게가 생각해 낸 기지로 가득한 기책(奇策)이라 할 수 있다. 

 

 

 

◇ 노부시게(信繁)의 전사(討死)

~ 5월 6일에 출진했던 군세는 오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철수했지만, 이미 이 성은 혼마루(本丸)만 남겨진 벌거숭이 성이 되어 있어, 농성이라는 전술은 불가능해져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야전(野戦)으로 결착을 낼 수 밖에 없다.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는 여러 장수에게 서장을 보내어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와 합류하라. 어설프게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 오늘의 일대사는 천하제일을 판가름하는 전투이기에, 앞질러가는 행동 따윈 하지 않도록 군법을 정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썼다. 이를 기록한 서장은 현재 2점이 확인되고 있는데, 서명은 「大主」(오오노 슈메의 약칭)로 되어 있을 뿐이라, 카오(花押)가 찍혀있지 않다. 서둘러 대량으로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카오를 생략한 서장을 쓰게했을 것이다. 일찍이 노부시게는 오오사카 성 안에서는 신경 쓸 일이 많다고 한탄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토요토미(豊臣) 가문의 중추는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의 전술 지휘에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노부시게는 겨울 전투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포진한 챠우스야마(茶臼山)에 진을 치고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이에야스를 쳐서 토쿠가와 쪽의 사기를 꺾어, 거기서 활로를 찾고자 생각했으리라 여겨진다. 노부시게와 이에야스 본진 사이에는 사나다마루(真田丸) 전투에서 농락당한 에치젠 마츠다이라 타다나오(越前松平忠直)가 포진, 수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그때, 노부시게는 적자인 다이스케(大助)를 인질로 삼아 히데요리(秀頼)에게 보냈다. 이는 다이스케가 도묘지 전투(道明寺の戦い)에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고도(『翁草』), 히데요리의 출진을 요청하기 위해서라고도 일컬어진다(『武辺咄聞書』). 확실히 히데요리가 자진해서 출진한다면 오오사카 측의 사기는 올라간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노부시게는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의 진을 돌파하여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들어갔다. 노부시게는 하타모토(旗本)를 향해 두번에 걸쳐 돌격, 하타모토 부대를 무너뜨리는 데에 성공했다(시마즈 씨의 정사 『薩藩旧記雑録後編』에 수록된 서장). 이것으로 인해 이에야스와 본진에 있던 히데타다(秀忠)는 3리 정도씩 본진을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돌격에 의해 이에야스의 우마지루시(馬印)가 부러졌으며(『山下秘録』), 예수회의 선교사는 앞으로 한발짝만 더 갔더라면 히데타다는 본격적으로 진을 물릴 수 밖에 없었다고 논평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는 한때, 할복할 결의를 했다고까지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아무래도 과장일 것이다. 노부시게의 맹공격에 의해 하타모토부대는 혼란에 빠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지전 이야기였지, 이에야스는 안전권으로 물러나 승리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었다. 다만 『薩藩旧記雑録後編(사츠반큐키자츠로쿠코헨)』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세번에 걸쳐 물러난 결과, 아예 깃발을 감추는 지경까지 왔고, 하타모토급의 이름있는 자들은 「도망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6월 11일에 국허(国許)로 보낸 보고서 속의 기술로, 시마즈(島津)군은 오오사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문(伝聞)을 정리해 써보냈을 것이다.

 세번의 돌격에 의해, 노부시게의 피폐는 정점에 달해 결국 공격을 단념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三河物語(미카와모노가타리)』가, 히데타다가 노부시게를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를 과장해서 쓴 것이리라. 동서의 기주(記主)인 오오쿠보 타다타카(大久保忠教)로서는, 이에야스가 노부시게에게 고전했다는 일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근년에 들어, 노부시게의 최후를 전한 사료가 발견되었다. 에치젠 마츠다이라의 한시(藩士)의 가보(家譜) 『忠昌様大坂ニ而御戦功有増(타다마사사마오오사카니테고센코아라마시)』이다. 이하, 그 문서를 따라 노부시게의 최후를 기록해 보도록 하자.

 혼전 중에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고, 노부시게는 이쿠타마(生玉: 오오사카 시 텐노지 구)와 쇼만(勝鬘) 사이에 있는 높은 지대에서 홀로 쉬고 있었던 듯 하다. 거기로, 에치젠의 한시인 니시오 진자에몬(西尾仁左衛門)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독자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는 바로 텐쇼(天正) 9년(1581)에 타카텐진 성(高天神城)을 탈출한 타케다(武田)의 옛 가신인 니시오 큐사쿠(西尾久作)였다. 이때, 그는 마츠다이라 타다나오를 모시고 있었다.

 니시오는 노부시게를 「멋진 적수」라 생각하고 말을 걸었다. 서로 「下り立ち(내렸다)」고 나와있기 때문에 노부시게도 말을 타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렸던 것이다. 노부시게는 여기서 각오를 했으리라 보여진다. 그래서 창으로 겨루다 결국은 니시오의 창에 찔려 쓰러졌고, 니시오는 곧 노부시게의 목을 쳤다. 노부시게의 나이는 마흔여섯, 혹은 그보다 젊었으리라 여겨진다. 덧붙여, 이 장소는 챠우스야마 북쪽에 해당한다. 노부시게 전사지라 여겨지는 야스이 진쟈(安居神社)는 쇼만 남쪽에 해당하기 때문에, 야스이 진쟈 전사설은 와전일 것이다. 

 노부시게와 니시오는 모두 타케다의 옛 가신이다. 하지만, 노부시게는 타케다 멸망 당시에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었다. 또, 노부시게가 가로(家老)이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자식인 한편, 니시오의 신분은 높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니시오 진자에몬은 자신이 무찌른 적이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이름 있는 부장(部将)일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 노부시게의 수급을 진지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날 저녁, 인척인 하나가타(하다나카라고도) 이치자에몬(花形市左衛門)과 그의 동생인 누이노죠(縫殿之丞)가 니시오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거기서 노부시게의 수급을 보며 하나가타 형제는 경악, 「이자는 사나다 사에몬(真田左衛門: 노부시게)님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왜냐하면, 하나가타는 이전에 사나다 씨를 모셨던 시절이 있었기에, 노부시게의 얼굴을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시 니시오는 가로인 혼다 나리시게(本多成重), 토미마사(富正)에게 보고, 그 이야기가 마츠다이라 타다나오에게 전해졌다. 당연하게도, 타다나오도 이에야스나 히데타다에게 보고했다. 그후, 니시오는 이에야스, 히데타다에 대한 알현을 허락받아 포상으로 황금과 의복을 받았다. 

 이상이 새롭게 발견된 사료를 통해 밝혀진 노부시게의 최후이다.

 이에야스는, 사나다 노부타다(真田信尹)에게 수급 검사를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후의 경위는 일정하지 않다. 『秦政録(신세이로쿠)』에 따르면, 노부타다는 틀림없이 이것이 노부시게의 목이라 말했다 한다. 하지만 『武徳編年集成(부토쿠헨넨슈세이)』 『幸村君伝記(유키무라쿤덴키)』 에서는, 노부타다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며 노부시게의 목이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부타다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이는데, 어쨌든 사슴뿔 투구가 결정타였던 듯 하다. 

 『유키무라쿤덴키』에 따르면, 토쿠가와 측의 여러 무장들은 노부시게의 무공(武功)을 닮고자 머리카락을 잘라 가지고 돌아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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